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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화 체육복 17. 사랑한다고 말하면 빵 한 조각을 주지 240725
학생부 선생님들의 일상적인 아침은 잔소리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너 왜 학교에 교복을 제대로 갖춰 입고 오지 않았니, 이 날씨에 슬리퍼는 발 시리지 않니, 치마가 왜 이렇게 짧니, 화장이 너무 진한 것 아니니. 이런 잔소리들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아이들의 외양은 비슷한 모습으로 수렴된다. 입들은 다물어지고 고개는 숙여진 채 교문을 통과하게 된다. 그런데 2018년에 만난 아이들은 내가 잔소리를 하기도 전에 이미 정확히 그 상태로 등교하고 있었다. 서로 초면이라 어색하기도 했지만 내가 용기 내어 인사를 건네는데도 고개만 까딱하거나 ‘이 아저씨는 뭐야?’ 하는 눈으로 말없이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날씨와 관계없이 무척 기운이 없거나, 혹은 무언가에 잔뜩 성이 나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내가 나고 자란 부산에서는 ‘고교 평준화’라는 말을 학창 시절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미 1974년에 시행된 제도이기 때문에 내가 고등학교 다닐 2000년대 초에는 이 단어를 사용할 일이 없었고 임용 시험 준비를 위해 교육학 공부를 할 때에서야 처음으로 알게 된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첫 발령을 받던 당시의 강원도에는 아직도 고교 평준화가 전면적으로 도입되지 않은 상태였다.
어디나 그렇지만 중학생들은 고등학교에 진학할 즈음이 되면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갈 것인지, 전문계고(특성화고)에 가서 기술을 배우고 빨리 취업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좁디좁은 지역사회에서 자식이 얼마나 공부를 잘하나 하는 것이 부모의 체면을 유지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였으므로,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본인의 자녀가 후자의 집단에 속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한 부모들의 마음속 지향점은 대부분 지역의 이름을 학교 이름으로 사용하는 이른바 ‘지역 중심’ 학교이었다. 2014년이 되어서야 춘천, 원주, 강릉을 중심으로 고교 평준화가 시행되었지만 내가 근무한 지역에서는 여전히 ‘선발 집단’ 시절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분위기가 머물러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 학교의 아이들은 그 과거 명문 학교 선별 집단의 명성에 걸맞게 ‘공부를 잘해야 한다’, ‘행동거지를 단정히 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을 받고 있는 듯했다.
요즘 대학 입시의 ‘공정성’을 위해서 수능시험과 정시 모집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좋아할 만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아이들의 학교 생활은 예전보다 힘들면 더 힘들었지 결코 학교 생활이 행복해지는 방향으로만 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예린아! 오늘 아침에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어제 핸드폰 보다가 늦게 잤어?”
“아니에요, 쌤. 수행평가 때문에…”
“에이, 적당히 하지 수행평가 하나로 밤을 새?”
“쌤… 저희 이번 주에만 수행평가 일곱 개예요.”
“뭐라고? 일곱 개? 그럼 잘 시간이 있어?”
“저 3일 동안 세 시간쯤 잤어요.”
이렇게 말하는 아이를 아침에 만나면 교복과 화장 상태를 지적하기 전에 선생님이 돼서 널 더 힘들게 하니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 게 인지상정이다. 만약 옆에서 누군가가 ‘그래도 학생이니까 주어진 모든 일에 최선을……’ 따위의 말을 한다면 예린이가 며칠 동안 잠을 쫓기 위해 먹었을 핫식스를 그의 입에 몽땅 부어주고 대신 예린이를 재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평가하는 방법은 크게 지필평가(중간, 기말고사)와 수행평가가 있다. 특히 대학 입시에서는 학생의 평소 학교 생활과 수업 시간의 교과 활동을 교사들이 관찰, 평가한 기록(과목별 세부 능력 및 특기사항)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국어를 예로 들면, 국어 교과에서 가르치는 영역이 크게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인데 지필평가로는 말하기와 듣기를 평가하기 어려우므로 그 기능을 잘 익혔는지 확인해 보려면 학생이 실제로 말하고 듣는 수행 장면을 평가해야만 한다. 상황에 맞게 말하는 방법을 객관식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상황을 주고 어떻게 말하는지를 지켜봐 줘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수행평가라는 것의 취지와 목적은 분명하지만, 이 평가가 한 과목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거기에 시도별로 다를 수 있지만 대개 평가 영역의 세분화, 반영 비율의 확대를 강제하므로 내신 성적을 잘 받으려면 지필평가뿐만 아니라 수행평가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 선생님들끼리 서로 협의해서 수행평가 기간을 조정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실제로 학생들과 이야기를 해 보거나 교육청과 학생들이 직접 소통하는 자리(교육감, 교육장과의 대화 같은 자리)에서도 매년 제기되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 문제다. 일반적인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이라면 보통 한 학기에 9과목에서 10과목 정도를 수강한다. 여기서 수강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대학교에서처럼 학생 본인이 듣고 싶은 과목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고교학점제’가 그것이다. 그렇다 보니 학생 각자가 가진 시간표가 모두 다르고 학생 수가 천 명쯤 되는 학교에서 교사들의 학생들의 수행평가 기간을 적절하게 배분하거나 조율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코로나 시국에서 등교 수업과 원격 수업이 교차될 때 학생들의 어려움이 극에 달했다. 수행평가는 숙제로 내어줄 수 없으므로 학생들이 등교할 때만 수행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에 예전보다 특정 기간에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부담이 무척 커졌을 것이다. 이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학교가 예전처럼 운영되면 이 부분은 해소될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겠다.
아무튼, 매일 그렇게 쩔어서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할 말이 이게 아닌 것 같다고 고민하면서, 2005년 개봉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6.25 전쟁이 발발한 것조차도 모르던 강원도 산간 오지 마을에 우연히 국군, 인민군, 연합군 병사들이 모여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코믹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낸 영화다. 어떤 상황이든 마을 공동체 속에서 서로 돕고 이해하려는 순박한 마을 사람들 앞에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던 병사들의 살기(殺氣)조차 누그러지며 그 공동체 안으로 녹아드는 것을 지켜본 인민군 장교가 촌장에게 그 ‘위대한 령도력’의 비결을 묻는다. 신선처럼 머리도 눈썹도 수염도 허연 촌장 할아버지는 무심하게 이런 말을 한다.
“뭘 좀 많이 메기야지 뭐.”
쩔어 있는 아이들의 어깨와 얼굴을 좀 펴게 만들려면 아침부터 뭘 좀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천 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내가 매일 아침밥을 해서 멕일 순 없겠고 날이 더워지면 쉬이 상하기도 할 테니 밥은 곤란했다. 아무래도 여자애들이니 밥보단 빵을 더 좋아하겠지 싶어 학교 근처에서 꽤나 유명한 큰 빵집에 무턱대고 찾아갔다. 빵도 만든 날이 지나서 안 팔리면 어차피 버려야 할 텐데, 어제 만든 빵을 버리느니 멀쩡하기만 하다면 교육 기부의 형식으로 우리 학교에 기부를 좀 해 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사장님이 주 1회 정도면 그렇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공무원증도 안 들고 갔는데 뭘 믿고 그렇게 해 주신 건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그렇게 협찬받은 빵을 그냥 나눠주려니 뭔가 구호소 같은 느낌도 나고 의미도 없는 것 같아서 동료 선생님과 적당한 형식과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요 작은 빵을 주면서 기쁨을 배가 시킬 수 있을까. 교회에 열성인 그 선생님과, 성당에 적을 두고 있는 내가 가장 많이 들으면서도 가장 힘이 센 말을 아이들에게 강요해 보기로 했다. ‘사랑해’라는 말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이니까 말이다.
* 이해인, <사랑한다는 말은> 중에서
그러니까 빵을 나눠주는 장소에 친구들과 같이 와서, 서로 끌어안으면서 ‘사랑해’라고 외치는 미션을 수행해야만 빵을 준다는 조건을 걸었다. 빵만 먹으면 목 막히니까 코코아도 한 잔씩 타서 따뜻하게 먹으라고 손에 함께 들려주기로 했다. 사랑한다는 말, 빵 그리고 따뜻한 음료, 이런 것들을 모두 집어넣어 우리가 만날 공간의 이름을 ‘사랑해 모닝 카페’라고 지었다. 이것저것 준비했지만, 지금까지 해 본 적 없는 행사라 잘 될 거라는 기대보다는 불안이 앞섰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학생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야! 지금 1층 학생부 앞에서 ○○베이커리 빵을 그냥 나눠준대!”
“뭐? 헐? 왜?”
“몰라, 몰라 일단 가자.”
“야 근데 그거 둘이 껴안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해야 준대.”
“으, 그건 극혐인데? 그래도 일단 가자!”
‘극혐이다’, ‘부모님한테도 안 한다’, ‘졸라 싫다’, ‘뻘쭘하다’는 온갖 부정적인 말이 난무했지만, 그 말을 내뱉는 어느 누구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다. 친구와 손을 잡거나 끌어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얼굴 근육은 그날치 웃음을 다 끌어당겨 쓰는 듯 무척 바빠 보였다. 친구가 없거나 성격이 소심해서 카페를 그냥 지나치는 아이들은 선생님이 불러다 안아주거나 카페 운영을 돕기로 한 학생자치회 아이들이 친구의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이후에 이들은 ‘사랑해 모닝카페 카페지기’라는 공식적인 직함을 얻게 된다.―빵과 음료를 받기 위해 수백 명의 학생들이 한 줄로 늘어섰고 장사진이라는 단어가 사전적 의미 그대로 눈앞에 펼쳐지면서 사랑해 모닝카페는 수요일 아침을 기다리게 하는 즐거운 행사로 단숨에 자리 잡았다. 일단 철을 씹어먹어도 소화 시킬 수 있을 것만 같은 늘 배고픈 여고생들의 자신감(이건 남녀 구분이 없다)과, 학교 안에 매점이 없다는 상황적인 조건이 시너지를 이룬 것도 큰 성공의 요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베이커리의 빵 후원은 한 학기로 끝났지만, 카페 운영에 대한 열광적인 성원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여기저기에서 예산을 조금씩 끌어다가 초코파이, 몽쉘, 오예스 등의 초코빵으로 간식을 대체했다. 카페 운영이 자리가 잡히고 호응이 지속되자 예산도, 주위의 도움도 많아졌다. 특히,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카페 운영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선생님과 학생 간의 갈등으로 학생부를 찾는 일, 학생 상호 간의 학교 폭력 사안이 교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덕분에 학교 폭력 예방을 위해 교부된 예산을 이 일에 쓰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쓰지도 않을 볼펜이나 포스트잇 같은 기념품에 ‘학교 폭력을 예방합시다’라고 형식적으로 써서 나눠주기보다, 맛있는 걸 나눠 먹으면서 친구와 그날의 일들을 이야기하고 사랑한다고 말해보는 경험이 서로 간의 관계를 좋게 만들어가는 데 분명히 더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거라고 믿는다.
학교가 너희들을 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 너희들은 충분히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알아주길 바랐다. 어떤 봄날엔 학부모회와 힘을 합쳐서 김밥을 나눠 주고 너를 사랑하는 존재가 친구들과 선생님들뿐만이 아니라 엄마, 아빠도 계시다는 걸 상기시켰고, 어떤 추운 날엔 어묵 국물 분말 수프를 사다가 뜨거운 물에 타서 분식집 분위기를 연출해 주기도 했다. 학교가 조금씩 조금씩, 하지만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침에 만나는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밝게 인사하고, 자신에게 전해지는 인사에 미소로 답하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졸업식 날이 되면, 내 수업을 듣지 않아서 서로 인연이 없는 것 같은 아이들로부터 꼭 편지나 엽서를 받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수업을 듣지 않아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졸업하기 전에 선생님께 꼭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2학년 때 성적도 그렇고 미래에 대한 진로도 불투명해서 너무 살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어요. 그런데 수요일 아침마다 쌤이 주시는 코코아랑 따뜻한 아이스티가 그렇게 생각나더라고요. 그렇게 일주일 버티고, 지내고 하다 보니 어느새 졸업도 무사히 하게 됐어요. 언제 다시 뵐지는 모르겠지만, 늘 건강하시고, 우리 후배들에게도 사랑해 모닝카페 계속 진행해 주세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언제나, 나는 내가 무엇을 준다고 생각하고 일을 시작하지만, 그 일의 끝엔 아이들에게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돌려받는다. 사실 카페를 한 번 운영하려면 결재받고, 물건 사 오고, 정리하고, 준비하고, 운영하고, 결산하고 하는 데 손이 무척 많이 간다. 수업이나 평가처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참 귀한 아이들이 특별한 것 없는 일상의 아침 친구들과 한 번 웃을 수 있다면, 짜증 나고 더러운 일도 달콤한 간식으로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일이다. 지금은 떠나온 예전 학교가 되었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참 행복하고 즐겁다. 그때 카페를 열려고 출근하던 길 귀차니즘이 스며들세라 꼭 듣던 노래가 떠오른다.
“니가 웃으면 나도 좋아.
넌 장난이라 해도.
널 기다렸던 날
널 보고 싶던 밤
내겐 벅찬 행복 가득한데”
-toy, <좋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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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랑해 모닝 카페' 이름도 참 멋지고 처음 학생들의 반응도 재밌고
선생님의 제자 사랑과 참신한 아이디어가 드디어 결실을 보이는 대목에 감동이 입니다.부모님과도 쑥스럼에 안아보지 않았다는 학생들도 서로 안으며 '사랑해'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열게 만든 이런 아이디어를 낸 정민형이야말로 제자를 사랑하는 참스승이십니다.
김 형, 저 아니에요!
책 저자, 이원재 선생님 이야기입니다. 저는 퇴직한지 20년 되어가요. 이 책은 2023년 3월 15일 발행한 책입니다.
미안, 감사합니다!
아하, 글에서 시기적으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머릴 스쳤지만 그만 몰입하다보니 그랬나 봅니다. 판단력도 떨어졌나 봅니다. 이원재 선생님 정말 멋진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