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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우리가 지난주에 이어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계속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구주의 성육신과 그리고 그분의 공생애의 삶과 아울러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계시로 우리에게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활은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하신 그 모든 사역에 대한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만유를 포함하는 구속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입증과 승인에 대한 것입니다.
이 구주께서 이루신 모든 구속사 사역에 대한 것들을 온전하고도 합당하게 입증하시고 승인한 것은 믿는 자들을 위한
객관적인 방면의 첫째 항목이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님을 일으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또한 의롭다 하신 증거가 되셨고 그리고 구주께서
제3일날에 부활하신 일을 통하여 우리가 가장 두드러지게 계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구주께서 하신 모든 일들과
그리고 그 사역에 대한 모든 것들이 구주의 부활의 모든 성취 안에서의 성공이었다 라는 것을 우리가 계시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라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한 구주의 부활은 사망과 음부와 이 무덤을 포함한 모든 사탄의 권세를 정복하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무효화시키고
무력화시키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승리로 나타난 것이 바로 부활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주께서 가지고 계셨던 그 신성한 생명이
해방되셨다 라는 것을 우리가 교제를 함께 나눴습니다. 그 신성한 생명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선제적으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사람으로서의 인생의 껍질이 산산이 부서져야만 했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죽음이 먼저 나타나야
되고 그리고 그 후에 인성의 껍질이 부서진 후에 바로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이 부활을 통하여 해방되어져서 믿는
이들 안으로 주입되어서 주님의 그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님께서 지니신 신성한 생명과 본성이 해방되어져서 바로 우리 믿는 자들 안으로 그것이 주입되어져서 우리를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들로 변화와 변형시키는 그 것이 바로 그분의 영화롭게 됨이었다라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참으로 이 구주의 부활은 성육신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공생애를 통하여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런 모든
사역들과 함께 그 뒤에 완성으로 나타나진 구주의 십자가 위에서의 부활을 위한 죽음과 그리고 제3일날 부활에 대한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의 관점에서 부활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려다보았다 라면 바로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부활하심을 하나님의 입장,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곧 주관적인 방면으로 들여다 본다면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가를 우리가 보고자 할 때 바로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부활은
믿는 자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구주의 변형을 위한 일이었다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을 통하여 바로 믿는 자들 안으로 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최종 완성되어진 바로 그 영을 통하여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하여 생명주는 영으로의 변형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바로 믿는 자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4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또 아버지께서 또 주님 안에 계신 것처럼 바로 주님 안에 우리가 있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가지기 위한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부활은 바로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믿는 자들 안으로 곧 하나님이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완성된 생명주는 영 안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영 하나님이 믿는 자들 안으로
들어오실 수가 있는가라는 것을 여러분들과 함께 오늘 교제의 말씀을 통해서 함께 묵상하고 상고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구주께서 부활하신 것은 단순히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제 3일날 부활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의 기나 긴 과정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활의 과정은 보통 우리가 알기로는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제3일날 살아나신 이 일을 우리는
그냥 부활이라고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부활이라고 일컫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 부활의 이 과정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제3일날에 시작 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보편적이고도 천연적인 생각을 통해서 나타나는 이 부활은 참된 부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제3일날 시작된 것이 아니라 신약 성경 전체를 깊게 묵상하고 상고해 보면
부활은 죽음과 함께 시작된다 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요한복음 12장 24절에 한알의 밀알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이 말씀은 바로 부활에 대한 계시의 말씀이었습니다.
죽음과 함께 시작된 것이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제3일날 시작된 것이 외형적으로는 보여지는 부활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주님께서 인생 33년 반 동안을 사시는 그 전체적인 삶의 기간들이 그분의 부활을 위한 기간이었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생명의 떡집이라고 일컫는 바로 이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신 그 순간부터
그분께서 30년의 인생의 삶과 3년 반 동안의 공적인 생활을 위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인생 33년 반 동안에 전체적인 삶의 생활들이 죽음을 체험하시기 위한 일들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하신 구주께서는 사람의 삶을 통하여 사람으로서의 인생에 대한 모든 것들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간접적인 삶을 체험하셨는데 이 삶을 통해서 체험하셨던 인생이 바로 죽음 아래에 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시간들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으로 오신 인성을 가지고 삶을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구주께서는 죽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하셨는데 이 33년 반 동안의 기나긴 삶의 시간의 과정들이 부활을 이루는 그러한 부분들의 연속이었다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2장 50 절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르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라고 답답한 그분의 마음의 심정을 이 말씀으로
이렇게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답답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갇혀져 있어서 속박되어져서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번민스럽다라는 그런 뜻이죠.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왜 마음이 답답하셨습니까?
그것은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사람의 형체를 입고 성육신 하셨습니다.
구주께서는 이 성육신을 통하여 입으셨던 자신의 육신 안에 있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육신 때문에 답답해 하셨습니다.
육신 안에서 속박되셨다라는 것입니다.
성육신을 통하여 입으셨던 그분의 육신으로 인하여 제한받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령님으로 잉태하셔서 신성한 생명을 지닌 신성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육신안에 속박되어진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제한받는 삶을 사는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이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신성한 생명을 지닌 그분께서 육신 안에 속박되셨기 때문에 무한하고도 영원하고도 충만하고도 풍요로운 그분의 신성한
존재가 그분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해방되어져야 되는데 바로 이 육신 안에 갇혀져 속박되어진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육체적인 죽음 안에서 침례받기 위하여 이 침례라 함은 바로 죽음을 말하는 것이죠.
이 육체적인 죽음 안에서 침례받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이 육체적인 죽음 안에서 침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하여야 제한되지 아니하는 무한한 신성한 존재가
충만하고도 풍요롭고도 정말 무한하신 그 구주께서 지니신 신성한 존재가 바로 그분의 육신 안으로부터 해방되어져서 믿는
자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여러분들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송축하리로다. 그 분은 그의 풍성하신 자비하심을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갖게 하셨으며 주님께서 그분 자신에 대하여 죽음 아래에
있는 삶을 사심으로 말미암아 신성하고도 무한하고도 영원한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지닌 신성한 존재가 그분 안으로부터
바로 믿는 자들 안으로 해방되어져서 주입될 수 있는 삶을 사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그 33년 반 동안에 인생의 삶에
간접적이고도 직접적인 죽음을 체험하심으로 말미암아 여러 복잡한 그러한 사람과의 일들과 만남을 통하여 바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죽음을 체험하심으로 말미암아 여러 종류의 다양한 온전하고도 완전한 삶을 통하여 부활의 과정을 가지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활이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계시해 주기 위하여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친히 이 부활이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계시로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알의 밀은 만약에 창고에 그대로 보관되어 남아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그 밀은 절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죽지 아니하면 자라지도 않고 성장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밀은 성장하여 자라고 발아되어서 많은 밀알들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땅속에 심겨져서 죽어야 됩니다. 밀은 자라고 성장하기 위하여 땅속에 심겨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밀에 대한 비유의 말씀은 밀은 죽지 않으면 절대 자라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한알 의 밀은 반드시 깜깜하고도 어두운 죽음을 상징하는 땅속으로 뿌려질 때 죽는다는 것을 여러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죽지 않으면 밀은 생명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밀은 자라나기 위해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땅속에 심겨져서 죽음과 같은 것을 나타내는 죽기 위하여 땅속에 심겨져야만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는 생명을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처럼 죽는 것을 거쳐서 자라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없이는 땅속에 심겨지지 아니하면 어둠 속에 갇혀지지 아니하면 밀알이 결코 자라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밀의 부활은 밀이 다시 살아난 것은 땅으로부터 싹을 낼 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밀의 부활은 밀이 싹을
내는 것이 부활이 아니라 부활은 훨씬 더 일찍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은 밀의 죽음에서부터 부활이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씀을 실예로 밀이 죽고 자라는 것을 통한 이야기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한편으로
죽으심을 통하여 또한 부활하시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하여 계시로 암시 받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보편적으로 대다수의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지 제3일날에 부활이 시작되었습니다라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대답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제 3일 후에 부활이 시작되었습니까? 여러분 아닙니다.
이 요한복음 12장 24절에 기록되어진 밀이 죽는 것과 자라는 것에 관한 이야기의 실예를 통하여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실은 그분이 죽어가고 계신 동안에 시작되었다라는 것입니다. 밀은 죽기 위해 땅속에 심겨져야 됩니다.
죽는 것을 거치지 않으면 결코 자라지 않습니다.죽는 것 없이는 밀알이 결코 생명으로 자라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는 외형적으로는 볼 수 없지만 그분이 죽어가고 계신 동안에 시작되었다라는 것입니다.
마치 밀이 땅 속에 숨겨져서 죽음을 당한 후에 깜깜한 땅속으로 뿌려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외형적으로 생각하기에 한알의
밀이 땅속으로 뿌려져 죽은 것처럼 보였을 때 실제적으로 죽은 것처럼 보여진 그 밀알은 사실상 생명으로 자라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이 죽어가고 계신 동안에 시작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하나님의 수많은 아들들인 자신의 형제들을 산출하기 위하여 수많은 밀들이 산출될 수 있도록
땅에 떨어져 죽는 한알의 밀로 비유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인 것입니다.
한알의 밀알처럼 주 예수님께서는 사망 안으로 들어간 뒤에 바로 음부로 상징되고 있는 그 무덤 속에 장사된 지 제3일 날
부활하신 것처럼 주 예수님께서는 죽어가고 계신 동안에도 사실은 발아되고 자라고 생명으로 부활하시기 위한 과정을
거치셔서 온전한 부활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참된 부활에 대한 실제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 금요일 날 유월절 날에 죽으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유월절 날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단지 십자가 위에서 금요일 날 유월절 날에만 죽으심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계시로 암시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시고 여인의 몸을 통해서 이 베들레
헴 생명의 떡집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신 그 순간부터 주 예수님께서는 사실상 죽기 시작하셨다 라는 것을 성경은 암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태어나신 그때부터 죽기 시작하셔서 땅에서 보낸 그분의 33년 반 동안의 세월 가운데서 땅에서 보낸 인생의 삶
30년과 3년 반 동안의 공생애 기간, 곧 33년 반 동안의 기나 긴 세월 속에서 그분은 죽어가셨습니다.왜 죽어가셨습니까?
살기 위하여 죽어가셨던 것입니다.살기 위하여 죽어가셨다라는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분께서는 그 베들레헴 생명의 떡집에서부터 그 수많은 사단의 도구가 된 대적자들을 떠나 애굽으로 육신의 부모를 따라
피신하여서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오는 그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매일매일 매순간 그 예수님은 살기 위하여 죽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아기 예수님으로 태어나신 그 때부터 죽기 시작하셔서 유아 시절을 거치고 소년 시절을 거치고 청년
시절을 거쳐 30세의 청장년이 되는 그 시점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비천하게 다윗의 왕가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성령님으로 잉태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비천한 삶을 살고 계심으로 말미암아 살기 위하여
죽어가시는 인생의 삶의 기간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비참한 삶을 사시고 계셨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이 살기 위하여 죽어가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가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분이 죽어가고 계실 때 곧 그분이 태어나신 그 순간부터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제 3일날 부활하실 그때까지 계속되어졌
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장 25절 말씀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11:25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11: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하시니 이 마르다가 자신의 오라비가 죽음을 당한 사실로 인하여 주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바로 주
예수님께서 그대의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라고 바로 주님께서 부활시키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으나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 오빠가 다시 살아날 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그 부활을 현재의 부활이 아니라 미래의 장차 도래하는 그 어떤
날에 부활이 있을 것임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때 주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장 25절 말씀을 통하여 현재에 일어나는
일이 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생명이 아닌 부활을 먼저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님께서는 이 부활에 대한 것을 먼저 언급하시고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생명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마르다는 요한복음 11장 24절 말씀을 통해서 마지막 날 부활의 날에는 우리 오라비가 다시 살 줄을 내가 압니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그 마르다가 생각한 그 부활은 먼 장래에 도래하는 그 어떤 날 곧 천년 왕국 바로 전에
주님께서 자신의 오라비를 살릴 것이라고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부활이 현재의 부활이심을 강력하게 계시하고 암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부활은 장래의 부활이 아니었던 것입니다.나는 장차 부활이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천년 왕국 전에 나는 너희의 오라비를 다시 살릴 것이다라고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나는 부활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것에 대한 의문이 일어납니다.
나는 부활이다 라고 현재의 부활을 말씀하고 계신 것은 주님께서 아기 예수님으로 이 생명의 떡집인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그 직후부터 주님께서 죽기 시작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태어나신 직후부터 바로 죽기 시작하셔서 인생의 30년 동안의 삶과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의 시간 곧 33년 반
동안의 땅에서 보낸 긴 세월 동안에 그분은 살기 위해서 죽어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생을 사시는 33년 반 동안에 계속 살기 위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부활하고 계셨기 때문에 나는 부활이다
라고 이러한 말씀을 하실 수가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으로 태어나신 그 직후부터 계속적으로 땅에서
보낸 그분의 오랜 세월 동안 계속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계속 살기 위하여 부활하고 계셨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주님께서는 언제 죽으셨습니까라고 질문을 한다면 보편적으로 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대답하기를
사실은 구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달리셔서 운명하셨기 때문에 아마 그 시간이 주님의 죽음이
시작되었고 끝이 났을 것입니다라고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죽음은 사실상 그분이 태어나신 그 직후부터 곧바로 시작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부활은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그분의 부활은 그분이 죽으신 그 시점부터 시작되었던 것이 그분의 부활인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나오는 한 알의 밀알에 대한 비유의 말씀인 것입니다.
밀이 죽지 않으면 자라지도 않을 것입니다.밀은 죽기 위하여 땅속에 심겨진 것처럼 죽는 것을 거쳐서 자라서 부활하는
것입니다.죽는 것 없이는 밀알이 결코 부활인 생명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셨다라는 이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땅에서 이 33년 반 동안에 주 예수님의 기나긴 인생의 삶은 바로 죽는 삶인 것이었던 것입니다.
기나긴 33년 반 동안에 주 예수님의 삶은 죽는 삶인데 이 죽는 삶은 살기 위해 죽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 죽는 삶이요. 그리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온전히 사는 부활하는 삶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 죽음을 당하신 것은 외형적으로는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그분의 죽음은 태어나신 그 직후부터 죽기 시작하셔서 33년 반 동안의 삶을 통해서 죽음의 준비 기간을 가지셨고
십자가 위에서 그 죽음에 대한 준비 기간이 완성되어졌고 제3일날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최종 완성되어졌던 것이
바로 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인 것입니다.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의 시작은 바로 태어나신 그 직후부터 시작이 있었고 그리고 최종 완성된 부활을 통하여 그분의 죽음의
끝인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으로 죽음의 완성이 있었고 죽음의 완성이 마무리되어진 십자가에 죽으신 후 제3일날에
최종 완성되어져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주는 영으로 변형되어 나타나셔서 우리와 함께 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그 부활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제3일날 최종 완성되었지만 그분의 그 최종 완성되어진 부활이
있기 위해서는 부활의 시작과 부활의 완성이 있어야 되는데 부활의 시작은 태어나신 그 시점부터 그리고 33년 동안의
죽음에 대한 준비 기간이 있었고 죽음의 완성이 십자가 위에서 보여지는 것이었고 그 십자가 위에서의 완성된 죽음을
통하여 바로 제3일날 최종 완성되어진 것이 부활이라는 것인데 이 부활이 바로 최종 완성되어진 생명주는 영으로
이 세상에 믿는 자들 안으로 주입되어져서 오늘날 우리와 함께 계신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영 하나님인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살기 위하여 죽으신 사람으로 오신 사람이시며 또한 구주인 것입니다.
그분은 아기 예수님으로 태어나셔서 살고 계시지만 실제적으로는 죽어가고 계셨고 또 한편으로 살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죽음과 부활을 온전히 이해할 때 우리는 이 귀하고도 놀라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이 기묘하고도 신기한 이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새삼 알 수 있으며 감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땅에서의 주 예수님의 33년 반 동안의 기나긴 인생의 삶은 사실은 외형적으로 죽음의 긴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부활의 긴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분이 베들레헴 생명의 떡집에서 태어나신 그 순간부터 바로 죽기
시작하셨던 그 죽음의 긴 과정이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되어진 긴 과정이었습니다만 또 한편 이 33년 반
동안의 죽음의 긴 과정은 부활의 긴 과정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죽음이 이렇게 동전의 양면처럼 아니 하나로 합해진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상호 내재된 상태에서
죽음과 부활이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요한복음 11장 25절 말씀을 통해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요 라고 말을 했을 때 주님께서는 33년 반 동안의 인생의 긴 삶을 사시는 동안에 죽으시는 긴 과정을 거치셨고 그리고
부활의 긴 과정을 아울러 가지심으로 부활하고 계셨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부활이다 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리고 나중에
생명이다 라는 말씀을 하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분이 부활하고 계시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결코 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33년 반 동안의 죽음의 긴 과정과 아울러 그 긴 과정이 또한 부활의 긴 과정이었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부활과
죽음이 함께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은 70 내지 80 정도의 보편적으로 이 인생의 삶을 살게 되는데요.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실은 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1살짜리 아이나 70살 되는 사람의 나이를 보면 나이가 많은 사람은 인생의 그 남은 죽음의 과정이 짧게 드러날 수밖에
없고 또한 갓 태어난 신생아라면 죽음의 과정이 길게 앞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그 남은 인생의 삶이 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죽음의 삶이 시작됨으로 말미암아 죽기 시작하는 그 긴
과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뿐이지 누구나 인간은 70 내지 80 뭐 100살 120살 정도면 다 누구나 죽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하나의 과정을 통해서 옵니다.
이 과정이 어떤 사람에게는 짧게 오고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길게 오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을수록 그 죽음의 과정이 짧겠죠. 나이가 어릴수록 죽음의 과정이 매우 길게 나타나겠죠.
믿는 자이든 안 믿는 자이든 모두가 죽어가는 과정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죽기 시작합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태어난다는 그 자체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믿는 자도 불신자들도 모두가 죽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들이 똑같은 죽어가는 과정에 있지만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죽어가는 과정의 길을
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삶을 통하여 오직 죽어가는 과정만 존재할 뿐이지만 교회 안에 있는 믿는 자들에게는 살기 위하여 죽어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죽어가고 있고 믿는 자들도 죽어가고 있지만 믿는 자들은 살기 위하여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사망과 부활이 동시에 함께 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죽어가는 과정과 사는 과정이 동시에
함께 있다는 것을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로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치신 죽음의 긴 과정과 부활의 긴 과정을 거치셔서 주님께서 부활과 죽음이 함께하셔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
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바로 죽어가는 과정과 사는 과정이 함께 내재되어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아주
가치 있고 아주 중요한 그 삶을 통하여 사망과 부활을 동시에 체험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삶을 통하여 더 많이 죽어야 됩니다.
더 많이 죽음의 과정을 거칠수록 주 예수님께서 거치신 것처럼 더 많이 생명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여러분 염두에 두시고
살기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삶의 길을 따르는 우리들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러한 죽어가는 과정과 사는 과정을 통해서 더 많이 죽을수록 더 많이 부활하는 일을 갖기 위해서 주 예수님께서는
성육신을 통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인성이 성령님으로 잉태하신 신성을
지니신 주 예수님이신 하나님께 더해졌음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성육신을 통하여 사람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신성의 하나님이신 구주에게 인성이 더해졌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육신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성이 덧입혀졌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지 않았으면 하나님은 신성만을 지니신 분이셨지만 인성은 결코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성육신 하시기 전에는 인성이 없으신 신성만을 지니신 하나님이셨으나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스스로 사람의 본성인 인성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스스로 인성을 입으신
것처럼 부활을 통하여 부활의 과정 안에서 주님께서는 그 어떤 요소들이 그 구주의 영 안으로 주입되어져서 생명주는 영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넣어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7가지 신분을 가지고 죽으셨다는 것을 말씀 드린바 있습니다.
우리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 양의 신분으로서 죽으셨고 육신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죽음을 당하셨고
옛 창조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십자가 위에 달려서 죽으셨고 청동 뱀 으로써 이 사단의 독을 제거하여서 사단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뱀으로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셨고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로서 죽음을 당하셨고 화평케 하는 자로서
또한 한알의 밀알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라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7가지 아주 중요한 신분을 가지시고 죽으신 것은 다 사단으로 인하여 기인된 어두운 부분들이며 부정적인 부분들이고
또 죽음에 대한 요소들입니다.
이 부활의 과정 안에서 그러한 죽음의 죄된 요소들을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처리하시고 새 창조를 위한 그 요소들을
그 영으로 주입됨으로 말미암아 주입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바로 이 7가지 신분을 소유한 자로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 채 죽음을 당하셨다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구주께서는 생명주는 영으로의 변형을 가지기 위하여 이렇게 죽어가는 과정과 사는 과정을 동시에 인생의 삶의 모든 부분들을
통해서 체험하심으로 말미암아 요한복음 14장 20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여러분이 내 안에 있으며 내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바로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그리고 아버지 안에 있는 그분이 그 부활을 통하여 생명주는 영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있게 하시는 이 일을 위해서 요한복음 14장 10절부터 20절까지 이 아버지 하나님과 그 영이신 하나님의 최종 완성인 그 영에
대해서 주님께서 특별히 계시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4: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에게 하는 말들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하시는 것이라.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으라. 그리하지 못하겠거든 행한 그 일들을 보고 나를 믿으라.14:12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들을 할 것이요 또 이보다 더 큰 일들을 할 것이라.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14: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그것을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라.14:14 너희가 무엇이나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들을 지키라.14:16 또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겠고, 그 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시리니 그가 너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리라.14:17 진리의 영인 그를 세상은 영접할 수 없으니 이는 세상이 그를 보지도 못하며 또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이는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임이라.
14:18 내가 너희를 고아로 남겨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14:19 잠시 후면 세상이 더이상 나를 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리라. 이는 내가 살고 너희도 살겠음이라.14:20 그 날에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게 되리라.
그러므로 그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제3일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영이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하나님과 그 영
하나님으로서 최종 완성되어지신 분이 그 영이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 영이 오실 때 사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세 분 하나님께서 함께 오신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할 때 바로 생명주는 영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새 생명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 창조를 이루시는 그런 생명주는 영에 의하여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최종 완성되어진 하나님으로서 오시는 그분을 바로 히브리어로는רוח<루아흐>, 헬라어로는
pneuma<프뉴마> 라고 그러죠. 프뉴마 영 그리고 히브리어로는 루아흐 이 뜻은 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호흡, 숨, 공기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죽어가는 과정과 사는 긴 과정을 거치신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그 영께서 마치 호흡과 공기 숨과 같아서
영이신 그분이 우리가 숨을 쉴 때 호흡해 드릴 수 있는 것처럼 그분을 우리가 영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8절에서는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노라."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우리로부터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아주 가까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다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부활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주는 영이 되신 그분은 호흡과 공기가 숨처럼 되셔서 우리가 그분을 모셔 영접 할 수가
있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성을 지니신 그분의 인격을 인식하고 그분의 이름인 주 예수님을 부를 때 주 예수님 안에 있는 아버지 그리고
그 영 안에 계신 아들 예수님 곧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영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어가는 과정과 사는 과정을 가지심으로 말미암아 살기 위하여 죽으신 이 모든 과정을 거치신
그분을 인식하면서 그분을 우리가 모셔드리기 위하여 영접하고자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실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시고 또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서로 상호 내재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주님께서 다른 보혜사를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 자신이 첫 번째 오신 보혜사라는 것을
우리가 계시로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을 아버지께 구하고 후에 그 둘째 보혜사가 사실은 첫째
보혜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임을 알게 된 것이 바로 17절에서 진리의 영인 그를 세상은 영접할 수 없으니 이는 세상이
그를 보지도 못하며 또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이는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임이라라고 말씀 하심으로 실제 영이 제자들 안에 계시다는 것을 말씀 하시고 그리고 18절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로
남겨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 라고 얘기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 자신이 바로 둘째 보혜사이신 그 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20절에서 그날에는 바로 첫 번째 보혜사인 그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 일을 위하여 주님께서 그토록 답답해하시고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르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누가복음 10장 50절에서 바로 성육신을 통하여 입으셨던 그분의 육신 안에 속박되신 삶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지 못하고 우리가 주님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일 때문에 속박되어진 이 주님께서 가지신
그 신성한 생명을 지닌 무한하고도 영원한 신성한 존재가 그분의 육체로 인하여 제한받아지고 갇혀져 있는 것처럼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육체적인 죽음 안에서 침례받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달려 죽으셔야 된다는 것을 그토록 강조를
하셨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요한복음 14장 10절부터 20절 사이에 있는 말씀을 통해 특별히 요한복음 14장 20절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오늘날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주는 영이신 그분이 바로 아버지와 그 아들과 그 영이신 세 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놀랍고도 귀한 일입니다.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요한복음 14장 20절의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묵상해 보면 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영 하나님에 관하여 성경이 계시하는 것은 사람은 영과 육과 혼을 가지고 있습니다.이 영과 혼과 육을 가진 인간의 세 부분으로 된 사람안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 하나님 세 분 자신을 분배시켜서 주입시켜서 넣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함께 하는
요한복음 14장 20절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여러분이 내 안에 있으며 내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아들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제3일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영과 육과 혼을 가진 인간의 안에 넣어짐으로 말미암아 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이 일 때문에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부활을 위한 긴 죽어가는 과정과 살아가는 긴 과정을 함께 체험하는 삶을 사신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20절 말씀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여기에서 너희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너희는 바로 우리 인간의 본성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바로 영과 혼과 육 이 세 부분으로 구성된 자들이 바로 우리 사람이고 그리고 나는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영 하나님 이렇게 세 부문으로 보여지는 바로 그러한 세 분 하나님이 세 부분으로 조성되어진 영과 육과 혼 안에
계시기 위한 삶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성육신을 통하여 육신 안에 속박되시는 삶을 사셨고 그 육신
안에 속박되시는 삶을 통하여 누가복음 12장 50절에 기록된 것처럼 내가 받을 침례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너무
크다라고 계속적으로 얘기하시면서 신성한 생명을 지닌 그분의 무한하고도 충만하고도 풍요로운 그 신성한 존재가 그분 안에서 해방되어져서 믿는 자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생명주는 영으로의 변형을 가지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33년 반 동안의 기나 긴
인생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여러 과정들을 거치신 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 안에도 계실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부활은 생명주는 영으로의 변형이었고 이 생명주는 영으로의 변형이신 그 영께서는 오늘날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과 영 하나님으로서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인생의 33년 반이라는 긴 세월 동안에 그분께서 이 인간의 본성을 지닌 인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모든 것들에 대한 죽음을 체험하기 위한 이 모든 사람의 삶을 친히 세상 가운데서 체험하시는 삶을 가지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육신을 통하여 입으셨던 그분의 육신 안에 속박되셨던 신성한 생명을 지닌 신성한 존재가 해방되어져서 믿는 이들
가운데로 영과 혼과 육이라는 세 부문으로 된 사람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그것도 세 부분으로 된 믿는 자들이어야만 되는 것입
니다.믿는 자들 안에 거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이러한 죽어가는 이 삶의 과정과 살아가는 부활의 긴 과정을 친히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주님께서는 부활과 죽음이 함께하는 33년 반 동안의 삶을 가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는 부활의 삶을 보여주어서 부활 안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보게 되는 것을 말씀 드리면서 오늘 교제의 말씀을
여기까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