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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교실 스크랩 조선 제25대 왕 철종 (哲宗 1831∼1863)
심상진 (호) 송정 추천 0 조회 3 14.02.17 18: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 제25대 왕 철종 (哲宗 1831∼1863(순조 31∼철종 14))

 

 


조선 제25대 왕(1849∼1863). 자는 도승, 호는 대용제(大勇齋). 이름은 변.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 사이의 셋째아들이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변은 형 회평군(懷平君) 명(明)의 옥사(獄事)로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어 농군으로 지낸데다 나이도 어렸는데 별안간 명을 받아 6월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초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1851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고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득세를 하게 되었다. 1852년부터는 철종이 친정을 하여 기근 및 가뭄·화재·수해지역 등을 대상으로 빈민구제책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는 안동김씨 일족에 의해 좌우되어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에 달하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삼남지방 등 여러 곳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고 민란의 수습에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런 사회상황에서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창도,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자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시킨다 하여 그를 처형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재위 14년 만인 1863년 12월 3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1865년(고종 1) 4월 7일 경기도 고양(高陽)에 예장되어, 능호를 예릉(睿陵)이라 하였다. 시호는 문현무성헌인영효(文顯武成獻仁英孝).


안동김씨 세력연장을 위한 철종의 즉위 배경

 

안동 김씨가 계속 실권을 잡게 되는 배경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순조의 비인 순원 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그도 그럴것이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었다.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벌이 되는 자로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왜냐하면 종묘에 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법도 때문이었 다. 그러나 안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씨벌 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안동 김씨 척족들은 기왕에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 하여 왕가의 법도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전횡을 저지른다.
민진용의 옥

 

순조 말기부터 김유근과 김홍근에 의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이루어지다가 헌종 10년에 이들이 물러나자 권력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반역을 꾀한 민진용은 우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의술로 은언군의 아들 이광과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원덕을 포섭하였다. 그들은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의를 꾸미다 가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을 당하고 마는데 이것을 '민진용의 옥'이라 한다.
철종의 대민 노력

 

친정을 시작한 다음 해인 1853년 봄에는 관서 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전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 냥을 민 간에 대여해주록 하였고 또 그 해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재물과 곡식이 없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 겨 재용의 절약과 탐관오리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1천여 호의 민가에 은전과 약 재를 내려 구휼하게 하였으며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천 냥을 지급하였다. 그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 지역에 내탕 금 2천 냥, 단목 2천 근, 호초 200 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 구제에 성의를 다했다.
삼정의 문란

 

토지세에 대한 징수인 전정은 본래 토지 1결당 전세 4두 내지 6두로 정해진 전세보다도 부가세가 훨씬 많았다. 부 가세의 종류만 해도 총 43종류에 달했는데 본래 그것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물게 되어 있었으나 전라, 경상 지 방은 모두 땅을 빌려 농사짓고 있는 농민들이 물고 있었다. 또한 지방 아전들의 농간으로 빚어지는 허복, 방결, 도 결 등이 겹쳐서 전정의 문란이 고질화되었다. 한편 군정은 균역법의 실시로 군포 부담이 줄긴 하였으나 양반층의 증가와 군역 부담에서 벗어나는 양민의 증가로 말미암아 계속 가난한 농민에게만 부담이 집중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을의 형세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군포를 부과하 기 때문에 지방관은 그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부과하는 백골징포나 어린 아이에게 부과하는황구첨정 등을 감행했다. 환곡은 본래 관에서 양민에게 이자 없이 빌려주게 되어 있는 곡식인데 여기에 비싼 이자를 붙이거나 양곡의 양을 속여서 가을에 거두어들일 때 골탕을 먹이는 등의 수법을 사용해 농민 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관리들이 비일비재했다. 이같은 일은 세도 정권의 공공연한 매관매직을 통한 관기의 문란과 더불어 세도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는 지방 토 호 세력의 횡포 아래 빚어진 일이었다. 이런 삼정의 문란이 겹쳐 백성들이 부담해야 하는 결세가 높아져만 갔고 그 것이 결국은 민란의 커다란 원인이 되었다.
진주민란

 

진주민란의 직접적인 발생 계기는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착취에 있었다. 백낙신이 민란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착취한 돈만도 약 5만 냥에 달했는데 쌀로 환산하면 약 1만 5천 석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게다가 당 시 진주목에서는 지금까지 지방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축낸 공전이나 군포 등을 보충하기 위해 그것을 모두 결세에 부가시켜 해결하려 했는데 그 액수가 2만 8천 석에 축난 환곡만 해도 2만 4천 석이나 되어 농민 부담이 급격하게 가중될 처지에 있었다. 이에 농민 봉기군들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진주성으로 쳐들어 갔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우병사 백낙신은 환곡과 도결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약속했으나 농민들은 그를 놔주지 않고 죄를 묻는 한편 악질적인 아전 몇 명을 죽이고 원한을 샀던 토호의 집을 불태웠다. 6 일간이나 계속된 진주민란은 그동안 23개 면을 휩쓸었고 120여 호의 집이 파괴되고 재물 손실이 10만 냥을 넘었다. 단성을 시작으로 진주에서 폭발한 이 민란은 곧 경상, 충청, 전라, 황해, 함경도의 5도와 경기도 광주에서 무려 37차에 걸쳐 일어난다. 크게는 수만 명에서 작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악정에 대항하여 민란에 참가했다.
동학의 탄생

 

동학은 1860년(철종11년) 4월에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서 그 교지가 시천주 신앙에 기초하면서도 보국안민과 광 제창생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교주 최제우가 서교인 천주교 에 대항하여 동방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1905년 손병희에 의해서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창도 당 시 동학은 시천주 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서민이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시는 입신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 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나라 구제 신앙이었으나 2대 교주 최시형에 가서는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한다'는 사인여천의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산천초목에 한울님이 내재한다고 보는 범천론 적 사상으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3대 교주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사상을 교지로 선포하였다.
동학의 초대교주 최제우

 

최제우는 1824년 순조 24년에 경주 최씨 옥의 서자로 태어났다. 몰락 양반 가문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에 의술, 복술 등 여러 방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세상의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1856년 천성산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구도 노력은 185 9년 구미산 용담정 수도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그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은 왕조의 기운이 쇠하여 개벽이 필요한말세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위기 의식에서 최제우는 서학과 서교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가 본래 이름인 제선을 제우로 고친 것도 종교적으로 구국과 제세의 길을 찾겠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1860년 4월 5일 마침내 그는 득도 체험을 하고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제하였다. 그로부터 1년간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하고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어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포교하기 시작하였 다. 특히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신도가 많이 모여들었는데 동학이 가지고 있는 민간신앙적 성격이 신앙적 결집을촉진하였다. 동학은 기성 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유교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였다. 그는 서민들이 수학 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입도할 수 있으며 입도한 그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서민이 군자의 인격을 갖 추는 길을 열어놓았다. 또한 동학의 교지인 '시천주' 사상을 통해 각 개인이 천주를 모시는 인격적 존재이자 각자 자기 안에 천주를 모신 주체임을 강조하였다. 이와같은 동학 사상은 후에 일어날 동학 농민혁명에 사상적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거니와 인간 관계가 상하 주종 의 지배, 복종 관계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같이 천주를 모시고 있는 존엄한 존재이다 평등한 관계임을 가르침으로써 근대적 사상의 선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한편 동학교도들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킨다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 교로 규정하고 1862년 9월 교조 최제우를 백성을 현혹시킨다는 이류로 경주 진영에서 체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 방면되는데 이 사건이 곧 동학의 정당성 입증으로 받아들여져 그 후 교 세가 더욱 커졌다. 신도가 늘자 그 해 12월에 각지에 접을 두고 그 지역의 접주가 지역 신도를 이끌게 하는 접주제 를 두어 1863년에는 교인 3천여 명, 13개 접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8월에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제2대 교 주로 삼았다. 당시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었던 최제우가 미리 후계자를 세워놓은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최제우를 다시 잡아들일 것을 명하니 그 해 11월 20일 최제 우는 선전관 정운구에 의하여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최제우가 한양으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 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3월 10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효수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러나 한 번 일 어난 동학의 불길은 2대 교주 최시형에 이르러 더욱 그 사상적 기반을 다지면서 조선 말기의 국내외 정세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민족 종교로 발돋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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