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9번째 시간으로서 “살아있다는 것” 生きているという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3주간에 걸쳐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주신 선물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한 사람을 통해서 들어온 불순종이라고
하는 죄로 인하여 우리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게 되었으나 예수님께서 져 주신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회복되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기만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흘려 주신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공부하였습니다.
앞서 로마서 5장 12절~14절에 대해서 전해드렸던 것이 5월 30일이었습니다만, 그 때 설교 시간에 로마서 5장 12절부터 5장
마지막인 5장 21절까지는 하나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워낙 정보량이 많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몇 번에
나누어서 살펴보았던 것이지요.
오늘은 로마서 5장 마지막 시간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이 로마서 5장 12절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의 총정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갑자기 오늘 본문을 살펴보았다면 다소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디만, 지금까지 함께 공부해 오셨다면 큰 문제 없이 이해하실 수가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우선 오늘 본문을 전체적으로 살펴본 다음에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우선 18절~19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8절~19절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18.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違反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不義に定めら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義の行為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義と認められ、いのちを与えられます。
19.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한 사람에 의한 범죄로 많은 사람들이 유죄판결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하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되었으나 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자, 복습입니다. 이제는 대답하실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우리는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나, 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인 즉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 20절~21절입니다.
로마서 5장 20절~21절
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20.律法が入って来たのは、違反が増し加わるためでした。しかし、罪の増し加わるところに、恵みも満ちあふれました。
21.それは、罪が死によって支配したように、恵みもまた義によって支配して、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り永遠のいのちに導くためなのです。”
이 말씀은 로마서 5장 13절과 3장 20절 말씀과 뜻을 같이합니다.
로마서 5장 13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実に、律法が与えられる以前にも、罪は世にあったのですが、律法がなければ罪は罪として認められないのです。
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죄라고 하는 것이 율법이 있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율법이 없어도 괜찮은 데도 굳이 율법을 주셔서 죄인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몸 어딘가가 아프다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아픈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프다고 하는 그 통증을 꼭 나쁘다고 만은 할 수 없어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몸 어딘가에 통증이 있다고 하는 것은 몸에
이상이 있다고 하는 신호입니다. 지금 몸 어딘가가 잘못되어서 문제가 있다고 하는 구조신호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와 같은 통증이 있기 때문에 약을 먹거나 아니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해서 질병이나 상처를 고칠 수가 있는 것이지, 몸에 분명히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이 없다면 몸 안에 있는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져서, 일찍 발견하면 대수롭지 않은 것인데도 발견이
늦어져서 심각한 상황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억지로 죄인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율법으로
인해서 깨닫게 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다는 것은 죄가 우리를 지배함으로 인해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만, 비단 코로나 바이러스만이 아니지요. 많은 질병을 보면 바이러스가 우리 몸 안에서 왕노릇
함으로 인해서 병이 심해지고, 나아가서는 목숨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신과 같이 주사를 맞거나 약을 먹으면 이제 우리 몸 안에서 백신이나 약이 왕노릇을 해서 병균을 물리쳐서 건강을 회복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이제 예수님이 우리 마음 안에서 왕노릇을 하게 되고 모든 죄를
물리쳐서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까지가 18절에서 21절까지의 전반적인 내용입니다. 이미 12절부터 살펴보았으니까 어렵지 않지요?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세부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것, 이는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저질렀던 불순종이라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고, 이를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순종의 회복이라는 선물을 주셨다는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만. 그렇다면 그 순종의
회복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순종의 회복이라고 하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그와 같은
선물을 주신 걸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오늘 첫 부분인 로마서 5장 18절, 그리고 마지막인 21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8절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8.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違反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不義に定めら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義の行為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義と認められ、いのちを与えられます。
로마서 5장 21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21.それは、罪が死によって支配したように、恵みもまた義によって支配して、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り永遠のいのちに導くためなのです。”
여기서 공통된 말씀은 생명, 그것도 영원한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까지 순종의 회복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닌 우리로
하여금 영생,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은 지금 살아 계십니까, 아니면 안 살아 계십니까. 아니, 그렇다고 지금 육적으로 살아 계신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살아 계신지 아닌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주님 안에서 살아 계십니까.
예, 이렇게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질문을 드리면 대부분 ‘아멘’이라고 대답하시겠지요. 본인이 ‘아멘’이라고 대답하신다는 것은
‘나는 예수님 안에서 살아 있다는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자신감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실은 믿음 안에서 죽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있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되면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내 몸 안에 이상이 있는데도 통증이 없는 것과 같이 나중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일 심각한 결과가 무엇이겠어요. 나는 교회도 오래 다녔고 직분도 받았고 분명히 구원 받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구원을 받지 못했어요. 이것만큼 심각한 결과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전에 일본 아사이신문에 연재되는 천성인어라는 칼럼이 있는데 2013년 5월 26일에 실린 천성인어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나이를 드신 분들 중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여전히 젊은 사람, 옛날에는 젊었던 사람,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젊은
적이 없었던 사람.”
“高齢の人には三つのタイプがあるとも言われる。まだ若い人、昔は若かった人、そして一度も若かったことのない人。”
교회 내에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전히 믿음 안에서 살아있는 사람, 옛날에는 믿음
안에서 살아있던 사람,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믿음 안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
우리는 항상 믿음 안에서 깨어서 살아 있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만약에 옛날에는 살아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한 사람, 아니면
지금까지 한 번도 믿음 안에서 깨어 살아본 적이 없었다면, 이제 오늘부터 깨어나서 믿음 안에서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우리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의학적으로 사람이 죽었는지 여부는 심장이 뛰고 있는지, 호흡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동자 동공이 반응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기본입니다만, 그렇다면 영적으로 살아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으로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인형 중에서 눈 막고 귀를 막고, 입을 막은 세 가지 인형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묘가 있는 일본 토치기 현 닛코 토쇼구에 가면 유명한 원숭이 조각상이 있다고 하지요? 하나는 눈을 막고, 하나는 귀를 막고, 또
하나는 입을 막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유래를 찾아보면 다양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공자가 쓴 논어에서 이런 말이 나오고, 영어에도 이봐 유사한 격언이 있으며, 또한 인도의 인권운동가였던 마하트마
간디도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디서 누가 먼저 이 이야기를 했건 간에, 이 보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말하는 것 또한 믿음 안에서 살아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는 척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믿음 안에서 죽은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합니다.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앞을 보지 못하는 줄도 모르고 이를 인정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 4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が盲目であったなら、あなたがたに罪はなかったでしょう。しかし、今、『私たちは見え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罪は残ります。」
예수님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꾸짖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신앙이 없는 이방인들인가요? 아니요. 오히려 반대로 자기들은 그 누구보다도 강한 신앙심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른바 사회 지도층인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신앙이 있기는커녕 교만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신앙 안에서 완전히 죽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3절 후반부~7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3절 후반부~7절
3.……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しかし、彼らの行いをまね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言うだけで実行しないからです。
また彼らは、重くて負いきれない荷を束ねて人々の肩に載せるが、それを動かすのに自分は指一本貸そうともしません。
彼らがしている行いはすべて人に見せるためです。彼らは聖句を入れる小箱を大きくしたり、衣の房を長くしたりするのです。
宴会では上座を、会堂では上席を好み、
広場であいさつされること、人々から先生と呼ばれることが好きです。
이와 같이 교만에 가득 찬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아, 주님 저는 맹인입니다. 앞을 보지 못합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고백하였다면 죄가 없었겠으나, 분명히 믿음 안에서 죽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볼 수 있다고 말하니 죄가 그대로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을 봅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신명기 1장 33절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主はあなたがたが宿営する場所を探すために、道中あなたがたの先に立って行き、夜は火の中、昼は雲の中にあって、あなたがたが行くべき道を示されるのだ。」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무조건 뛰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해야 할 분,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푯대를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서 달려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자동차가 낭떠러지를 향해서 달리고 있습니다. 옆에서는 큰 소리로 멈추라고 합니다. 핸들을 꺾으라고 소리칩니다. 살아서 귀가 열려
있는 사람은 그 말을 들으면 곧바로 핸들을 돌리거나 멈추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를 달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는 그야말로 듣지 못하는 사람, 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ですから、信仰は聞くことから始まります。聞くことは、キリストについてのことばを通して実現するのです。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듣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누구는 기도를 하면 주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누구는 꿈속에서 주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또 누구는 금식하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몇 시간쯤 하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잠을 얼마나 주무시면 꿈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까. 며칠이나 밥을 굶어야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까.
문제를 내겠습니다. 이에 대한 답을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그렇죠.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몇 시간쯤 기도하면
주님 음성을 들을 수 있는지, 잠을 얼마 동안 자면 꿈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지, 며칠쯤 금식하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나와 있습니까. 안 나와 있습니까.
적어도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안 나와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 좋습니다. 꿈을 꾸거나 금식을 하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냐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금식하고 꿈 이야기를 하지만, 가장 중요한 성경말씀을 도외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7절~8절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探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出し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
だれでも、求める者は受け、探す者は見出し、たたく者には開かれます。
그렇다면 어디서 구해야 하겠습니까. 이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무조건 기도하고 굶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구해야 할 곳이
어디 입니까. 이는 다른 곳이 아니에요.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구하고, 성경 말씀 중에서 찾아야 하고, 성경 말씀을 두드려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보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법률이 있습니다. 이건 이상한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 사회에서 많은
법률들이 공평하고 공정하게 시행된다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어떠한 법률이든 간에 그 나라의 헌법정신에서 빗나가면 안 됩니다. 아무리 강력한 법률이라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헌법재판소에서, 일본에서는 최고재판소에서 그 법률이 헌법과 맞지 않는다. 위헌이다 하는 판결이 내려지면 그 순간 그 법률은 무효가
됩니다.
이 세상에는 훌륭한 목사님들, 훌륭한 신학교 교수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책방에 가면 훌륭한 기독교 서적들이 많습니다. 많은
설교들도 있고, 많은 해석들, 많은 간증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교수님이나 아무리 큰 교회 목사님이나, 아니면 하물며 꿈 속에서 선명하게 예수님이 나타나서 하신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이 성경에서 빗나간다면, 그것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しかし、驚くには及びません。サタンでさえ光の御使いに変装します。
여러분, 사탄도 그냥 천사가 아니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합니다. 그런 사탄이 내 꿈속에 예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서 말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귀는 반드시 어디를 향해 있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향해 있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더 이상 추가할 내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꿈속에서 하나님을 봤다, 예수님을 봤다
하더라도, 거기서 들은 말씀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는다면 이는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완전하고도 유일한 하나님 말씀이신 성경에 귀를 기울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잡아넣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경고를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고 말합니까.
사도행전 4장 19절~21절
“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しかし、ペテロとヨハネは彼らに答えた。「神に聞き従うよりも、あなたがたに聞き従うほうが、神の御前に正しいかどうか、判断してください。
私たちは、自分たちが見たことや聞いたことを話さないわけにはいきません。」
そこで彼らは、二人をさらに脅したうえで釈放した。それは、皆の者がこの出来事のゆえに神をあがめていたので、人々の手前、二人を罰する術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
베드로와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自分たちが見たことや聞いたことを話さないわけにはいかない。
그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믿음 안에서 살아 있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다면, 믿음 안에서 살아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믿음으로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어야 할 주님,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행함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있는 책 이름이 무엇입니까.
볼 견자를 써서, 사도견전입니까. 들을 문자를 써서 사도문전입니까. 아닙니다. 사도들이 행함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사도행전인
것입니다.
사도들은 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듣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가만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보고 들은 대로 행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고 들은 것이 있으면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그렇다고 발벗고 전도를 다니는 것만이 행함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가 변하는
것도 훌륭한 행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녀 놓고도, 어디서 주워들은 말만 늘고, 그 사람 자체는 전혀 안 바뀌는 사람, 오히려 안 좋게 바뀌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우리를 온전하게 해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인 성경에 귀를 기울여서, 우리가 교만을 버리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바꾸어 간다면, 이것 또한 놀라운 행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보고 들은 대로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보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께 순종하는 행함을 통해서, 믿음과 말씀과 행함으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기쁨에 찬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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