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을 깨닫는 원리나 방식은 하나 뿐이다.
공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세한 원리와 방법을 알고 시도하면, 대다수가 다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방법으로 공을 깨닫든지간에 공을 깨닫는 원리는 같다.
그 원리와 방식은 결코 다를 수 없다.
왜냐면, 마음에서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깨닫는 방식이나, 저 사람이 깨닫는 방식은 틀릴 수가 없다.
공을 돈오하는 그 원리는 하나다. 둘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마음에서의 돈오, 그 원리만 제대로 이해하고 시도하면, 결코 어렵지 않다.
2. 공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
공을 못 깨닫는 이유는 크게 세가지이다.
첫째, 시도를 하지 않아서이고,
둘째, 공을 깨닫는 원인과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서이고,
셋째, 깨달으려고 열심히 시도하지만 그 방법과 원리를 몰라서이다.
아래에 적어놓은 방법을 상세히 이해하고 나서 시도한다면,
시도하는 대다수 분들은 공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3. 공을 깨닫는다는 것의 의미
여기에 너무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왜냐면 겨우 공성을 한번 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공을 돈오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부처가 되는 것도 아니요...
또 번뇌가 확 사라지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저 공을 겨우 조금 깨달은 것 뿐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비하면....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물한방울 수준의 깨달음조차 안된다.
공에 대한 돈오는,
그저 공을 한번 힐끗 보는 일별[一瞥]이다. 그저 공을 조금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너무 큰 의미를 둬서,
이게 수행의 끝이고....내가 부처다.......라는 미친 소리를 하면 안된다.
의외로 이런 부류가 꽤 있다.
그러나 이 단 한번의 일별이 사실은 굉장한 의미가 될 수 있다.
불법[佛法]은 이 공에 대한 일별이 있고 나서야, 제대로 닦아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공에 대한 일별[一瞥]이 없다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뭔지도 알 수 없고, 그로 인해 한 발조차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공에 대한 돈오가 있어야,
진정으로 불법승 삼보에 확고부동하게 귀의할 수 있다. 이때 진짜 佛子가 된다.
공을 깨닫고 나서는,
부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대승보살의 길을 걸어야 한다.
4. 공을 깨닫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
첫째, 쌓은 공덕이 충분한 채로 시도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선업을 지어 쌓은 공덕이 없는 자는 공을 깨닫기 어렵다.
그래서 불법승 삼보에 공양을 올리거나 방생, 절, 염불 수행등으로 공덕을 쌓는게 우선이다.
공덕이 많은 자는 문수보살께서 한번 힐끗 쳐다보는 그것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공을 돈오한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의미가 아니다.
비록 겨우 조금 깨닫는 것일지라도....
둘째, 연기법에 대한 이해가 있는 상태에서 시도해야 한다.
공성과 연기법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래서 우선 불교의 핵심교리인 연기법에 대한 상세한 공부가 필요하다.
연기법에 대해서 이치적으로 알면 그만큼 더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또 설사 공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연기법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역시나 다시 연기법을 배워야 한다. 다시 공부해야 한다.
공부 안하면 공에 대한 이해가 커져갈 수 없다.
셋째, 계율을 잘 지키는 상태에서 시도해야 한다.
계율을 지키지 않아, 마음에 번뇌가 가득한 채 로는 시도해봐야 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재가자는 재가자 5계를, 출가자는 출가자 계율을 지켜야 한다.
특히 음행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지혜를 덮어 버리는게 바로 음행이니까.......
계율을 지키는 이유는 번뇌를 줄이기 위해서이다.
번뇌가 많은 채로는 깨닫기 어려우니까......지혜를 덮어 버리는 것이 번뇌다.
넷째, 나는 이미 공을 돈오했다라고 여긴 채 시도한다.
나는 이미 깨달았다...라고 여기고 시도해야 그만큼 더 수월하게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일체유심조의 기능을 쓰는 것이다. 그 결과에 촛점을 맞춘다.
일체유심조, 마음 먹은대로 된다.
나는 공을 깨달을 것이다...라고 여기고 시도하지 말고,
나는 이미 공을 깨달았다......라고 여기고 시도해야 수월하다.
다섯째, 바른 자세를 취한 후 시도한다.
가부좌 자세를 취하고, 특히 허리를 꼿꼿히 펴는게 중요하다.
바른 자세를 취하면 기가 중맥으로 들어가 망상이 사라져 그만큼 더 공을 깨닫기 수월하다.
허리는 펴고 양손은 포개서 하단전 근처에 놓는 것이 집중력을 높인다.
왼손바닥은 밑에 오른손바닥은 그 위에 올려 놓는다.
5. 공을 깨닫기 위해 필요한 원인 및 방법, 원리 설명
첫째, 공은 내 마음에서 깨달아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공을 내 마음이 아닌, 다른 곳에서 깨달으려고 하고 시도해봐야 깨닫지 못한다.
이런 방법은 실패만 가져온다.
공을 돈오하는 그 장소는 내 마음.......바로 여기다.
내 마음의 공함을 깨닫는 것, 바로 이거다.
둘째, 내 마음을 직접 바라보는게 공을 깨닫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구루린포체, 파드마 삼바바께서 말씀하셨듯이.....
마음이 마음을 관할 때 마음은 사라져 텅 비게 되고 이때 깨닫게 된다.
이 방법이 가장 쉽고, 가장 확실하고, 가장 빠르다.
마음이 마음을 관할 때 마음은 사라진다.
이때 텅빈 공의 상태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안하고, 안 해본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아는 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걸 시도해야 한다. 이 생소한 것...
셋째, 무념 상태에서 공의 돈오를 시도해야 한다. 회광반조(回光返照).
무념 상태를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직접 마음을 관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조단경에 무념위종이라는 명언이 있다.
마음이 마음을 직접 관하는 것이 바로 회광반조(廻光返照, 回光返照)이다.
제6식인 의식이 빛이고, 그 빛을 돌이켜 진여를 보는게 회광반조이다.
이 회광반조........이 방법이 공을 깨닫는 가장 쉬운 방법이고, 가장 빠른 방법이다.
이것이 또 파드마삼바바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마음을 관할 때 마음은 사라진다는 의미다.
마음이 마음을 관할 때 마음이 사라지면 텅비고 공하게 되는데,
그때 깨닫게 된다.
그 때 제6식인 의식이 진여를 경험한다. 그게 공의 돈오다.
넷째, 무념 상태에서 공의 상태로 전환, 이게 돈오의 핵심이다.
누구나 종종 무념 상태에 이른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 공을 깨닫는 자는 드물다.
왜 그럴까?
이 이유를 아는게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면, 자아/무명에 휩싸인 그 무념상태만 있는 줄 알아서이다.
이 무념 상태에서 공의 상태로 건너와야 한다.
이때가 바로 공을 돈오하는 순간이다.
순간이다. 찰라에 깨닫는다.
생멸심이 진여심으로 순간적으로 건너올 때 깨닫는다.
여기서 결판난다.
아, 생멸심이 나의 본체가 아니라, 진여심이 나의 본체였구나...라는 걸 깨닫는다.
먼지같은 생멸심이 나의 실상이 아니고, 광활한 우주와 같이 텅 빈 것이 나의 실상이구나.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의 그 무한 광대함....
이 때가 바로 능엄경에 나와 있듯이,
주인이 주인의 자리를 되찾고, 손님이 손님의 자리를 되찾는 순간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다.
"마음 속에 어떤 뭔가가 있는 줄 알고 평생 살아왔는데, 그게 없고 비어 있다니...."
다섯째, 무념상태에서 공의 상태로 건너오는 요령
마음은 텅 비어 있다. 의식이 그 공을 경험해야 한다.
그게 바로 돈오이다.
의식이 공을 경험하려면, 반드시 무념상태가 되어야 한다.
무념상태가 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마음이 마음을 직접 관하면 된다.
의식이 이 무념상태에서 생각이라는 먼지/파편을 바라보려고 하지 말고,
반드시 광활한 텅 빈 그 무한의 공간에 촛점을 맞춰야 한다.
무명/무지에 빠진 자아는 이 무념상태에서 뭘 바라보려고 하는가 하면,
온갖 생각/망상이라는 그 먼지....이걸 바라보려고 애쓴다.
자아는 공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먼지인 생각/망상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 한다. 이게 자아의 생존 수단이니까!!!
마음이 이 자아의 이 농간에서 벗어나서,
텅 빈 그 무한의 공[空]과 하나가 되려고 시도하는 것이 돈오의 비결이다.
제 6식, 즉 의식의 촛점을 무한히 비어 있는 바로 거기에 맞춰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럼 그때 순간적으로 딱, 알게 된다.
이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 回光返照)하여 공을 깨닫는 방법이다.
▶ 진여심의 의미
진여심, 이것도 마음의 한 측면이고 오로지 이 마음은 공[空]을 향해 있다.
그래서 진여심이라고 부르고, 지혜라고 부른다. 언제나 공[空]을 향해 있으므로!!!
생멸심은, 찰라찰라 생멸하면서 외부의 것들을 바라보지만,
진여심은, 오로지 제법실상인 공[空]을 향해 있다.
진여심이나 생멸심은 따로 분리되어져 있지 않아서 일심[一心]이다.
텅비어 공한 것이 그저 공한게 아니고, 그것 역시 마음이고 그게 진여심이다.
이것이 본래 우리의 실상이다. 불성......
▶ 마음이 마음을 관한다...라는 것의 의미
아마도 윗 글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마음이 마음을 관하다>..라는 내용일 것이다.
이것을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매 순간 찰라찰라 온갖 망상을 하며 움직이는 내 마음...
이것이 제6식이고, 의식이고, 생멸식이다.
이 의식이 바로 제 자신을 바라보는 것, 이것을 우선해야 할 일이다.
즉, 떠오르는 그런 망상/생각/형상/기억등...마음에 떠오르는 그걸 처음에 바라본다.
마음이 망상/생각/잡념/모습/기억등을 바라보게 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
이런 망상/생각들이 사라져 버린다. 신기하게 사라져버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그런 것들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움직이는 제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면 사라져서 텅비게 된다.
텅 비게 될 때, 그걸 잘 이해해야 한다.
자아는 그것을 공허하고, 허무하고, 아무것도 없는 무의미로 여긴다. 여기에 속으면 안된다.
자아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자아는 제 자신의 마음을 직접 바라보는 것을 아주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이걸 두려워한다. 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걸 두려워한다.
왜냐면, 제 자신이 본래 없다는 걸 알게 될까봐서이다.
그래서 공을 돈오했다고 한들, 그런 무명은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
이 무명에 빠진 마음을 계속.....끝없이 훈련해야 한다.
공성과 보리심은 죽을 때까지 계속 닦아야 한다고 달라이라마께서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