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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한울을 공경함으로써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알게 될 것이요, 모든 사람과 만물이 다 나의 동포라는 전체의 진리를 깨달을 것이요, 남을 위하여 희생하는 마음과 세상을 위하여 의무를 다할 마음이 생길 수 있나니, 모든 진리의 중심이 되는 부분을 옮겨 잡는 것이니라. 사진 권오철
2024년 6월 2일(일) 오후 6시 종로 구 단성사 극장앞 ‘해월 최시형 순도 표지비’ 앞에서 주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주최,주관,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 후원으로‘해월 최시형 순도 126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오전 해월 선생 묘소에서 추도식을 하고 순도 현장에 모인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몇 사람과 시민, 그리고 몽양 여운형 선생 탐방을 위한 국어고전연구원(이사장 유수연),(사)종해문화진흥원(권태운),한류앤뉴스(이순식 국장)등도 참석하여 앞으로 내년에 보다 성대한 참배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식(式)은 청수봉전,심고,주문3회 병송,추도사,심고의 순인데 가장 한국적인 검소하고도 천인합일,시천주의 가장 원초적인 행례(行禮)이다. 깨끗하고 정성 담긴 물 한사발(淸水)이면 되는 것이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진심을 말하면 그것으로 신이되고 신과 통하는 것이다.(心告)
이어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채길순이사장의 추모사에서 ‘우리가 깨끗하고, 새롭고, 바르고, 밝게 사는 길 또한 열어 주셨습니다. 행동으로 실천으로, 눈빛으로 마음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선생의 향아설위 그 말씀을 좋아 리가 다시 선생의 길에 서서 살고자 맹세하오니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계시면서, 앞길을 밝게 비추서’라고 말하였다.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주영채(선원) 회장은 ‘이 사진(해월의 마지막 러시아 공사관 직원 촬영)을 보십시요. 순도 바로 직전의 형형한 눈빛 .. ’ 말하면서 해월이 이곳에서 순도하던 그 장면을 실감나게 말하여 주었다.
또 민족문제연구소 박용규박사는 그의 저서[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에서 밝힌바도 있지만.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 을 위해 진력해야한다면서 직접 그 이유를 ㅅ민이 듣도록 우렁차게 설명하였다.
길가던 시민들은 헤프닝인 줄로만 알고 ‘이런 자리인 줄을 몰랐다.’다고 하면서 앞으로 이 길을 지날 때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어야 한다고도 했다. 또 어찌이리 조촐한가? 한탄하는 이들도 있었다.
해월의 소박하면서도 정연한 진리 설파는 곧 핵심 한류의 하나이다. 어린이,부녀를 떠 받들고, 위생을 중시하고, 노동을 신성시하고 향아설위(나를 공경,내가 하느님)의 획기적인 발상을 시대를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그리고 세계적인 진리의 말씀으로 전파되어 인류세(人類世)의 멸종을 막는 역할이 기대되는 사상이다.
한울만 공경하고 사람을 공경함이 없으면 이는 농사의 이치는 알되 실지로 종자를 땅에 뿌리지 않 는 행위와 같으니.. 사진 이순식 기자
수년전 동학해설사 기행 2년을 마치고 해월의 공적을 1896년 이후 양반들의 투쟁 부터 인정한 이병도의 꼼수에 분개하여 작성한바가 있던 기억을 더듬으며 그 일부를 적어본다.
어찌 전봉준, 최시형이 애국열사가 아니란 말인가? 그걸 묵인하는 정부나 민간의 의식은 가히 경악할 사안이다. 더구나 그 재판관 중 하나가 동학농민혁명의 원인 제공 주범인 조병갑이었음은 경악 그 자체이다. 아직 악질 친일파 윤덕영이 살아 남아 시대를 농단하고 있다는 증좌이다. 尹은 순종비 윤황후의 치맛속에 손을 넣어 옥쇄를 강탈한 진정한 악질이었다.
전봉준 최시형이 항일 투쟁가가 아니라니 어불성설이요, 언어도단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국민은 왜? 이런 지 모르고 있으니 참 한류는 이를 계도 하는 것이다.
공적신청 대상자 최시형은 1894년 음력 6월24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국권이 위기에 처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동학교도인 전봉준등이 1894년 음력 9월18일에 무력 봉기를 획책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상경을 시도 하자 동학교의 교주이며 또한 동학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 이를 최종 승인하고 자신도 손병희등을 무장 시켜서 10만명을 동원하고 남쪽에서 진군하는 전봉준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국권침탈자 일본군과 대항하여 전투를 한바 있다.
패배 이후 일본군과 조선 정부군의 추적을 피해서 도피 생활을 하던중 1898년4월5일 원주 호접면 고사리 342-8 소재 동학교도 원덕여의 집에서 일본군의 사실상 지시를 받고 있던 조선 관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이후 일본 공사의 지시를 받는 조선 정부 법무부의 재판에 따라 사형 선고를 받고 1898년6월5일 서울 돈화문로30 소재 육군법원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사망하였다.
신청 대상자 최시형(최경상)의 공적은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 1항의 내용 ‘순국선열’ 조항에 의하면 ‘일제의 국권침탈(1895년)전후로부터 1945년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분’에 해당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행 규정에 나오는 ‘1985년 전후’ 는 1894년도 포함 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이후 이런 모호한 규정은 친일강단사학자 이병도,신석호에 의해 1962년 군사변란 후 박정희 군사정권이 제정한 것이니 재개정하여서 동학농민군이 반봉건, 반제국주의 운동의 선봉이었음을 인정하는 지금에도 개정되지 않은 것이 도리어 시대 착오적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현행 이 조항 만으로도 적법하다고 본다.
둘째 최시형(최경상)이 2차 동학군 궐기에 대해 전봉준과 합세한 봉기의 이유는 항일투쟁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이전 6월에 일어난 일본군의 조선왕궁점령은 명백한 국권침탈이고 이에 대해 전투한 상대는 조선관군도 있지만 사실상 일본군이었다. 이를 공적신청대상자 최시형은 동학교주로서 최종 승인하고 실행한 한 총 책임자임이 분명하다.
셋째 2018년 ‘역사와 교육학회ㆍ동국대 역사교과서연구소가 주최한 ’동학농민혁명 학술대회‘에서 논의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과 한국사교과서 내용 검토’내용을 보면 현행 8개 검인정 고교국사교과서에는 모두 1894년 2차 동학 봉기(혁명)은 ‘항일투쟁’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동학혁명’이 국가기념일되고 모든 것이 정비되고 있는 시점에서 최시형과 전봉준 그리고 동학교도들의 항일투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넷째 전시 전봉준의 1894년3월24일 1차 봉기 포고문에도 ‘왜양(倭洋)을 축멸하고 성군의 도를 깨끗이 하라.’라는 조항이 있고 이후 조선정부와 합의한 소위 ‘전주화약’의 내용에도 ‘일본인과 내통한 자를 엄중하게 처벌할 것’이라는 조항이 있다. 이것만 보아도 동학농민혁명군의 궐기는 일본에 대한 국권수호를 명백히 한 것이고 또 전투 대상도 사실상 일본군이었다.
다섯째 현재 기존 사학계와 기득권층의 야합에 의해 왜곡되어온 수구적 잔재들에 의해 사회변혁이 지연되는 상태에서 공적 신청 대상자 최시형(최경상)에 대해서 그에 대한 명백한 항일투쟁 증거가 있고 모두가 인정하면서도 국가기관인 보훈처가 ‘공적이 불문명하다.’고 답변 했다는 것은 책임회피에 불과 하다고 본다. 관련 법조항의 미비와 규정의 보완을 언급하고 그 내용을 상신하여 시정하겠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따라서 동학혁명군 중 우선 최고 사령관 최시형(최경상)에 대한 독립유공자 (순국선열) 로서의 공적은 매우 크다고 보며 서훈해야하며 이어 전봉준,김개남,손화중,손병희등과 100만 교도들에 대한 공적도 인정해야한다.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채길순이사장,(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주영채(선원) 회장! 사진 권오철
이렇듯 민중의 마음 속에 살아남은 동학의 면면한 정신은 오늘날 한류의 원천의 큰 흐름의 하나이다. 알았으면 공부하고 공부했으면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한류 그 자체이고 이를 하지 못함을 옛 사람들은 삼환(三患)이라 했다. (글 권오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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