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해체와 중공공산당이 주도한 “5.30 투쟁”과 “길돈`폭동”
1927년 10월 24일 중공만주성위임시위원회가 설립되고 1928년 2월에 연변지구 당조직을 위해 주동교를 파견하였다. 그는 용정에 첫 당지부인 중공용정촌지부를 설립하였다. 1928년 8월에 중공동만구위가 설립되어 주동교가 서기가 되고 팔도구지부, 국자가지부, 등 지부가 세워졌다. 그러나 1929년 1월 15일 주동교가 적에게 체포된 뒤를 이어 대리서기인 류건장 마저 체포되자 대다수의 당원들이 연변을 떠났고 연변의 중공당 조직은 무너졌다.
1928년 7월 17일 ~ 9월 1일까지 국제공산당 제6차 대표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3차례 일제에 의한 검거로 조직이 마비상태에 있었으므로 대회에 정식대표를 파견하지 못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코민테른은 4명의 조선위원회를 조직하여 그들로 하여금 조선공산당의 문제를 조사, 연구한 후에 해결책을 제출하게 하였다. 동년 12월 10일에 공산국제집행위원회 정치서기처는 “조선 문제에 대한 결의”와 “조선농민에게 보내는 글”(12월 테제)을 발표하여 조선공산당의 국제지부 자격을 취소하며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파쟁을 극복하고 소자산계급 울타리에서 벗어나 노농대중을 토대로 한 진정한 볼셰비키 당을 재건할 것을 촉구하였다. 사실상 조선공산당의 해산을 선포한 것이다.
12월 테제 발표 이후에 조선 국내의 공산당은 해산되었으나 중국내 만주총국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화요파, ML파, 서울•상해파는 오히려 당재건위원회를 세우고 재조직을 위해 백방으로 수고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각파의 이견으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에 의해 조선공산당원들이 개인의 자격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였다. 1930년 ML파, 화요파 그리고 서울 • 상해파가 차례대로 해체선언을 하면서 조선 혁명과 조선독립운동의 일환으로서 공산주의 운동을 버리고 개인의 자격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공공산당의 일원으로 코민테른 국제부의 지시에 따랐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조선공산당은 만주에서 사라졌다. 중공공산당에 가입한 조선인들은 중국의 보전과 중국혁명에의 참여를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며 국제공산당의 일원으로 자신들의 충성과 열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민족성을 부정의 기만과 위선에 직면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부터 만주에서 만주공산당에 의해 진행되는 모든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은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중국을 위한 것이 되었다.
1국1당으로 만주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잡게 된 중국공산당은 1930년 1월에 연변지구의 당 조직을 회복하기 위하여 조선족공산당원 왕경을 연변에 파견하여 화룡현 달라자에서 중공연변특별지부위원회를 건립하였다. 연변특별지부는 석건평, 달라자, 남양평, 동량사, 대감자, 등 5개 지부를 설치하였다.
1930년 4월 9일에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전 만주 노동자, 농민 및 일체 노고대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동북지구의 전체 조선족 노농대중에게 중국공산당의 감독하에 혁명에 적극 참가할 것을 호소하였다. 중공연변특별지부는 4월 24일에 “5.1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홍5월투쟁”방안을 제정하였다.
1930년 5월 1일에 용정의 400여명의 수공업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조선인 중, 소학교들도 동맹휴학을 하고 시위에 나섰다. 같은 날 두도구에서도 300여명의 군중들이 항일집회를 열고 반제동맹을 결성하였다. 화룡현 자동, 평강, 석문, 달라자, 명동, 연길현의 팔도구, 왕청현의 북하마탕 등지의 농민들도 중공당의 지시 하에 5.1국제노동절기념모임과 항일집회를 개최하고 시위행진을 하였다. 5월 1일 이후 시위행진이 연변에 널리 파급되었다. 5일에 화룡현 약수동의 600여 명 농민들이 시위를 벌였으며 돈화, 액목의 1,500여 명의 농맨들도 항일집회를 가진 후 친일지주를 처단하고 고리대 계약서와 장부를 불살라버렸다. 화령과 연길 등지의 농민들도 선전대와 특무대를 조직하여 일본 앞잡이들과 대지주와 자본가들을 청산하고 소작계약문서와 고리대장부를 불태웠다. 투쟁이 계속되면서 연변지구의 농민협회, 농민자위대 등 군중단체들이 확산되었다.
5월 27일 화룡현 약수동과 인근 마을의 1,000며 염의 사람들이 약수동 상촌에서 집회를 열고 약수동소비에트정부를 설립하였다. 소비에트정부는 토지혁명을 전개하며 농민적위대를 조직하였다. 그 후 약수동소비에트정부는 일제와 반동군벌의 탄압으로 무너졌지만 동북지역의 첫 노농혁명정권으로서 동북공산당투쟁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였다.
5.1절 거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중공연변특별지부는 “5.30참안6)” 5주년 기념일이 되는 날에 대규모적인 무장폭동을 조직하여 반제반봉건투쟁을 고조시키기로 하였다.
“5.30폭동”은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3일간 전개되었는데 화룡현 삼도구, 약수동, 장인강, 명풍, 두도구, 용정, 대불툰, 남양평, 걸만동, 국자가, 로도구, 이도구 등지의 조선인 군중들의 봉기하여 일으킨 폭동이었다. 일본 영사관과 및 그 산하기구와 친일조직이 공격의 대상이었다. 일제 측 통계에 의하면 지주의 저택이 19채, 총독부 보조학당 5개소, 조선인거류민회 사무실 2개소가 불에 탔고 교량 4개와 발전소 1개소가 파괴되었으며 전화선 10여 곳이 끊어졌으며 피해악은 일화로 약 17,500여 엔에 달했다. 190여 명의 폭동 참여자들이 주었거나 부상당하였으며 3,168명이 체포되고 그 중에서 22명이 사형 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공연변특별지부는 연변의 조선인들의 혁명 정신을 함양하고 촉진시키고자 국제반제운동기념일인 8월 1일에 “길돈폭동7)”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8월 1일 새벽에 일제히 행동을 개시한 각 지역의 폭동대대들은 맡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가장 먼저 액목대대의 파괴대가 철교를 파괴하고 전선주를 넘어뜨리고 전화선을 단절시켜 길림으로부터 교화, 돈화로부터 신참까지의 교통과 전화 연결을 차단시켰다. 돈화대대의 폭동대원들이 신개도보위단 병영을 습격하고 무기고에 들어가 보총 16자루, 탄약 천여 발을 탈취하고 병영에 불을 질렀다. 한광우가 인솔하는 폭동대원들이 마호에서 육군 제7퇀 병영에 사격을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2시간 만에 퇴각하였다. 홍일산, 윤순찬 등이 인솔하는 폭동대는 남황니허공안국 제3분주소를 습격하여 경찰 2명에게 부상을 입혔고 정철호와 이범용이 등이 지휘하는 액목습격대는 관지에 주둔하고 있는 육군 제7연재 8중대 병여을 습격하여 보총 한 자루와 탄알 50발을 노획하였다. 8월 15일 밤 9시에 폭동대원들은 다시 제8중대 병영을 습격하였다.
“8.1길돈폭동”은 연변각지 여러 민족8)의 혁명의식을 고양시켰다. 도처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폭동대들이 시위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군경들과 충돌하였다. “8.1길돈폭동”은 타격대상이 당지의 봉건반동세력이었는데 그 목적이 토지혁명을 통하여 소비에트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일본과 중국지방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930년 6월부터 12월 사이에 중국정부에 체포된 사람이 1,41명인데 그 중 98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고 일본 측에 체포되었거나 살해된 사람은 883명에 달하였다.
“홍5월투쟁”과 “8.1길돈폭동”은 일본제국주의와 동북반동군벌에게 큰 타격을 주었지만 그들에게 연합토벌을 당하기도 하였다. 중공공산당 만주성위는 조선인들을 투쟁의 길로 이끌어 대일본 투쟁과 반 동북반동군벌과 반제반봉건투쟁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는 허다한 동북 조선인들의 사망과 부상의 결과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수천의 민중들이 체포되었고 투옥 당하였다.
제 2 단계는 1931년부터 1940년까지이다.
2 단계는 유격대 설립과 활동, 동북인민혁명군 설립과 활동, 동북할일연군 설립과 활동 및 연해주로 퇴각하는 3개의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1) 각종 유격대 설립과 활동(1930년 후반기~ 1933년)
중공공산당은 조선인들을 동원하여 1930년에 “5.30 투쟁”과 “길돈`폭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1930년 중공만주성위는 중공연화중심현위9)를 설립하였다. 8월말에는 중공연화중심현위에는 10개의 구위와 61개 지부와 470여 명의 당원이 있었는데 10월에 새로 가입한 당원 만해도 670명이었다. 그 670명 중에 660명이 조선인들이었다. 중공만주성위는 중공연화현중심현위를 토대로 하여 중공동만특위를 설립하였다. 그 후 중공왕청현위가 세워졌고 하마탕, 라자구, 요영구, 소왕청, 석현 등 5개 구위와 17개 지부에 당원 150명이 있었다. 훈춘에서는 1928년에 일찍이 중공공산당에 가입한 유경운과 조진가가 중공훈춘지부를 건립하였으나 1930년 8월에 김성도가 중공연화중심현위의 지시를 받고 훈춘에서 중공훈춘구위를 새로 설립하였다. 산하에 대황구, 밀강, 경신, 성관 등 4개의 구위가 설치되었다.
2023년 8월 30일 축시
우담초라하니 올리다
4부로 계속됨
*각 주
6) 5.30참안 : 영국 경찰이 상하이에서 중국인 시위대에 발포하여 13명이 죽은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이는 유례가 없었던 대규모의 반외세 시위였으며, 이 시위에는 중국 각지의 모든 계층이 참여하였다.
7) 길돈폭동 : 길돈은 연길과 돈화에서 한 자씩 떼어서 만든 말로 연변지역을 의미한다.
8) 여러 민족 : 당시 만주에는 조선인, 만주인, 한족이 살고 있었는데 조선인 인구가 가장 많았다.
9) 중공연화중심현위 : 중공 만주성위가 연길과 화룡현를 하나로 묶어서 만들어 동만에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