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문화권 사람들은 좋은 일을 많이 하여 덕(德)을 쌓아야 내생에 복이 있다고 믿는다. 덕이 있어야 벼슬도 하고, 재산도 얻고, 덕이 있어야 좋은 사람도 만나다고 말을 한다. 덕은 일종의 재산과 같은 것으로 교환 형식을 갖고 있어 덕이 없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장자<匠子>는 덕(德)이란 고마운 마음을 얻게 하는 것이다. 덕은 마음을 가볍게 하고, 입을 무겁게 하며, 귀를 두텁게 하고 눈을 밝게 한다.
은나라와 주나라의 교체기에 등장한 ‘덕(德)’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당시의 인간들이 얼마나 강한 의지로 신(神)으로부터 독립해 인간의 길을 가려고 노력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엄밀하게 말하면 덕이라는 특성을 갖게 되면서 인간은 ‘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됐다. 즉 인간이 신의 역할에 영향을 줄 수 있게 됐으며 이와 동시에 인간은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책임과 역할을 신에게만 맡겨놓을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신으로부터 책임을 나눌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은 이제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을 키우면서 자존심이 강한 동물로 성장해간다. 이제는 인간이 신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각을 통해서 자신의 움직임을 결정하고 거기에 스스로 의미 부여를 할 수 있게 되는데, 그 과정의 전반적인 진행은 바로 덕을 근거로 해 이뤄진다. 결국 인간이 인간의 수준에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행위를 하는 근거도 바로 덕이다. 그래서 동양 사회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말하더라도 인간을 논할 때는 덕이라는 개념을 절대 뺄 수 없게 됐다.
그런데 이 ‘덕’은 사실 존재하는 어떤 것의 구성물이나 근거로서 있는 것이 아니다. 권위를 갖고 가만히 멈춰 있으면서, 존재하는 어떤 것을 지탱해주는 ‘무엇’이라기보다는 ‘활동’이자 ‘향기’이자 ‘동력’이다. ‘힘’인 것이다. 덕은 인간을 지탱하는 어떤 ‘무엇’이 아니라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활동’이자 ‘작용’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보편적 원리를 수행할 수 있는 근거가 인간에게 있는가? 주희는 우주의 보편 원리가 인간 각자에게 ‘본성’의 형식으로 내재돼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본성이 곧 원리(性卽理)’라는 명제다. 그는 ‘대학’이라는 책의 첫 구절에 나오는 ‘명덕(明德)’을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으로서 잡스럽지 않고 영묘하며 밝아서 여러 이치를 다 갖추고 있으니 온갖 일에 다 대응한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고 해석한다. 고정되고 불변하는 ‘이치’를 인간이 안으로 담고 있는 것, 즉 이치의 ‘내적 구현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성 즉 덕은 활동력이 아니라 이치와 같은 본체적 특성을 갖게 됐다. 그래서 밖에 있으면 이치가 되고, 인간 안으로 들어오면 본성 즉 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자는 그의 책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서 ‘하늘이 사람들을 낸 이래로 사람들에게는 이미 인, 의, 예, 지의 본성이 누구에게나 부여돼 있다.(蓋自天降生民, 則旣莫不與之以仁義禮智之性矣)’고 말하기에 이른다. 덕을 본성화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하면 덕은 활동하는 동력으로서의 힘을 잃고 거기서 자연스럽고도 강력하게 뿜어져 나오는 향기도 잃어버리게 된다. 그 대신 이제는 발굴해야 하는 어떤 것, 알아야 하는 어떤 것으로서 다뤄져 버린다.
주나라 초기의 문화를 신봉했던 공자의 언설을 보면 당시 회자되던 덕의 진실한 의미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논어(論語) 이인(里仁)편’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 한 구절을 본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 덕이 그 자체로 본체적인 것으로서 활동성이 없다면 어떻게 이웃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