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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0일 사순절 넷째 주일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8장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
찬송 16장입니다.
광고, 헌금, 기도입니다.
성경 계11:1-14절(신409)입니다.
성가대 찬양입니다.
제목: 두 증인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서 삽입구인 10장과 같이 또 하나의 삽입구인 오늘 본문도 ‘나팔들의 심판에서 남은 자들이 회개하지 않음(9:20-21)에서 회개하여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11:13)라는 문맥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또(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되어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10:11)는 요한의 사명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두 증인이 ‘예언하리라’(3)라는 말씀과 그들이 ‘두 선지자(예언자)’(10)라는 사실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먼저, 측량의 이중 명령과 약속과 사명입니다(1-3).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여기 ‘내(요한)게 .. 말하기를(현재분사)’의 내용은 ‘일어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여 3절에서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무엇을) 주리니’ 약속과 ‘그들이 .. 예언하리라’로 끝납니다(표준 새번역, NIV). 원문에는 3절에 ‘권세’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흔두 달’(2)과 ‘천이백육십 일’(3)은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즉 주님의 교회 시대를 가리킵니다(12:5-6).
1) 측량의 이중 명령입니다(1-2).
‘측량하라’는 명령 대상은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이지만,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는 명령 대상은 ‘성전 바깥마당’입니다. 이는 ‘그것이 이방인에게 주었기에,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2b)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성전(나오스)’과 ‘제단’은 예루살렘 성전이 AD 70년에 파괴되었기에 그 성전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각각 하나님의 백성(교회)을 상징합니다(요2:19-22, 엡2:21-22, 고전3:16).
그러면 ‘성전 바깥마당’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이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배교자나 세상과 타협하는 자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전 바깥마당’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였으며, ‘거룩한 성’도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께 속하는 성’이기 때문입니다(21:15-17절 참조). 그러므로 ‘성전 바깥마당’과 ‘거룩한 성’도 하나님의 백성(교회)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측량할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하늘에 속한 교회’를 의미하며, 측량하지 않을 ‘성전 바깥마당’과 ‘거룩한 성’은 ‘세상에서 고난받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측량의 이중 명령(1-2)은 요한의 예언사역(10:11)과 두 증인의 예언 사역(3)에 대한 이방 세상의 핍박과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상징합니다.
2) 두 증인에 대한 약속과 그들의 예언의 사역입니다(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을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여기 ‘내가’는 하나님 또는 어린양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1절의 ‘말하기를’의 주체도 하나님 또는 어린양일 것입니다. 또한, 10:8절의 하늘의 음성과 10:11절의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라고 요한에게 사명을 주신 분(원문에는 ‘그들’이라는 복수이지만)도 하나님 또는 어린양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의 두 증인’(3)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 에녹과 엘리야,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미래의 어떤 두 사람 등등이라는 견해들입니다. 심지어 ‘두 증인’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이단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두 명의 사람일 수 없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각각 개인적으로 하지 않고 모든 면에서 한 사람 같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동일한 것을 받으며 동일한 기간에 예언하고(3) 동일한 시간과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합니다(7). 특히 ‘그들의 그 시체’(8)에서 ‘시체(프토마)’가 복수명사가 아니라 전체를 대표하는 ‘정관사와 단수명사’입니다. 둘째는 그들과 짐승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데(7), 단지 두 사람이라면 ‘전쟁’이라는 용어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전 세상의 사람들이 그들의 시체를 보는 장면(9)이 나오는데, 그들이 두 명이면 그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그들이 예언하는 ‘1260일’이 주님의 초림과 재림의 기간(12:5-6)을 의미한다면, 이렇게 오래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두 증인이 주님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어떤 특정한 두 사람일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예언(증거)할 내용이 요한이 다시 예언할 두루마리의 내용(10:11)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두루마리(하나님의 복음)는 죽임당하신 어린양에 의하여 이미 완성되었기에 더하거나 빼거나 할 계시가 필요 없습니다(계22:18-19). 이제는 주님의 교회가 이것을 세상에 예언(증거)할 선교적 필요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두 증인’(3)은 어떤 특정한 두 개인이 아니라, 10:11절에서 요한을 통하여 다시 예언할 사명 받았던 1-2절의 하나님의 백성(교회)을 대표(상징)합니다.
요한을 통하여 다시 예언할 사명을 가진(10:11) 하나님의 백성(교회)을 ‘나의 두 증인’으로 상징하게 한 이유는 최소한 두 명의 증인을 요구하는 율법(민35:30, 신17:6)에 따라 예언(증거)하는 복음의 참됨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도 칠십 인을 세우사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려 파송하셨고(눅10:1), “너희 율법(신19:15)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요8: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회개의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의 복음을 예언할 사명을 가진 두 증인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약속하셨을까요? 본문이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약속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앞뒤의 문맥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나의 두 증인’(3)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하는 4절을 통하여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슥4:2-14절에 근거한 그들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촛대)가 있는데 ..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 내게 말하는 천사가 ..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대답하여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 내가 그에게 물어 이르되 등잔대(촛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여기에 ‘그들이 누구(Who)’의 질문이 아니라, ‘그들의 뜻(What)’의 질문과 그 답이 강조됩니다.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3)는 ‘주의 기름 부음(성령)을 받아 사역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이며, ‘두 촛대’(3)는 그들이 ‘주의 기름 부음을 받아 빛내는 교회’(1:20)라는 의미입니다. 계4:5절입니다.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등불(성령)’이 일곱 촛대 위에서 켜있기에 ‘일곱 촛대’는 모든 교회를 상징합니다(계1:20). 그러기에 성령을 받은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며(고전3:16), 성령을 받은 우리 몸이 ‘성령의 전’(고전6:19)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신부(교회)’가 일치되어 ‘오라’며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계22:17).
그렇다면,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을 주리니’(3)에서 그 무엇은 ‘약속의 성령’일 것입니다. 이것은 행1:8절과 같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도 여러분, 이것(3)은 1260일을 하나님 복음을 예언(증거)할 사명을 가진 두 증인(교회)에게 ‘예언의 영의 약속’, 즉 ‘요한계시록의 오순절’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증거 사명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입니다(롬15:18-19). 요15:26-27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예수님도 나사렛 회당에서 사62:1절을 자신에게 적용하시면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눅4:18)라고 인용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성령의 최고 목적이요, 능력입니다.
이제 요한은 약속의 성령을 받아 1260일을 예언할 사명을 가진 하나님의 두 증인(교회)에 대하여 설명합니다(4-13).
1) 두 증인(교회)이 가진 권세입니다(4-6).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이것은 약속의 성령을 받은 두 증인(교회)가 가진 권능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동일하게 예레미야(렘5:10)와 같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키며 죽이는’ 말씀의 권능을 가지며(5), 엘리야와 같은 권능(6a)과 모세와 같은 권능(6b)을 가집니다. 마16:17-18절입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성도 여러분,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기에 어떤 원수도 이길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에게 오신 성령님이 절대 타지이신 하나님이시며, 특히 그들(교회)의 권능의 기간이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6)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에게 성령을 통하여 이런 권능을 주신 이유는 ‘그 예언(증거) 사명을 위하여’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교회)이 그들 자신을 위하여 그들의 원수들을 죽이거나, 해롭게 하거나 심지어 저주할 수 없습니다(고전12:2).
2) 두 증인(교회)의 운명입니다(7-10).
‘두 증인’이 주님의 교회를 상징한다면, 7절부터 13절까지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7절(그들의 죽음)은 미래 동사들, 8-10절(그들의 시체 모독)은 현재 동사들, 그리고 11-13절(그들의 부활, 승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심판)은 부정과거 동사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두 증인에 대한 사건들이 시간적 순서나 문자적이 아니라 상징적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첫째는 그들(교회)의 죽음입니다(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여기 ‘올라오는’은 현재분사로서 ‘계속 올라오고 있는’ 상태를 설명하며, ‘그 짐승’은 ‘정관사+단수명사’로서 두 증인(교회)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들을 대표합니다. 이것은 그 짐승이 그들의 증언하는 ‘1260일’(3), 그리고 거룩한 성(그들)이 이방인에 의해서 짓밟히는 ‘마흔두 달 동안’(2)에 무저갱에서 계속 나오는 것이지 그들이 증언을 마칠 때만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13:1, 7).
따라서 그들의 증거는 무저갱의 짐승과 전쟁으로 인한 고난이 따르며, 심지어 죽임까지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증언의 사명을 마칠(완성할) 때야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말하면,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 증언의 사명을 마칠 때까지는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그들(교회)의 시체에 대한 모독입니다(8-9).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사흘 반’(9) 또는 ‘삼일 반’(11)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단7:25, 12:7)라는 어구에 상응합니다. 이것의 변형이 본문에서 ‘마흔두 달’(2)과 ‘천이백육십 일’(3)이므로 ‘사흘 반 또는 삼일 반’도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온 세상의 사람들이 큰 성 길에 있는 그들의 시체를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여 그들을 모독합니다.
그리고 ‘큰 성’은 요한계시록에서 여덟 번 나오는데(11:8, 16:19, 17:18, 18:10, 16, 18, 19, 21) 항상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바벨론(로마)’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그들의 시체를 구경하며 무덤에 장사 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성(세상)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하며,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예루살렘)’과 같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하며, 복음을 증거 하여야 세상의 성격입니다. 악한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고 핍박하였듯이 그의 증인들인 우리도 계속해서 미워하고 핍박을 당할 것입니다(요15:18-20). 우리가 일시적으로 나그네로 사는 우리나라도 이 세상의 부분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빌3:20)을 아심으로 우리나라에 대하여 너무 염려하거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를 사랑하며 기도하여야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약4:4).
셋째는 그들(교회)의 죽음에 대한 땅에 사는 자들의 즐거움입니다(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땅에 사는 자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서로 예물을 보내는 이유는 두 선지자(교회)의 증언으로 그들의 양심에 찔림을 받아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3) 두 증인(교회)의 궁극적인 승리입니다(11-13).
첫째는 그들(교회)의 부활과 승천입니다(11-12).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죽임당한 그들이 성령에 의하여 어린양과 같이 부활하였고(11),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천하였습니다(12). 천지가 흔들려도 그들에게 새 언약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부활과 승천을 구경하던 원수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의 승천은 공개적이며, 환란 전이 아니라 환란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심판과 그 남은 자들의 회개입니다(13).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여기서 ‘큰 지진’은 14절의 ‘둘째 화’가 가리키는 여섯째 나팔의 심판에 속합니다. 그래서 그 지진에 의하여 성(세상)의 1/10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칠천이 죽었지만,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며, 회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세상의 적대적 상황과 하나님의 절대 보호 아래에서 두 증인(교회)의 성령을 통한 예언(선교) 사명과 그들의 운명과 궁극적인 승리를 살펴보면서,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존재 의미와 소명에 대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는 이미 선교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찬송 515장을 부르신 후에 다같이 기도하며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