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등성이 하나 못 넘으면서~ ♡
팔순의 부모님이
또 부부싸움을 한다.
발단이야 어찌됐던 한밤중,
아버지는 장롱에서 가끔 대소사가
있을때 차려 입던 양복을 꺼내 입는다.
"내 저 답답한 할망구랑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죄없는 방문만 쾅~ 걷어차고 나간다.
나는 아버지에 매달려
'나가시더라도 날이 밝은 내일 아침에
나가시라' 달랜다.
대문을 밀치고 걸어 나가는
칠흑의 어둠속,
버스가 이미 끊긴 시골마을의 한밤,
아버지는 이참에 아예 단단히
갈라서겠노라고 큰 소리다.
나는 싸늘히 등 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어머니를 다독여
좀 잡으시라고 하니,
"그냥 둬라,
내 열일곱에 시집와서 팔십평생
네 아버지 집 나간다고 큰소리 치고는
저기 저 산 등성이 넘는 것을 못 봤다"
어둠 속 한참을 쫓아 내달린다.
저만치 보이는 구부정한 아버지의 뒷 모습,
잰 걸음을 따라 나도 가만히 걷는다.
기세가 천리를 갈 듯 하다.
드디어 산등성,
고요하게 잠든 숲의 정적과
뒤척이는 새들의 혼곤한 잠속,
순간 아버지가 걷던 걸음을 멈추더니
집 쪽을 향해 소리를 치신다.
"에이, 이 못난 할망구야,
서방이 나간다면 잡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이 못된 할망구야,
평생을 뜯어 먹어도 시원찮을
이 할망구"
뒤돌아 씩씩거리며 아버지는
집으로 천릿길을 내 닫는다.
지그시 웃음을 물고
나는 아버지를 몰고 온다.
어머니가 켜 놓은
대문앞 전등불이 환하다.
아버지는 왜, 팔십평생
저 낮은 산등성이 하나를 채 넘지 못할까?
아들은 묻는다.
'아버지는 왜 저 산등성이 하나 못넘느냐고?
아버지가 답한다.
'가장이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안 되는 거라고'
딸이 묻는다.
'왜 엄마는 대문 앞까지
전등불을 켜 놓느냐고?
어머니가 답한다.
'남정네가 대문을 나가면
그 순간부터 기다려야 하는 거라고'
아들 딸이 묻는다.
'그럴 걸 왜 싸우느냐고?
부모가 답한다.
"물을 걸 물어보라고 ......"
- 고영민/ 시집 '악어' 중에서-
♡♡♡
노부부의 부부 싸움 아닌 부부싸움을
지켜보노라니 입가에 잔잔하게 번지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을 듯 하다.
한 평생 희노애락을 같이 해 온
부부의 연이란 게 저런 것일까.
마음에 안들면 한량없이 밉고
원망스럽다가도,
없으면 그립고 궁금해지고
걱정되는 것이 또한 어쩔 수 없는
부부의 연이 아니던가.
옛 어르신들은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산등성이 하나 쉬이 넘지 않는
평생의 금도가 있었고,
그 지아비를 환한 전등불로
말없이 기다리는 따뜻한 마음을
가슴 밑바닥에 간직하고 있었으리라.
손바닥 뒤집듯 쉬이 내쳐지는
오늘날의 손쉬운 인연에 대하여,
그리고 가벼운 만남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하는
가슴 따뜻한 시이다.
그리고 독자를 ‘산등성이‘로 끌고 가는
시인의 시적인식이 뛰어나고,
참 기발하다.[양현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