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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1장
1. 사도의 인사(1)
데살로니가는 헬라인과 로마인, 유대인들이 함께 섞여 살던 지역입니다. 이 데살로니가로 사도 바울이, 실라(실루아노)와 디모데를 데리고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행 17: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가르쳤는데, 회당에 있던 적지 않은 경건한 헬라인과 많은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경건한 헬라인과 귀부인이라면,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고, 힘 있는 집안의 부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유대교를 등지고, 이제는 예수를 믿겠다고 한다면, 유대인들로서는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헬라지역인 데살로니가에서 많은 헬라인들이, 그것도 헬라인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유대교에 함께 하고 따른다면, 데살로니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는 크게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헬라인들의 많은 수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서, 예수를 믿겠다며 개종을 한다면, 유대인들로서는 시기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사람을 동원해서 바울을 잡으려고 하고, 바울은 결국 데살로니가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남겨 둔 채, 실라와 함께 베뢰아로 도망을 치게 되고, 베뢰아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뢰아에서도 유대교를 따르던 많은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결국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도망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 일행은 다시 아덴을 거쳐 고린도로 가게 되고, 고린도에 찾아온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교회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바울이 들은 교회 소식은, 데살로니가교회가 바울이 겨우 3주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에 모범을 보이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킨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종말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서, 신앙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를 격려하고, 동시에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재림과 종말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편지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편지를 쓸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인사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도 사도의 서신서이기 때문에, 편지의 형식을 따라 가장 먼저 인사말이 나옵니다.
1절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인사말로 서신을 시작합니다. 바울의 인사말은 그냥 통속적인 인사로 보입니다.
우리도 별다른 의미 없이 이런 인사를 할 수 있습니다. 현재도 교회가 행사를 준비하고 다른 교회에 초청장을 보낼 때, 거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통속적인, 말 그대로 인사일 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는 것은, 교회와 가정이 아무런 문제없이, 평안하게 잘 지내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은혜와 평강을 비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런 의미로 은혜와 평강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은혜와 평강은, 믿음의 문제이지 환경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곧 좋은 환경으로 인해서 근심 걱정이 없는, 편안한 삶을 사는 은혜와 평강이 아니란 것입니다.
성도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예수님이 다 이루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통상 믿음을, 원하기 위한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을 하고, 그래서 ‘믿는 대로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성도의 믿음은 예수님이 다 이루셨음을 근거로 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음을 근거로 한다면, 성도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은 잘못된 것임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생명에 대해서, 모든 것을 완벽히 이루신 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생명의 문제는 단 한 점의 부족함도 없습니다.
주 안에서 내가 무엇을, 얼마나 행하고 실천하느냐는 것은 언급할 문제가 못됩니다. 우리의 행함이나 실천이, 예수님이 다 이루신 생명의 문제에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무엇을 해도 부족하고, 자신의 힘으로 채울 수 없는, 자기 무능을 인정하는 자로 주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 이루신 주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세계에서는, 자신이 꿈꾸고 소망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싸우는 것도 없게 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싸움에 묻혀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내 교회 사람으로 확보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확보하려는 싸움, 빼앗기지 않으려는 싸움으로 가득한 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입니다. 많은 수의 교인이 목사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되고, 자신의 능력과 명예가 되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은혜와 평강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천명이 되면 만 명을 원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끝없는 욕망에 갇혀 살아가는 인간에게, 은혜와 평강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세계에 갇힌 인간에게, 믿음은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방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믿음을, 헌금과 봉사와 실천과 전도로 연결하여,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빙자하여 교인들을, 자기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다 이루심을 믿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다 이루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대로 감사하면서 받을 때 가능합니다. 사도가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쓸 때, 그는 옥에 갇힌 형편이었습니다.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사도는,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했습니다. 바울의 성격이 낙천적이어서가 아닙니다. 바울은 다 이루신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다 이루신 예수님 안에서, 바울은 자신이 별도로 세우고 이루어야 할 것이 없었습니다. 설시 자신이 세운 계획이 있다고 해도, ‘내 계획을 다 이루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죽는다고 해도 그것을 주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옥에서 당장 죽는다고 해도, 아쉬울 것도 후회될 것도 없었기에,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성도에게 이루어야 할 것이 있다면, 평생 그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루어야 할 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분명 사명을 다 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도에게 무엇인가 이루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까?
목사에게 교회 몇 개를 세우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까? 선교사로 나가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까? 선교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루어야 할 사명이라면, 한국의 모든 목사가 선교사로 나가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고, 이제는 성도를 다 이루심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실천과 행함의 여부를 바라보며, 자책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책해야 하고, 자책하지 않고 만족해도 되는, 그런 행함의 기준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급론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으면, 그에 따라 상에 달라지기 때문에, 행함과 실천으로 인한 불이익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 이루신 믿음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해야 할 것도, 이룰 것도 없기 때문에, 실천과 행함의 문제로 인한 불이익은 없습니다.
교회를 출석하며 복음을 전하고 봉사를 해도 주가 하신 일이고, 병상에 누워 있어도 주가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병상에 누워 있다고 해도, 주의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은 것입니다.
병상에 누워서도 주를 믿는다면, 그는 주의 일을 하는 주님의 도구입니다. 이런 믿음 안에서는 ‘왜 나는 저 사람처럼 안될까?’라는 생각이 사라지는 것이고, 따라서 은혜와 평강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성도의 경건과 거룩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와 상관없이, 성도는 믿음으로 인해서, 경건하고 거룩한 자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경건과 거룩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고 전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성도는 자연히 자신의 삶과 행동이,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는 그릇 다운 것인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준 높은 행동과 삶의 실천으로, 경건하고 거룩한 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경건과 거룩을 증거하는 그릇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해야 할 것도, 이루어야 할 것도 없다는 말을,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행함에 붙들려 있는 사고방식에 의한 생각일 뿐입니다.
성도의 마음에 일관되게 흘러야 하는 것은, 예수라는 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된 우리의 생명의 모든 문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도는 부족함이 없다는 이 믿음이, 성도에게 일관되게 흘러야 합니다. 이 믿음이 성도를 은혜와 평강에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2. 복음으로 된 것 / 살전 1:2-5 (464)
사도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한 기간은 겨우 3주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3주의 복음 전파로 무슨 큰 효과가 있겠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데살로니가교회에 나타난 결과는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3절에서 언급한 대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데살로니가교회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으며,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찾아온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교회의 이런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 그들을 기억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에 믿음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이 그만큼 능력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사도가 복음을 잘 가르쳤기 때문일까요? 이것을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5절 상반절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사도의 능력도, 탁월한 말재주도 아니라, 복음이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그들에게 이르렀기 때문에 나타난 열매라고 말합니다.
히 4: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이론이나 교리가 아니며, 성도에게 지식으로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다스리고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시는 능력으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말로만 이르지 않고,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성도를 장악하고 있다면, 성도에게서는 그에 합당한 열매가 드러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에서 그것을 확인함으로써, 비록 자신은 떠나 있으나,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그들에게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지키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말이 아니라 능력으로 성도에게 함께 한다면, 어떤 열매가 나타나게 될까요?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능력이나, 성령의 능력이, 주술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서의 체험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지만, 데살로니가교회에 그러한 체험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3절에서 사도는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처럼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되어진 데살로니가교회의 열매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을 안다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열매가 자신의 삶에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를 기준으로 한다면,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으며, 소망의 인내가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 7:17-18절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복음을 안다면 그는 분명 좋은 나무입니다. 하지만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고, 복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자신을 확인하지 말고, 좋은 나무로써 아름다운 열매가 있는가를, 스스로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인한 열매를 종교적, 도덕적 행함이나 활동으로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러한 것은 복음으로만 맺어지는 열매의 특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에 나타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오직 복음으로만 맺어질 수 있는 열매였습니다.
믿음의 역사란 믿음이 일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믿음의 역사라는 말을, 인간의 계획과 소원을 성취하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인간이 믿은 대로 되어지는 것을, 믿음이 역사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신앙입니다. 물론 십자가와는 전혀 관계없는 인간의 신앙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성도는,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 곧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처럼 믿으며,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환난과 박해가 있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환난과 박해로 낙심하고 염려하는 것은, 연약한 인간의 증거물입니다. 성도 역시 자신의 연약함을, 세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이러한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지 않고 믿지 않는 결과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참된 세계가 있음을 믿게 하심으로, 어려움과 힘든 일에서도 주를 의지하는, 믿음의 길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역사가 있는 것이 성도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이웃을 돕기 위해, 수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수고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에 나타난 사랑의 수고는, 인간관계에서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의 사랑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곧 단지 이웃을 돕는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웃 사랑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은 당연한 것이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의 이웃 사랑은, 도덕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 자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사랑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고난과 박해의 길을 거부하지 않으신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아는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길에서 주어지는, 환난과 박해를 거부하지 않게 됩니다. 환난과 박해에서도, 오직 주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수고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환난과 박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편함과 이익을 구하는 믿음이 아니라,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생명이신 주를 바라보는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인해 나타나는 열매이며, 주를 사랑하기에 나타나는 수고입니다.
따라서 육신의 이익을 위해 주를 찾는 것은, 주가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들이 수고롭게 행하는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도, 결국 자기 사랑을 위한 수고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소망의 인내도 ‘주를 믿으면 언젠가는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소망의 인내는 소망이 인내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소망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소망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메시야가 오심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멸망의 자리에 있는,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메시야를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음에 처한 자임을 아는 성도라면, 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되는 것이고, 그 소망이 세상의 모든 일에서 인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육신의 삶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어떤 분으로 오셨든 상관없고, 내 생활에 도움만 주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는 의도로 예수를 찾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4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에게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에게서 나타난 믿음의 흔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을 인도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신앙 위에 완벽히 서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여러분에게 말로만 이르지 않고,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역사하면서, 믿음의 길로 인도해 갈 것이고, 그 흔적이 증거물로 나타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의 소문이 퍼지다.(6-8)
성도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결단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인간의 의지의 결과이고, 믿은 후에 성령이 오셔서, 믿음이 강하게 되도록 도우시고, 능력을 주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결단이 빠질 수 없는, 필수 조건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성령이 오신 이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령이 역사한 결과이고, 믿음의 삶 또한 성령의 능력의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어떠한 믿음의 삶도,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난 믿음의 삶이라면, 그 삶은 자기 힘으로 산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을 어떤 사람은 ‘극단적 은혜주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너무 은혜에 치우친 말이라는 것입니다.
곧 인간의 몫도 남겨두고, 인간의 행함이나 공로도 적당히 섞어서 말을 하는 것이, 인간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인간이 해야 할 일을 강조할 수 있는데, 너무 은혜만 강조하면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사라지기 때문에, 성도를 나태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이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성령의 능력과 인간의 행함을 적절히 혼합한 것입니까? 물론 성도가 믿음에 의해서 행하게 되는 것은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받았음을 알게 됨으로써 형제를 용서하게 되고, 자기 죄를 깨달음으로써 회개하게 되고, 세상을 배설물로 여기면서, 천국을 소망하게 되는 모든 것이, 믿음으로 인한 행함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행함이 아닙니다. 곧 인간의 의지와 결단이, 역사함으로 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역사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행함도, 자신을 나타낼 도구로 활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7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이 구절을 대개 ‘데살로니가교회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믿는 자의 본이 된 것처럼, 우리도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도록 하자’라는 교훈적 의미로 활용을 합니다. 그리고 믿는 자의 본이 되기 위해, 실천해야 할 내용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8절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이 내용도 같은 의미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교회처럼 우리 교회도, 사방에 믿음의 소문이 퍼질 수 있도록 합시다’라는 교훈적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처럼 믿음의 본이 되고, 믿음의 소문이 퍼지는 교회가 되라는 의도로, 이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본문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사도에게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가 교회로 하여금 믿는 자의 본이 되고, 믿음의 소문이 퍼져야 한다는 의도로 하는 말이라면, 다른 교회에 보낸 서신에 데살로니가교회를 예로 들었어야 합니다.
곧 믿음이 엉망인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본을 보이고,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 너희도 데살로니가교회를 본받아서 믿음의 본을 보이고, 믿음의 소문이 퍼지는 교회가 되도록 하라’고 해야 옳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이 믿음의 본이 되고,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본이 되라거나, 소문이 퍼지도록 하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본이 되고, 각처에 퍼진 믿음의 소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그들의 노력과 힘과 의지에 의한 열매였다면, 바울의 말은 그 같은 믿음의 모습을 보인 교회를, 칭찬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모든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5절의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말로만 이르렀다면, 나타날 수 없는 모습들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이르렀기 때문에,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데살로니가교회에 나타난 믿음의 모습들은, 복음이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증거물이기에, 각처에 퍼진 믿음의 소문은, 데살로니가교회가 믿음이 좋다는 의미의 소문이 아니라, 복음이 능력으로 그들에게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단지 교회가 좋은 소문이 나기만을 기대합니다. 교회가 믿음의 좋은 소문이 난다면, 교회에 득이 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위한 믿음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일하심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에, 복음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좋은 믿음을 보여주고, 좋은 소문을 내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이 칭찬하고 인정하는 것을 행하려고 합니다. 가령 노숙자에게 식사대접을 하고, 불우 이웃을 돕는 일에 앞장 서는 일을 통해서, 교회를 소문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교회의 소문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6-7절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데살로니가교회는 많은 환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사도와 주를 본받는 것이었고,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환난 가운데서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 역시 환난 가운데서, 주님이 가신 길에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오셔서 역사한 결과입니다. 성령이 주를 고난의 길인 십자가로 인도하셨고, 성령을 받은 사도들 역시, 예수님과 똑같이 고난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역사한 데살로니가교회도 기쁨으로 말씀을 받으며,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말로만 아니라, 능력으로 그들에게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8절 끝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는 말을 합니다.
교회가 사도와 주를 본받고,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게 된 일에 대해서, 사도가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은 복음이 그들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함께 함으로써 나타난 증거들이기 때문에, 사도는 단지 주께 감사할 뿐인 것입니다.
성도는 복음이 말로만 아니라, 능력으로 역사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이 능력으로 역사한다면, 데살로니가교회처럼 많은 환난에서도, 기쁨으로 말씀을 받게 되고, 항상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성도된 자신의 믿음의 능력이 아니라, 복음이 역사하는 증거일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성도는, 어떤 삶도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로 활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가 잊지 말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고집으로, 자기 백성을 어둠의 세상에서 붙들어,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어떤 말씀도 기쁨으로 다가올 수가 없는데, 어느 순간 말씀이 기쁨이 되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면서, 천국을 소망하게 되고, 주를 의지하게 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복음이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도가 자신에게 나타난 믿음의 모습을, 자기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역사하는 증거물로 제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증거물로 존재하는 성도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도는, 서로에게 본받을 자로 존재해야 합니다. 종교적인 실천과 업적을 보여서, 자신을 본받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 그대로 환난과 박해와 어려움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성도로 존재하고,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예수님으로 감사하는 것으로 본받을 자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함께 하심과, 복음이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여 응답받고, 부자가 되었다는 간증 아닌 간증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과 어려움에서 변함없이, 주를 믿는 믿음으로 복음이 내게 역사하고, 성령이 함께 하고 있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이런 증거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살아계심과, 복음이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증거하고자, 자기 백성을 환난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환난에서 주를 바라보는 믿음에 세우심으로써, 예수님이 살아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이런 증거물로 부름 받았고,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아니라 복음이 증거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4.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9-10)
기독교계의 여러 가지 소식을 다루는 ‘뉴스엔조이’라는 홈페이지가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 보면, 한국교회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들을 접할 수가 있고, 목사에 대한 소식 또한 들을 수가 있습니다.
뉴스엔조이에서 들을 수 있는 교회 소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교회답지 못한 사건들의 소식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교회다움을 보여주는 소식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교회답지 못한 교회를 비난을 하고, 교회다움을 보여준 교회에 대해서는 칭찬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느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면, 그 교회에 관심을 둡니다. 어느 교회가 짧은 기간에 크게 부흥을 했다는 소식에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그런 부흥을 이루었는가?’에 관심을 두게 되고, 새벽예배의 부흥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는 모 교회의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 교회도 새벽예배를 부흥시켜 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사회사업 등으로 사회로부터 좋은 평을 받는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 자신의 교회 역시 좋은 평을 듣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볼까?’에 관심을 두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의 소문에 대해서도 동일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데살로니가교회처럼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실천하여, 좋은 믿음의 소문을 내는 교회가 됩시다’는 말을 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의 소문을 본받고 이용하여, 내 교회의 이름을 높이는데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데살로니가교회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다릅니다.
9-10절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이것이 사도가 말하는 데살로니가교회의 소문을 들은 각처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이들의 반응을 보면, ‘데살로니가교회처럼 우리 교회도 믿음의 소문을 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의 소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계심을 보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의 소문이, 성도의 노력과 신앙심에 의한 결과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의 소문으로 퍼진 믿음의 역사를, 사도가 어떻게 데살로니가로 들어갔느냐와, 그들이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는가로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떻게’라는 말은, ‘사도의 전도 열정과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도, 그들의 믿음의 결단이나 의지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역사하신 결과, 곧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돌아오게 하신 결과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어떻게’라는 말입니다.
곧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의 역사는, 성도들의 대단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여전히 자기 백성 가운데 살아 역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 소문에서 성도의 믿음의 열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성도의 바른 시각인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교회를 성장시킬 수는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이 새벽예배에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은혜의 결과라면, 모든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현상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부흥하지 못하고, 새벽모임 등에 열악한 교회들은, 은혜가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믿음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뜻합니다. 그것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인간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자신에게 힘 되는 것을 의지하는 인간 속성의 결과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결단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의 역사는, 그리스도가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계심을 증거하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랑의 수고도 동일합니다. 인간은 섬김 받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섬긴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살아계시고 참되신 분으로 섬기고자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증거되고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서 나타난 사랑의 수고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군다나 환난과 박해의 환경에서 하늘로 가신 분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린다는 것은, 세상이 볼 때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환난과 박해에서의 사람의 관심은, 하루속히 그 같은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오시겠다는, 때와 시간도 말씀하지 않고 하늘로 가신 분을, 기약도 없이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굳건한 소망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 또한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소문은, 그들의 믿음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대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함께 하심으로, 그들을 죄에서 건지시고 의의 나라로 인도해 가시는, 예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인간이 활동하는 세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믿음의 소문에서 봐야 할 것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하심이어야 합니다.
10절의 마지막을 보면 사도는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의 소문을 들은 각처의 반응에서, 역시 예수님의 일하심을 바라봅니다.
교회의 믿음의 소문을 듣고,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믿게 되었다면, 그 역시 인간의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지혜이기에, 그 또한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 모든 것을, 장래의 노하심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예수님의 일하심으로 증거합니다.
장래의 노하심은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심판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한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해,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늘로 가셨고, 가신 뒤에는 그리스도의 영을 보내셔서, 여전히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믿게 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심으로써, 장래의 노하심에서 건지시기 위함입니다.
사도가 데살로니가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우상을 섬기던 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아들이 강림하기를 소망하며 인내하게 하신 그 모든 것이, 장래의 노하심에서 건지시기 위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일하심은,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지,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서, 복을 받고 잘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을, 욕망의 시각에서 자기 멋대로 판단합니다. 세상에서는 복을 받아 잘 살도록 인도하시고, 죽은 후에 천국 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향한 생각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생각일 뿐입니다. 믿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진심으로 아들의 강림하심에 소망을 두고 인내로 기다린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잘 살고 못사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세계, 말씀의 세계 안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만 있을 뿐이지, 내가 원하는 나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금 현재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믿는가?’의 문제입니다. 매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예수님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 믿음에 붙드시기 위해서, 영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도 없고 교회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 세계만 있을 뿐입니다. 그 일하심은 사도가 증거한대로, 우리를 장래의 노하심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 속에서 매일같이 바뀌는, 변덕스러운 우리를 다스리시면서, 죄를 알게 하시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우리를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한, 예수님의 일하심의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죄를 보면서 회개하게 되고,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되고, 복음으로 인해서 환난에서도 기쁨이 있게 될 때, 그것으로 예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다른 보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미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견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선물로 받았기에, 또 다른 것을 보상으로 기대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성도는 받기 위해서 행동하지 않습니다. 받기 위해서 행동한다는 것은, 아직 받은 것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성도라면 예수님 안에 있는 예수님의 백성인데,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받은 것이 없다면, 예수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가짜입니다.
그래서 고후 6:10절 뒷부분에 보면, 사도는 자신을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가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는 모든 것에 해당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은 아무리 많이 가졌다고 해도,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가진 자는 세상 모두를 가진 것입니다.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질 수 있는 능력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다시 강림하시는 예수님만이, 우리를 건지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의 가치를 장래의 노하심, 곧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씀의 성취 안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면,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마음에, 모든 삶의 답으로 자리해야 합니다. 이 답을 가진 자로 사는 것이 성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