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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기도]
사랑의 하나님!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 영광과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의 허물을 보혈의 피로 씻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연약한 우리들, 이런 저런 일로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힘주셔서 이기게 하심을 믿습니다.
혼돈은 질서로 … 어둠은 빛으로 … 사망은 생명으로 … 변화시켜 주옵소서.
우리 모두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살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 누구를 대하든,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하며 맡은 사명/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기족들, 군대에, 외국에, 객지에 있는 성도들 …선교사와 선교지를 위해 기도합니다.
목회동역자와 성도들을 모두 영과 육이 강건하게 붙들어 주옵소서.
병상에 누워 아픔과 싸우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옵소서. 치료와 회복의 기쁨을 주실 줄 믿습니다.
모두를 평강으로 지켜주옵소서.
부족한 종이 말씀을 전합니다. 능력 있게 전하도록 성령께서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자기 백성을. . .
할렐루야!
본문 룻기 앞에는 사사기가 있고, 룻기 뒤로는 사무엘서가 있습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사사’라는 리더가 이끌었던 350여 년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서는 이스라엘 최초의 왕 사울과, 그 뒤를 이은 다윗이 통치했던 80년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 홍성환, 『구약의 숲을 걷다』 (서울 : 넥서스 Crodd, p.25~26. 참조. >
이스라엘의 중요한 역사를 담고 있는 사사기와 사무엘서는 흥미롭고 교훈적인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내용이 길고 역사적 분석이 필요하기 때문에 신학적 논쟁이 많고 해석하는데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사사기와 사무엘서를 딱딱한 두 개의 조개껍데기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딱딱한 조개껍데기 사이에 끼어있는 룻기를 “조개껍질 사이에 낀 진주”라고 표현합니다.
룻기는 내용이 길거나 어렵지 않으면서 ‘진주처럼 값지고 은혜로운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김지찬, 『룻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 본문 주해에서 설교까지』 (서울 : 생명의말씀사, 2018), pp.21~23. 참조.>
유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요단강 건너 모압 지방으로 살기 위해 옮겨갔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어서 … 먹을 것을 찾아 이주했지만 형편이 더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엘리멜렉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모압에서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도 모압에서 산지 10년쯤 되었을 때 죽었습니다.
이제 그 가정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남편을 잃은 세 여인 …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과 오르바 뿐이었습니다.
본문을 읽다 보면 ‘이게 무슨 진주며 보석인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말씀 속의 주인공들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복이 임한 게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가족의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이 소개되어 있을 뿐입니다.
본래 엘리멜렉 가족이 살던 베들레헴은 가나안 중심부에 있는 작은 동네입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 데려가고자 하셨던 곳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에 데려가려 하노라” (출 3:8)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은 땅이 기름지고 풍성한 열매가 맺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베들레헴은 가장 풍요로웠던 곳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벧(בֵּית)’은 ‘집’을 의미하고 ‘레헴(לֶחֶם)’은 먹는 ‘빵’을 뜻합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이름을 해석하면 ‘빵집’입니다. 그만큼 먹을 것이 풍성한 곳이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런 베들레헴에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기근’은 ‘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모자라 굶주림’을 말합니다.
떡집에, 빵집에, 풍요로운 땅에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요의 땅에 살았지만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지만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당황스러워합니다.
예수 믿으면 고통이 없고, 시험도 없고, 역경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왜 젖과 꿀이 흐르지 않지?’ ‘베들레헴에 왜 먹을 게 없지?’
‘내가 뭘 잘못했지? 왜 하나님이 이런 고난을 주시지?’
‘왜 이런 고통을 겪게 하실까’라고 답답해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움을 겪게 되면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하고, 원인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엘리멜렉의 가족이 특별한 죄를 지었거나 악을 행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들은 평범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캐릭터 ‘슈퍼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가 많습니다.
예전에도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이 있었고 그런 만화 같은 캐릭터 뿐 아니라
사람도 굉장한 영웅으로 만들어서 인기를 끄는 영화나 드라마가 있습니다.
그런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인공, 혹은 주인공 주변의 사람, 혹은 전 인류에게 … 큰 위험이 닥칩니다.
그러면 주인공이 나서서 목숨을 걸고 악당과 싸웁니다.
싸우다가 부상당하고,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결국 주인공이 모든 악당을 물리치고 이깁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멋지고 잘생긴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서
그 배우가 다치면 안되니까 나쁜 사람과 싸우지도 않고 잘 먹고, 잘 놀고,
건강하게 아무 일 없이 지내면서 매일 매일 행복하게만 살다가 영화가 끝난다면
여러분은 그런 영화를 보러 가시겠습니까? 그런 영화는 재미없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다치고, 넘어지고, 죽을 위기에 처하다가
피투성이가 되었어도 악당을 다 물리쳐서 이긴다면 재밌는 영화라고 느낄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로마 교회 성도들의 정체성을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 (롬 5:1)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가 해야 할 일을 소개했습니다.
“…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성경에 예수 잘 믿으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삶이 늘 평탄하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도 환난을 당할 것이고,
환난이 당연하다는 듯이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을 만나고, 환난을 겪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견딜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겨야 합니다. 견디는 것뿐 아니라, 즐거워할 수도 있습니다.
환난을 통해 인내하고 연단하는 과정 중에도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문제를 만날 때 보면,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왜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생기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 해결하면 생각하지도 못한 또 다른 문제가 생겨 머리를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숙제 없는 사람 없고, 문제없는 가정도 없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참고 견디며 싸우며 저 높은 곳을 향해 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이 되기 위해 모든 일에 주께 하듯 해도 고난이 우리를 피해 가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게 답이 아닙니다.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 내게 들려 주시고자 하는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느 날 남편을 잃은 세 여인 …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에게 소식 하나가 들려왔습니다.
“…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 유다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쉬운성경, 룻 1:6)
먹을 것이 없어서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가 남편과 자식을 잃었는데 고향 땅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오늘 본문 6절을 우리 성경(개역개정)으로 다시 읽어봅니다.
“…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 (룻 1:6)
양식을 주셨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입니다.
그러나 진짜 복된 소식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몸 건강하게 지내는 것 … 중요합니다.
일터와 학교에서 열매를 맺는 것도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 하는 일이 잘되기를 위해’서 많이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힘들고 어렵지만 나를 지키시고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가지만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듣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받아도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예배 마치고 맛있는 음식점에서 점심 먹기로 약속되어 있는 사람은 지금 설교가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들어도
어떤 이는 말씀에 은혜를 받고 어떤 이는 왜 저런 말을 하냐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찬송을 불러도 어떤 이는 가사에 은혜받고 어떤 이는 악기 소리에 민감하게 집중합니다.
전체적인 찬양대의 찬양 소리보다 특별한 파트 소리에 관심을 갖거나, 박자에 민감하거나
찬양대의 태도, 표정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현상에 신경 쓰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생각에 집착하면 판단이 흐려집니다.
그래서 자기 지식, 자기 경험, 자기 판단만 옳다고 생각하게되고 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담배 피우는 사람에게 해야 하나요? 전도하지 말아야 하나요?
그러면 담배 피우는 사람도 교회에 출석해야 할까요? 전도하지 말아야 할까요?
담배 피워도 교회에 와야 합니다. 집사, 권사님이 담배 피우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장로님들이 길에서 담배 피우면 안되나요?
기준이 무엇입니까?
술 마시는 분들도 교회에 출석해야 할까요? 하지 말아야 할까요?
술 마셔도 교회에 와야 합니다.
사람마다 지식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관습이 다르고, 전통이 다릅니다.
그 사람의 신분에 따라 해도 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용서보다
자기의 지식, 자기의 기준, 자기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차를 타고 다니십니까? 국산차입니까? 아니면 외제차를 타십니까?
튼튼한 차가 좋은 차이고, 안전합니다.
요즘 국산차도 잘 만듭니다. 그리고 같은 배기량이면 국산차가 외제차보다 더 비쌉니다.
외제차가 다 비싼 것은 아닙니다.
8`~9년 전에 제가 타고 다니던 차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러분, 제가 타고 다니는 차는 제 명의가 아니라 교회 이름으로 된 차였습니다.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안전하게 다니라고 교회에서 결정하여 구입한 차를 제가 타고 다니는 것입니다.
차에 문제가 생겼으니 교회에서 회의하면서 튼튼하고 비싼 외제차를 사드리자고 결정했는데
어떤 한 분이 목사님은 외제차 타면 안된다고, 비싸도 국산차를 사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 후에 제게 회의 결과를 알려주는데 만장일치로 결의한 것도 아니고
1명이 반대했다는데 제가 외제차를 타겠습니까?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난 뒤에 ‘비싸도 목사님은 국산차를 타야 한다’고 말한 그이는 외제차를 타고 다니더군요.
여러분, 무슨 기준인가요?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 행동할 때 그 말이, 행동이 무슨 기준에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용서보다, 하나님의 관용보다,
자기 기준, 자기 판단, 자기 결정을 더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먹을 것이 넉넉하고 평안하게 해주리라는 말씀에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돌보신다는 말씀에 관심이 있습니까?
남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남이 무엇을 하는지, 남이 담배를 피우는지, 술을 마시는지에 대한 관심보다
그 사람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더 있느냐 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귀에 들리는 것, 자기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결정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어떤 것을 가졌느냐, 어떤 것을 누리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과 함께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시편 73편 28절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는 말씀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어디에 사느냐, 무엇을 먹느냐, 어떤 것을 누리느냐, 어떤 것을 가졌느냐 …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묵상하며 사는 것이 복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을 보는 것, 내 마음에 편한 소리를 듣는 것,
내가 만족할 만한 것을 누리는 것, 내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 … 분명 복입니다.
그러나 그건 복(福)의 일부분입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늘 계시는 분이니까 관심도 없고 찾지도 않습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인 폴 호켄(Paul G. Hoken, 1946~현재)은
오레곤 대학(University of Portland in Oregon, 2014년 5월 2일)에서 강연 중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별이 천 년에 한 번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 날밤, 잠들기를 포기하고 밤새 별을 볼 것이다.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황홀함을 맛볼 것이다.
그러나 별은 매일 밤하늘에 있고 우리는 밤마다(별이 있는지도 의식하지 않은 채) TV를 보도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깨닫기 위해 때로는 가까운 것에서 눈을 돌려야 합니다.
별 보기 위해 밤하늘을 봐야 하듯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지금은 잠시 어렵더라도 …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산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고 산다면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돌보시는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복 …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복 …
그것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인 것을 알면서도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매일 보지 않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았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했고,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산다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복입니다. 그 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어렵게 지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눈물겨운 사연을 감추고 있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과 가까이함이 복”임을 깨닫게 하시고
자기 기준, 자기 지식, 자기 판단으로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에서 땀 흘려 일하여 얻은 소득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성도들의 정성을 받으시고 저들의 가정과 일터가 물질 때문에 어려움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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