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에 따른 실천」(그리스도의 우월성)
히브리서의 수신자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으나, 핍박과 신앙적 혼란 등의 이유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유혹에 직면한 유대인 성도들이다.
그리스도교는 당시 사회에서 ‘불법 종교’로 규정되었고, 유대인 성도들은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 ‘합법’의 울타리 속에 안주하고 싶은 유혹이 적지 않았다.
당시 유대인 성도들은 구약 제사 제도가 폐한 것에 대해 ‘종교적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유대인 성도들은 유대교로 되돌아가는 것이 그리스도께 대한 배신행위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교리적으로는 분명히 배교의 행위인데도, 당사자들은 그것이 배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옛 신앙 유대교’로 되돌아가고픈 유혹에 직면한 유대인 성도들의 신앙을 권면하기 위해,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우월성(The Superiority of the Christ)”을 논증하는 방법을 택한다.
히브리서에는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수신자를 향한 경고가 등장한다.
(2:1~4, 3:7~4:13, 5:11~6:12, 10:26~31, 12:18~29)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계시 전달자로 소개한다(4복음서의 중요성).
히브리서 기자는 세상 사상과 시대정신의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직접 계시해 주신 4복음서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함을 권고한다.
천사를 통해 주신 율법에 불순종하는 자들도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큰 구원의 복음을 소홀히 대하고 그 복음서의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그에 합당한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그리스도를 가리켜 ‘대제사장’이라고 칭함은 성경 중 본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3:1, 4:15, 5:10, 7:26, 8:1, 9:7)
이 호칭은 구약 시대 대제사장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한 속죄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속죄 제사를 드렸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하고 완전한 중보자 되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칭호이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의지하고 말씀을 따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들은 비록 육체의 죽음은 당할지라도 장차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살 것을 믿음으로써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히브리서 3:1~4:13의 말씀에 따른 실천」(영원한 안식)
‘옛 신앙, 옛 종교로 돌아가는 행위(배교)’는 그에 합당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경고한다.
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라는 구절이 나오게 된 문맥의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당시 유대교인(유대주의자)들은 모세를 추종하는 자들이었다. 오늘날에도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3:6 참소망에 대한 확신과 참된 자랑거리를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하나님 집의 진정한 일원이라고 말씀한다.
3:14 복음의 말씀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안식(천국 구원)에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한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완고하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사탄의 유혹(죄악)에 대해서는 완고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항상 겸손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탄의 유혹(죄악)에 완고해야 한다는 관점은 교만과 세속적 욕망에 맞서 영적 경계를 늦추지 않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완고함은 융통성이 없고 고집이 매우 센 태도를 의미하며, 성경적·심리적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완고함의 의미 및 관련 개념 일반적인 의미로 완고함은 고집스럽고 완강한 태도를 뜻하며, 관련 속담으로는 '딱딱하기는 삼 년 묵은 물박달나무 같다' 등이 있습니다. WORDROW 속담 종교적 맥락에서 완고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나 지혜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영적 상태를 지칭하며,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이 맞물린 결과로 논의되기도 합니다. kci.go.kr+1 심리적으로 완고함은 자기 의가 강한 상태로 나타나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 회복을 가로막는 부정적 요인으로 간주됩니다. jcbs.kr |
이스라엘 광야 1세대는 항상 마음이 사탄에게 미혹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임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불순종으로 반응한 광야 1세대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이신 반응은 ‘진노하심’이었다.
안식(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이스라엘 광야 1세대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씀을 믿는 자가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중요한 원리는 이미 창조 때부터 있었던 원리임을 히브리서 기자는 밝힌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광야 1세대의 불순종의 본을 제시하며, 누구든지 그 불순종의 전철을 밟는 자는 하나님의 안식(천국 구원)에 참여하지 못함을 선언한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고, 그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르게 마련이다.
4:11을 통해 히브리서 기자는 순종을 통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 것을 권면한다.
4:12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운동력과 통찰력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에게 임할 영적이며 육체적인 심판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히브리서 4:14~6장의 말씀에 따른 실천」(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4:12~13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서도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말씀의 능력이 무서운 심판의 능력으로 작용할 것’임을 경고한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보좌, 즉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자는 가장 적절한 시기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된다.(단, 인본주의적 안전망을 내려놓아야 함.)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대속적 죽음을 감당하려면 죄가 없는 존재여야 하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와 허물이 없는 완전한 인간이심을 피력한다.
창세기의 인물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이신 완전함을 상징하는 예표적 인물이다.
멜기세덱 (Melchizedek, 성경 인물) 카이노스 바이블 멜기세덱은 누구인가요? (성경이 답하다, SYW 성경) ‘의(義)의 왕’이라는 뜻이며, 살렘(예루살렘)의 왕이자 제사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부모와 족보, 출생일은 알 수 없고, 생명이 끝이 없어 신적 존재를 방불케 하는 인물으로 여겨집니다(히 7:3). 라이프성경사전 성경적 의미와 특징 이름의 뜻: 히브리어로 '나의 왕은 의로움' 또는 '정의의 왕'으로 해석됩니다. 신비로운 인물: 성경에는 그의 부모, 족보, 시작과 끝에 대한 기록이 없어 신비로운 인물로 묘사됩니다. 예수와의 연관성: 시편 110편과 히브리서에서는 그를 '멜기세덱의 서열(반차)'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언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모형)로 설명합니다. 라이프성경사전+3 인물에 대한 다양한 견해 역사적·전승적 해석: 멜기세덱이 노아의 아들 셈이라는 견해나, 천사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견해 등이 존재합니다. 신학적 해석: 아론 계열의 레위 제사장직보다 앞선, 왕과 제사장을 겸한 독특한 제사장직의 모델로 다뤄집니다. 라이프성경사전+3 |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야 한다(5:8).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5:9).
성장하지 않는 성도는 결국 퇴보하고 배교의 위험에 놓이게 된다.
성장하는 성도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 즉 훈련을 받는 특징을 지닌다(5:14).
이는 성경을 이해하고 깨닫는 노력의 시간, 즉 제자 훈련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유대인 성도들은 초보적인 단계에만 머물러 있는 성장 발육이 중단된 비정상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본서 기자는 유대인 성도들의 영적 유치함을 책망하며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명령한다(6:2).
배교 행위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라고 본서 기자는 엄히 경고한다(6:6).
소망이 ‘영혼의 닻(anchor)’과 같다는 말은 소망이 성도들의 영혼을 흔들리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약속의 말씀을 통해 참소망을 가진 성도의 영혼은 거칠고 험한 파도가 몰아치더라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6:19).
「히브리서 7장의 말씀에 따른 실천」(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6:17).
그리스도는 ‘불멸(不滅)의 생명의 능력’으로 대제사장이 되셨다(7:16).
그리스도는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제물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한 완전한 제사를 십자가에서 드리심으로 구약의 제사는 폐하게 된다(7:27).
이제 누구든지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한다면 구약의 희생 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 된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① — 십자가 죽음을 통해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 사역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② —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서 변호·중보(중보) 사역
이러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으로 성도들은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7:25).
「히브리서 8:1~9:12의 말씀에 따른 실천」(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옛 언약(구약)은 ‘좋은 언약’이고, 새 언약(신약)은 ‘더 좋은 언약’이다.
땅의 성막과 제사는 모형이자 그림자이고, 하늘의 성막과 제사가 그 원형이자 실체이다.
예수님과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이시며,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의 성막(성전)에서 사역하신다.
‘중보자(중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시테스’(μϵσιτης)는 ‘두 존재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는 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타인의 빚을 보증해 주는 보증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 히브리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 옛 제사 제도와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제사장직을 비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논증하는 심오한 신학 서신이다. 이 서신의 논증은 12장에서 그 절정에 이르는데, 저자는 옛 언약이 체결된 시내산의 두려운 광경(히 12:18-21)과 새 언약의 백성이 나아온 시온산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극적으로 대조한다. 이 영광스러운 시온산의 실체들, 즉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그리고 그 모든 영광의 정점으로서 제시되는 인물이 바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이다. 이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이 가져온 모든 복과 실체의 핵심이자 완성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본 소논문은 히브리서 12장 24절에 나타난 ‘중보자’(μεσίτης, 메시테스)라는 단어의 어원적, 구약적 배경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 갖는 신학적 의미와 그 절대적 유일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 단어는 단순한 ‘중간자’나 ‘전달자’를 넘어,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근본적인 단절을 해결하고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구속사적 역할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메시테스’(μεσίτης)로서 자신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온전히 화해시키고 언약의 모든 약속을 자신의 존재로 보증하시는 유일무이한 자격을 갖춘 하나님-인간(God-man)이심을 논증할 것이다. 이를 통해 그가 구약의 모든 중보자적 모형들을 성취하고 초월하셨음을 밝히고, 최종적으로 이 심오한 진리를 성도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설교적 적용점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해피캠퍼스 자료 |
예수님께서 죄의 값(빚)에 대해 보증을 서주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어 새 언약에 참여한 자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진리의 영)의 도움을 통해 하나님의 법(말씀)에 각 개인의 마음에 새겨진 ‘내적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변화는 하나님의 법(말씀)에 대한 ‘자발적 순종(自發的 順從)’을 끌어내며, 더 차원 높은 영적이고 도덕적인 ‘성화(聖化)의 삶’을 지향하게 한다(6:2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마태복음 27:51, 마가복음 15:38, 누가복음 23:45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지성소에로의 길이 완전히 개방되게 된다.
이는 구약의 제사 제도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단지 유보한 것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셔서 이제는 누구든지 그분을 믿어 십자가 속죄의 은혜를 힘입기만 하면 하늘 지성소의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 화목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의미한다.
대제사장은 피가 없이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용서함도 없었다(9:22).
레위계 대제사장들이나 하늘에 속한 대제사장 예수님도 모두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완전한 피조물의 피가 아니라 완전한 피, 즉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원하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하고 완전한 희생 제물 되심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레위계 대제사장들은 자신들과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수없이 반복적으로 희생 제사를 드렸으나, 무죄·무흠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자신이 친히 짊어지고 단번에 최종적인 희생 제물이 되셨다.
이로써 불완전했던 구약 제사 제도에 확실한 마침표를 찍으셨다.
「히브리서 9장 13절~10장 18절의 말씀에 따른 실천」(단 한번의 영원한 제사)
죄의 결과는 죽음이므로(롬 6:23) 죄를 지은 자가 용서함을 받으려면 죄 없는 누군가가 그 죄지은 자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어야만 한다. 그래서 옛 언약(구약) 하에서는 동물이 죄지은 자를 대신해 피를 흘려 죽었던 것이고, 새 언약(신약) 하에서는 예수님께서 죄지은 자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죄인이 용서함을 받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값비싼 희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이다(죄의 무게)
| Rom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Rom 6: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
롬 6:21 바울의 말씀처럼 고의로 죄를 반복하는 자, 죄를 떠나지 않는 자의 마지막은 영원한 죽음일 수밖에 없다(10:26~29)
| Heb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Heb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Heb 10: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Heb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
본서 기자는 단 한 번의 죽음 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밝힌다.
이러한 기자의 언급은 한 가지 사실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을 심판을 준비할 기회는 육체가 살아 있을 때뿐이라는 사실이다.
구약 제사의 역할은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갈 3장)
하나님께서는 죄에서 떠나지 않고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드리는 예배를 가증히 여기신다(사1:13)
[Isa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시편 40편 8절 다윗의 고백처럼, 신앙의 본질은 “말씀에 대한 청종과 순종”이다.
(시편 40:8, 새번역)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삼상 25:22, 개정)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성도는 그리스도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고 또한 성도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진리의 영)의 인도를 따라 실제적으로도 거룩하게 변화되어 간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성도는 의롭다 칭함을 받고 성화(聖化,sanctification)되는 일련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밟아 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는 반복될 필요가 없는 “단 한 번의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이다.
「히브리서 10장 19절~39절의 말씀에 따른 실천」(배교에 대한 경고)
본서 후반부 신앙 권면의 주제는 “인내하는 믿음(persevering faith)"이다.
찢어진 지성소의 휘장은 곧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한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렘 17:9)
[Jer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따라서 그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지 않는 자는 결코 성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
마음이 새롭게 됨 즉 양심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힘입어 죄 용서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에게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다(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
이 “내적 정결=양심의 회복”이라는 변화 때문에 성도들은 지난날 자신의 죄악을 깨달아 회개하게 되며 다시는 그 같은 죄악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힘쓰게 된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실한 마음과 성장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본서 기자는 교회의 모임에서 멀어지는 것이 배교로의 걸음임을 지적한다.
우리는 자신은 물론 자녀와 성도들을 격려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가까이 올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는 바른 전통을 지켜 나가야 한다.
본서 기자는 “진리의 지식을 받고서도 고의적인 죄들을 반복하고 있다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라고 단호히 경고한다(6:4~6, 10:26~27)
| Heb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Heb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Heb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Heb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Heb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
초대교회 성도들이 경험했던 신앙에 따른 모욕과 구경거리가 되는 것에 관해 생각해 보자.
초대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자기 소유를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좋고 영구한 재산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는 것을 알고서 오히려 그러한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진실한 신앙에 관해 생각해 보자.
현세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만나게 되는 신앙에 따른 고난은 일시적이며 주님의 도우심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다.
반면 그런 일시적인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등지고 진리를 내팽개치게 되면(배도·배교하면) 후회해도 소용없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옛 신앙으로 뒷걸음질 치지 말고 인내와 믿음을 가지고 전진해야 한다.
「히브리서 11장 1~19절 말씀에 따른 실천」(믿음으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말씀)들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성도는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약속(말씀)들에 대해 확신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본서 기자는 11장에서 “믿음으로”라는 표현을 20회나 반복하여 강조한다.
먼저 본서 기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서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세계가 비롯되었음을 증거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을 수 있는 방편이 바로 “믿음”임을 논증한다.
1~3절을 통해 믿음의 본질에 대해 정의한 기자는 4~40절을 통해 이스라엘 선진들이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를 진술한다.
| Heb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Heb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Heb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
믿음으로 아벨은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의 소산물 중 최상의 것으로 정성 어린 제사를 드렸다(창4:7)
Gen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행하며 첫 번째 명령에 순종하였다(창 5:22)
Gen 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Gen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믿음으로 노아는 홍수 심판과 관련된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경고)을 받아들여 오랜 시간 동안 인내로 방주를 건조하는 순종의 모습을 보였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하란의 도시 문화와 안정된 삶을 내려놓고 담대히 미지의 땅 가나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일시적 체류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언제든지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하는 자이다.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실 완전한 성 천국을 사모하고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 초연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성적인 계산에만 의존하는 것, 눙에 보이즌 것만을 따라가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언약의 말씀을 통해 보지 못하는 것을 마치 보는 것처럼 믿고 행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히브리서 11:11~31절의 말씀에 따른 실천」(아브라함의 믿음)
믿음은 과학과 의학의 영역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영역이다.
믿음으로 사라는 계속적 불임 상태와 늙어 생리가 끊어진 상태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믿음으로 이삭을 낳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우리에게도 현실보다 하나님의 망씀을 우선순위에 두는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현실을 먼저 생각하고 그 현실을 우선순위에 두는 태도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을 무시하는 불신앙적인 태도이다.
천국 백성은 스스로 이 세상에서 자신이 외인과 나그네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증언하게 된다.
우리의 선택과 삶의 모습 속에서 과연 본향(천국)을 바라보는 나그네로서의 고백과 증거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세상과의 관계)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큰 시험 앞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친 이후에 죽은 이삭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절대능력의 하나님을 믿었고, 그래서 결국 창 17:19과 창 21:12에서 약속하신 말씀을 지키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독자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아브라함의 믿음이다.
Gen 17: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Gen 21: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오늘날 목회자들의 축복 기도를 보면 성경적 근거가 없는 허황된 희망을 가지고 맹목적으로 복을 빌어주고 위로하는 이교도적인 행태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축복은 전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믿음의 조상들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분명한 말씀을 믿었고 그 분명한 말씀을 근거로 언약의 후손들을 축복하고 위로하였다.
믿음으로 모세는 40세가 되었을 때 세상의 영광과 즐거움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한다.(자발적 고난)
믿음으로 모세는 80세가 되었을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보는 것처럼 믿고 바라보면서 고난을 견디어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최고의 전술·전략이다.
믿음으로 라합은 이방 여인이었으며 창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여리성의 멸망 중에서 유일하게 구원을 얻었고 심지어 메시아의 족보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된다. 이처럼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자는 참으로 복된 자이다.
라합은 여리고 성 공격 전 그곳의 정황을 정탐하도록 여호수아가 파견한 두 명의 정탐꾼을 위험을 무릅쓰고 보호했는데, 본서의 저자는 그녀의 이러한 위험을 무릅쓴 행위를 “믿음”으로 평가한다.
「히브리서 11:32~12:13의 말씀에 따른 실천」(예수님을 바라보자)
예수님의 속죄 사역의 효력은 신약뿐 아니라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이 세상에서 당한 핍박과 환란과 고난을 생각하면서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이 싸움(믿음의 경주)에 임해야 한다. 믿음으로 그들이 참아낸 것을 우리도 참아낼 수 있고, 믿음으로 그들이 극복한 문제들을 우리 또한 극복할 수 있으며, 믿음으로 그들의 승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승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철자하고 단호하게 제거해야 한다.
본서 기자는 죄와 맞서 싸우되 피 흐려 죽는 데까지 싸워야 함을 지적하며 교훈한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에게 인내가 없다는 것은 곧 실패를 의미할 정도로 인내는 필수적인 자세이다.
고난에 직면하여 믿음의 경주를 중단하고 싶을 때, 위기에 직면하여 믿음의 회가 찾아왔을 때,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해야 한다(모든 모욕과 치욕을 묵묵히 참아내신 위대한 인내를 묵상)
성도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인내하며 믿음의 경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는 자녀로 여기신다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낙심하지 말고 복종의 자세로 그 징계를 통과해야 한다.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미숙한 성도를 성장하도록 이끄신다(징계의 유익-성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당시에는 슬프고 괴로운 것이지만 그 징계를 통해 연단과 훈련을 받은 후에는 의로움과 평안의 열매를 맺게 된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성도가 피고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진리의 길을 똑바로 걸어간다면 진정한 회복을 경험하게 된다.
「히브리서 12장 14절~13장 6절의 말씀에 따른 실천」(그리스도인의 생활)
12:14에서 본서 기자는 저자가 말하는 “화평하라”는 명령은 “진리 안에서 화평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Heb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거룩하라”는 명령도 뒤이어 나오기 때문에 “불의와 비진리와 타협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저자는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성부 하나님을 보지 못함”을 피력하며 성도의 거룩한 삶을 강조한다.
본서 저자는 신앙공동체(교회)의 화평과 거룩을 위협하는 세 가지 위험을 제시하낟
⓵ 성장하지 않고 퇴보하는 성도
⓶ 악영향을 끼치며 선동하는 성도
⓷ 욕망을 좇아 망령된 행위를 하는 성도
옛언약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은 지상의 시내산에 강림하신 성부 하나님께도 두려워서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새언약 아래에 있는 성도들은 (중보자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하늘나라의 시온산(새예루살렘)에 계시는 성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구약 시대 모세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한 것처럼, 신약 시대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성도들도 반드시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강력하게 경고한다.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의 시선과 마음이 고정돠어 있어야 한다.
새언약(신약)의 성도는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반드시 경건함과 그 분을 두려워하는 마음(경외심)을 지녀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는 결혼을 귀하게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믿음의 성도는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 물욕을 경계하는데 있어서 생활방식(습관)이 중요하다.
믿음의 성도는 가지고 있는 소유에 만족해야 한다. 이러한 자족의 태도는 현재 자신을 돕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믿음)
「히브리서 13:7~25절의 말씀에 따른 실천」(고난에 동참하는 믿음)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성자 하나님이시오(빌2:6), 생명의 빛(요1:4)과 진리(요14:6) 자체이시며, 처음이자 마지막이시기 때문에(계 1:17)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분이시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다.
Phi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Joh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Joh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Rev 1: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영원히 한결같은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서 과거에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하셨던
것처럼 현재에도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선진들의 믿음을 본받아 따르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심(선한 도우심)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선진들의 순전한 믿음을 본받아 여러 모양·여러 색깔의 인본주의적 교훈에 끌려다니지 말아야 한다.
당시 유대교의 한 분파였던 엣세네파는 오늘날의 대표적인 이교도인 가톨릭과 불교의 금욕주의와 매우 흡사하여 독신과 금식의 방법(인본주의적 방법)으로 성욕과 식욕을 엄격히 통제할 때 인간의 영혼이 변화되어 새롭게 되는 효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만 새롭게 될 수 있다.
우리는 과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며 치욕과 모욕을 짊어지고 있느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내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치욕을 짊어지는 자들이 영원한도시 새 예루살렘 성을 유업으로 상속받게 된다.
믿음의 성도는 장차 오게 될 영원한 도성 새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기다려야 한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면한 저자는 그 찬송의 제사와 함께 선행과 구제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면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