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열심. キリストの形づくられる熱心。( 2024년 11월 3일 주일예배)
본문 갈 4:12~20
갈 4:12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게 해를 입힌 일은 없습니다. 13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14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15 그런데 여러분의 그 감격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할 수만 있었다면, 여러분의 눈이라도 빼어서 내게 주었을 것입니다. 16 그런데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원수가 되었습니까? 17 위에서 내가 말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게서 떼어놓아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네들을 열심히 따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8 그런데 그들이 좋은 뜻으로 여러분에게 열심을 낸다면,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좋은 일입니다. 19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20 이제라도 내가 여러분을 만나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어서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습니다.
12.わたしもあなたがたのようになった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ようになってください。兄弟たち、お願いします。あなたがたは、わたしに何一つ不当な仕打ちをしませんでした。13.知ってのとおり、この前わたしは、体が弱くなったことがきっかけで、あなたがたに福音を告げ知らせました。14.そして、わたしの身には、あなたがたにとって試練ともなるようなことがあったのに、さげすんだり、忌み嫌ったりせず、かえって、わたしを神の使いであるかのように、また、キリスト․イエスででもあるかのように、受け入れてくれました。15.あなたがたが味わっていた幸福は、いったいどこへ行ってしまったのか。あなたがたのために証言しますが、あなたがたは、できることなら、自分の目をえぐり出してもわたしに与えようとしたのです。16.すると、わたしは、真理を語ったために、あなたがたの敵となったのですか。17.あの者たちがあなたがたに対して熱心になるのは、善意からではありません。かえって、自分たちに対して熱心にならせようとして、あなたがたを引き離したいのです。18.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もとにいる場合だけに限らず、いつでも、善意から熱心に慕われるのは、よいことです。19.わたしの子供たち、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内に形づくられるまで、わたしは、もう一度あなたがたを産もうと苦しんでいます。20.できることなら、わたしは今あなたがたのもとに居合わせ、語調を変えて話したい。あなたがたのことで途方に暮れているからです。
지난 주일에는 추수감사주일예배를 지키며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며, 강건하게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손수 일하신 결과로 맺히는 열매들과 성과들을 발견하는 눈이 활짝 열려, 주님과의 친밀함이 나날이 깊어지는 일상생활을 누리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반응과 태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게중심에 관한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지지난 주일에 이어지는 본문입니다. 지지난 주일 나누었던 본문인 갈 4:8-11에는 갈라디아 성도들이 복음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잠시 잊고 유치하고 천박한 가치관에 한눈을 판 것에 대한 바울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이 느껴지며 다시 복음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드러나 있습니다. 12~14절까지는 처음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하였는지와 그때 갈라디아 성도들의 태도와 행동에 대해서 추억하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육신적으로 연약하고, 외적으로 내세울 것이 하나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전한 복음을 순전하고 매우 인류애가 가득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모습을 고백하고 있는데요.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에 심한 질병이 생겨서 요양을 위해서 갈라디아 지방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요양 중에도 그는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바울의 전도를 듣고 복음을 믿는 이들이 모여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해 받을 당시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고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주님을 대하듯이 귀하게 여겼다는 것을 기억하며 바울은 감격했습니다. 그들의 인품이 매우 선하고 사람됨이 훌륭했던 것을 알 수 있지요.
동시에 복음은 그것을 전하는 자의 사회적 지위나 혹은 육체의 여건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하심으로 인해 가치가 헤아려지는 것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라고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바울의 간곡함을 간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2)
병들어서 요양 중에 있던 사람의 전하는 복음은 육신적만 본다면 그다지 힘차고 생기발랄하게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심지어 바울은 그것이 시험에 들 수도 있는 형편이었다고 본문의 14절에서 말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복음은 전파되고 예비된 사람들의 귀에 들리고 받아들여지는 것인데요. 성경은 바울과 바나바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6, 48)
그러므로 천박하고 사악한 황무지와 같은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고, 고백하고, 말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은 확률이나 효율이나 혹은 능률로 인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조건, 나쁜 조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열심과 일하심이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순종하는 것이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성경의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7b)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세속적으로, 혹은 육신적으로 좋은 조건의 사람들만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조건과 형편과 여건을 전부 사용하시고, 활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그래서 우리의 부르심에 대해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 2:20-21)
그러므로 우리가 준비할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내면이 깨끗한 그릇으로서 주님께서 쓰실 만하게 되기를 준비하는 것이지요.
자신이 금그릇이나 은그릇이냐, 혹은 나무로 만들어졌느냐 흙으로 빚어진 것이냐에 집착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신의 태생으로 자기 가치를 규정짓거나, 혹은 뭔가 대단한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기 전에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먼저 주님께서 쓰시기에 깨끗한 그릇으로 자신의 내면을 관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한 후에 주님께서 맡기신 인생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주시는 만큼 재능을 연마하고 연단할 때 실력은 갖춰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깨끗한 그릇으로 자신을 관리하려고 하기보다, 자기가 태생적으로 어떤 재료의 그릇인지에만 관심을 쏟고 자기 가치를 규정하고 판단합니다. 뭔가 열심히 노력하고 연단하는 것만을 우선시하고 최고로 여기고 말지요. 그리스도인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거의 동일합니다. 그래서 뭔가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눈쌀을 찌푸리고 한 마디씩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게으름은 바람직하지 않는 태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잠 12:24)
열심히 노력하며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나, 혹은 실력을 쌓기 위해서 애쓰고 자기관리를 하려는 것이 믿음이나 복음에 합당한 삶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 열심과 노력과 연단, 그리고 애쓰는 태도가 거룩하고 깨끗한 내면의 그릇을 위한,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한 열심인지의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17, 18절을 보시면 갈라디아 성도들의 마음을 미혹하고, 복음이 아닌 율법이나, 세속의 초등학문과 같은 유치한 가르침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는 것은 결국 허망한 구덩이에 빠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이단, 사이비 종교의 열심히 하는 모습은 본받고, 배웠으면 한다고 말이지요. 저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아주 강력하게 말씀드립니다. 차라리 그런 사이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게으른 것이 낫다고 말이지요. 이단, 사이비의 가르침에 게으른 것은 오히려 깨끗한 그릇으로 사는데 근면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 자체를 좋다, 혹은 나쁘다로 규정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사악한 짓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부지런히 움직이면 멸망으로 빠르게 질주하는 고속철도와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룩한 일을 위해서는 근면하고 성실한 것이 최고로 선한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나요? 저는 감히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방향을 올바르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조금은 느린 것 같기도 하고,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결과와 성과도 나타나지 않지만, 분명히 바르고 온전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요?
바로 주님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위해서 매일 하루에 하루 만큼씩을 사명으로 여기고 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살기보다 거룩하고 깨끗한 그릇으로 살기 위해서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이 복음을 믿는 삶이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목적이며, 교회를 다니는 보람이며 능력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거룩한 삶을 위해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하면 대부분 어렵다고 하고 불가능하다고 덮어놓고 포기해 버립니다. 심지어 신비적인 것이라서 뜬구름 잡는 것쯤으로 여기게 되는데요.
누군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지속적인 만남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만일 어떤 귀한 분을 한 번 만나 본 경험을 가진 것으로 그와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소한 상대의 개인적인 연락처를 알고 수시로 소통할 수 있을 때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손에 있는 이 성경의 말씀을 매일 정기적으로 눈으로 읽고 귀로 듣는 일상의 일과를 지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주님을 바라보는 습관을 몸에 배게 하는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의 성실함과 근면, 그리고 열심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루에 하루만큼씩 주님과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지기를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나를 가장 복되고 풍성한 열매가 넘치는 삶으로 인도하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신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이미 이루신 죄사함과 구원, 그리고 거듭남과 영생의 삶을 실감나게 체감하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정성과 열심에 기계적으로 반응한다는 거짓 교리로 속이고 사기를 치는 비인격의 우상이 아니라,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축복하시고 풍성하게 하시는 참된 진리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우리는 자기의 뜻을 이루려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며 성실히 살아가는 것을 미덕이라고 배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벗어나 복음과 관계없는 삶에 대한 열심과 노력은 오히려 우리 영혼을 더욱 갈증나고 답답하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지탱하기 위해 열심히 주님을 바라보는 것과 내면의 그릇을 깨끗이 닦기 위한 노력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대한 나름의 반응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신 구원의 복음을 믿고, 일상생활 가운데 주님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은 우리를 풍성한 축복과 풍요롭게 열매 맺는 인생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열심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참된 능력의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