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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 남대문 밖 한 이웃에서 동년배 문사로 재상이 된 자가 5명이 있으니,
∙윤부는 경오생으로,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28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수는 50세였다.
∙오상은 임신생으로,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2세였다.
∙윤현은 갑술생으로,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4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5세였다.
∙유창문은 갑술생으로, 27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수는 57세였다.
∙나는 병자생으로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의정)에 이르렀으며, 나이 82살인데도 여전히 병이 없다.
나는 5인 중에서 재주와 덕이 최하이면서 벼슬과 수는 최고이고 보니, 하늘이 주신 풍부하고 군색한 것은 실로 알지 못하겠다. 이는 늦게 영달한 이유에서인가. 재주 없는 내가 장원 급제한 것은 첫 번째 요행이고, 급제한 지 10년 만에 승지에까지 오른 것은 두 번째 요행이고, 본래 명망도 없으면서 벼슬이 의정에 이른 것은 세 번째 요행이고, 권세를 잡지 않았으므로 집에 손님이 드문 것은 네 번째 요행이다. 네 가지 요행이 있는 데다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다섯째 요행이다. 어찌 하늘이 주신 운명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영규율수》를 보면, 유우모가 여상공게 올린 시가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중하고 맑은 명망을 천하가 두루 아니
신선인가를 알지 못하겠네
한 번에 용호방(과거)에서 장원이 되더니
10년 만에 몸이 봉황지(한림 벼슬)에 이르렀네
묘당에선 다만 말 없는 자 같고
집은 항상 귀하지 않을 때와 같구나
문득 낙양에서 나와 지키던 것 뺀다면
성조의 현상은 다시 누구라고 쓰랴
하였다. 경인년 가을에 이웃에 사는 벗 죽계 안한이 이 시의 두 연이 나의 관적과 근사하다고 하며 베껴서 보여 주거늘, 내가 곧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그 시에 차운하여 보냈다. 임진난 후 갑오년 가을에 우연히 《영규율수》를 열람하다가 이 시를 보고서 그때 차운하였던 시가 기억나기는 하나, 가물가물하여 한 구절도 기억나지 않기에 감히 또 졸렬한 시를 지어서 훗날 보는 데에 대비하였으니, 그 시에,
나라가 언제나 태평할꼬
난후에 천심을 실로 모르겠네
평생 벼슬길은 험하기만 하고
하루 침 사람 일은 모두 어긋났네
선도 복숭아는 3천 년이 가도 익지 않는데
백발은 부질없이 80이 되어가네
나라 위한 단심은 아득하기만 하니
어려운 이 고비 건져줄 이 그 누구랴
하였다.
◉ 내가 명조 때 가정 병오년 식년시에 장원 급제를 하였는데, 그때 문과가 33명, 무과가 28명이고, 중시 문과가 18명, 중시 무과가 35명이며, 역과가 19명, 그리고 음양과와 율과가 각각 8명씩으로 모두 1백 47명이었다. 이것을 합하여 《방목(합격 기록)》 한 책을 만들어 인쇄하여 각기 간직하였다.
만력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경성을 함락하여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는 바람에 공사서적들이 모두 깡그리 없어졌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고, 그 해 겨울에 성상이 경성으로 돌아왔다.
갑오년 가을에 어떤 사람이 우연히 《병오방목(병오년에 급제한 자를 적은 기록)》을 얻어 주기에 내가 펴 보니, 1백 47명 중에서 생존한 자는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다. 49년 안에 인사가 이같이 변하였다. 생존자인 내가 이 책을 얻은 것은 아, 또한 다행한 일이다.
◉ 국법에 서얼은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는 옛날에는 없던 일이다. 당초 이런 법을 세운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근래에는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의론이 여러 번 있었으나, 결국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또한 그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서얼로 문장에 능한 자는 선조 때에는 어무적과 조신이 가장 유명하였고, 근세에는 어숙권과 권응인이 또한 유명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기억하지 못하나, 재주를 가지고도 출세하지 못함은 어찌 억울하지 않으리오. 그리고 나라에서 인재를 수용하는 데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 설날 아침에 도소주를 마시는 것이 옛 풍습이다.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노인이 뒤에 마시는데, 지금 풍속은 또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나의 허술한 것을 사가라.”
하는데, 이것은 자기의 병을 파는 것으로 재앙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의 설날 아침에 대한 절구를 좋아하였는데, 이르기를,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도소주 마시는 이 많으니
이제는 쇠퇴한 줄 알겠으니 큰 포부를 저버렸다
일마다 병을 파나 병은 끝나지 않으니
그대로 옛 나를 가지고 지금의 내가 될 뿐이네
라고 한 것이다. 내가 80세 되던 설날 아침에 장난삼아 이 시에 차운하여 이르기를,
약한 몸 병이 많아 도소주 빨리 못 깬다
80살 강녕은 생각조차 못했는데
어찌 병 팔려고 먼저 술 마실까
시장에서의 강한 상대에게나 대항해 볼까
라고 지어서 서교 송동지(송찬)에게 보냈다.
◉ 우리 나라의 명절 중에 설날ㆍ한식ㆍ단오ㆍ추석에는 묘제를 지내고, 3월 3일과 4월 8일, 그리고 9월 9일에는 술 마시고 논다. 《주자가례》에 ‘묘제는 3월 상순에 지낸다.’고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같이 행한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네 명절에 지내는데, 그 출처는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오례의》에는, ‘설날ㆍ단오ㆍ추석에는 사당에서 제사 지낸다.’ 하여 한식은 빠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묘제는 지내니, 또한 그 어찌 된 까닭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는 한식에 그네를 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단오에 그네를 타니, 명절에 행하는 풍속 역시 무슨 연유로 다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라에서 지내는 능묘의 제사가 지극히 번거롭고, 사삿집 묘제 역시 번거롭지만 예를 어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임진난 후에는 나라의 제사가 감해졌으니, 사삿집 묘제도 감해야 할 것이다.
◉ 백낙천의 자경시에 이르기를,
누에 늙어 고치 되어도 제 몸은 못 가리고
벌은 굶주려 가며 꿀 만들어서 다른 사람 위하네
모름지기 알아 두자꾸나 늙어서도 집안 걱정 하는 자
두 벌레의 헛수고 같다는 것을
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통달한 자의 말이로다. 내가 난리로 집안이 망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길래 두어 칸 집을 사고자 하는데, 나이 80이 넘었으니 여생이 얼마나 되나 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백낙천의 시를 보고 깊이 느낀 바 있어 웃고 집 사는 것을 그만두었다.
◉ 근세에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책이 있어 이름을 《동몽선습》이라고 하는데, 누구의 저작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가 사문 박세무의 저작이라 하기에 그 조카 박정립에게 물어보았더니, 과연 자기 숙부의 저작이라고 하였다.
그 책은 먼저 오륜, 다음으로는 역대 사실을 서술하였으며, 그다음은 우리나라의 사실과 경사 약간을 서술하였으니, 어린이에게 마땅히 먼저 읽힐 것이 된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자는 어찌 이것을 먼저 가르치지 않겠는가.
◉ 근세에 우리 말로 장가를 짓는 자가 많으니, 그중 송순의 〈면앙정가〉와 진복창의 〈만고가〉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 흡족하게 한다. 면앙정가의 줄거리를 보면 아늑한 산천과 널찍한 전야의 모양과 높고 낮은 정대, 휘돌아 드는 지름길, 그리고 춘하추동 사시와 아침저녁의 경치를 두루 기록하지 않음이 없는데, 우리 말에 한자를 써서 그 변화를 지극히 하였으니, 진실로 볼 만하고 들을 만하다.
송공은 평생 동안 가사를 잘 지었는데, 이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잘된 작품이다. 〈만고가〉는 먼저 역대 제왕의 현부를 서술하고, 다음에는 신하들의 현부를 서술하였는데, 대개가 양절 반씨의 논을 본받아서 우리 말로 가사를 짓고 곡조를 맞추었으므로 또한 들을 만하다. 사람들은 진복창이 삼수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재주가 덕보다 나은 자라 하겠다.
◉ 세상에서 선조를 위하여 비명문과 묘지문을 지을 때는 반드시 글 잘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청하는데, 혹 청하여도 얻지 못하거나 미루다 써주지 못하는 자도 많다. 비갈은 묘 밖에 세우고, 지석은 묘 앞에 묻는 것인데, 이는 만일 세월이 오래되어 비갈이 없어지면 지석을 상고하여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갈과 지석을 설치하는 뜻이 대개 여기에 있으니, 각기 다른 글을 쓰지 말고 같은 글을 쓰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런데 예로부터 각기 다른 글을 쓰기 위하여 두 사람에게서 각기 다른 글을 받으니, 이는 무슨 뜻일까. 나의 어리석은 견해가 이러하니, 예를 아는 자는 부디 헤아려 주기 바란다.
◉ 우리나라 사대부의 상례와 제례는 《국조오례의》에 기재되었는데, 상례는 전적으로 《주자가례》를 쓰지만 간혹 조금 다르고, 제례는 《주자가례》와 다른 점이 많으니, 이는 필시 우리나라 음식의 절차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제물은 직품의 차등에 따라 간략하고 쉽게 갖추게 되어 있으나, 지금 사람들은 국가 제도를 따르지 않고 임의로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한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이르러서는 사시의 시제를 모두 지내지 못하고, 다만 한두 시제만 지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은 전혀 지내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기제마저 핑계 대고 지내지 않는 자도 있다. 이는 모두 제물이 풍성하고 사치스러운 폐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니,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한양 경복궁 광화문 위에 큰 종이 있고 종루에도 큰 종이 있는데, 모두 새벽과 저녁에 울린다. 신덕왕후(태조의 계비 강씨)의 정릉이 돈의문 안에 있고 능 곁에 절이 있었는데, 능을 옮기자 절도 폐지되었으니, 오직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원각사는 도심지에 있었는데, 절이 폐지되자 또한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중종 때에 김안로가 정승이 되어 건의하여 두 종을 동대문과 남대문에 옮겨 두고 또한 새벽과 저녁에 울리려고 하다가, 김안로가 죄를 입게 되면서 종을 달지 못하고 수풀 속에 버려둔 지 60여 년이 되었다.
만력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고 멋대로 불을 지르니, 광화문 종과 종루의 종도 모두 불에 녹게 되었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자, 그해 겨울에 성상이 환도하였고, 갑오년 가을에는 남대문에 종을 걸어 새벽과 저녁으로 울리게 하니, 그 종소리를 듣는 서울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유년 겨울에 명나라 장수 양호가 서울에 와서는 종을 명례동 고개 위에 옮겨 달도록 명령하였다.
◉ 역서는 국가의 큰 정사로, 중국에서는 매년 역서를 반포한다. 우리나라도 역서를 만드는데 중국과 비슷하여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오직 주야에 있어서 중국은 극장이 60각인데 우리나라는 61각이며, 중국은 극단이 40각인데 우리나라는 39각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한쪽에 치우쳐 있어 해가 뜨는 동쪽과 가까우므로, 1각의 가감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항상 이것을 주자로 인쇄하여 중외에 반포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도성을 함락하여 모든 역기 등의 물건이 깡그리 없어지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 의주로 따라갔던 일관 몇 명이 우연히 《칠정산》과 《대통력주》등의 서적을 얻어서 계사력을 만들어서 목판으로 몇 권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계사년 겨울에 성상이 환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옛날 역서를 인쇄하던 주자를 얻어 바치므로 옛 역서에 의하여 인쇄 반포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 육방옹의 이름은 유이고 자는 무관으로, 송나라 시인의 대가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평이하여 난삽하고 기괴한 병통이 없으므로, 내가 전부터 좋아하였다. 우연히 유간곡이 정밀히 뽑은 한 부를 얻었는데, 이는 판서 성임이 사가 서거정이 간직한 것을 등사하여 인쇄한 것이다. 그런데 다만 글자가 적어서 노안에 합당치 못하기에 글씨 잘 쓰는 친구 안한에게 청하여 등사하여 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시들은 노경에 지은 것이 많은데 지금 안공과 나도 80이 넘었으니, 노인이 지은 시를 노인이 등사하고 또 노인이 보는 것은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육방옹은 벼슬이 예부 낭중 보장각 대제(례부랑중보장각대제)로 있다가 치사하였다. 향년 85세였다.
◉ 세종 16년 갑인년 알성친시방에서 을과 1등으로 3명이 있었으니, 유학 최항과 전 문소전직 조석문(후에 석문으로 개칭), 그리고 생원 박원형이다. 이들 셋이 모두 영의정이 되었고, 최항은 대제학까지 하였으니, 그 알성친시방에서 인재 얻은 것이 성대하다 하겠다. 《경국대전에, 과거는 ‘갑과ㆍ을과ㆍ병과가 있다.’고 하였는데, 조종조에서는 혹 갑과와 병과는 없이 다만 을과(을과)만 두어 3등으로 나누었으며, 혹은 을과 병과 정과를 두었고, 혹은 무슨 과가 없이 1, 2, 3등만 두었으니, 그 제도는 모두 상세하지 않다.
세조 12년 병술년 5월의 발영시에서는 일찍 급제한 자로 정2품 이하는 응시를 허락하여 합격자 40명을 뽑았고, 같은 해에 또 등준시를 보였는데, 발영시의 예에 따라 합격자 10명을 뽑았다. 영순군 이부는 등준시에 참여하여 제5위가 되고, 또 무자년 중시에서는 제1위가 되었으며, 춘양군 이래는 같은 해인 무자년 식년시에서 병과 제2위가 되었으니, 영순군은 광평대군(세종의 다섯째 아들)의 아들이고, 춘양군은 보성군의 아들이다.
이들은 모두 군으로서 시험에 참여하였다. 국초부터 세조까지의 매년 방목을 보면 종실로 등과한 자는 없었으며, 그 후에도 없었으니, 아마 이 두 사람은 특명으로 응시한 듯하나, 공도는 아니다. 하성위 정현조는 정인지의 아들로, 세조의 부마였는데, 친시에 참여하여 제3위를 하였다. 이 또한 상규는 아니다.
◉ 부인으로 문장에 능한 자를 말하자면 옛날 중국의 조대가와 반희, 그리고 설도 등 이외에도 많이 있어 이루다 기재하지 못하겠다. 중국에서는 기이한 일이 아닌데,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보는 일로 기이하다 하겠다. 문사 김성립의 처 허씨(허난설헌)는 바로 재상 허엽의 딸이며, 허봉ㆍ허균의 여동생이다.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지만 그 여동생인 허씨는 더욱 뛰어났다. 호는 경번당이며 문집도 있으나, 세상에 유포되지 못하였지만, 백옥루 상량문 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전송하고 시 또한 절묘하였는데, 일찍 죽었으니 아깝도다. 문사 조원의 첩 이씨와 재상 정철의 첩 유씨 또한 이름이 났다. 논하는 자들은 혹,
“부인은 마땅히 주식이나 의논할 것인데, 양잠하고 길쌈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오직 시를 읊는 것으로 일삼는 것은 미행이 아니다.”
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다.
◉ 나라 풍습에 바둑ㆍ장기ㆍ쌍륙 등을 잡기라고 한다. 바둑은 검고 흰 것으로 해변에서 검정 돌과 조개껍질이 물에 씻기어 반질반질한 것을 쓰고, 장기는 차ㆍ포ㆍ마ㆍ상ㆍ사ㆍ졸을 나무로 깎아 만들어 글자를 새기고 채색을 칠하여 쓰며, 쌍륙은 흑백마아를 나무로 깎아 만들거나 또는 뼈로도 만들어 쓴다.
이것들은 모두 판국이 있어서 통틀어 박국이라고 부른다. 그 기술은 각각 잘하고 못함이 있어서 승부를 겨루는데, 이는 모두 소일거리로 놀이이다. 다만 혹 즐기다가 뜻을 상실하는 자도 있으며 혹은 도박으로 재산을 날리는 자도 있으니, 잡기는 이로움은 없고 손해만 있다 하겠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