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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강 창세기 32:21~33:12 그가 절었더라 49.51
26.10.29(목)
미스바에서 야곱은 라반과 평화조약을 맺고 화평하는 가운데에 라반과 결별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인 가나안 귀환에 들어서게 됩니다.
라반과의 사이에서 평화협정이 맺어졌다고 해서 야곱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야곱 앞에는 라반과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에서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야곱은 이미 거부였습니다.
처첩 4명에 아들 11명 딸 1명 그리고 수없이 많은 가축 떼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의 재산과 자기 집에 딸려있는 노비를 다 데리고 간다면 어디에 가서도 야곱은 정착하고 편안히 살 수 있었습니다.
굳이 가나안을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가나안을 향해 갔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그 가나안이 언약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이 믿었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 땅의 언약의 계승권을 너에게 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지금 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안일이나 평안함을 우선시했더라면 그 길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 안일이나 자기의 평안함이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위태로울지라도 말씀의 길을 쫓아간 것입니다.
그때 야곱이 먼저 청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자 한 사자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이 나타났었는지 야곱이 마하나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영 혹은 하나님의 군대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가나안을 지향할 때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을 함께 지키시고 동행한다는 것을 야곱에게 보여주셨던 것이죠.
하나님을 쫓고 가나안을 지향할 때 신약적인 용어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삶을 책임져 주신다고 하는 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일관된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도 하나님의 군대로 당신이 함께하심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이 가까워지자 먼저 자기 집 사람을 에서에게 보냅니다.
일종의 정탐꾼을 보낸 셈입니다.
그랬더니 그 대리인이 갔다 와서 깜짝 놀랄 보고를 했습니다.
형 에서가 지금 400명을 데리고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에서는 본래 사냥꾼이지요 그렇죠
사냥꾼은 피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거친 사람이죠.
그런데 그 형 에서가 만약에 동생 야곱을 환영하기 위함이라면 400명을 데리고 올 필요가 없을 터인데 400명을 데리고 온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야곱 죽이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에서가 사냥꾼인 만큼 지금 자기와 같은 우리 속된 말로 칼잡이 400명을 데리고 지금 야곱을 도륙내겠다고 지금 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해 했습니다. 야곱은 본래 목자 출신이지 않습니까?
거기다 또 맘마보이 출신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자기 뭐 가솔들을 다 모아서 설령 숫자가 400대 400이 된다 할지라도 그 칼잡이들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그래서 야곱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자기 떼와 식구들을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애서가 와서 한 떼를 도륙을 내더라도 나머지 떼마는 건지자 그 순간에 야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편치가 않죠.
그래서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더러 네 땅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지금 하나님 말씀 순종해서 가지 않습니까?
하나님 에서의 손에서 저를 건져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에서가 와서 나와 내 처자식을 질가 두렵습니다. 기도합니다.
기도했는데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시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야곱이 자기 가축떼 가운데에서 580마리를 특별히 골라내어서 그 가축떼를 세 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각떼 사이에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시차를 두고 세 떼를 에서에게 보냅니다.
일종의 선물 공세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오다가 첫 번째 선물 공세를 받고 또 두 번째 선물 공세를 받고 세 번째 선물 공세를 받으면 그래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겠는가?
여러분 지금 분명히 야곱은 가나안을 향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마하나님 하나님 군대도 봤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머릿속까지는 들어왔지만 마음속에 아직까지 확신의 뿌리를 못 내립니다.
그러니까 기도도 해요.
그런데 두렵습니다. 근심이 돼요.
그래서 또 물량 공세를 퍼붓는 것입니다.
21절 보시겠습니다.
32장 21절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에서 밤을 지내다가 예물 세떼를 각각 거리를 두고 시차를 두어서 먼저 앞서서 보내고 밤을 지내다가
22절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약복나루를 건널세 여기에 나루라고 번역된 마르라고 하는 이 단어는 나루라기보다는 여울이라는 말입니다.
나루라고 하면 나루터에서 배 타고 건너야 되잖아요. 그런데 야곱이 언제 그 수없이 많은 가축을 배에 실어서 옮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얍복강 가운데에서 수심이 낮은 곳 사람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을 특별히 선택해서 지금 여울을 건너간다 이 말입니다.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자기 처자식들 식솔들 다 그 여울을 건너서 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축 떼도 다 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여러분 지금 야곱이 선물 공세를 펼치지 않았습니까? 선물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나서 그 야곱이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야곱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가족들을 또 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 소유도 다 건너게 합니다.
그래서 야곱의 마음이 편안했겠습니까?
그래도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100% 아직 신뢰 못하는 거예요.
야곱은 하나님을 믿지만 자기의 물질의 힘을 또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신뢰하고 내 물질도 신뢰해요.
그래서 형한테 이런 선물 공세를 보내면 되지 않을까?
여러분 믿음은 1%가 모자라도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100%일 때 믿는 거예요.
99%도 믿음일 수 없습니다.
1% 때문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거든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마는 히브리말로 신뢰한다. 바타허 이거는 기대는 거라 그랬습니다.
내가 어디에 기댈 때는 반드시 내가 기대는 대상이 나를 버텨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대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댔는데 안 버텨준단 말이에요.
어 넘어가네. 그래도 기대는 거예요. 언제까지 나 자빠질 때까지 기대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박살이 나도 내가 기대는 것 이게 믿음인 거예요.
그런데 야곱은 아직까지도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선물공세도 펴고 기도도 하지만 편치 않습니다.
그 상태에서 지금 가족들과 자기 재산 가축을 다 강을 건너게 하고 혼자 강 저쪽에 야곱이 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혼자 남았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야곱이 혼자였다. 그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10:33
지금 방금까지 야곱 옆에는 사람도 있지 않았습니까? 방금까지 야곱 옆에는 자기 재산 가축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자기 옆에 있던 사람 재산 전부 강 건너 갔습니다. 자기 혼자밖에 없죠. 그렇죠
그러니까 야곱은 더 이상 믿을 사람도 믿을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마치 그 영혼이 벌거벗은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 것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중심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이 세상 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 100%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대면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완전히 맺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밤 야곱이 그런 상태입니다.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바로 그 밤에 야곱이 어떤 사람과 밤이 새도록 씨름을 했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대개 누구입니까?
29절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함이더라
나중에 하나님이심이 확인된 것이죠. 그렇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보면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 죽어야 되는데 하나님을 뵈었는데도 내가 안 죽었구나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때까지는 하나님이신 줄 모르고 하나님의 사자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죠.
어쨌든 그날 밤에 야곱은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사생결단을 했다는 것입니다.
25절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야곱이 사생결단하는 그 대상자가 자기가 야곱을 이길 수 없음을 보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말로 쳤다 하면 힘을 가격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히브리말 나가는 그냥 만졌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한번 이렇게 슬쩍 만지셨는데 관절이 위골되어 버렸습니다. 26절
그가 이르되 날이 세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날이 밝아 와서 하나님께서 이제 내가 가려 간다 가려 한다. 나를 놔라 그랬더니 나에게 축복해 주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축복해 달라는 거예요? 살려 달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복을 달라는 거예요. 에서의 손에서 나를 구해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밤에 야곱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 문제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성숙자반에서 배웠습니다마는 사람이 복을 구해주는 것은 축복이지만 하나님께 복을 구해주는 것은 축복이지만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
그것은 축복해달라가 아니라 복을 주십시오라고 해야 되잖아요. 그렇죠
축자는 기도 축자니까 하나님께 축복해 주세요 하면 하나님께 누구에게 기도해 주세요라는 거니까 그건 말이 안 맞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축복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이심은 30절에 가서야 확인이 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확인 이전이니까 축복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27절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물었습니다. 너 이름이 뭐냐?
하나님께서 야곱 이름을 몰라서 물으시겠습니까? 아시죠
야곱에게 자신의 실체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이 뭡니까? 발꿈치를 잡았다. 발꿈치 잡는 사람.
그러니까 에서 형하고 쌍둥이였는데 에서가 먼저 나오는데 그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이후에 형을 속여서 형의 장자의 명분을 또 중간에서 가로채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형의 뒤통수를 쳤던 거죠.
그리고 20년 동안 그 밧던 아람에서 그 삼촌 라반의 집에서 살면서는 삼촌하고 서로 뒤꿈치 잡는 삶을 살았잖아요.
처음에는 라반이 먼저 속여 먹고 나중에는 야곱이 자기 잔깨를 부리고 그러니까 야곱은 일평생이 그렇게 떳떳하고 남 앞에 내세울 만한 그런 삶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28절
그가 이르되 내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습니다.
이제부터 너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해라 이스라엘 거기에 1자가 있죠. 제일 밑에 주란을 보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그러게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으니까 앞으로 너 이스라엘이라 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새신자만에서 배우셨잖아요.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람이 하나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손으로 한번 슬쩍 만져도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위골되는데 하나님께서 이기시고자 하면 그 사람은 죽는 거죠.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져주시는 하나님이라 그랬습니다.
야곱에게 야곱아 나는 너에게 져주는 하나님이야
이걸 일깨워 주신 것이었죠. 세상에서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그러잖아요. 간절히 원하면 부모는 해준단 말이에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온갖 허물과 부족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 투성이의 삶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응답해 주신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한 전과 3범 4범만 되어도 우리가 상대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 상대 안 하려고 그럴 거여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하루에 죄 하나씩만 범해도 사실 그 정도면 성자지요. 그렇죠 1년이면 전과 365범이잖아요.
한 30년만 살면 전과 만범입니다.
그런 사람을 사람이 보겠습니까? 하나님은 봐주십니다. 왜? 저 주신은 하나님이시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져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28절 하반절 보면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분명히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말인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 하라.
여기에서 사람이란 누구를 의미하겠습니까?
크게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좁게는 에서가 에서가 칼잡이 400명을 데리고 와도 그 칼잡이 400명이 절대로 너를 도둑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가 되는 것이죠.
29절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브니엘 2자가 있지요.
밑에 보니까 하나님의 얼굴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함이더라.
바로 그 밤에 그가 만났던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지명을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던 것을 기념해서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다 이렇게 명명했다는 것입니다.
31절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사생결단은 하는 기도를 끝내고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그 햇빛은 지금까지 야곱이 97년 동안 보았던 햇빛과 결코 같은 햇빛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20:56
그날은 전혀 새로운 아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곱이 하나님 안에서 이스라엘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달력을 교체한다고 해서 새날 새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했습니다.
새날은 내 존재가 새로워질 때 모든 날들이 새날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다 똑같은 시간들이 스쳐 지나가는데 내 존재가 새로워지지 아니하면 달력을 아무리 바꾸어도 그 날은 묵은 날의 연장일 뿐입니다.
그러나 내 존재가 새로워지면 나를 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의미가 새로워지잖아요.
가치가 새로워지잖아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안에서 내 존재가 새로워질 때에만 새날 새 시간 새해가 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날은 정말 새날이었고 새해의 시작이 되는 셈이죠.
야곱에게 31절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야곱이 밤새도록 하나님과 사생결단하면서 기도한 기도의 제목이 뭡니까?
살려달라는 것이어요 내 생명을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도를 시작한 초장에 살짝 허벅지를 만지셔서 관절을 위골시키셨단 말이에요. 그럼 아침에 야 야곱아 나 이스라엘이야.
나 너한테 져주는 하나님이야. 그러고 가실라면 고쳐주고 가셔야죠. 회복시켜주고 가셔야 되잖아요.
그런데 분명히 야곱이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날은 밝아왔는데 어제까지는 야곱은 건장한 몸이었는데 지금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만 다리를 절었는가?
32절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그때 야곱의 다리 관절이 위골되어서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짐승 육류를 먹을 때에 둔부의 심줄을 먹지 않는다.
지금까지가 언제까지여요? 모세가 출애굽을 해서 창세기를 기록할 때까지 그러니까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위골되고 나서 수백 년이 지나서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까지 야곱의 후손들은 가축을 먹을 때에 그 둔부의 힘줄을 안 먹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의미합니까?
이 이후에 야곱은 계속 다리를 절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다시 한번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어요.
밤새도록 기도했으면 이때 야곱이 99세인데 좀 이렇게 병난데 다 고쳐주시고 깨끗하게 해주셔야지 그 멀쩡한 사람 다리를 절게하시고 그날 하루도 아니고 그다음에 계속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게 하셨다 그 이유가 대체 뭐냐 하는 거예요.
33장 1절입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보니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지금 야곱이 눈을 들어서 에서가 400명 장정을 거느리고 오는 걸 자기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어제의 야곱 같으면 또 금방 겁에 질려서 마음이 답답해야 되겠죠. 그러나 더 이상 야곱은 어제의 야곱이 아닙니다.
아주 태연하게 지금부터 이제 수습을 합니다.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자기 네명의 처첩들에게 각각 자기 소생의 자식들을 맡깁니다.
2절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그들을 쭉 일렬로 세우는데 제일 앞에 두 여종과 그 자식들 그 다음에 레아와 그 자식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라헬과 요셉을 세웠습니다.
야곱이 자기 처첩들과 가솔들을 다 데리고 라반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도주해버리지 않습니까?
처음에 그때 라헬이 자기 아버지 드라빔을 훔쳐서 나오지 않습니까?
라반이 추격해 와서 이제 내 드라빔을 내놔라.
아무도 훔쳐가지 않았다고 말하니까 드라빔을 이제 찾잖아요. 그때 순서가 어떻게 됩니까?
제일 먼저 야곱 장막에 들어갔습니다. 이게 라반은 항상 야곱을 의심했습니다. 거기 없거든요.
두 번째가 누구예요? 큰딸 방에 들어갔습니다.
큰딸 장막에 레아 방에 들어갔습니다. 없거든요.
여종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없으니까 마지막에 라헬 장막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라헬의 아버지 라반도 그렇고 라헬의 남편인 야곱도 그렇고 이 라헬을 제일 사랑해요.
그러니까 라헬은 아마 남으로부터 특별히 이렇게 사랑받는 은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3절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여기에서 그들 앞에서 나아갔다는 것은 앞선 위치에서 나아갔다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이제 우리가 그림을 그려보면 되죠.
여종들과 아들을 먼저 세우고 자기가 가서 자 여 레아 서라 그리고 아들들 서라 그리고 또 라헬 당신 서시오. 요셉 여기 서 그래서 쭉 일렬로 대열을 만들다 보니까 자기가 제일 뒤로 갔잖아요.
그리고 그 식구들을 앞을 스쳐서 제일 앞으로 나아갔다 그 말이에요.
이건 지금 뭘 뭐하고 대비해 주는가?
대비하려고 그러는가?
어젯밤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식구도 강 건너가게 하고 가축도 강 건너가게 하고 자기는 제일 뒤에 남아 있었던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과 사생결단하는 기도한 뒤에 가장답게 자기가 그들을 스쳐 지나가서 제일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몸을 7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형에게 달려가서 그 자리에서 7번 몸을 굽힌 것이 아니라 몸을 7번 굽혀가면서 형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티베트에 가며는 라마 불교 신자들이 랏사 성지를 순례할 때 걸어가는데 오체투지라는 걸 하잖아요.
그 오체투지라고 하는 것은 땅바닥에 이렇게 엎드려서 양 팔꿈치 양 무릎 두 개 이마 이렇게 다섯 군데가 땅바닥에 완전히 붙는 겁니다.
그래서 이마가 닿은 지점에 또 다리를 떼어서 가서 또 굽히고 이러고는 성지를 향하는 거거든요. 그게 뭐 몇 달씩 걸리는 거죠.
지금 몸을 굽혔다고 하는 히브리말 샤하라는 게 그런 단어입니다. 완전히 부복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야곱은 지금 한 번 땅 바닥에 탁 구부렸다가 또 일어나서 또 구부리고 일곱 번을 구부리면서 지금 에서에게 나아가는 겁니다.
4절 에서가 동사를 잘 보십시다.
달려와서 에서가 그 모양을 가만히 보고 자기는 딱 그 자리에 앉아서 그래 너 몇 번이나 절하고 오는가 보자. 그게 아니라 에서가 달려가서 그를 맞이하고 그를 안아주고 목을 어긋 맞추어서 그와 입을 맞추고 서로 울었습니다.
이 상상할 수 없는 대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에서는 어떤 상황입니까? 야곱을 죽이기 위해서 400명 칼잡이들을 지금 데리고 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에서가 달려가서 영접을 하고 안아주고 그것도 모자라서 목을 어긋 맞추고 입을 맞추고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거예요.
30:02
여러분 이때 야곱은 부자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만약에 야곱이요. 형이 턱 만났을 때 우리 표현으로 비단옷을 입고 부자답게 살이 찌고 얼굴에 기름기가 절절 흐르는 유들유들한 모양으로 형님 안녕하시오. 이러고 나타났으면 칼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지금 에서는 그런 야곱의 모습을 연상하고 온 것입니다. 400명을 데리고 오면서 자기를 속였던 옛날의 야곱 그 교활하고 그 유들유들한 야곱의 모습을 연상하고 지금 온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눈앞에 나타난 야곱은 어떤 모습입니까? 어제 밤새도록 한잠도 못 자고 기도했으니까 얼굴은 초췌하겠죠. 헝클어졌겠죠. 옷 다 구겨졌겠죠. 그런데 다리를 절고 있습니다.
20년 전에 집을 떠나갈 때는 분명히 건강한 몸으로 떠났는데 다리를 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저는 다리로 오체투지를 합니다. 자기를 향해서 땅바닥에 몸을 굽혔다가 그 저는 다리로 또 일어납니다. 그리고 몇 발자국 뛰고 또 절을 합니다.
그 몸을 굽혔다가 일어설 때마다 그 뼈가 위골되었으니까 통증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뼈 위골돼 보신 분 아시죠?
그런데도 야곱은 형을 위해서 부복을 하고 그 고통스러운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에서가 자기를 쳐다보는 그 눈초리는 간절합니다.
에서가 누구입니까?
바로 야곱과 한 핏줄을 나눈 형제거든요. 어떤 형제입니까? 쌍둥이 형제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잉태되어서 한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열 달을 같이 있었습니다. 같은 날 태어났죠.
자기 어머니의 젖을 한쪽씩 같이 빨았습니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같이 큰 것입니다. 그 두 쌍둥이가 크면서 친구처럼 어린 시절에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겠습니까?
우리 표현으로 물장구도 치고 들판에 뛰어다니고 나비 잡으러 다니고 얼마나 재밌게 놀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랑하는 동생 야곱이 불구자가 되어서 쩔뚝거리면서 자기하고 자기에게 인사를 하면서 다가오고 있을 때 어떻게 에서의 마음속에 메말랐던 형제애가 솟구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랑하는 동생에 대한 동정심이 어떻게 끓어오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야곱이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더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불구자가 된 그 야곱의 모습을 보고 에서가 그 사랑하는 마음에 자기가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를 맞았습니다. 안아줬습니다. 목을 어긋맞추고 입을 맞춰줬습니다.
그리고 네가 왔느냐고 기쁨의 통곡을 터트렸던 것입니다.
5절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입니다.
한동안 형제가 재 상봉의 기쁨을 나눈 뒤에 이제 에서 눈에 딴 게 보이는 겁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도 금강산에서 이산가족들 상봉이 있었지만 우리가 그런 것 연상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렇죠
그래서 정말 에서도 한동안 기쁨의 눈물을 흘린 다음에 이 사람들 다 누구냐 그랬더니 야곱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주신 자식들입니다.
6절
그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을 하고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을 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와 절하니
그 야곱의 처첩들에게 4명의 처첩들에게 에서는 족보가 시아주버님이죠. 그렇죠?
또 야곱의 자식들에게 에서는 큰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처첩들과 자식들이 시아주버님 그리고 큰아버님 지금 처음 만나면서 예를 갖추어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8절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지금 에서가 오다가 세 번씩 선물 공세를 받았잖아요. 그래서 야곱에게 물었습니다.
저 떼들은 다 무슨 의미냐 그랬더니 형님에게 은혜를 입고 싶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형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그 말입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족하다. 이 말은 심히 많다는 것입니다. 나도 재산이 심이 많다. 네 소유는 네게 두라.
그러니까 이건 도로 거두어라. 이건 그저 에서가 한번 해보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이 말이 히브리말로 미완료형 단축형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히브리 문법상 그것은 간절하게 부탁하는 말입니다.
아우야 나 이미 부자다 내 간곡히 말하는데 이거 거두거라 내 안 줘도 돼.
그러니까 에서가 진심으로 동생을 위해서 그렇게 얘기해 준 겁니다.
10절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나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청하건대 제발이라는 말이죠.
아닙니다. 형님 제발 제발 이 예물을 받아주십시오. 야곱도 지금 진심으로 어제의 야곱 같았으면 어떨까요? 형님이 야 이거 거두어라 그러면 아이 그렇습니까 아마 거두었을런지 모릅니다.
그런데 야곱은 어제까지는 형의 마음을 누그러트리기 위해서 선물 공세하려고 보내었는데 지금은 야곱도 진심으로 아닙니다. 형님 제발 가져가십시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보는데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이것은 형님 기분 좋으라고 아양떠는 말이 아닌 거죠. 지금 야곱은 실제로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보고 있는 겁니다.
자기를 죽이려 왔던 그 에서가 달려와서 환영하고 안고 목을 어긋 맞기고 입을 맞추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인자한 형님의 모습으로 이 사람들은 다 누구냐 그래서 그들의 절을 받는 그 형님의 얼굴을 볼 때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형님이 형님의 얼굴이 아니고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1차적으로는 자기 눈앞에 있는 형님과 화해하면서 형님에게 그 예물을 드리지만 실은 마음으로는 그 형님을 통해서 역사해 주신 하나님께 바치는 심정으로 지금 형에게 그 예물을 주면서 꼭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11절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데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함에 받으니라
그러니까 계속 받으세요. 아니다. 받으세요. 아니다. 계속 하다가 야곱이 강권함에 형님이 그래 고맙다. 그리고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20년 동안 서로 갈라져 있고 그 원한에 쌓여 있던 이 형제의 관계가 완전히 복원되고 완전히 화해하는 아주 감동적인 결말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12절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에서가 이제 그 상봉의 감격이 다 끝난 뒤에 동생에게 말하기를 자 같이 가자 내가 너와 동행할게.
혹시 지금 개역성경 가지고 계신 분 계십니까? 개역성경에는 여기 뒤가 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까? 아무도 안 가지고 계셔요. 개역성경 보면 우리 개역 개정판에는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는데, 개역 성경은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40:08
왜냐하면 히브리말을 보면 내가 너의 앞서 가리라. 그러니까 내가 앞에 갈게. 너 나 따라와라
바꾸어 말하면 내가 데리고 온 이 400명 이 사람들이 너를 다 둘러싸서 호위를 하고 갈 테니까 너 나하고 같이 가자 이 말입니다.
그 400명은 야곱을 죽이려고 온 칼잡이들입니다.
그 칼잡이들이 한순간에 야곱을 인도하고 호위하고 보호하는 앞잡이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런 극적인 대반전이 있을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로 인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기에요?
야곱의 허벅지의 관절을 치셔서 야곱으로 하여금 다리를 절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밤에 야곱을 생각을 해보십시오.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밤새도록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허벅지의 관절을 위골시키셨습니다.
일어나서 다리를 절 때 고통스러웠겠죠? 아팠겠죠? 이해가 안 됐겠죠? 왜 하나님께서 내 뼈를 위골시키시는가? 왜 하나님의 응답이 내 생각과 이렇게 다른가?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야곱을 불구의 몸으로 만들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야곱의 생명을 지켜주시고 그 과정을 통해서 야곱과 에서가 완전히 화해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야곱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묘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그날 확인하고 경험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9절에서 10절 말씀 우리가 잘 아는 구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러분 세상의 부모도 떡을 달라는데 돌 주는 부모 없지 않습니까?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주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이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번역한다면 너희가 살인 강도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이 말입니다.
여러분 도둑질 하는 사람도요.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 줍니다. 아니 자식에게 좋은 것 주려고 도둑질 하는 겁니다.
악한 사람도 그렇다면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는가? 그 비교급이죠.
뭐보다 더 좋은 것 세상의 부모보다 더 좋은 것 첫 번째
두 번째로 네가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것
새신자반 배울 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하나님께 달라고 날 간구하는 것들은 실은 없어도 상관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거 없어도 죽지 않는 것들. 그러나 우리가 구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기 안 주시면 어떻게 되죠? 끝납니다. 물 안 주시면 끝납니다. 내일 태양이 사라지면 끝납니다.
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 구하지 않고 얻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왜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지 아니하시겠느냐 그 말이여요.
믿음은 내가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그 응답을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입니다.
만약에 야곱이 다리를 절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 뭐 이래 원망하고 되돌아가거나 딴 길을 갔으면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야곱은 비록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가야 할 가나안 길을 절면서도 갔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의 더 좋은 은혜였음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에게 꿈이 있다면 어떤 꿈이었을까요?
아버지 야곱 밑에서 그 가나안 땅에서 그저 아버지 유산 잘 지키는 목축업자가 되는 것이 어린 시절의 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요셉을 종으로 애굽에 팔려가게 하시잖아요.
열심으로 충성해서 이제 살만한가 싶었더니 그 주인집 여자의 농간으로 옥살이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위골이 된 것과 같은 아픔이고 시련이고 고통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과정을 통해서 바로 요셉을 이집트의 국무총리로 삼아서 당시 중동 세계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옥살이 종살이를 했지만 그것이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건강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오히려 건강이 더 나빠졌습니까? 절망하지 마십시오.
내가 무엇을 계획에서 이 계획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그 계획이 무산되었습니까?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 상황 속에서도 내가 가야 할 믿음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십시오. 그 상황 속에서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더 좋은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될 때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이런 열매를 거두게 해 주시려고 그 과정을 거치게 해주셨다. 확인하고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를 절게하심으로 자기 인생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했을 때 야곱이 그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아무쪼록 여러분들이 야곱과 같은 믿음의 간증거리를 갖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야곱이 얍복나루 위에서 살려 달라고 밤새도록 사생결단하던 바로 그 밤에 하나님께서는 엉뚱하게도 야곱의 허벅지의 관절을 위골시키시고 그로 하여금 다리를 저는 불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고 그것이야말로 시련이요 고통이요 아픔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야곱이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그를 죽이려던 형 에서와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졌고 야곱의 모든 가솔들을 도륙내려고 하던 칼잡이 400명이 그들의 앞잡이가 되겠다고 자원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님 만약 야곱이 다리를 절었다고 해서 절망하고 그 길을 포기해버리거나 딴 길로 갔더라면 결코 그 생명의 역사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 그 야곱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게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내 기도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응답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내 계획이 무산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내가 기도하고 주님을 믿을수록 내 삶이 더 고달프고 더 시련 속에 빠지는 것 같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말고 야곱처럼 나아가야 할 길을 절면서도 나아가게 도와주옵소서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나를 위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더 좋으신 뜻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섭리하시는 그 열매를 우리 모두 삶으로 경험하며
우리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을 누리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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