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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시대 수필의 나아갈 방향
디지털 미디어(빅 데이터) 시대에 하이브리드(hybrid)한 글쓰기
최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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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늘 시대를 대표해 왔고 선도해 왔다. 문학은 그 시대와 사회를 묘사하고 그 시대인의 인생을 그려냈다. 그러면서 그 사회에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으며 발전했다. 작가와 독자가 동시대와 사회를 살면서 주고받는 것은 공감이요 그 시대와 사회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작가의 사명일 것이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 시대를 더 행복하게 살아가려 했고 문학 또한 인간을 행복으로 이끌고자 했다. 한데 현대를 문학의 위기 시대라 한다. ‘문학’ 하면 종이책이었는데 문학으로 대표되는 그 종이책이 갈 곳을 잃었다고 대신 영상의 시대가 되었다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시작이고 중심이던 문자가 소셜 커뮤니티로도 무게중심이 바뀌고 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유심히 동승인의 동정을 살펴보곤 한다. 아무리 찾아봐도 책을 읽는 사람은 없다.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 핸드폰을 보고 있다. 어쩌면 저렇게도 한결같이 핸드폰만 보고 있는 것일까 놀랍기도 하다. 더러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거나 영상을 보는 것 같고 드라마나 예능프로를 보기도 한다. 젊은 층에선 웹툰을 보거나 무언지 모를 긴 글도 읽고 있다. 휴대하기도 불편한 책을 굳이 갖고 다니지 않아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스마트폰 속에 담고 다닐 수 있는 시대다. 전자책도 대세가 될 수 있다. 종이책만이 책이 아니란 얘기다. 그렇다면 진정 종이책의 위기인가. 하지만 디지털 미디어 시대가 도래하면서 종이책의 위기는 예상되어 왔었다. 그렇다면 그게 문학의 위기까지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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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영상시대(映像時代)라 한다. 사전적 의미로는 텔레비전, 컴퓨터 따위의 영상 매체를 주로 이용하는 시대란 말이다. 여기에 디지털 미디어, 빅 데이터, 사이버, SNS 시대 등 여러 명칭으로도 불린다.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 변화를 쫓아가기에도 벅차다. 특히 5∙60대 이상만 되어도 그런 문화엔 적응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미 새로운 시대는 와버렸고 이런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선 적응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오토 노이라트는 현대인의 정의를 대부분의 정보와 지식을 그림과 영상을 통해 받아들인다는 경향성을 들어 시각적 인간이라 했다. 그렇다면 지금같은 영상문화시대의 현대인은 특히 시각적 인간으로 볼 수 있겠다. 물론 책도 눈으로 읽는다. 하지만 노이라트의 시각적 인간은 미래시대의 인간에 대한 예언 같은 것이었다. 한데 그게 현실이 되었다. 눈은 책에서만 아니라 모든 다양하고 종합적인 정보를 읽어들이는 창구로 정보유입의 관문이요 새 지식의 빨대가 되는 것이다. 시각적 인간은 눈으로 모든 걸 다 받아들이는 인간인 셈이다.
심지어 발터 벤야민은 영상문화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은 영상을 읽어내지 못하면 문맹자로 취급될 것이라고까지 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다양한 해석이 필요한 볼거리와 동영상 포함)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문맹자라는 말이다. 사실 문자도 소리를 그림으로 만든 소통의 매체다. 따라서 문자는 소리에서의 의미와 그림에서 오는 형태를 동시에 담고 있다.
현대 전자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영상문화 시대를 열게 했는데 곧 단순한 문자적 언어적 코드에서 탈출케 한 것으로 이러한 변화는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왔다.
2021년 6월 8일자 J일보엔 아마존의 창업자인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가 우주선을 타고 은퇴 기념 여행을 우주로 떠난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 때문인지 인류가 대서양 횡단에 걸린 시간을 그림으로 표시해 놨는데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탄 청교도들은 64일이 걸렸지만 1919년 프로펠러 비행기로는 16시간이 걸렸고, 현재는 제트 여객기로 7시간이 걸린단다. 하지만 초음속 제트 여객기로 간다면 3시간 30분이면 되고, 로켓 여객기라면 30분밖에 안 걸릴 것이라고 한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과학의 발달은 속도를 창출해 낸다. 속도는 변화다. 시간이다. 거리(간격)의 좁힘이다. 빨리 보는 것이고 동시에 여러 개를 보는 것이고 한 번에 여러 가지를 할 수 있게 한다.
요즘 우리 생활문화의 변화 중 가장 크다 할 수 있는 핸드폰의 발전을 보면 더욱 놀랍다. 1G∙2G를 거친 3G는 음성과 문자, 사진과 동영상까지 무선으로 송수신했다. 그러나 4G(LTE)를 거쳐 5G는 AR(증강현실)과 VR(가상현실)까지 시현 한다. 2시간짜리 영화 한 편을 다운 받는 시간은 겨우 1초다. 휴대하는 크기는 말할 것도 없고 기능의 발달은 놀라움의 극을 달리게 한다. 단순한 통신 도구였던 것이 지금은 모든 생활의 중심이다. 그 안에 우리 삶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일정 계획은 말할 것도 없고 사업상 또는 일상적 지인들의 정보며 심지어 가족들의 연락처나 생일 등도 핸드폰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지구 반대편에 살면서도 함께 있는 것처럼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고 정보뿐만 아니라 감정까지 함께 할 수 있다. 뿐인가. 사람이 하던 일을 AI(Artitical Intelligence.인공지능)가 하나씩 둘씩 대신하고 있다. 그만큼 직업에 대한 위협도 받고 있다. 이런 변화의 시대 속에 살면서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특히 글을 쓰는 작가는 AI도 넘볼 수 없는 존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또한 안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오래전에 AI가 소설을 써서 인정을 받은 바 있으며 사람이 하던 일의 많은 부분을 AI가 대신하고 있고 감성적인 글은 아니더라도 논리적이고 지적인 글들은 더 잘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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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자기표현의 시대다. 그런 표현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과 그것을 보여주면서 공유하고 공감하려는 매체에 대한 소망이 일반화된 인터넷과 합해지게 되었다. 사실 책을 내고 그걸 유통시켜 공감하는 독자를 만들어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시간과 장소와 재정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인테넷은 잘만 하면 정보의 생산도 소비도 시공간의 제한조차 없이 활용할 수 있다. 거기다 어렵지 않게 자기만이거나 공동의 공간도 만들 수 있고 그걸 원하는 대로 대중과 서로 나눌 수도 있다. 내 이야기들도 블로그나 카페에 저장하여 언제나 볼 수 있고, 트위트나 페이스북 등 소셜 커뮤니티를 통해 자유롭게 다른 사람과 소통도 할 수 있다.
사실 문학 장르 중 수필은 자기 이야기를 문학화한 것으로 체험적 내 진실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내 경험적 이야기에 보편적인 삶의 의미를 담아 나누는 문자적 공유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문학이라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부담으로 작가라는 고유 영역을 인정해야만 했고 그것들은 자격증을 따듯 공인된 관문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인정받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로 SNS가 일반화됨에 따라 타인을 의식않는 나만의 글쓰기가 자연스럽게 이뤄지기 시작했고 그들 중 대중과 공유한 일부가 많은 공감을 얻게 되면서 글쓰기의 또 다른 장을 열었다. 작가라는 생산자와 독자라는 소비자로 엄격하게 구분되던 글쓰기에서 소비자도 생산자, 생산자도 소비자가 되는 ‘서로 작가‘의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뿐 아니라 정형화된 문자적 글쓰기가 사진과 어울리더니(디카에세이. 포토에세이) 다양한 영상의 글쓰기로 지경을 넓히고 시각을 확대하면서 청각까지 호사케 하는 시청각 영상물로의 자유로운 생산(노출)활동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처음엔 지극히 개인적인 자기표현 욕구였으나 이내 소수 대중과 공유를 하더니 아예 다수 대중을 겨냥한 콘텐츠로 발전하는 경향도 보였다. 이러한 시도와 변화의 바람은 글쓰기가 전문적이라는 두려움을 제거해 버리면서 쓰는 자체를 즐거움으로까지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그 변화의 중심에 핸드폰(스마트폰)과 유튜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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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만 뜨면 카톡부터 확인하는 이 시대의 우리 일상이다. 밤사이에 보내져 온 수많은 글과 영상이 내가 봐주길 기다리고 있다. 보기 싫으면 그냥 지워버릴 수도 있고 영상은 삭제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몇 개는 읽어보고 답글도 단다. 좋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로 보내주면서 거기 한마디씩 붙여 보내기도 한다. 펜이 아니라 자판을 두들겨 만들어내는 글쓰기가 이렇게 손쉽게 보편화 일반화된 것이다. 음성의 전화보다도 문자로 보내는 것이 더 편리하고 현실적이다. 전화는 받는 이의 사정에 따라 통화를 못 할 수도 있으나 문자나 카톡은 언제든 보낼 수 있고 일단 전달이 되니 받은 사람이 당장 보지 않더라도 나중에라도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더 많이 이용된다. 뿐인가 핸드폰의 각종 기능은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메모장 기능을 이용할 수도 있고 음성으로 저장도 할 수 있고 누군가를 지정하여 내 생각이나 영상을 그것도 여럿에게 동시에 보낼 수도 있다. 카카오스토리나 페이스북이나 밴드나 인스타그램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글쓰기를 올릴 수도 있다. 누가 보건 안 보건 상관없다. 온전한 나만의 공간에 쓰는 글쓰기가 된다. 핸드폰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도 있고 나 또한 메모장을 이용한 글쓰기도 한다. 누구나 쓰는 일을 언제 어디서든 아주 손쉽게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남녀노소 누구나 글쓰기의 일상이 된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게 쓰는 것 자체가 문학은 아니지만 쓰는 것이 문인들만의 전유물인 시대는 갔다.
문학은 문자로 기록된 모든 저작물인가 하면 그렇진 않다. 문학성이 담보되어야만 문학이다. 소소한 이야기라도 최소한의 자기 사유가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젊은 저널리스트나 카피라이터 등 전문적 문학인이 아닌 이들도 웹소설을 쓰고 다양한 직업의 많은 이들이 문학성도 있는 특유의 글쓰기로 독자에게 나아가고 있다. 오히려 출판사를 먹여 살리며 오랫동안 고락을 같이해 왔던 전업작가가 외면되거나 거부되고 감각 있는 글쓰기의 비전문가를 찾아 나서거나 영입하기도 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우리 문학 특히 수필문학은 어떤 방향성을 찾아야 하는가.
영상시대라 하는 현대는 다양한 영상매체가 있어서 이런 영상매체를 주로 이용하게 된다. 영상은 보는 문화의 중심으로 생동감은 있지만 즉시적 상황에 따른 주관적 표현이기 쉽다. 그럼에도 카톡 밴드 카스 페이스북 등에는 다양한 유튜브 동영상이 올라온다. 혹자는 이런 영상에 대한 거부감으로 클럽하우스 등 목소리만으로 소통하는 쌍방향 음성채팅만 하기도 한다. 영상과 사진 텍스트로 정보를 공유하는 것에 대한 피로감(거부감)과 한 번 올려지면 순식간에 퍼져가고 삭제가 어렵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 순간만의 소통방식이다.
이제는 스마트폰의 고급화 고성능화로 누구나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영상의 촬영부터 편집과 공유까지가 가능하다. 스마트폰은 카메라와 마이크와 조명까지 단번에 해결해 주고 다양한 어플은 웬만한 편집도 가능케 해준다. 그러다 보니 게임, 엔터테인먼트, 먹방, 뷰티, 운동, 문학, 낭송, 여행, 부동산 등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을 마음대로 선택하면서 1인 방송으로도 세계인과 공유가 가능하다. 결코 종이책으로는 엄두도 못낼 일들을 이렇게 쉽게 간단하게 신속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세상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우리 문학가 수필가는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먼저 유튜브가 어떤 것인지부터 알아보자.
YouTube는 사용자가 동영상을 자유롭게 올리거나 볼 수 있는 Google의 콘텐츠 호스팅 웹사이트로 세계 최대 규모 비디오 플랫폼이다. YouTube라는 명칭은 사용자를 가리키는 '유(You, 당신)'와 텔레비전의 별칭으로 사용되는 '튜브(Tube)'를 더한 것으로 '당신을 위한 텔레비전'이나 '당신이 곧 텔레비전' 정도의 뉘앙스지만 한국에서는 '너튜브'로도 통용된다.
2005년 2월 14일 밤 서비스가 개시되었고 그해 4월 23일 첫 동영상인 Me at the zoo의 업로드를 시작으로 한국에선 2005년 12월 20일 기타리스트 임정현이 Canon Rock을 편곡한 영상을 올려 알려지면서 UCC 열풍의 기폭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YouTube는 영상을 플래시로 재생하는 기술을 통해 간편하게 공유도 가능한데 2006년 Google이 YouTube를 인수하면서 2008년 1월 23일부턴 한국어 서비스도 되고 지금은 동영상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동영상 콘텐츠 제공 사이트로 바뀌었다. 유튜브는2005년 페이팔이라는 미국의 결제 서비스 회사에 다니던 스티브 첸, 자베드 카림, 채드 헐리라는 세 청년이 자신들의 파티 비디오를 친구들에게 배포코자 궁리하던 차에 누구나 쉽게 비디오 영상을 공유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케 되었고 이것으로 회사를 설립한 것이 유튜브 시초라고 한다. 그것을 2006년 구글이 인수하면서 세계 초대형 미디어 플랫폼이 된 것이다.
2019년 기준으로 전 세계 YouTube 사용자는 19억 명, 1일 비디오 조회 수 1억 개, 1일 사용 시간이 10억 시간 이상이며 1분에 400시간 분량의 새 동영상이 업로드되고, 채널 수만도 2,430만 개나 된다고 한다. 1인당 시청시간만도 월평균 16시간 이상이고, 우리나라도 4천만 명의 이용자에 구독자 10만 명 이상 채널이 1,275개나 되는 실정이다. 신문과 라디오와 TV의 기능 거의 모두를 흡수한 뉴미디어 인터넷 사이트로 YTN이나 연합뉴스TV 등 뉴스 채널도 24시간 방송 내용을 유튜브에서 라이브로 송출하고, 방송사가 제작해도 TV에서 볼 수 없는 영화 등을 보여주는 넷 플렉스(Netflix) 같은 유튜브 독점 프로그램까지 운영되는 상황이다.
이처럼 시대의 변화는 1인 미디어 시대로 동영상 플랫폼인 유튜브가 문화의 아이콘이 되게까지 이르렀는데 이런 영상 콘텐츠 문화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플랫폼이 유튜브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콘텐츠 중 가장 많은 동영상 콘텐츠가 모이는 플랫폼으로 가히 유튜브 시대라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만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의 주역이 되어 있다.
유튜브는 첫 시작이 ‘개인의 일상을 담은 동영상의 공유’였듯 대부분의 유튜브 콘텐츠 제작자들은 상업적으로 영상을 제작하고 유통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유튜브라는 플랫폼을 통해 본인의 문화적 취향이나 관심 분야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고자 하는 일반 유저들이다. 그만큼 기존의 미디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콘텐츠 공간으로 개인의 창의성을 세상과 공유하는 기회의 장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시청자(독자)와 함께 만드는 콘텐츠로 플랫폼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단순히 동영상 유통의 공간만이 아니라 콘텐츠 제작자와 시청자가 소통하는 커뮤니티의 장이다. 곧 제작자에 의해 ‘채널’이라는 콘텐츠 공간이 구성되면 홈, 동영상, 재생목록, 커뮤니티라는 메인메뉴들이 생기고 거기에 콘텐츠 제작자의 채널이나 운영 중인 채널을 소개하는 정보 등의 메뉴로 시청자에게 다가간다.
시청자는 이런 채널 정보나 동영상 중 원하는 채널을 ‘구독’하면 되고 ‘댓글’ 기능을 통해 크리에이터와 소통하면서 ‘좋아요’ 버튼으로 호감도 표현한다. 곧 일방적이 아닌 다양한 대화의 공간, 피드백을 통해 제작자와 시청자가 함께 콘텐츠를 만들어나간다는 차별성도 매력이다.
내가 활약하고 있는 분야의 이야기를 소재로 평소에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정보를 제공 유튜브 콘텐츠를 다채롭게 만들고 그 콘텐츠를 매개로 자신들의 팬 커뮤니티도 만들어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인기를 확보해 간다. 유튜브는 동영상 콘텐츠를 제작하는 창작자요, 소통 공간을 만드는 창조자라는 의미의 이들을 ‘크리에이터(Creator)’라고 칭한다.
디지털 미디어(digital media)는 보통 디지털 코드를 기반으로 동작하는 전자 매체로 아날로그 매체와 대조된다. 디지털 오디오, 디지털 영상, 그리고 다른 디지털 콘텐츠와 같은 디지털 미디어(정보를 표현하는 형식)를 만들 수 있으며 디지털 정보 처리 컴퓨터를 통해 공유할 수 있다. 플로리다의 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인 ‘디지털미디어동맹 플로리다’(Digital Media Alliance Florida)는 디지털 미디어를 ‘사람의 표현, 의사소통, 사회 상호작용, 교육을 위한 디지털 예술, 과학, 기술, 사업의 창조적 집중’으로 정의한다.(위키백과 참고) 이와같이 디지털 미디어는 미디어라는 용어의 기술적인 관점을 기반으로 하며 휴대전화, 콤팩트 디스크, 블루레이 디스크, 디지털 영상, 디지털 텔레비전, 전자책, 인터넷, 미니디스크, 비디오 게임, pc방, 월드 와이드 웹, 기타 인터렉티브 미디어 등을 포괄한다. 우리는 이처럼 쉬임없이 새롭게 변하는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해서 문학과 지성사 대표인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새로운 것은 항상 새로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라든가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현실-문화-문학의 복잡한 연결 회로는, 특히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는 직선적이며 단선적인 순진한 시각으로는 정확히 포착되지 않으며 올바로 해명될 수도 없다. 다양성이나 다원주의적 관점이 아니고서는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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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문자문학의 시대는 가고 영상만 살아남는 시대가 될 것인가 하는 우려는 이 시대의 문학인에겐 큰 이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학은 ‘문자-인쇄매체’의 전유물이 아니다. 문자 이전 구비문학의 단계에선 소리가 주였다. 문자가 생기면서 소리가 문자로 정착되고 문자문학이 책이라는 새로운 매체기술과의 결합을 통해 탄생시킨 것이 근대문학 곧 문자문학이다. 그런데 영화가 나오면서 문자문학과 대비되는 영상문학으로 새로운 맛을 보게 되었는데 이제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영상시대는 영화뿐 아닌 다양한 영상 콘텐츠로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구비전승으로 이어지던 전통적 서사들이 문자로 정착되었고 인쇄기술의 등장으로 인쇄매체에 의해 유통되는 단계에서 다양한 서사문학들을 폭넓게 생산 유통 소비하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는데 어느 순간 영상이라는 거대한 새 문화의 바다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TV가 나오자 라디오는 없어질 거라 했지만 TV는 TV대로 라디오는 라디오대로 여전히 제 몫을 하고 있고 오히려 상생하며 발전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문자문학의 독자는 영상문학의 시청자도 되면서 취사선택이 아닌 동시에 누리는 즐거움까지 얻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문자에 의한 사건의 서술과 대상의 묘사는 화자-서술자의 ‘말하기’(telling) 개념이지만 영상을 통한 이미지 재현은 사건의 직접적인 ‘보여주기’(showing) 개념이므로 바쁜 현대인들은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취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문자문학의 입장에선 영상문학을 두려워할 수도 있지만 문자문학과 영상문학의 장점을 제대로 이용한다면 둘 다 현대인에겐 필요한 것으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 때문에 크게 약해지거나 소멸되는 일이나 다른 하나로 대체되진 않을 것이다. 언어적으로 볼 때도 영상언어와 문자언어가 각기 가진 속성이나 기능 및 잠재력에서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만큼 제시 방법과 효과에 따라 특유의 적합성 및 기능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영상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행동과 상태를 시각화해 냄으로써 언어가 개입하지 않아도 되게 한다. 영상은 움직이는 그림의 직접 제시로 현실 재현성의 강도를 문자보다 몇 배 더 높일 수 있고 특별한 부가 설명이 없어도 바로 이해되며 문자 해독력이나 언어능력이 없어도 보는 것만으로도 이해하게(알게) 되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문자언어의 능력을 능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문자는 사건과 대상을 문자라는 매개로 서술하고 묘사한다. 하지만 문자적 묘사가 이뤄내고 있는 이미지를 영상으로 다 재현하는 것은 결코 쉽지않다. 오히려 영상 이미지가 해낼 수 없는 것을 문자 이미지는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도정일(문학평론가. 경희대 영문과 교수) 은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녀는 마치 고인 물속에 오랫동안 잠겼다 나온 시체처럼 퉁퉁 붓고 창백해보였다. 그녀의 두 눈은 흰 밀가루 반죽에 박아놓은 두 개의 작은 석탄 같았다.”
이것은 윌리엄 포크너가 단편 「에밀리에게 장미를」에서 주 인물 에밀리를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다. 포크너가 묘사하고 있는 이 에밀리를 영상 이미지로 재현해낸다고 할 경우, 어떤 탁월한 영상작가도 포크너의 문자적 묘사가 성취하고 있는 효과를 영상 제시를 통해 거둘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영상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두 개의 까만 눈동자가 괴이하게 반짝이고 있는 푸석하게 부은 여자의 얼굴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 이미지로서의 영상기표는, 그 현실적 핍진성의 정도가 아무리 높다 해도, ‘고인 물속에 오랫동안 잠겼다 나온 시체처럼’이라든가 ‘흰 밀가루 반죽에 박아놓은 두 개의 작은 석탄 같은’ 등의 특수한 언어적 묘사가 거두고 있는 효과를 산출하지 못한다. 그 영상 이미지를 보는 관객의 머리속에는 “거 참 괴상한 얼굴이군”이라거나 “찐빵 같애” 등등의 인상이 형성될 수는 있어도 포크너가 내놓고 있는 식의, 혹은 그것과 동일한, 문자적 묘사가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상 이미지가 지각 주체에게 생성시키는 것은 현실적 대상을 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느낌과 인상이지 그것에 대한 묘사는 아니다. 영상에 의한 대상 묘사는 묘사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 지각의 대상인 이미지로 제시되고 이 대상화한 이미지에 대한 해석이나 읽기로서의 이차적 디에게시스는 별개의 노동을 요구한다. 말하자면 관객이 이미지를 지각하는 일과 그 이미지에 대한 특정의 묘사를 생산하는 일은 서로 다른 작업이다.
이처럼 문자 이미지에 비해 영상 이미지엔 한계가 있다. 바로 독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상상력이 제한된다는 것이다. 문학은 상상을 통해 감동과 이어지는데 문자 이미지는 무한한 상상력으로 읽는 이를 끌고 간다. 오히려 작가보다 더한 상상의 세계를 문자 이미지에서는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영상은 보이는 그것에서 더 멀리 더 크게 나아가 지지 않는다.
또 하나 문자문학은 비유를 통해서도 많은 상상을 유발하고 창출하는데 그것들은 글자와 글자 사이 그리고 행간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영상은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각 이미지는 비유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는 시각 이미지 자체가 문자 이미지보다 강렬할 수는 있지만 문자 이미지만큼 연상의 밀도나 범위는 강하거나 풍부하지 못하다. 오히려 문자는 보여주지 않음으로 상상력의 범위를 확대하는데 영상은 그 보여줌이 상상을 제한한다. 영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로 시각의 범위가 한정되고 고정되기때문에 상상력이 더 발동되지 않는다. 사물을 지칭하는 꽃, 나무, 물 등의 단어 하나만으로도 문자로는 색깔 향기 분위기 등으로 연상되는 것이 많지만 영상은 보여지는 것으로만 상상을 제한한다. 따라서 문자문학이 가질 수 있는 상상과 암시 그리고 다양한 언어적 제시기법들은 영상이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우위성을 지닌다. 그만큼 문자문학이 갖는 잠재력은 영상문학의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영상시대라 하여 종이책이 없어진다는 불안이나 두려움보다는 양자의 특징적 가능성들이 저마다의 별개성으로 존재하면서 상호 매체적 특성을 지켜간다면 둘의 상호존재가 더 좋은 문학의 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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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이 일만큼 급박히 변화하는 시대에 살면서 작가도 독자도 변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제한된 공간과 시간에서 남보다 빨리 파악하여 선택하고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야 하는 바쁜 현대인에게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이미지 동영상은 더없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영상의 시작은 글이다. 어떤 영상도 글이 없이 바로 만들어지진 않는다. 소재를 찾고 기획하고 추진하는 모든 것이 글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곧 글이 있어야 영상도 가능하다. 따라서 글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영상화할 수 있다. 곧 영상은 글이 기초가 되는 것이고 글의 다음 단계가 영상이기 때문에 영상 때문에 글이 소멸되거나 축소되진 않는다. 따라서 문자시대를 지나 영상시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문자시대 속에서 영상시대가 온 것이고 이들은 한 지붕 두 가족은 될지언정 어느 하나로 종속되거나 통합될 수는 없다. 따라서 영상을 어떻게 접합하거나 활용하는가가 이 시대 문학인의 과제라 할 수 있다. 문자를 통해 읽고 이해하는 전통적 소통방법이 영상을 보고 아는 것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새로운 소통방법으로 적응하거나 포용할 일이다.
영상문학의 최대 장점은 실시간 독자(시청자)와의 소통이다. 즉 온라인 시대의 요구인 메시지의 이해가 쉽고 전달이 효과적이고 짧게 축약 내지 함축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층의 요구를 충족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문자문학의 약점(단점)이라면 독서라는 과정이 어렵다는 점이다. 바쁜데도 시간을 들여서 읽어야만 하고 또 이해도 쉽지 않은데 비해 영상은 눈으로 보기만 하면 되고 그런데도 이해가 잘 된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활용하면 될 것인가.
첫째 글쓰기의 방법을 바꾸는 것이다. 문자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문자를 주연으로 다양한 조연과 함께 하는 것이다. 가장 쉬운 것이 사진과 함께하는 글쓰기이다. 디카에세이, 포토에세이 등으로 상호 이미지를 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높이는, 둘이 하나가 된 한 편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 경우 건조한 글만 읽기에서 사진과 함께함으로 시각을 신선하게 확충시키고 더불어 이해의 폭도 증진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현대의 독자를 끌어내는 장치로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둘째 작품을 문자와 영상으로 동시에 발표하는 것이다. 특히 수필은 비교적 짧은 글로 5분 내외로 한 편을 소개할 수 있다. 작가가 직접 읽어도 되고 전문가가 읽어도 되지만 작품과 관련된 몇 개의 이미지를 영상으로 함께 보여줌으로 보고 듣고 읽는 것을 동시에 하면서 세 가지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게 하는 것이다. 최근 개인 문학방송 채널로 직접 유튜브에 올리는 경우도 많지만 ‘한국수필 채널’이나 ‘한국문학방송 DSB유튜브문학관’ ‘이온겸의 문학방송’ ‘문학TV’등을 활용할 수도 있다.
셋째 새로운 아포리즘의 수필과 독특한 나만의 테마수필로 독자층을 확보하는 것이다. 수십년 한결같이 보여왔던 체험적 자전적 이야기들의 수필에서 벗어나 짧고 쌈박한 아포리즘의 수필이거나 나만이 쓸 수 있는 테마의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 윤재천이 시도한 아포리즘 수필, 수화(隨畫)수필, 이정원의 꽃 수필, 유혜자의 음악 에세이처럼 특화된 수필로 브랜드화하면 자연 관련된 사진들도 따라가게 되고 그만큼 첨가되는 이야기의 살이 붙게 된다. 아이들이 읽는 책처럼 노년층을 위한 큰 글씨와 사진(그림)을 함께 하는 수필집도 가능할 것이다.
넷째 문자문학 작품을 홍보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지난해(2020.6) ‘출판사를 위한 유튜브 홍보영상 제작 신청’의 광고를 봤는데 편당 7분 이내의 홍보 동영상을 제작해 준다고 했다. 주력 출판물의 판매 증대를 기대하며 책의 저자나 관계자를 인터뷰하여 책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젊은 작가들은 쉽게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내지만 수필가들은 특히 고령층이 많아 엄두도 못 내는데 이런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재능있는 수필가 중 전문적으로 신간 수필집이나 좋은 수필을 소개하고 홍보하는 일을 해줄 수 있다면 보람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수필가 각자가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직접 해보는 방법이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해서일 것이다. 몰라서가 아니라 배우지도 않고 하려고도 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해보려는 열정과 도전이 가장 필요한 것 같다.
핸드폰 녹음기능에 내 글을 녹음하여 SNS를 통해 지인들과 나눌 수도 있고, 오디오 북을 만들 수도 있고, 내 작품을 소개하는 유튜브를 직접 운영해도 되고, 종이책과 함께 전자책을 같이 출판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경계의 한계를 섞는 글쓰기로 하이브리드(hybrid) 글쓰기를 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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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김태길(1920.11-2009.5.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은 1980년대부터 ‘가치 명제로서의 수필’로 수필다운 수필을 주장했다. 서사문학의 대표문학이 수필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관능적 감각적 심미적인 부분에서도 문학성이 확보되어야겠고 거기에 재미가 있어야 한다. 어쩌면 노년층이 두꺼워지면서 종이책을 선호하는 엘리트 장수 인구가 새로운 독서층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종이책의 향수를 버리지 못할 세대이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이 문자문학과 결별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시대의 코드인 ‘누구나 글을 쓰는’ 젊은이들과 젊은 신참 문인들도 종이책을 떠날 수 없다. 여전히 길을 찾는 것은 종이책에서다. 따라서 디지털시대 독자들의 지적수준을 문인들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글로벌시대로 국제적 감각과 글로벌 시각에 예술적 감수성까지 갖춘 젊은 인재들이 이 시대의 독자들이요 그들 중에서는 독자로만 머물지 않고 직접 글을 쓰면서 문단에 입성도 하기 때문이다. 디지털시대는 서로 다른 것을 융합하며 새로운 가치와 문화를 창출해 내는 혁신의 시대다. 따라서 문학도 여러 장르를 융합하고 압축시켜 뉴 미디어화하는 것이 디지털시대의 세계적 추세이다. 그만큼 시대적 적응력은 신속 정확 다양함인 만큼 혼종의 수필, 경계가 없어지는 수필, 다양한 실험수필로도 시대 속으로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수필은 생물(生物)이다. 생물이어야 한다. 변화의 시대, 눈이 고급화된 시대에 그 눈을 사로잡고 감동으로 흔들 역동적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독서는 영상의 시대에도 필수다. 디지털 매체에만 몰입하는 ‘뇌읽기 회로’가 지워져서 판단력이나 반성 공감 이해 성찰력 등이 저하된다고 하는데 문학을 하는 작가 특히 이 시대적 장르인 수필이 다양하고 풍부한 읽을 맛 나는 작품들로 시대와 독자 앞에 나서려면 그들을 녹일 작품으로 승부해야 한다. 해서 영상시대에 맞게 영상의 장점과 문자의 장점을 살려 문학적 시너지 효과를 높일 하이브리드 수필의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