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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39
야간 항공전은 초보적인 수준이긴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실시됐다. 대전이 진행되면서 처음에 정찰용으로 쓰이던 항공기는 전투기와 폭격기로 발전했고 독일은 적 야간폭격기를 요격하기 위해 방공전술을 개발했다. 어둠속에서 적 폭격기를 추격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지상 관측소와 청음초소는 야간에 폭격기가 비행로를 자주 바꾸거나 탐조등를 피해서 구름 속으로 숨으면 탐지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적을 발견하더라도 이미 폭탄이 투하된 다음이기 일쑤였다. 그래서 야간 폭격에 대한 유일한 대항책은 대공포였다.
1916년에 비행장에 대한 야간 폭격을 요격하기 위해 독일공군은 연합군 폭격기가 자주 이용하는 비행로에 정기 순찰비행을 실시했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야간 항법과 비행 자체만도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어둠속에서 적을 찾아내고 격추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고 전과도 없었다. 이런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1917년 4월 6일 제4전투비행중대의 빌헬름 프랑클 소위가 북프랑스의 기지를 습격한 영국 폭격기를 격추했다. 프랑클은 7일에도 격추를 추가해서 통산 20기에 도달했지만 그 다음날 영국 전투기에 격추돼서 전사했다.
비행 중인 NJG4의 Bf110E(1942년 서부전선). 기수에는 독수리 모양은 야간전투기부대 엠블렘
다른 조종사들도 약간의 전과를 세웠지만 조직적인 야간 방공전이 수행된 것은 1918년 독일이 플랑드르 지방에 대한 마지막 공세 시였다. 전투기, 탐조등, 대공포, 청음초소가 협조하는 이 전술은 23년 후 요셉 캄후버가 채용한 방법과 거의 같은 단순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다음과 같았다. 1.전선을 따라 설치된 청음초가 적기를 탐지하면 그들의 방향과 위치는 대공포 진지에 통보된다. 2.대공포는 예광탄을 발사하고 탐조등이 적기를 찾아낸다. 3. 미리 대기지역을 비행하던 전투기가 적을 격추시킨다. 1918년 5월 22일 밤 프리츠 티데 소위는 이 방법으로 3기를 격추했고 다른 조종사들도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너무 늦었고 규모가 작았으며 지상 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1920년부터 1930년대까지 초기의 개척자들로부터 습득된 야간항공전 기술은 모두 잊혀졌다. 베르사이유 조약 규정 중 하나는 독일이 공군을 보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2년째인 1935년 2월 독일은 루프트바페의 창설을 발표한다. 헤르만 괴링의 지휘 아래 루프트바페는 수비보다는 공격 위주의 조직으로 성장한다. 1936년에는 탐조등과 야간전투기가 합동훈련을 실시했고 이 훈련 보고서를 바탕으로 1937년에 추가훈련이 실시됐고 그해 말까지 야간 전투비행을 포함하는 본토 방어 교범이 제작된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39년에는 2개 야간전투비행중대가 시험 편성됐다.
탄생
1939년 9월 제2차세계대전 발발 후 영국폭격기 부대는 전단 투하를 시작으로 독일 본토에 대한 야간작전을 시작한다. (주간폭격은 위험했다.) 이 성가신 공격에 대항해서 Bf109를 장비한 3개 야간전투비행중대 10./(N)JG26, 10./(N)JG72, 10./(N)ZG26가 편성돼서 북독일에서 북해까지 야간방공작전에 돌입한다.
초창기의 야간전투기는 Bf109D-1 단발기였다.
이들의 이름은 야간전투기 부대였음에도 어둠 속에서는 비행하지 않았고 적을 찾을 가능성이 높은 저녁이나 새벽에 활동했다. 또한 탐조등이나 지상부대와 상호협력이 없었으므로 성공의 가능성이 극히 낮았다. 적기를 전혀 격추하지 못했으나 괴링은 더 이상의 야간전투기 부대 확충은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중대들은 Ⅳ./(N)JG2(제2전투항공단 제4야간비행대)로 통합돼서 주로 빌헬름스하펜과 헬리고란트 바이트 주변의 독일 해군기지 주변 방공에 투입됐다.
야간방공의 첫 전과는 1940년 4월 21일 00:45분 빌리 쉬말레 상사가 크라일스하임 북쪽에서 마인츠와 다름슈타트를 정찰하고 귀환하던 배틀 폭격기를 격추한 것이었다. 4월 26일 1:10에는 헤르만 푀르스터 상사가 실트섬 부근에서 햄든 폭격기를 격추해서 두 번째 전과가 기록됐다. 1940년 4월 독일의 덴마크 점령 후 영국 폭격기부대는 덴마크 내의 독일 비행장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볼프강 팔크 대위는 알보르그의 기지에서 Bf110으로 구성된 Ⅰ./ZG1를 지휘해서 우군의 노르웨이 침공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 기지에는 드물게 반경 120km와 3km 상공까지 탐지하는 ‘프레야’ 신형 레이더가 배치돼있었다.
이 초기형 조기경보 시스템이 적기 접근을 미리 알렸기 때문에 독일병사들은 참호로 대피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팔크는 이 시간을 이용해서 전투기를 미리 상공에 대기 시켰다가 적기를 요격하고자 했다. 그는 탐조등과 대공포 부대 지휘관들에게 이 계획을 설명하고 방어 구역을 나눴고 덴마크 북쪽과 북해 서측에 전력을 집중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팔크는 가장 우수한 베르너 스트라이프 중위 등 3명의 조종사에게 Bf110을 이용한 야간 작전 가능성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론상으로는 적기가 레이더에 탐지되면 우군기가 출동해서 적기를 찾아내야 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전과가 없었다. 팔크는 전투기를 미리 설정한 고도에서 대기하면서 지상 레이더 기지와 연결을 유지하도록 전술을 변경했다. 역시 전과는 없었지만 이때의 야간 작전은 후일을 위한 유용한 경험이 됐다. 또한 적기의 아래에서 접근하면 밝은 하늘을 배경으로 물체 식별이 쉬워지고 반대로 적기는 어두운 지상을 배경으로 접근하는 독일기를 식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접근 방식은 야간전투기 부대가 대전 중 유용하게 써먹은 효과적인 전술이 됐다.
베르너 스트라이프(중)는 66기의 격추기록을 남겼다.
1940년 4월 30일 밤 팔크와 스트라이프, 라두쉬, 티어가 알보르그에서 출격해서 북해로 나아갔다. 새벽 무렵 이들은 3기의 웰링턴을 발견하고 공격을 시작했지만 폭격기들은 새벽의 안개 속으로 강하해서 달아났다. 전과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귄터 라두쉬중위는 웰링턴기에 가깝게 접근했고 그의 기체에는 탄흔이 남아있었다. 이날은 적기 격추에 가장 근접했던 날이었다. 팔크는 이날의 경험을 바탕으로 요격 전투기 엔진에 소염기를 부착해야 하고 무기 발사 시 조종사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는 탄약을 도입한다면 Bf110이 보다 효과적인 야간전투기가 될 거라고 상층부에 보고했다. 또한 조종사에게는 야간 전투를 위한 전문훈련이 필요하고 대공포, 탐조등, 레이더 병과와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이 보고서를 제출한 일주일 후 놀랍게도 루프트바페 총감인 에르하르트 밀히 항공대장이 방문해서 팔크와 오랜 대화를 나눴다. 밀히는 팔크의 보고서에 큰 관심을 보여주었지만 연이은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라는 대사건으로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Ⅰ./ZG1도 독일로 귀환해서 침공을 준비했다. 6월에 르 아브르까지 진출했던 부대는 케셀링 상급대장의 명령으로 뒤셀도르프로 귀환했다. 루르 공업지대에 대한 영국 폭격기의 공격이 증가하면서 야간전투 경험이 있는 팔크의 부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영국 폭격기 부대는 전쟁 발발 후 독일의 군사목표만을 공격해왔는데 산업시설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공격을 가하기로 전술을 바꿨다. 독일의 로테르담 무차별 폭격 후 영국 전시내각은 RAF가 라인강 동쪽에서 작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앞으로 5년간 영국과 독일 간 어둠 속의 살육전으로 수만명의 양군 병사와 그 몇 배의 독일 민간인 희생을 낳게 되는 결정이었다.
야간전투기 부대 창설
팔크는 1940년 6월 26일 네덜란드에서 개최된 고위 지휘관 회합에 참석했다. 점령군 사령관 크리스티안센 장군의 사령부에는 괴링, 브르노 뢰르저, 알베르트 케셀링, 에른스트 우데트 등이 참석했다. 팔크는 계급이 한참 낮은 대위 신분이었다. 괴링은 전쟁의 진행상황에 대한 장황한 연설로 회의를 시작했다. 토론의 주제는 최근 일어난 RAF의 루르폭격으로 옮겨갔다. 괴링은 그전에 독일 본토에는 폭탄이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장담한 적이 있었으므로 폭격의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이에 대항하기 위한 야간전투기 부대 조직을 지시했다. 제1야간전투항공단(Nachtjagdgeschwader1) 지휘관에는 볼프강 팔크가 임명됐다. 항공단 지휘관은 보통 중령이나 대령이 임명되는 자리였으므로 이 결정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Ⅰ./ZG1가 Ⅰ./NJG1이 되고 Bf109D를 운용하는 Ⅳ./(N)JG2가 Ⅱ./NJG1로 개편돼서 항공단은 2개 비행대로 구성됐다.
새로운 야간전투기 부대를 조직하는 것은 거대한 임무였다. 첫 번째 문제는 그의 휘하에 임무를 맡을 만한 야간비행훈련을 받은 대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팔크는 곧 대공포연대, 탐조등 부대, 청음초, 레이더 부대와 긴밀한 협력 시스템을 개발했다. 괴링은 방공조직을 통합 지휘하는 야간 전투기사단 지휘관으로 요셉 캄후버 대령을 임명했다. 뛰어난 조직가인 캄후버는 열의를 가지고 임무에 착수했다. 지휘본부는 네덜란드의 차이스트에 있었고 팔크의 사령부는 아른헴 북쪽의 데엘렌에 있었다. 그는 거기서 야간전투기 부대를 실전 조직으로 육성됐다.
캄후버는 조직 내에서 없어서는 안돼는 팔크의 전투비행을 금지시켰다. 팔크는 비행을 못하는 에너지를 지상 임무에 쏟아 부었다. 베를린으로 가는 길목이고 남쪽에 루르 공업지대가 위치한 요지인 뮌스터 북서쪽에 탐조등 벨트가 설치됐다. 프레야 레이더가 배치되기 전까지 청음기가 탐조등 앞쪽에 배치됐다. Ⅰ./NJG1 도 뮌스터 동쪽 기지로 이동해 와서 청음초가 적 폭격기 소리를 탐지하면 즉시 이륙할 태세를 갖췄다. 전투기는 이륙 후에는 탐조등 위치 동쪽, 폭격기 보다 약간 높은 고도에서 대기해서 탐조등 빛에 드러난 적기를 찾아내고자 했다. 적기가 탐조등 구간을 통과하는 시간이 3분이었으므로 적을 찾을 수 있는 시간도 3분이었다.
가장 안전한 공격 방법은 적기의 후방 아래에서 접근하다가 기수를 쳐들고 적기의 날개에 사격을 가하고 급강하해서 적기 후방사수가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요격방법을 ‘밝은 야간전투(Helle Nachtjagd)’라 불렸다. 베르너 스트라이프 중위가 1940년 7월 20일 02:15분에 격추한 휘틀리 폭격기가 부대 첫 전과였다. 스트라이프는 이 전술을 이용해서 7월 중에 6기를 격추했다. 이 전술은 성공적이었지만 레이더와 서치라이트, 신형 항공기가 도입될 때까지 임시적인 것이었다.
영국 폭격기 사령부는 독일이 뮌스터 부근에 연속된 탐조등 벨트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폭격기를 우회시켰다. 캄후버는 그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쉴레스비히 홀스타인에서 벨기에의 리에쥬까지 이어지는 길이 900km 폭 30km의 탐조등 벨트를 1년에 걸쳐 완성됐고 그 보다 작은 벨트를 베를린 북서쪽에 구축했다.
프레야(중)와 뷔르츠부르크 (둥근 레이더)
프레야 레이더도 도입됐는데 통신장교인 헤르만 딜 소위는 전쟁초기에 지상기지에서 레이더로 전투기를 적 폭격기가 보이는 곳까지 유도할 수 있다는 이론을 시험한 바 있었다. 처음에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거리 측정레이더 AN-Peilung이 도입되면서 극복되기 시작했다. 프레야는 높이를 계산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딜은 낮에 여러번의 실험을 통해 전투기들을 목표물로 유도하는데 성공했다.
레이더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팔크는 딜을 불렀다. 8월에는 팔크와 딜은 캄후버에게 레이더 유도 요격 이론을 설명했다. 캄후버는 프레야를 영국공군이 자주 통과하는 눈스페트에 설치했다. 적기의 고도를 알 수 없다는 문제점 해결을 위해서는 ‘뷔르츠부르크’라는 새로운 레이더가 도입됐다. 이 레이더는 탐조등과 함께 사용되면서 야간전투에 필수적인 장비가 된다. 이 장비를 처음으로 실전에 이용한 것은 4./NJG1이었는데 이런 방법을 ‘어두운 야간전투’(Dunkel Nachtjagd)라고 불렀다.
딜 소위는 이런 방법을 이용해서 1940년 10월 16일 루드비히 벡커 소위를 웰링턴 폭격기 눈앞에 까지 유도하는데 성공했고 21:25분에 웰링턴을 격추했다. 네덜란드와 독일 해안에는 레이더 기지가 추가 설치됐다. 1940년 말까지 야간전투기 부대는 전과는 42기가 됐다. 큰 전과는 아니었지만 전술은 상당히 진보했다.
1940년 여름 베를린, 프랑크프루트, 쾰른, 브레멘, 함부르크 부근에는 모든 병과를 통합한 야간전투 구역이 설정됐다. 하지만 우군 대공포가 우군기를 오인 격추할 수 있는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야간전투기는 이 전투 구역에 들어가는 것을 꺼렸고 전과는 오르지 않았다. 이 당시에는 항공기가 우군 대공포에 사격을 받지 않도록 조명탄 발사 이외에는 지상부대가 식별할 수 있는 적절한 전자장비가 없었다.
볼프강 팔크
보잘 것 없었던 야간전투기 부대를 위협적인 집단으로 발전시킨 제1의 공로자라고 볼 수 있는 팔크는 1910년에 베를린에서 목사인 아버지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학업을 마치고 1931년 독일 육군에 입대했고 항공성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을 30명의 장교 후보생 중 하나로 선발됐다. 그는 뮌헨 부근에서 조종 기본 교육을 받았고 독-소 밀약에 의해 귄터 뤼초프나 하네스 트라우트로프트 같은 사람들과 함께 소련 국내에서 훈련 받았다. 1934년에 루프트바페의 소위가 됐고 교관, 전투기부대 중대장 등을 거쳐서 전쟁 발발 직전에는 최신형 Bf110을 장비한 ZG76에 소속됐다. 폴란드전에서는 3기를 격추하면서 괴링에게 2급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42년 하인켈박사의 모임에 참석한 팔크(좌). 에른스트 하인켈박사(안경낀 사람). 캄후버(그 좌측)
폴란드전 후 쉬투르가르트에 배치된 팔크는 독일본토를 공격한 영국 폭격기 2기를 격추했고 1940년 2월에는 제1구축항공단(ZG1)의 제1비행대장으로 임명돼서 덴마크 공격에 참가한다. 그는 점령한 덴마크의 기지를 공격해오는 영국 폭격기에 대한 전술을 확립해서 상부에 큰 관심을 끈다.
상층부에 우수한 야간전투기 부대 지휘관으로 알려지게 된 팔크는 1940년 NGJ1의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1940년 10월에는 야간전투기부대 발전에 대한 공적으로 기사십자훈장을 받았다. 그는 전선선을 방문해서 야간전투 전술을 보급했고 1943년 7월 대령의 계급으로 총 참모부로 자리를 옮겨 베를린 상공의 야간 방공 임무를 맡아 영국 폭격기부대에 상당한 타격을 가했다. 1944년 7월 20일 벌어진 히틀러 암살사건 주모자였던 백작 폰 스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팔크 부인의 친척이었으므로 전투기부대 총감 갈란트는 그를 보호해주기 위해 발칸반도 전투기부대 사령관으로 전출시켰다. 그는 1945년 3월 서부전선의 B군집단으로 돌아온 후 1945년 5월 2일 미군의 포로가 됐고 5주 후 석방됐다.
전후에 항공과 관계없는 영업사원이던 팔크는 그의 능력과 명성을 인정한 미국의 노스아메리칸과 맥도널 더글러스 항공사에서 1961년부터 1986년까지 고문을 지냈고 2005년에 95세로 티롤에서 타계했다.
야간습격
캄후버는 야간전투기 부대 사령관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구상했던 영국에 대한 야간 공격을 지시했다. 그런 임무에 적합한 부대는 7월 1일 KG30의 요격 중대를 받아들이고 항속거리가 긴 야간전투기 Ju88C-2와 Do-17을 장비한 Ⅱ./NJG1이었다. 대원들은 뒤셀도르프에서 신형기와 야간전투전술을 익혔고 Ⅰ./NJG2로 개편됐다. 네덜란드의 길제-리헨의 콘크리트 활주로를 가진 훌륭한 비행장이 그들의 주둔지였다. 감청된 영국 폭격기와 지상 유도기지간의 무선통신 정보는 매일 15:00에 길제-리헨으로 전달됐다.
공격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폭격기가 이륙할 때 공격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폭격기가 비행 중에 공격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기지에 착륙할 때 공격하는 것이었다. 미리 전달된 정보가 있더라도 적기의 이륙 시 공격은 사실상 어려웠고 자체 레이더 없이 비행중인 적기 공격도 어려웠다. 결론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적기가 그들의 기지에 돌아와 착륙등을 밝히고 착륙하는 순간에 공격하는 것이었다. 캄후버는 이 공격을 위해 괴링에게 추가로 2개 항공단 편성허가와 기존 비행대 확장을 위해 힘썼다. 1940년 12월 세 번째 항공단 창설 허가를 받았지만 항공기가 매우 부족해서 비행대 규모에 불과했고 Ⅰ./NJG2은 보유수가 20기 뿐 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Ⅰ./NJG2는 1940년 10월 24일 21:30에 쿠르트 헤르만 중위가 영국 상공에서 블렌하임을 격추하면서 첫 번째 승리를 기록했다. 헤르만은 5분 후 뷰포트를 격추했고 한스 한 하사가 이륙 중인 휘틀리를 격추했다. 10월 28일에는 하인츠 뵐커 소위가 함부르크를 폭격하고 돌아와 기지에 착륙 중인 햄든을 격추했다. Ⅰ./NJG2는 이런 공격 외에도 적 비행장 폭격과 기총소사를 실시해서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1940년 말 Ⅰ./NJG2 공식기록은 18기였지만 전후 영국군 기록에 의하면 그 수는 5기로 줄어든다. 반면에 비행대장 하이세 소령을 포함하는 32명의 대원과 12기를 상실했다.
JU88은 Bf110과 함께 야간전투기 부대의 주력을 형성한다.
1941년에 접어들면서 1월 16일 요크셔에서 블렌하임 2기를 격추를 시작으로 2월에는 13기를 격추해서 부대원들에게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3월에는 6기, 4월에는 25기를 격추하면서 전과는 상승했다.
헤르만 좀머 상사는 4월 29일 밤늦게 길제-리헨을 이륙해서 영국으로 비행했고 다음날 00:15분에 노팅햄 북서쪽에서 적기가 착륙 전 비행장을 향해 예광탄을 발사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비행장 상공에 침투해서 적기의 2~300m 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고 적기에 포문을 열어 상공에서 폭발시켰다. 4분 후에는 착륙등을 켜고 접근 중인 두 번째 적기를 발견했고 80m 거리에서 격추시켰다. 비행장을 떠나기 전에는 폭탄을 투하했고 주기 중인 3기와 이륙 직전의 2기를 격파했다고 보고했다. 20분 후에는 헉크날 비행장에 착륙 중인 블렌하임을 격추시켰고 귀환 중에는 뷰포트 1기를 전과에 추가했다.
Ⅰ./NJG2는 5~6월에 36기를 격추해서 100기에 도달했고 전과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영국공군의 수비-야간전투기 세력-가 강화됐기 때문에 부대의 사냥터는 이제 북해 상공으로 옮겨졌다. 7월에는 58개 비행장에 대한 270회의 작전비행이 실시됐고 대부분 북해 상공에서 19기를 격추했다. 한스 한 상사가 10기 격추로 철십자 훈장을 받으면서 부대원들의 사기는 올랐다. 빌헬름 바이어 상사는 8월 8일 하루 동안 격추한 블렌하임, 핼리팩스, 웰링턴으로 야간 전투기부대 최고의 에이스가 됐고 그해 10월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8월말까지 135기에 도달한 Ⅰ./NJG2는 야간 전투비행대 격추기록 선두였다.
10월 11일 한스 한 상사가 영국 상공으로 출격해서 옥스포드 연습기를 발견하고 지나친 격추 의욕으로 적과 너무 접근한 결과 사격 중 충돌하면서 전사했다. 한 상사가 행방불명됐다는 소식과 함께 Ⅰ./NJG2는 시칠리아 이동이 결정된다. 새로운 임무는 북아프리카의 롬멜에게 가는 추축군 보급로 엄호였고 영국 상공의 큰 위협이던 독일 야간전투기 부대는 이렇게 해서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