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 외 2편
홍일표
멀리 안개 뒤에서 개가 컹컹 짖는다
개는 보이지 않고
귀만 점점 커진다
소리를 만진다
몸으로 만지는 소리에는 거친 거스러미가 있다
울퉁불퉁한 흉터도 있다
눈앞에 없는 개가 점점 자란다
하느님만큼 커진다
컹컹 짖을 때마다 허공이 조금씩 찢어진다
틈새로 얼핏 보일 듯도 한데
보이지 않는다
개는 죽어서 돌아오지 않는
열일곱 살 봄날 같다
강가에 서 있던 내가 지워진다
안개 저편에서 누가 내 목소리로 부르는 것 같다
그가 나를 살고 있는 것 같다
그가 꾸고 있는 기나긴 꿈의 한 모퉁이
잠시 피었다 지는 개망초 근처에 내 발자국이 있다
저만치서 낡은 신발 한 짝 물고 흰 강아지가 오고 있다
안개가 숨어서 몰래 낳은 아이 같다
검은 강
오래전에 죽은 사내가 떠내려가고 있다
어느 검은 지층에서 흘러나온 표정인지
마지막으로 본 희미한 빛을 물어뜯고 죽은
시커멓게 타 버린 노래들
검은 강물 위로 흘러간다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말이 되지 못한 돌멩이들만 바닥에 박혀 있다
언젠가부터 강가에는 목이 없는 새들이 숨어 산다
조각조각 깨져 강물 위에서 희뜩이는 목소리들
흑백영화 같은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단칸방에서 홀로 숨을 거둔 그는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흘러간다
술병들이 굴러가고
죽은 태양이 굴러가고
아무도 오지 않는 빈방이 굴러가고
환한 대낮인데
저녁은 아직 멀었는데
카페의 늙은 악사는 이곳에 없는 봄을 연주한다
저무는 해는 팔다리가 없는 고독을 증언하고
강물은 봄의 악보를 받아 적으며 중얼중얼 흘러간다
매일 걷던 길인데
중저음의 재즈처럼 낮고 천천히 흐르는 강물이 왜 검은빛이었는지
한쪽 눈을 가진 사람들이 왜 어둠뿐인 밤의 짧은 생을 수장시켰는지
미지칭
너머에 숨은 얼굴이 있다
이름도 없고
기호도 없는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이곳의 표정을 지운다
이곳의 표지판을 삭제한다
컵은 물을 기억하지 않고
물은 컵의 형태를 고집하지 않는다
잠시 지상에 어른거리다 사라지는 물안개를 따라간다
바깥의 바깥까지 가면
컵이 없다
바위도 없다
어제의 결심이 있던 자리에 드라이아이스가 있다
마이크가 있던 자리에 파꽃이 흔들리고 있다
결정되지 않고
텅 비어 있던 나는
잠시 무정형의 리듬이 된다
바깥에서 무한으로 출렁이는 노래가 된다
외진 구석에서
밀정처럼 숨은 얼굴이 나타난다
어디선가 새로 태어난 봄을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 홍일표 시집, 『조금 전의 심장』 (민음사 / 2023)
홍일표
1988년 《심상》 신인상과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중세를 적다』. 청소년 시집 『우리는 어딨지?』,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지리산문학상, 시인광장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