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아 있어도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평소 관심 없었던 책에 눈길이 간다. 가을만 되면 커지는 여행과 독서욕구 때문이다. 이 두 욕구를 해소하러 떠났다. 목적지는 여행과 독서를 한번에 즐길 수 있는 곳, 인천 동구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다.
‘작은 배들이 드나드는 다리’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배다리마을. 정겨운 이름의 이 마을은 지하철 1호선 동인천역에서 10분 정도만 걸으면 만날 수 있다. 이 마을엔 인천에서 유일한 헌책방 골목이 있다. 배다리 헌책방 골목은 1960~1970년대 서울 청계천, 부산 중구 보수동과 함께 ‘전국 3대 헌책방 거리’로 불릴 만큼 번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그런 수식어는 과거의 추억이 됐다. 조용한 골목에는 대여섯곳의 헌책방만이 남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헌책방이 많진 않지만 각자 개성 있는 외관 덕에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커피 전문점처럼 아기자기한 외관을 갖춘 곳이거나, 입구부터 헌책 꾸러미가 얼키설키 놓여 누가 봐도 헌책방임을 알게 되는 곳도 있다. 발길은 후자의 책방으로 향했다. 어렸을 적 드나들었던 헌책방과 비슷한 정감 있는 모습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헌책 특유의 묵은 종이냄새가 코끝에 와닿았다. 이상하게 이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대형서점에선 느낄 수 없는 기분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미로처럼 얽힌 서가 사이로 들어갔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서가엔 빈 곳 하나 없이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책 한권을 꺼내 들었다. 거의 새책처럼 깨끗한 스위스 여행책자였다. 새책과 한가지 다른 점은 베른지역 명소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나 새로 산 책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면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헌책방에선 오히려 반가웠다. 밑줄을 보고 ‘책의 전 주인은 이 명소에 가봤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니 어느새 베른 구시가지를 거니는 착각에 빠졌다. 밑줄 하나로 책의 전 주인과 소통은 물론 간접여행까지 덤으로 하게 된 것이다. 헌책방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책 두권을 사들고 다시 거리로 향했다. 노란 외관이 인상적인 헌책방이 눈에 들어왔다. 케이블 채널 tvN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신(神)―도깨비>에서 도깨비 김신(공유 분)이 즐겨 찾던 장소다. 그는 사랑하는 소녀 지은탁(김고은 분)을 기다리며 책을 읽다가 그녀가 오면 함께 헌책방 골목을 거닐며 데이트를 즐겼다. 예스러운 길을 두사람이 걷는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드라마가 끝난 지 1년도 더 지났지만 이 장면은 아직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듯했다. 골목에는 여전히 여행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한 연인은 골목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만들고, 한 중국인 관광객은 도깨비 촬영지임을 설명하는 안내판을 읽고 있다. 이들 틈에 섞여 드라마의 여운을 느끼다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헌책방 골목에서 15분 정도 걸어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에 닿았다. 이곳은 1960~1970년대 인천 동구 송현동을 재현한 곳이다. 입장료 1000원을 내고 안으로 들어서니 어두컴컴한 골목길이 펼쳐졌다. 그곳엔 작은 구멍가게·연탄가게·솜틀집 등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가게들이 들어서 있었다. 전봇대와 담벼락에는 쥐 잡기 포스터와 반공표어 등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홍보물도 붙어 있다. 이런 작은 부분까지 섬세하게 표현돼 실제 1970년대 달동네를 방문한 느낌이 들었다.
동네를 다 돌고 나오니 가을바람이 반겼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너와 함께한 모든 날이 좋았다”는 명대사가 떠올랐다. 마찬가지다. 어느 가을날, 인천 동구에서 보낸 모든 시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