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한점 부끄럼 없기를"… 독립 투쟁 의지 詩에 담았죠
입력 : 2023.01.12 03:30
시인·독립운동가 윤동주
▲ ①윤동주 시인의 모습. ②간도에 있는 그의 생가. ③그가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시절 스크랩했던 조선일보 기사들. ④대표작 ‘서시’ 육필 원고. ⑤대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1948). /위키피디아·조선DB
중국에서 가장 큰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百度)의 백과사전이 시인 윤동주(1917~ 1945)의 국적을 '중국'으로 잘못 표기했는데, 한국 측의 시정 요구를 2년째 묵살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현재 중국 영토인 옌볜조선족자치주에서 태어난 윤동주 시인이 '중국 조선족'이라는 논리죠. 정작 윤동주는 한 번도 자신을 중국인이라 인식한 적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한편 청와대 춘추관에서는 지난달 22일부터 문학 특별전 '이상, 염상섭, 현진건, 윤동주, 청와대를 거닐다'를 진행하며 윤동주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윤동주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두만강 북쪽에서 태어난 '조선인' 윤동주
윤동주는 두만강 북쪽인 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에 속한 곳이지만, 1886년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이 두만강을 건너 이 부근에 정착할 때만 해도 동포들은 이곳을 중국 땅으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개신교 장로였으며, 외삼촌인 김약연 목사는 3·1운동 때 간도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자 명동학교를 설립한 교육가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윤동주는 올곧은 민족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던 것이죠.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잠시 중국인들이 다니는 소학교에 편입했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시 '별 헤는 밤'에서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이란 구절로 나타나는데, 중국인 여학생들을 분명히 '이국(異國·다른 나라) 소녀'라고 표현한 것이 지금 와서 새삼 주목됩니다. 윤동주는 평생 한국어로 시를 썼으며, 뒤에 나오듯이 조선인(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끝까지 잃지 않았습니다. 그의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 시절 동기 동창 중 한 명이 현재도 생존해 있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입니다.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1938년, 윤동주는 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경성(현재의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문과에 입학했습니다. 윤동주는 이 학교에서 최현배 교수의 조선어 강의, 손진태 교수의 역사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 민족 문화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웠다고 합니다. 이양하 교수의 문학 수업을 통해서는 스스로 문학관을 세웠다고 하죠.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입학 뒤 2년 동안 조선일보 학예면을 매일 읽고 기사를 오려 붙이며 3권에 이르는 스크랩북을 남겼습니다. 그야말로 '신문은 선생님'이었던 것이죠. 조선일보 지면에 시 '아우의 인상화' '유언'과 수필 '달을 쏘다'를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대학 생활 시기는 무척 엄혹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38년 조선도 전시 총동원 체제에 포함했죠. 이 무렵 쓴 시 '자화상'은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라며 식민지 지식 청년의 고뇌를 읊었습니다. 번민의 시간을 겪고 난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반이 된 1941년 시 '무서운 시간'에서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소'라며 자신이 그 어둠 속에서 살아있음을 선언했고, 시 '간판 없는 거리'에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이라며 압박받는 조선 민중을 따뜻하게 보듬는 민족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졸업을 앞둔 1941년 11월, 윤동주는 써놓은 시 중에서 18편을 뽑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책 앞에 쓰는 서문(序文) 대신 시로 쓴 '서시(序詩)'를 붙였죠. 그것이 지금도 사람들이 즐겨 읊는 윤동주의 대표작입니다. 섬세하고 연약한 감수성인 듯하면서도, 끝내 절망적 환경을 극복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는 확고한 결의를 표현하고 있죠. 다음은 '서시'의 전문(全文)입니다.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독립을 위해 무장봉기를 준비하자"
연희전문을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의 릿쿄(立敎)대 영문과를 거쳐 교토의 도시샤(同地社)대 영문과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교토대에 다니던 단짝 송몽규와 다시 만났죠. 그런데 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갈 준비를 하던 1943년 7월, 윤동주는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송몽규와 함께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 놓고 조선 독립과 민족문화 수호를 '선동'했다는 혐의였습니다.
윤동주는 1944년 3월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습니다. 그런데 1년도 되지 않은 1945년 2월 16일, 만 27세의 청년 윤동주는 감옥에서 숨졌습니다.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둔 때였습니다. 같이 수감됐던 송몽규가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러 온 윤동주의 당숙을 만나 "우리는 계속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고 증언했고 얼마 뒤 숨졌는데, 두 사람이 일제 생체 실험 대상이 돼 희생당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독립운동은 송몽규가 주도했고 윤동주는 시로써 간접적으로 투쟁했다'고 아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2010년에 재판 기록이 공개되면서 윤동주 역시 대단히 저항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가였음이 드러났습니다. 윤동주는 '징병제를 이용해 우리가 무기를 갖고 군사 지식을 체득한 뒤 기회가 오면 무력 봉기를 일으켜야 한다'는 투쟁 논의를 했고, 재판정에서도 당당하게 "조선 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해 독립이 가능하게 하려 한다"고 말했다는 거예요. 윤동주는 1990년 대한민국 건국장 독립장을 추서(죽은 사람에게 훈장 등을 줌)받았습니다.
[죽은 뒤에 출간된 윤동주 시집]
윤동주가 1941년에 엮어 놓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곧바로 출간되지 못했습니다. 스승 이양하가 일제의 검열을 우려해 '출판을 미루라'고 권했기 때문이죠. 윤동주는 후배인 정병욱(훗날 서울대 국문과 교수)에게 이 시집 원고를 줬는데, 정병욱은 1944년 일제 학병으로 징집되기 전 전남 광양 본가에 이 원고를 숨겼습니다.
다행히 이것이 잘 보존됐습니다. 정병욱은 광복 후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친구 강처중과 함께 다른 원고도 모아 모두 31편을 실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1948년 출간했습니다. 나중에 윤동주의 누이동생 윤혜원이 고향에서 미발표 시를 갖고 38선 이남으로 내려와, 윤동주의 시 총 116편을 다시 시집으로 출간할 수 있었습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안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