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대하여
칼릴 지브란
그러자 알미트라는 또다시 물었다.
그러면 스승이여, 결혼이란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며, 또 영원히 함께 있으리라,
죽음의 흰 날개가 그대들의 생애를 흩어 사라지게 할 때까지
함께 있으리라.
아, 그대들은 함께 있으리라, 신의 말없는 기억 속에서까지도,
허나 그대들의 공존(共存)에는 거리를 두라, 천공(天空)의 바
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도록,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차라리 그대를 영혼의 기슭엔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어느 한 편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서로 저희의 빵을 주되, 어느 한 편 빵만을 먹지는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
비록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외로운 기타 줄들처럼.
서로 가슴을 주라. 허나 간직하지는 말라.
오직 삶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허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서 있는 것을,
참나무, 사이프러스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 자랄 수 없다.
장석주 시인의
마음을 흔드는 세계 명시 100선 중 057
[작가소개]
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 ]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 은 수많은 예언자를 낳은 레바논에서 1883년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산세가 매우 험한 곳으로 예수의 탄생지와 인접한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주민들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험한 산세 덕분에 터키 지배하에서도 자치 구역으로 남아 있었다. 1869년 수에즈운하가 개통되면서 생업이던 대상(caravan)을 통한 동서 교육이 타격을 받고 주민들은 터키의 폭정과 가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예수회 교육의 영향으로 자유 의식이 싹튼 지식인들은 아프리카, 남미,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의 가족도 이민자들 무리에 섞여 아버지만 레바논에 남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2년 후 칼릴 지브란은 혼자 레바논으로 돌아와 베이루트의 ‘지혜의 학교’를 다녔고 그 후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1902년 무렵에는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인생을 체험했다. 1908년 파리에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을 만나 3년간 미술 공부를 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미국의 보헤미아라고 불리는 그리니치빌리지에서 독신으로 지내며 인류의 평화와 화합, 레바논의 종교적 단합을 호소했다. 타국살이의 외로움을 알코올로 달래다가 건강을 해쳐 4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종교적 분위기가 강한 작품과 그림을 발표했는데, 초기 작품들은 아랍어로 쓰여진 산문시와 희곡 들로 모든 아랍권에 널리 알려져 지브라니즘(Gibranism)이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였다. 20살 전후로 영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1923년, 20년간의 구상을 거쳐 완성한 원고를 출판하기로 결심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영어로 기록한 산문시 『예언자』였다.
인생에 대해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깨닫게 하는 『예언자』는 현대의 성서라고 불리면서 소설 『부러진 날개(The Broken Wings)』와 함께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시공을 초월한 사랑을 받고 있다. 그 후에도 철학자, 화가, 소설가, 시인으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했으나, 『예언자』만큼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의 저작들에는 그가 그린 그림들이 삽화로 실린 경우가 많았다. 초상화를 비롯한 그의 그림은 철학을 느끼게 하는 독창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띠며 웅장하고도 경이로운 다빈치적 특질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았다. 젊은 시절 파리에서 첫 번째 전시회를 가진 이래 뉴욕, 보스톤 등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 (해외저자사전, 2014. 5.)
첫댓글 사랑이란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가을정취 만끽 하신가운데
무한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