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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공연~[연극/뮤지컬/오페라/발레/콘서트/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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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후기 스크랩 **** 뮤지컬<부활-더 골든 데이즈 >
백서연 쌍둥맘 추천 0 조회 47 11.12.09 10: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11206

나루아트센타 대공연장

 

부활 골든 데이즈

THE GOLDEN DAYS

 

1930년 격변기 조선의 석주명,

2085년 파괴된 미래의 지구,
그리고 2011년 오늘의 나를 만난다
2011년,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할

 폭발적인 판타지뮤지컬!! 
 

창작뮤지컬의 새로운 재미찾기에 방점을 찍다.

맛깔 진 평안도 사투리와 더불어 1930년대를 살아가는

 순박한 인물들의 모습은 바쁘게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오래 전에 잊어버린 우리들의 또 다른 자화상 같은

인물들은 곳곳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낸다.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을 되찾는 것만이

유일한 소원이며 희망이던 이 시대 사람들을 보며,

관객들은 우리가 지금 온전히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건대 롯데 백화점 앞의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성탄절의 설레임을 미리 전해 주는군요

 

 

나루아트센터 도착 인증샷 한장 남기고요

 

 

나비박사석주명

한국의 파브르라 불리우는

석주명 박사의 이야기라서

미래 과학자를 꿈꾸는 아덜내미를

 위해서 고른 공연입니다

 

 인증샷은 필수죠 ㅋㅋ

 

ㅎㅎㅎ 이 어색한 미소는~

  

 

좌석 안내도 보면서 좌석 확인해보고요 

 

모니터를 통해서 공연 실황을 볼수도 있지요

토요일공연시간으로 착각해서 7시 30분인줄 알고 갔는데

평일은 8시 공연으로 아직 리허설 중이라고

정갈한 정장을 입으신 분들이 출입구를

 철통같이 지키고 계시네요

 

  석 주명은 불안정해 보이는 20대 청년이다.
그는 나비연구로 늘 정신이 없으며

시간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으로서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모습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해방될 조국의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조선 과학자의 사명은 무겁기만 하고,
그만큼 그의 마음은 편치 않다.


그래서 이제 이곳 백두산에서

마지막 나비채집 여행을 마치고,
과학자로서의 삶을 잠시 마감할 생각이다.

 

백두산에 숨어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한다.
그의 진정한 운명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마지막 나비채집을 위해 떠난 백두산에서

신비로운 나비소녀를 만나는 석주명

그리고 석주명의 나비분포지도를 살리기 위해

 미래에서 온 이영철

 

이들이 만들어가는설레임의 여정을

브로드웨이 정상급 제작진이

합류하여 만들어낸 창작 판타지 뮤지컬로

 최고의 무대를 만나실수 있습니다

 

아들녀석 석주명 위인전 내용이랑 틀리고 지적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창작 뮤지컬이니까

1부는 비교적 석주명 박사의 내용을 충실히 보여주었으나

2부에서는 미래의 지구의 아픈 모습이어서

보는 내내 섬뜩했답니다

 

환경파괴의 주범이 누굴까?라는 질문에 아이들이

인간이 가장 큰 문제라고

저런 참혹한 지구를 남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까 라고 질문하니

전기를 아껴야해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아야 해요

환경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할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일제시대와 6.25의 시대적 배경이 깔려서

석주명이살았던 시대를 엿볼수 있었구요

 

창작이라서 다소 이야기가 갈라지긴 했지만

전 아이들에게 석주명에 대한 인지를 시키는것만으로

만족했기에 충분히 만족했답니다

 

미래 모습에서 좀 지루하다 생각한 모친과는 달리

미래 세계에 나오는 로봇 카스토 덕분에

아주 열광하는 반응을 보였답니다

 

 

"내가 세상을 바꿀수는 없겠지

하지만 나는 오늘의 나를 변화시킬수 있어.

내가 변하면 내일의 세상이 바뀌는 기적도 일어날꺼야"

 

멋진 창작 판타지뮤지컬로 후끈 달아오르는

저녁시간 잘 보냈습니다

 

 

 

석주명 ~~~~~~~ 

  • 석주명 곤충학자
  • 출생/사망 : 1908년 11월 30일 / 1950년 10월
  • 출생지 : 평남 평양
  • 소속 :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소장
  • 경력 :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1946), 미국 인시류학회에 가입(1940)
  • 특이사항 : 나비박사,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 이론 뛰어난 업적
  • 저서 : '접류목록', '제주도방언집', '제주도문헌집', '제주도의 성명조사서'

    평양 출신. 개성 송도중학교와 일본의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나비 연구에 몰두, 표본을 수집하여 미국박물관과 교환하였다.

    하버드대학 비교동물학관 관장 T.바버 박사의 경제적 원조로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

    1940년 한국 《접류목록》을 출간하고 미국 인시류학회에 가입했다.

    1943년 경성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에서 2년 근무하는 동안 제주도 방언을 연구했으며, 개성 본소로 전근하여 5년간의 연구 끝에 《제주도 방언집》을 출간했다.

    100여 편의 나비 관계 연구논문 중 특히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은 생물의 분류학이나 측정학상 뛰어난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석주명은 한국인으로서 곤충을 연구한, 특히 나비만을 연구한 곤충학자이다.
    석주명은 1908년 11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석주명이 태어나던 1908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시 상황을 잠시 소개해 보기로 한다. 

    그해 3월은 창경원 준공, 10월엔 최남선에 의해 최초의 월간지 <소년>창간, 11월 원각사에서는 이인직의 신극 <은세계>가 선을 보였고, 12월은 일본이 한국땅을 제도적으로 침략하기 위한 일환으로 허울 좋은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한 해였다.
    그는 19세가 되던 해 개성의 송도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농학과에 입학한다.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생활은 그럭저럭 즐거웠다. 

     교과 과목 중에 가장 흥미로운 과목은 도이타케오 선생님이 가르치는 생물학이었다.

    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생물학을 강의함에 있어서, 뭘 암기하라, 어느 부분을 더 복습하라는 식의 강의는 전혀 없었고, 집념의 의지를 가져라, 티끌 만한 것도 유심히 관찰하라는 식의 강의를 하였다.  

    그런 말씀 끝에는 항상 파브르의 이야기를 첨언하곤 했었다.
      "생물학은 암기하는 학문이 아니죠.  파브르처럼 하찮은 매미를 보고도, 매미는 귀머거리 곤충이란 걸 알아내듯이, 관찰하는 학문이요, 무엇을 관찰할 때는 끝을 보려는 집념의 학문이 곧 생물학인 것입니다."
    옆의 학생은 코를 드르릉 골았다.  

    아마 그 학생은 생물학이 어지간히도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석주명만은 도이타케오 선생님의 강의 시간이 제일 즐거웠다.

    석주명의 책꽂이에는 파브르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 꽂혀 있었다.
    어쩌다가 파브르에 관한 새로운 책이나 논문집을 구하게 되면, 그날 밤은 그걸 읽느라고 꼬박 날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그리고는 의문 나는 사항들을 낱낱이 적어두었다가 그 다음날 도이타케오 선생님을 찾아가 질문하여 의문을 푸는 것이었다.
    그런 기특한 자세에 탄복한 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석주명에 대해서는 일본 학생들보다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도이타케오 선생님은 석주명을 개별적으로 만날 때마다
     "석주명 학생, 정말 훌륭해요.  열심히 하세요." 라는 격려와 함께
    우장춘의 화제를 꼭 꺼내곤 했다. "우장춘 씨는 분명히 한국인이시다.  그런데도 일본에서 없어선 안될 장래가 촉망되는 육종 연구가이시다.  지금은 비록 농림성 농사 시험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곧 박사 학위를 받고도 남을 거야." 

    도이타케오 선생님으로부터 우장춘 아저씨의 자랑을 전해들을 때마다 당장 만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가고시마에서 우장춘 아저씨가 계신 농사 시험장까지의 교통편이란 복잡하고 멀기만 하여 마음만 앞섰지 행동은 한 번도 옮겨보지 못했다.

    어느날, 소낙비가 쏟아지던 여름, 밤늦도록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다가, 우장춘 아저씨의 얼굴을 상상해보다가, 문득 까치와 맹꽁이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맞았어.  난, 바로 그것,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해볼테야."
      

    석주명은 학교를 졸업하여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까치와 맹꽁이를 연구하여 유명한 생물학자가 되겠노라는 결심을 해 본다. 

    사실 까치와 맹꽁이는 한국 땅이 아니면 쉽사리 볼 수 없는 동물이다.

    석주명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29년 말이었다. 

    이 무렵 한국의 사회는 광주와 나주간의 통학 열차에서 한·일 학생간의 충돌로 빚어진 사건이 비화되어 이른바 11·3 광주학생운동사건으로 전국이 성난 벌통이었고, 일본에 의해 우리의 민요 아리랑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등 몹시 암울해 있었다.

    석주명은 귀국하여 곧 모교인 송도중학교의 교원으로 취임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석주명이 택한 교육 과목은 일본에서의 결심처럼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엉뚱하게도 곤충학이었다.  

    곤충학 중에서도 나비를 그 대상으로 선택했다.  

    이점에 대해서 석주명의 주위 사람들은 많은 의문을 던졌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는 한국의 고유한 동물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해 보겠다 하고선 엉뚱하게도 나비만을 쫓아다니느냐?  나비에 무슨 현상금이라도 붙어 있느냐?  석주명이가 연구 대상을 까치나 맹꽁이에서 나비로 바꾼 것에 대하여 별의별 의문들이 난무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그냥 조사할 일이 있어서 나비를 찾아다닌다." 라고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맨 처음 연구 의욕은 희귀종이나 다름없는 까치나 맹꽁이를 연구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려 했으나, 막상 귀국해서 보니 그걸 연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첫째는 그것들이 희귀종이라는 점, 다시 말해서 희귀종이니 만큼 연구 대상을 크게 잡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것을 연구하기에는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아무튼 석주명은 연구 대상을 나비로 선택한 이상 누가 뭐라고 하든 나비를 찾아 나섰고, 그걸 채집하는 데만 열중했다. 

     석주명이 나비를 채집하러 나설 때 차려 입은 채집복장은 흡사 각설이와도 같았다. 

     얼굴의 햇볕 그을음을 막기 위하여 안경만 남겨 놓고 푹 눌러 쓴 낡은 중절모자의 모습하며, 나비 한 두 마리씩 갇혀 있는 수십 개의 채집 주머니를 주렁주렁 허리에 찬 모습하며, 궁둥이까지 축 늘어지게 맨 배낭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런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어느 누구고 그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숫제 석주명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거지야, 거지야, 나비 잡아서 뭐하냐?'하며 놀려댔다.
    나비를 채집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팽나무 끝에 않은 왕오색나비를 잡으려다가, 나무 가지가 꺾어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생명까지 잃을 뻔했다. 

     절벽에 딱 붙어 있는 남방노랑나비를 잡으려다 추락하여 다리에 골절상을 입은 일, 한 마리의 나비를 쫓다가 그만 심심산중에 갇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던 일,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일 등 나비를 채집하려다가 당한 위험했던 고비는 수없이 많았다. 

    그렇게 해서 나비를 잡을 때마다 석주명은 괴성에 가까운 감탄을 연발하곤 했었다.
      "오!  예쁜 나비!  이런 나비가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군!"
    석주명은 나비를 연구하기 시작한 지 꼭 삼년만인 1933년 이윽고 <개성지방의 접류(蝶類)>와 <조선산 접류의 미기록종>등 논문을 조선박물학회지 15호에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 후로도 석주명은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을 쉬지 않고 발표했다.
    석주명의 그런 논문을 접한 생물학의 식자들은 그를 가리켜 <나비 박사>라며 경탄하기 시작했다.  

    비록 박사 학위는 없었지만 그를 <나비 박사>로 불렀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 유전학의 토대를 세워 유명해진 그레골 멘델도 한 중학교의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학교 안의 조그만 뜰을 이용하여 완두콩을 심어 실험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불후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멘델의 유전법칙>을 결실 맺었듯이, 석주명도 일제시대의 시골 중학교에서 어려운 환경을 인내하며 여가를 틈타 산과 들 또는 강변을 헤매며 나비를 채집하고 연구한 결과가 마침내 <나비 박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주명의 방 천정은 온통 채집한 나비가 담아진 종이 봉지만이 대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종이 봉지는 나비를 채집한 날짜와 장소 등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석주명의 방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를 한약방 한의사로 착각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석주명의 나비 연구는 보다 심층 깊이 다루어졌고, 그것에 대하여 몰입하려는 욕심과 외곬성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석주명은 나비를 찾아 전국을 안 다녀 본 곳이 없었다.

    학문적 대상이랄 수 있는 나비의 서식처를 찾아 전국을 누비다 보면 전혀 본 적이 없는 나비들을 채집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석주명은 그것에 대한 이름을 붙여주느라고 고심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흑백<알락나비>의 학명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 학명인 의 Seoki는 석주명의 성(姓)인 석의 영문 표기인데, 이름 없는 나비를 채집하여 학명을 붙일 경우가 생길 때마다 석주명은 그런 표기법을 자주 이용하였다.

    석주명의 나비에 대한 광적인 연구 소식이 세계 곤충학계에까지 퍼져 그 공로가 인정되어 급기야는 1941년 왕립아세아학회로부터 적극적인 보조금의 협조를 받아 한국산 나비 목록이라고 할 수 있는 영문판 조선접류목록을 발간하게 된다.


    석주명의 나비 연구 중에서 특히 <나비의 개체변이 연구>는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는데 그 중 <조선산 배추 흰나비의 앞 날개의 변이> 논문은 일본의 곤충학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나비를 사랑했던 석주명은 나비라는 어휘의 생성 과정을 찾아 「나뵈―두시언해(杜時諺解)」, 「남이―시몽언해물명(時蒙諺解物名)」 등 한글의 변천사를 발표, 나비 연구가다운 진면목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나비 연구를 한다는 일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석주명은 그 일에 대하여 한번도 좌절하거나, 게을리 해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고, 연구 생활을 위해서는 적어도 연구 실험을 해나갈 수 있을 만한 장소와 소요 시설, 연구에 필요한 연구비, 연구를 도와주는 조력자 등 세 가지의 기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석주명은 그런 조건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나비에 대해서만은 세계인이 우러러보는 최고의 연구가라는 위치를 확보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석주명은 나비 연구 외에도 <만돌린> 연주에 있어서 그 솜씨가 뛰어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나만큼 수준 높은 만돌린 연주가는 없다." 라고 할 정도로 그 자부심 또한 대단하였다.
    나비를 채집하러 전국을 누비고 누빈 또 다른 결실로 얻어진 것이 있다면 「제주도 방언집」이었다. 

     나비 연구가인 석주명이 난데없이 「제주도 방언집」이란 책을 발간하자 국문학계의 많은 학자들은 풀이 죽어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그런가하면 세계 각국의 나비의 이름을 조사하여 후학들을 경탄케 하였는데, 그 중 몇 개를 소개해보면 <초-일본>, <후례-중국>, <엘베테-몽고>, <빠뽀추카-소련>, <슈멧텔링케-독일>, <버터플라이-미국> 등이다.
    석주명은 송도중학교 재직 12년간 나비에 관한 연구 논문 79편을 발표하고 나서, 경성제국대학 부속 제주도 생약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해방 이후에는 농사시험장 병리곤충학 부장으로 재임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 그러니까 1950년 3월 우장춘 박사가 귀국하여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 인사를 하였다.
      "박사님 이렇게 귀국해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석주명의 그런 첫 인사에 우장춘 박사는 반색을 하며
      "오, 석주명 선생.  이야기 많이 들었소, 나비 연구가라는."  석주명을 껴안은 우장춘은
      "훌륭해요, 정말 훌륭한 학자예요."  하며, 석주명이 1937년 일본 <곤충계>라는 학회지 5호에 발표한 바 있는 <다물리의 접류(蝶類)·완도의 접류> 논문을 관심 있게 읽었노라고 전하는 것이었다.
      "네에?  박사님께서 소생의 그런 졸논문을 읽으시고, 지금까지 기억하시다니.

    " 석주명으로선 눈물이 핑돌 정도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석주명과 우장춘의 그 만남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는데, 까닭은 그 뒤 얼마 후에 터진 6·25가 석주명의 아까운 마흔 셋 생명을 꺾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서식하는 나비 2백50여 종 가운데 석주명의 손을 거쳐 분류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의 나비에 대한 학자적 애정은 <나비 박사>라는 별명으로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파브르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관 위에는 생전에 연구하고 아끼던 수많은 곤충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듯 날아왔다고 전해지듯이, 석주명이 세상을 떠나자 수백 마리의 나비들조차 유택에 날아들어와 슬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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