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우리에게 보여주신 놀라운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사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구세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세상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실 사명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말씀 한마디로 세상의 질서를 뒤바꿀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30년 세월 동안 이스라엘의 변방 나자렛에서 조용히 사셨습니다. 인간에게 명령하셔야할 만왕의 왕이신 분이 인간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며 서른해를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수였던 양부 요셉의 일을 기쁘게 도와드렸습니다. 때로 요셉의 부탁으로 열심히 대패질도 하셨고 못도 박으셨습니다. 가사 일로 늘 바빴던 마리아의 일손도 거들었습니다. 때로 마늘도 까고 양파도 까면서 매워 눈물도 흘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 어떤 자식보다 효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꽤 의아하게 다가옵니다. 효자이셨던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48-50)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마리아와 요셉, 사촌들을 폄하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 말씀에 가장 충실하셨던 마리아를 향한 극찬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주님 말씀을 씹고 곱씹고, 새기고 되새기던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길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신원과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나자렛이라는 작은 고을에만 머물며, 가족 친지들과 알콩달콩 한평생을 사셔야 할 분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 더 넘어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더 큰 바다로 나아가셔야 할 분, 온 세상의 구원이라는 큰 사명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결코 혈육이나 지연, 학연에 연연하시면 안되는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 가정, 내 공동체, 내 본당을 지나치게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역시 작은 시냇물에서만 놀 것이 아니라 더 큰 강물로 나아가야 마땅합니다.
물론 내 가정, 내 공동체, 내 본당도 중요하지만, 활짝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 모든 가정, 모든 공동체와 본당이 다 내 공동체요 우리의 공동체, 주님의 공동체라는 연대와 공유 의식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