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과 영원
김 난 석
한 여성이 서서 카메라를 파지하고 있다.
빛은 사정없이 산란하는데
어떤 피사체를 잡아 담아내려는 포즈다.
사진은 렌즈를 통해 피사체를 담아내는 일인데
그 피사체는 존재계를 말하지만
어느 철학자는 그 존재의 본질을 진동이라 했다.
(Alan Watts의 "해탈의 길"에서)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진동에서 한 순간을 잡아낸 것이
사진이란 뜻이니
사진은 존재계의 근본요소인 진동의 한 입자를 담아내는 일이요
조물주의 손을 엿보는 셈이기도 하다.
무엄하게도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진동 없이 셔터를 누를 수 있을까?
없다.
진동의 한 입자를 찾아낸다는 건 애초에 불능이요
그저 흉내를 내볼 뿐인 것이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세상이 내 안에 들어온다.
영원히 눈을 뜨고 있다면 죽음이요
영원히 눈을 감고 있음도 죽음이다.
눈꺼풀을 깜짝하는 순간이 1초도 안되지만
살아있음은 바로 그 순간의 연속일 뿐이다.
그래서 삶은 진동과 진동사이에 존재하는 것이요
사진 활동은 진동과 진동사이를 포착하는 일이다.
셔터를 눌러 조리개를 계속 열어놓고 있으면?
상(像)은 다 날아가 버리고 만다.
반대로 아예 조리개를 닫고 셔터를 눌러본들
상(像)은 하나도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사진은 진동의 한 순간을 잡아내기 위한
셔터와 조리개의 조화라 할 수도 있다.
몇 해 전 뉴스에서 100 펨토 초의 영상을 담아내는
사진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했다.(2005년, 독일)
1 펨토는 1000조 분의 1을 말하니
100 펨토 초의 영상이라면
10조 분의 1초 동안의 흔들림을 잡은 것이 된다.
가히 가공할만하다 하겠으니
아마추어 사진가에겐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경지다.
카메라를 메고 나가 여기저기 셔터를 눌러보지만
한번 누르는 순간이 백분의 1초라 한다면
하루에 백장을 촬영한들 하루 종일 1초의 순간을 담아 올 뿐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넣었던 것을 집에 돌아와서는 빼내는 게 일이니
넣었다 뺐다 하는 게 아마추어 사진가의 일상이 아닌가 싶다.
순간을 위해 긴 시간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흐르는 시간을 어딘가에 묶어두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사진작가라고나 할까?
백 펨토(femto) 초의 원자 움직임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면
앞으로 과학이 더 발달해
1 펨토 초 안의 원자 움직임도 포착할 텐데
그렇다면 정(靜)과 동(動)의 차이는 무엇이며
생(生)과 멸(滅)의 분별은 무엇일까?
모든 존재는 진동이며
이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측면이 있다고 했으니
(앨런 와츠의 ‘해탈의 길’에서)
한 가지 측면은 '닿음'이요, 다른 하나는 '떨어짐'이다.
어두운 밤, 어린 아기를 가만히 품에 안아보라.
아기가 처음에는 알아차리겠지만
두 손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알아채지 못할 거요,
그 뒤에 손으로 아기의 등을 토닥이면
닿았다 떨어지는 감각이 계속되기 때문에
아기는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연못에 ‘퐁당’ 하고 개구리가 뛰어들었을 때
보는 이 없었다면 소리가 났다고 할까?
안 났다고 할까?
소리는 공기와 고막 사이의 진동 관계이다.
공기는 만고(萬古)에 공기이며 생성 소멸을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소리는 고막과의 관계 속에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생긴다.
바로 공기와 고막의 만남에 의해 소리는 존재하나
진동은 생성과 소멸의 연속이요
소리는 그런 인연의 결과일 뿐이다.
불가(佛家)에선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한다.
(반야심경)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니
있음과 없음의 진동과 무한 순환을 생각해 보게 된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던가~
살아있는 자 반드시 죽음에 이르고
만나는 자 반드시 헤어지게 됨을 이르는 말이니
생(生)과 사(死), 만남과 헤어짐의 순간에
삶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눈을 감았다 뜸에 존재를 의식한다.
바로 순간의 삶이다.
숨을 들이마셨다 내뿜음에 존재를 의식한다.
바로 숨 사이의 삶인 것이다.
영원히 눈 감음은 죽음이요 영원히 눈뜸도 죽음이다.
영원히 들이마심도 죽음이요 영원히 내뿜음도 죽음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닿음과 떨어짐, 채움과 비움,
만남과 헤어짐의 순간순간에 삶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런 이치로 생(生)과 멸(滅), 정(靜)과 동(動)의 진동을 알고
충만한 자 비움이 있어야 진정한 삶과 존재의 의미를 안다 하겠다.
바로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니
그 경계선에 깨달음이 있음을 어렴풋이 느껴보는 것이다.
과거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이며 미래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오로지 가는 세월과 오는 세월의 틈새 틈새에
영원으로 통하는 순간의 삶이 있을 뿐이지 않는가.
과거가 지나가버린 퇴적물이라면 거기선 꽃도 피어날 것이요
미래가 허공에 흐르는 바람이라면 거기선 단비도 내려 주리니
우리는 순간순간을 치열하게 살되 꿈도 꾸어보는 것이다.
아름다운 5060 갑진년 송년회는
2024년 12월 1일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4시간 이어졌다.
그 사이 나는 축제장에 앉아있었고
그 시간에 사진작가들도 그 구석구석에 머물며
100분의 1초 동안 셔터를 눌러대며 영상을 남겼다.
그로 인해 그 피사체는 100분의 1초의 생명을 다 하고
화면에 이미지로 남아 존재한다.
그러면 그건 영생하는가? 그렇다.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는 것이리라.
송년축제는 지나갔지만
우린 예술로 남아 있고
그걸 추억이라 부르기도 한다.
함께 했던 이들은 모두 떠나가고
밤하늘의 별빛도, 스치던 바람도
모두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그걸 우린 허무라 하는가?
아니다.
기억이라는 창고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5060 회원들이여!
가끔가끔 그런 날을 회상하시라.
* 사진 : 두리두리 님
모델 : 미류 님
첫댓글 글이 워낙 심오하여
댓글 쓰기가 망설여 집니다
백분의 일초의 순간이
사진이란 것 외는..
제 글이야 원래 장황하지만
핵심을 잡았네요.ㅎ
지금 세상은 어수선하지만
지구의 역사 40억년을 생각하면 순간도 아니지요.
저도 가끔씩 사진을 찍습니다만
시진이란것도 갈수록 더 어려운 분야입니다.
그런데 선배님 글을 읽으며 사진이 더 어려울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예술사진이 아니고야 그냥 즐기면 되겠지요.
기록으로만 생각했던 사진 만을 알지,
그 외 다른 생각은 해 보지 않아서, 철학적인 느낌마저 듭니다.
네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