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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주시는 은혜
딛 2:11-15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딛 2:11-15 / 영원한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은 이제 누구에게나 주어졌습니다. 12) 그리고 이 선물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이루어 갑시다.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세속적인 쾌락에 빠진 생활에서 벗어나서 날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3) 우리가 대망하고 있는 그 환희의 때를, 다시 말해서 우리의 위대한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날을 바라고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ㄱ) 항상 죄에 빠져 들어가는 우리를 구해 내어 그분의 백성으로 삼고 깨끗한 마음과 남을 돕는 일에 열성을 다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ㄱ. 신14:2,시130:8,겔37:23) 15) 그대는 이 모든 것을 교회의 신도들에게 가르치고 또 이것을 실행하도록 권면하시오. 잘못이 있을 때는 엄하게 훈계하여 바로 잡으시오. 그대의 가르침을 아무도 가볍게 생각하지 않도록 행동에 늘 신경을 쓰시오.
하나님은 성도를 은혜로 구원하시고 양육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 종말론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11-13)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을 양육하십니다(12). 양육은 가르친다는 의미와 약간 다릅니다. 가르치는 것이 스승과 제자의 의미에 무게가 있다면 양육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셔서 자녀인 성도들을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게 합니다. 성도의 삶이 거룩해 지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버리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합니다. 성도는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복스러운 소망이자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4-15) 예수는 성도들을 대신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주셨다’는 말은 어쩔 수 없이 피동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을 말합니다. 첫째, 모든 불법으로부터 성도들을 속량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셔야만 죄의 노예로, 죄의 종으로 살던 우리가 죄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더러워진 삶을 살았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셋째, 우리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도록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야 합니다. 주변을 살피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넷째,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출애굽 후에 바로의 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처럼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디도는 이런 사실을 영적권위를 가지고 강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때론 책망해야 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디도의 리더십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적용: 예수의 대속적 죽음의 이유와 의미에 대하여 나누고 타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그 받은 은혜가 나타나야 하는지 나누어 보세요.
신앙인은 개인적 번영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으면 안됩니다. 또한 인격이나 자기 제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단지 예배에 참석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춰서도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인정받아야 하며, 진실한 회개와 선행을 꾸준히 실천할 때 사람들은 우리 속에서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은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딛 2:11-15 / 이삼규 목사 / 낙양교회
예수님은 영원한 죗값을 치러야 하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그 형벌은 본래 사탄과 그 패거리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내주신 그분의 목숨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은 온갖 짐승, 새, 곤충, 바다 생물, 대기권을 비롯한 이 땅의 나머지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인류를 완전하게 지으셨습니다.
창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이러한 세상을 누구에게 맡겨주셨습니까?
시 115:16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대적인 루시퍼에게서 보호하는 것이 아담의 책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동산 안에 그분을 사랑하고 순종할 선택의 자유가 없는 로봇을 두실 생각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 한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시며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분이 말씀하신 죽음은 당장 육체적인 죽음이 임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육체적인 죽음(그것도 불순종의 결과였다)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서 루시퍼 즉 마귀의 본성인 죽음을 입게 될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 마귀가 하와의 눈앞에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시켜 그녀를 유혹하였습니다. 그는 먹어도 되는 모든 나무들에서 단 하나의 금기된 나무로 그녀의 초점을 돌려놓았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보았습니다. 본즉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하와는 망설임 없이 그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분’에서 ‘빼앗는 분’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인류는 아직 타락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인 아담이 그것을 받아먹고 나서야 하나님의 피조세계는 죽음의 본성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죄는 더 컸습니다. 여자는 꾀임을 당하기라도 했지만 아담은 그것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딤전 2: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 결과로 아담뿐만 아니라 그의 밑에 두신 모든 피조 세계가 즉시 죽음의 본성을 입게 된 것입니다.
롬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자연이 죽음의 저주를 받은 것은 스스로 택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반항한 결과였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수하에 맡겨진 것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아담은 자기 자신, 자기의 아내, 미래의 후손까지 하나님과 분리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본래 루시퍼가 받을 저주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류를 싹 쓸어버리시고 새로운 우주를 만드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실 구속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갈보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수 있느냐?”는 불신자들과 신자들의 질문에 쩔쩔매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나의 대답은 단순이 이것입니다. “그분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이다.” 예수님은 인류를 자유케 하시려고 처참한 값을 치르셨고, 그러고 나서 이 기쁜 소식을 이미 깨달은 우리들에게 온 세계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다는 것
우리 죄에 대한 심판을 예수님이 치르셨을 뿐 아니라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새로운 성품을 입습니다.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온전히 드리면 그 사람은 전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말 그대로 죽습니다. 우리의 옛 성품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전혀 새로운 사람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난 것입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그분이 정말로 그의 구주와 주님이시라면 그 사람의 삶 속에 경건한 성품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마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마 7: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여기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복잡하지 않으며, 영구불변의 법칙입니다. 원인은 열매가 아니라 나무의 본성이지만, 그 본성은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품을 입으셨습니까? 다시 말씀드려서 거듭나셨습니까? 그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열매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분이 전부이시다
우리가 전해 온 복음은 영접 기도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데에 강조점을 둔, 한쪽으로 기울어진 복음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일단 그렇게 했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가 아닙니다. 그분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7:21)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영접 기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진정 구주로 모시려면 영접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분이 우리 삶의 주인이시며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그분의 자리를 두고 겨룰 사람이나 물건이나 활동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주님이셔야 합니다. 큐리오스이십니다. 궁극의 주인이요 소유주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라면 그런 사람과 결혼하겠습니까? ‘당신과 다른 애인들에게 모두 충실하되 그 중에서 당신이 첫째가 되리라.’고 말하는 사람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왕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저의 다른 애인들 중에서 첫째이십니다.”라고 말하는 신부를 그분이 용납하실까요? 언약의 관계도 없고 둘이 하나가 되는 연합도 없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기만입니까!
이들 ‘새 회심자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삶을 십자가에 죽이지 않았고, 내면에 예수님의 새로운 성품이 빚어질 자리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만 더 나은 삶과 천국의 약속을 수용했을 뿐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고 있는 세상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알고서도 예수님께로 옵니다. 정작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우리들은 단지 더 나은 삶과 천국을 얻으려고만 예수님께로 옵니다. 그러나 우리도 목숨을 잃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식의 복음을 전해온 결과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많은 전형적인 복음주의자들은 기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회심자들은 새로 찾은 ‘믿음’으로 힘을 얻고, 기독교 활동들에 참여하고, 교회에 나가고, 봉사 활동도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참신하고 재미있는 일이라서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새로운 클럽에 들어가거나 새로운 스포츠를 배우거나 새로운 학교에 다니거나 새로운 직장에서 일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신한 느낌은 있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모든 참된 제자들에게 하라고 명하신 일은 한 적인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을 따르는 대가를 계산하고, 그러고 나서 그 대가를 치르기로, 즉 목숨을 바쳐 그분을 섬기기로 영원히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맞바꾸기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전부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대신에 그분의 삶(성품)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거듭 말씀하십니다.
막 8:3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자기와 자기의 유익을 잊고, 무시하고, 버리고, 잃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단단히 내게 붙어서, 계속) 나를(내 제자로서 나와 함께, 내 편에 서서) 따를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단단히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저 기도 한 번 하고 나서, 이제 ‘거듭난’ 클럽에 들어가 천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만 빼고는 평소대로 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막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어떤 성경에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고작 이 땅에서만 사는) 자기 삶을 버리면(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더 높은 영적인 삶을) 얻으리라”(amp)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맞바꾸기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에 따르기 위하여 내 삶의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버립니다. 그러면 그 대신에 그분의 영원한 삶을 받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지극히 중대한 부분이건만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는 그 점이 강조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혜택들만 듣고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십자가의 영향과 결단은 전하지 않고 부활의 약속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어떤 사람이 해병대 입대하기 위하여 12수를 하여 해병대에 입대하였다고 합니다. 서울대 들어가기보다 더 힘든 해병대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해병대에 목을 맸을까요? 해병대 군인들을 보면 일단 멋있지 않아요. 박력도 있고 군기가 잡혀있고 그래서 그런 면만 보고 해병대를 지원합니다. 그러나 무적 해병이 그냥 되는 것입니까? 훈련 받는 과정부터 일반 병사들과는 다릅니다. 피땀 흘리는 훈련과정을 통과하고 자대에 배치되는데 자대에서도 역시 일반 부대와는 사뭇 다릅니다. 군기가 세고 훈련 강도도 높습니다. 그냥 입대만 한다고 해서 저절로 해병이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접 기도만 했다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가 되지 않습니다.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삶으로 주님을 인정하라
바울 시대에 신자의 삶은 시시각각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의심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충성을 바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딤후 3: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딤후 3: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바울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바울의 교훈만이 아니라 삶의 모습 그리고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응답받은 기도들, 기적을 행하는 초자연적인 은사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탁월한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지적한 것은 그런 특성들이 아니라 그의 생활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이 성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들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쯤은 우리도 다 압니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속이는 자들, 즉 외관상의 정체와 진짜 성품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CBS에서 신천지에 대한 방송을 하는데 너무나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바울뿐만 아니라 신약의 다른 많은 기자들도 우리에게 경고한 싸움입니다.
유 1: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은혜는 순종할 힘을 준다
유다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은혜의 메시지를 왜곡시킨다고 말합니다. 이 말세에 그런 현상이 아주 만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란 하나님이 불순종의 생활 방식까지도 몽땅 다 보호해주시는 것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기만입니다. 성경은 은혜를 커다란 반창고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진리의 요구를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내적 임재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공로 없이 받는 하나님의 호의라고만 가르쳐왔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분의 호의이며 우리가 사거나 얻어낼 수 없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또한 우리에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며, 은혜를 참으로 받았다는 증거는 우리의 경건한 생활 방식에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은혜가 실존한다면 그것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확증됩니다.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순종의 행위와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무효한) 것이라
약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선한) 행함이 있으니 (선한) 행함이 없는 네 (말뿐인)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순종의 선한)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진정 구원받았다는 증거는 그 구원을 입증해주는 우리의 생활방식입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그분이 받으실 만하게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물론 구원은 선물입니다. 살 수도 없고 얻어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은, 다 버리고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그분의 주권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렇게 할 때 그분의 성품대로 살아갈 능력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딛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딛 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딛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2: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모든 경건치 못한 것과 세상적인 정욕을 부인하고, 바르고 경건하며 절제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칩니다. 일반적으로 교사들은 우리를 가르쳐서 실력을 길러주거니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고 권면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딛 3:8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항상)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우리는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늘 선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에게 은혜가 없었습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시대에는 다른 사람의 물리적인 목숨을 끊으면 살인자로 취급되어 지옥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형제를 바보라고 부르거나 편견을 갖거나 용서하기를 거부하거나 어떤 다른 형태의 증오를 품기만 해도 지옥 불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가르치십니다(마5:21-22참조). 왜 그럴까요? 이제는 우리에게 은혜의 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품대로 살아갈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 힘만으로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은혜를 충만하게 받은 사람은 순종할 능력이 주어집니다. 오늘 성례주일을 맞이하여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양육받고 있는가?
딛 2:11-15 / 조영식 목사 / 김포한신교회
들어가는 글
10월 둘째 주일입니다. 지난주 시찰회 목사님들과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수련회를 오가는 중에 어느 사모님이 ‘바램’이라는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저도 들어보니 그 여가수의 노래 가사에 인생의 의미가 담겨있었습니다. 특별히 노래 가사 중에서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간다”는 것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우리들이 나이를 먹는 것이 익어가는 것이 된다면 정말 복 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올 가을에도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아쉬워 할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성숙의 계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익어가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익어가는 삶이 될 수 있는지 깨닫고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양육의 첫 걸음은 무엇인가?
바울은 그레데 섬에 있는 디도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중해의 그레데 섬은 소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바울은 디도와 함께 그레데 섬에서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섬에 새로운 성도가 생겨나자 디도가 남아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레데 섬 사람들의 미신과 이단과 방탕 등 수많은 어려움들이 디도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힘들어 하는 디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제시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양육이었습니다(12절).
양육을 다룰 때 먼저 누구에게 양육을 받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양육을 받는 사람이 양육하는 사람에게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한다고 합니다(12절). 그러므로 주님께 양육을 받으면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양육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를 다니면 누구나 양육을 한번쯤은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양육이 하나님의 양육이었는지 사람의 양육이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사람에게 속한 양육이 되어서 그 열매가 갈등과 다툼으로 나타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부디 우리들의 양육이 하나님께 받은 것이 되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제자로 익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양육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11절).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양육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양육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받았더라도 양육으로 연결이 되지 못하면 신앙이 성숙하지 못하게 됩니다. 양육과 관련하여 교회가 범하는 실수는 교인들을 양육하기 보다는 사육한다는 것입니다. 양육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를 만드는 것이지만, 사육은 교인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교회 와서 양육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사육을 받았습니까? 부디 구원의 은혜를 받아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양육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어떻게 하나님의 양육을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양육을 받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바울은 경건하지 않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으로 변화된다고 합니다(12절). 그러므로 우리들이 경건해지는 만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경건은 무엇입니까?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히11:6).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했던 사람이 양육을 받음으로 경건해져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양육과 다른 하나님의 양육입니다. 그러면 경건하지 않는 사람이 경건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양육을 받아야 합니까?
첫째로 이 세상의 정욕을 버리라고 합니다(12절). 누구든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 세상의 정욕을 버리지 않으면 경건해질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정욕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소유함으로 육신의 만족을 채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더 많은 것과 더 좋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광고합니다. 이런 세상의 광고에 전염되어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해서 자신의 만족을 채워달라고 기도하는 부류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경건이 무엇인지 모르는 영적 소경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더 소유하고 싶은 정욕을 버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건의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둘째로 자신을 다스리는 신중함을 지니라고 합니다. 사람의 죄악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신중함을 잃어버릴 때 시작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죄가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창4:4,5). 여기서 하나님은 사람과 제물을 함께 연결하여 받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 결과로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창4:5).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합니다(창4:7).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 동생을 죽였습니다. 이처럼 사단은 우리의 감정을 충동질하여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육을 받아 신중해짐으로 감정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중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에도 우리의 감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님의 평안을 구해야 합니다.
셋째로 이웃과의 관계를 공정하게 하는 의로움을 가지라고 합니다. 경건하지 않는 삶은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양육을 받아서 경건해질수록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이웃을 공정하게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하는 의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는 의로움이 있어야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경건함이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3. 양육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는 양육의 열매가 익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고 합니다(13절). 우리가 씨를 심어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합니다. 어느 것이든지 기다림이 없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의 시대가 빠른 것을 찾다보니 너무 서둘러서 설익은 신앙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누군가를 양육할 때 너무 조급하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실망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양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양육은 말씀의 씨를 뿌리고 그 사람이 변화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리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디도에게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세상의 정욕을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으로 경건해지는 오늘의 삶이라는 관점입니다(12절). 또 하나는 복스러운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미래의 소망이라는 관점입니다(13절). 한국 교회가 오늘의 경건한 삶이 없는 채로 미래의 천국 소망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정말 미래의 복스러운 소망을 기다린다면 오늘의 삶을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오늘의 삶과 미래의 소망이 균형 잡힐 때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주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14절). 어느 한쪽이라도 균형이 무너지면 선한 일이 될 수 없으며, 주님께 속한 백성도 될 수 없습니다. 부디 오늘의 삶과 미래의 소망이 균형 잡힌 양육을 받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건한 주님의 백성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들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육으로 익어가는 믿음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경건하지 못했던 이 세상의 정욕을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으로 경건히 살아가게 하소서. 또한 오늘의 삶과 미래의 소망이 균형 잡힌 양육을 받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딛 2:11-14 / 송기성 목사 / 정동교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임마누엘 칸트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행복을 누릴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행복을 누릴 자격을 갖춘다는 것은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은혜(카리스)란 선물, 기쁨, 감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 은혜의 선물과 기쁨과 감사로 말미암아 행복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에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것도 그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고전15:10). 그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 (For God has revealed his grace.)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나타났습니다. 문제는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사도 바울은 디도서2:11,14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나타났다고 하였으며,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에게’ 라고 함은 구원은 결코 선민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나 결코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주심은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속량하시고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나타났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엡2:8). 구원은 모든 불법에서 속량하시고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엡2:10). 구원은 결코 자신의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속량 곧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친백성이 되게 하셨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행함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친백성으로서의 열매이며 증거인 줄 믿습니다.
미식 축구 선수였던 존 크로일(John Croyle)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우범 소년 합숙소인 Big Oak Ranch를 크게 열어 수많은 십대 소년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가정과 사회로 돌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그가 시작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낮은 데로 내려오셔서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나도 낮은 데로 내려간다” 라면서 “내가 높은 곳에 앉아 아이들에게 명령이나 지시만 하면 결코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내가 그들의 자리, 그들의 입장,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여 나를 비어 줄 때 그들은 나의 지도를 따랐습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요한복음1:12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낮은 데로 내려오셔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의 모양으로 성육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처럼 낮은 데로 내려가며 겸손과 복종, 사랑과 희생의 주님 발자취를 따라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양육하셔서 변화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사도 바울은 디도서2:12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은혜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양육하시는 은혜입니다. 여기서 ‘양육’이라 번역된 원문은 ‘교육’ (teaching, NIV), 혹은 ‘훈련’(Training, RSV)을 뜻합니다. 양육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교육과 훈련이 없는 양육은 양육이 아니라 사육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교육과 훈련을 통해 양육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자신을 주셨으며,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친백성 답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교육과 훈련으로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하나님의 양육 곧 하나님의 교육과 훈련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중함(self-controled)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의로움(upright)과 하나님께 대한 경건함으로(godly)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잘 양육된 사람은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변화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회심과 변화에 관한 고백입니다. 그는 “나의 회심(回心)” 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5년 전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나의 전 생애가 변했다. 이전에 욕망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던 것들을 갈구하게 되었다. 이전에 좋게 보이던 것이 좋지 않게 보이고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소위 행운의 무지개를 좇아 살았는데 그 허무함을 알게 되었다. 거짓으로 나를 꾸미는 것이나 여인들과의 타락한 생활이나 술 취해 기분 좋아하던 것이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었다.”
고린도후서5:17에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곧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써 나의 전 생애가 변화되었노라고 고백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복스러운 소망을 주셔서 주님의 영광을 기다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사도 바울은 디도서2:13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은혜이고 우리를 양육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복스러운 소망을 주셔서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스러운 소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기다리는 소망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기다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고 그 재림의 영광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복스러운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스러운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나타났습니다. 복스러운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복스러운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8:17).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스러운 소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복스러운 소망을 가진 사람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5:3-4).
지난 10월19일, 금요일 저녁 해질 무렵에 성전 건축비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았습니다. 충남 보령의 원산도 섬에 있는 구치교회 황선필 목사의 목회 간증과 건축 계획에 관한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성전 보수 후 받은 은혜와 복을 흘러 넘치게 하여 꼭 필요로 하는 교회와 선교지를 돕고자 하던 중 해외는 이미 우간다와 세네갈의 교회와 학교 건축과 증축안이 이루어졌는데, 국내에선 바로 이 교회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가 필요로 하는 금액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후 어느 권사님이 전화로 1억 원을 목적헌금으로 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토요 새벽기도 후에 남편 되시는 권사님이 1억 원 수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라는 확신과 감격이 들었습니다.
구치교회 황선필 목사님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놀라웁게도 황 목사님은 2억5천만 원 총 건축비 중 1억 원을 놓고 새벽마다 교우들과 함께 기도했다며 감격스러워 했습니다. 2013년 서리 전도사로 첫 목회를 시작하여 지난 6년 동안 국유지와 사유지를 매입하여 대지 170평을 마련하고 4m 진입도로도 확보한 그는 건축비도 1억2천만 원이나 준비해놓았습니다. 정동제일교회 한 가정에서 1억 원 헌금을 주시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구치교회 교우들은 기도 응답의 은혜에 감격하여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0월21일 주일예배 후에 교인 두 사람이 찾아와 각각1천5백만 원, 2천만 원 헌금을 더 하시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결산 2500만 원을 넘지 못하는 아주 작고 미약한 섬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스러운 소망을 품고 주님의 영광을 기다리며 그 소망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체험한 황선필 목사의 고백입니다.
“창립 133주년을 맞이한 어머니 교회의 성전보수 소식을 들었습니다. 페이스북을 통해 오래된 예배당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자원을 들여 헌신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대업을 완수한 교회에 염치불구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은 바로 정동제일교회가 옛 것과 새 것의 조화를 이루며 성전을 봉헌한 그 마음이 저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사라진 시대라고 하지만 저는 6년 동안 기적 속에 살았고, 사역했습니다. 또한 그 기적이 원산도에서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아멘!
로마서 4:18에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스러운 소망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기다리면서 마침내 그 소망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복스러운 소망을 주시고 주님의 영광을 기다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기적이 사라진 시대라고 하지만 기적 속에 살고 기적 속에 섬기면서 주님의 영광을 찬송하며 간증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디모데전서1:14에 사도 바울은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나타난 주님의 은혜는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입니다.
이미 나타난 주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이고, 우리를 양육하시는 은혜이며, 우리에게 복스러운 소망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양육받아 변화된 신자가 되며, 복스러운 소망을 받아 주님의 영광을 기다리는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그리스도인답게 일하자
딛 2:11-15 / 박봉수 목사
2차 세계대전 중에 히틀러의 명을 받은 독일군들은 유대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을 학살하라는 명을 받은 독일군 가운데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몇 사람을 학살한 뒤에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독일군들도 많았습니다.
독일 군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3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수용되어있는 포로수용소에 화장실을 하나만 남기고 없앴습니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화장실 앞에서 길게 줄을 섰습니다. 급한 사람들이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아귀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다 견디지 못하고 아무데나 일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수용소 곳곳은 배설물로 넘쳐났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고, 배설물과 뒤엉켜 살아가면서 짐승처럼 변해갔습니다. 하나씩 둘씩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독일군들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유대인을 죽이면서 한결 양심의 가책이 덜했습니다. 살인을 하면서도 과거처럼 그렇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서서히 유대인이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보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부질없어 보이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매일 오후 4시 반에 유대인 포로들에게 따뜻한 물 한 컵씩이 배급되었습니다. 이 때 일부 유대인들은 물을 남겨서 이를 닦았고, 세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깨진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것입니다. 독일군 눈에 이들은 특별하게 보였습니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이들을 함부로 학살하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노력을 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인간다움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인격의 고상함을 저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야 내 스스로도 인간다운 삶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 남들에게도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을 살면서 그리스도인다움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사람들로부터도 그리스도인으로 존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될 때 직장동료들이 보이는 반응이 대체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역시 그리스도인이었군요!”라는 반응입니다. 동료들이 함께 일하면서 남다르다고 여겨왔는데, 그 이유가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일터에서 모두가 좋은 동료요 귀감이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알고 보니 그리스도인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당신도 그리스도인이었습니까?”라는 반응입니다. 동료들이 함께 일하면서 자기들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겨왔는데, 뜻 밖에 그리스도이었다는 것입니다. 일터에서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비난까지 받는 사람인데, 그리스도인이어서 놀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평을 받아야 할까요? “당신도 그리스도인이었습니까?” 이런 평을 받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했다는 증거이고, 일종의 모욕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역시 그리스도인이었군요”라는 평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다는 증거이고, 일터에서 우리가 받게 되는 최고의 찬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바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먼저는 우리의 죄를 속량하셔서 죄사함 받게 해주시는 것이고, 다음은 우리가 선한 일을 열심히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면 먼저 우리는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선한 일을 열심히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사람에 관한 일이라면, 선한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겉사람에 관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답다고 평을 받게 되는 것은 결국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판가름이 날 것입니다.
그러면 선한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선한 일은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결과적으로는 같아보일지 몰라도 그 과정은 다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해야 하는 선한 일은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을 따르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본 두 가지를 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 십자가를 지는 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제일은 십자가를 지신 일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일이 제일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일들과 달리 십자가를 지는 일에는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셨지만 막상 예수님께 돌아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일방으로 희생을 당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도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마 10:38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마 16:24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생각해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지셨던 그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의 ‘은유’입니다. 마치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주의 제자들이 빛처럼 세상을 밝히는 존재라는 뜻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십자가의 본질이 일방적인 희생인 것처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일까요? 누구나 똑같은 희생을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가 해야 할 희생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각자가 희생해야 할 대상이 다르고, 희생해야 할 내용과 방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일을 하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일방적으로 양보하고 손해 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 26장을 보면 이삭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한 번은 이삭이 가뭄이 들어 블레셋 땅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농사짓고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큰 부자가 됐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우물을 돌로 막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이삭이 땅과 우물을 넘겨주고 그랄 골짜기로 옮겨왔습니다. 그곳에서 우물을 팠는데 물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랄 사람들이 그 우물이 자기들의 것이라 우겼습니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 즉 ‘다툼’이라고 부르고 선선히 넘겨주고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그곳에서 또 우물을 팠는데 역시 물이 나왔습니다. 그 지역사람들이 또 자기들의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싯나’ 즉 ‘대적함’이라고 부르고 또 넘겨주고 또 다른 곳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또 물이 나왔습니다. 다행히 그곳에서는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 불렀습니다. 이제 이삭은 르호봇에 머물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이삭이 보여준 이런 모습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억지를 부리는 그랄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일방적으로 양보했습니다. 이 우물이 누구의 우물인지 다투어 지켜낼 수 있지만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다투지 않겠다는 뜻으로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곳으로 가서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물이 나오자 또 그랄 사람들이 빼앗으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정말 싸워서 지켜내고 싶었지만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싸우지 않겠다는 뜻으로 그 우물의 이름을 싯나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바로 이 에섹이 이삭이 지었던 십자가입니다. 이 싯나가 이삭이 지었던 또 다른 십자가입니다. 이렇게 이삭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삭이 또 새로운 곳으로 가서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또 물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그랄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알았을 것입니다. 이삭이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르호봇이라 이름을 짓고 그곳에 머물며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삭처럼 양보하고 희생하며 선한 일을 하게 될 때 세상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일터에서 이삭처럼 살아야 합니다. 양보하고 희생하며 선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둘, 발 씻는 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발 씻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 가운데 사람들을 감동시키신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 중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감동시키신 일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저들의 발을 씻기신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셨습니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예수님께서 갑작스럽게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는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들어오셨습니다. 베드로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셔서 발을 씻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너무도 놀랍고 황송해서 거절했지만 예수님께서 뿌리치시고 발을 씻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제자들의 발을 다 씻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저들과 작별하시기 직전 저들의 발을 씻어주셨을까요? 그동안 수없이 섬김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섬길 줄을 몰랐습니다. 계속 세상사람들처럼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충격요법을 쓰신 것입니다. 직접 저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어주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누군가의 발을 씻어주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나 아닌 누군가의 발을 씻어줄 때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것으로 보여 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지방은 건조한 땅인데다가 아직 도로 포장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샌들을 신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밖에 다니다 집으로 들어올 때면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집안에는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발을 씻도록 물 담은 항아리가 준비되어있었습니다. 일반인들은 자기 스스로 발을 씻었습니다. 그러나 부유한 집이나 지체 높은 집에는 하인이 있어서 주인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요 선생이신 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발 씻음을 받아야 할 분이 발을 씻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발을 씻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선 다른 사람의 발을 씻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이유가 있어서 발을 씻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자발적으로 발을 씻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발을 씻어주는 것은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섬김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그런 섬김이 아닙니다. 내게 돌아올 것을 계산해서 하는 그런 섬김도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하는 그런 섬김입니다.
지난주에 중국선교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늘 가던 섬서성과 하남성 지역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조금은 예년과 상황이 달랐습니다. 중국정부의 정책변화 때문에 두 성의 기독교지도자들이 과거와 달리 더 조심하고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하남성 기독교를 대표하는 탕위민 목사님과 다른 때와 달리 길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분이 이번 우리의 방문에 대해서 중국말 두 가지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는 ‘급시우’(及時雨)입니다. 이 말은 꼭 필요한 때 비가 내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번 우리 방문이 꼭 필요한 때 찾아준 고마운 방문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설중송탄’(雪中送炭)입니다. 이 말은 눈이 많이 내린 엄동설한에 석탄을 보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엄동설한에 땔감이 부족할 때 땔감을 보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번 우리 방문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 도움을 준 방문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하남성 기독교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중국 중앙정부가 하남성의 기독교 발전이 가장 빠른 편이기 때문에 주목을 해 왔습니다. 이런 중앙정부의 관심에 대해 하남성 정부가 나서서 기독교 발전 추세를 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불법적인 교회 건물들을 정리하고, 교역자들도 철저하게 자격심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로 하남성 기독교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특히 신학교 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교회의 헌금이 줄고 학생들이 교회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정말 여러 가지로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이 때 방문한 것입니다. 저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은 물론이고 심적으로도 크게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급시우, 설중송탄이란 말을 쓴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참 기뻤습니다. 22년 동안 그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저들을 섬겨왔는데, 그 섬김이 저들에게 이토록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누군가를 섬겨 도움을 주며 선한 일을 하게 될 때 세상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일터에서 누군가를 도우며 선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일터에서 선한 일을 하며 그리스도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양보하며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섬기며 돕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딛 2:11-14 / 이수영 목사 / 새문안교회
오늘은 교회가 종려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유월절 명절을 지키러 온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며 외친(요12:12-13) 사실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곧 하나님이 보내시는 약속된 메시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할 정도로(마21:10) 큰 기대 속에 입성하신지 한 주일도 지내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죽음이 곧 이스라엘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셔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신을 십자가에 내주시는 일이 곧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일이었고, 유일하신 친아들을 그렇게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게 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 11절에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 하고는 14절에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이라고 말한 뜻입니다.
본문 11절에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만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되 유대인과 이방인, 남녀노소, 사회적 지위 등의 차별 없이 구원하기로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14절 끝에서 사도 바울은 그것을 밝히기를 우리로 하여금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미래의 소망과 오늘의 삶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대답합니다. 첫째로 미래의 소망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란 본문 13절에서 쓰듯이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둘째로 오늘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본문 12절에서 말하듯이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4절에서 말하듯이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복된 삶을 소망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 가운데 선한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야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백성이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런 백성이 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에서 그는 쓰기를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라.” 합니다.
물론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며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2절 머리에서 쓰기를 “우리를 양육하시되”라고 함으로써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합니다. 또 본문 14절에서는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라고 함으로써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성화시켜 가시는 성령의 역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의 구원의 사역을 믿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심을 받게 하시는 일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우리를 날마다 조금씩 성화시켜 가시는 일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에게 응답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전체는 바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응답이며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응답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본문 12-14절을 다시 봅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종려주일에 교회에서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 식으로 그 주간의 끝 날인 금요일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그 바로 전날인 목요일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시며 최초의 성만찬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찬예식에서 우리는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고 마십니다. 떡과 포도주는 각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극악무도한 죄인을 처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죄를 지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까? 그것은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우리를 우리의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를 원하셨으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 대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떡을 떼어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하셨고, 또 잔을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찬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그의 십자가 위에서의 우리를 위한 대속적 죽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재확인하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가 성찬을 대할 때마다 그저 죄 사함 받은 것을 기뻐하는 데에 그치며 만족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는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나라의 복된 삶에 소망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살기를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장래의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을 바라보면서도 오늘 여기에서의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을 성실히 살기를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신중하고 의로우며 경건한 삶을 살면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기를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깨끗한 삶을 살기로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신 뜻임을 마음에 새기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성찬에 임하는 우리의 바른 자세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바른 신앙의 고백과 삶의 다짐으로 성찬예식에 참여하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놀랍게 우리 안에 차고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딛 2:11-14 / 송기성 목사 / 정동제일교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월요일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인 동기동창 친구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형님, 감신 영성집회 환영합니다. 냉천동산에 불을 내리소서!!! 자랑스럽습니다. 임마누엘. 집에서 기도합니다” (2013. 3. 4 안석모 교수)
문자를 받고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이 친구는 지금 봄 학기를 휴직한 채 암 치료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몹시 힘들고 어려운 중에도 감심대 영성집회와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 친구를 생각하며 더 열심히 말씀을 전했습니다. 총장님을 비롯해서 모든 교직원은 물론 천여 명의 신학도들이 한 마음, 한 믿음으로 냉천동산에 불을 내려주시기를 갈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체험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찍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 10)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선포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냉천동산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간 이곳 정동예배당의 우리들에게도 나타나는 은혜인 줄 믿습니다.
1.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 2:11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구원을 주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테리오스’는 ‘소테르’, 곧 ‘구원자’에서 파생된 말로써 ‘해방하다’, ‘석방하다’라는 뜻으로써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구원의 보편성, 은혜의 보편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구원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짐을 시사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그 동안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아주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나 같은 죄인까지도 구원하시는 구원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빌리 그레이엄(William Franklin Graham, 1918~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 출생인 그는 플로리다 신학교와 탬퍼위튼칼리지를 졸업하였습니다. 1939년 목사가 된 그는 1049년 L.A. 전도대회를 계기로 대부흥사로 급부상했습니다. 이후 세계적인 부흥목사로서 크게 활약한 그는 1973년 5월과 1980년 8월 등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복음화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실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수십만 명을 주님 앞에 인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아멘!
로마서 3:23~24의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아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구원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죄 값을 다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죄인이기 때문이며, 믿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결코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은 성도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2.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 2:12에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양육하시되’(instructing)라는 말은 ‘교육하시되’(teaching, NIV), ‘훈련시키되’(training, RSV)라는 뜻으로써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단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양육과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경건하지 않는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self-controlled) 의로움과(righteously) 경건함으로(godly)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은혜일뿐만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변화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과 교회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이상 예배와 전도와 훈련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소홀하게 다룰 수가 없다는 신념으로 제자훈련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는 물론 자녀들이 그를 닮고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아들 옥성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얼마 전에 목회자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 마음을 먹엇습니다. 2009년 12월 5일 옥 목사님은 그 마지막 생일을 맞아 가정예배를 드린 자리에서 디모데전서 1장 12~17절의 말씀을 보셨습니다. 그중에 디모데전서 1:14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매우 중요한 충고와 교훈을 심어 주셨습니다. “성호야, 목사에게 필요한 건 딱 하나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하고, 그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야한다. 목사는 딱 두 종류가 있다. 은혜를 아는 목사와 은혜를 모르는 목사다. 은혜를 모르는 목사가 설교를 하면 그럴듯하기는 한데, 그 설교는 듣는 사람의 영혼을 때리는 울림이 없다. 성령의 감동이 없다. 너는 그런 설교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않니? 그게 바로 은혜의 차이 때문이다.”
로마서 12:1~2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배움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아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기까지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결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고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변화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3.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복스러운 소망 속에서 살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 2:13에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복스러운 소망’이란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기다리는 ‘영생에 대한 소망’(골1:5)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이란 역시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기다리는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행1:11; 히9:28)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이며,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은혜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영생에 대한 소망과 주님의 재림에 대한 복된 소망 안에서 인내하며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은혜이며,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변화의 은혜이고, 우리를 복스러운 소망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복된 소망(blessed hope)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3세때 혈우병 치료를 위해 수술을 받았는데 수혈로 인해 에이즈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밝은 모습으로 학교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신문과 TV에 보도되면서 레이건 대통령을 비롯해 유명한 가수들이 그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18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한 기독교 잡지에 알려져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게 더 이상 해 줄게 없어 마음이 너무 아프구나. 미안하다. 너를 사랑하지만 이젠 네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구나.”
“아빠, 저는 지금까지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아빠와 같은 선물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아빠는 제게 천국 갈 수 있는 티켓을 선물로 주셨잖아요. 제게 예수님을 소개해 주셨잖아요. 아빠 때문에 예수님 믿고 영생을 선물로 얻었어요.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어요.” 아멘!
베드로전서 1:3~4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지하신 것이라” 아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복스러운 소망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영생의 선물을 기뻐하며 결코 썩어질 육체나 재물 때문에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 곧 하나님께서 간직하신 유업을(the rich blessings) 소유하리라는 복스러운 소망 속에서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줄 믿습니다.
디도서 2:14의 말씀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속량하시고 구원하시는 은혜이며,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변화시켜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열심히 하며 복스러운 소망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은혜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에게도 깨끗한 삶과 선한 일로 덕을 끼치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자신을 주신 목적
딛 2:11-14 / 박덕기 목사 / 송정중앙교회
릭 워렌 목사는 그가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의 첫 페이지에서 “삶의 목적이란 개인의 성취감, 마음의 평안과 행복감 이상의 것이다. 가족과 직업 그리고 우리의 가장 큰 꿈과 야망보다도 훨씬 더 큰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삶의 목적을 알고 사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같은 책에 또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일리노이 대학의 철학 교수인 휴 무어헤드 박사는 세계의 저명한 철학자, 작가, 학자 250명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는 그 응답들을 모아서 책으로 출판했다. 몇몇 사람들은 가장 좋은 답을 제시했다고 자신했고, 또 몇몇은 삶의 목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 학자들 가운데 몇 명은 무어헤드 교수에게 그가 답을 발견하거든 자신들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는 철학자, 작가, 학자들도 사실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이현주 목사는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라는 그의 수필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의 형은 머리도 좋고 항상 공부도 잘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고, 따라서 아버지는 중요한 심부름을 언제나 형에게 시키시는 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더니, “현주야, 너 오늘 학교 가기 전에 군청엘 좀 다녀오너라.”고 했다. 처음에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좀처럼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망설일 것인가? 군청까지 2킬로 남짓한 거리를 뛰다시피 단숨에 달려갔다. 그런데 마당에 들어서서 한동안 가쁜 숨을 고르고 나서야, 자기가 무슨 일로 군청까지 달려왔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그날 아침 군청 서기였던 아버지는 ‘결근계’를 써서 그것을 둘째 아들에게 전달하라는 심부름을 시킨 것인데 “너 오늘 군청엘 다녀오너라.” 했을 때 ‘예’ 하고 대답한 녀석이, 서랍에서 결근계를 꺼내 들고 보니 금방 온데간데없더라는 것이다. 할 일 없이 4백년 묵었다는 느티나무만 서너 바퀴 똥마려운 개처럼 빙빙 돌다가, 맥 빠진 걸음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니, 아침 밥상에 앉아 있던 식구들이 나를 보고서 “넌 아버지 심부름은 안하고 어딜 갔다 오는 거냐?”면서 나무랐다. 이렇게 해서 모처럼 얻은 심부름 기회는 어이없는 낭패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다음에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사건이 한바탕 웃어 버릴 수 있는 철부지 시절의 실수담으로 끝나고, 시방 내 현실에서 그대로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또한 모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한평생 군청 마당의 느티나무나 돌다가, 자기가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태어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끝내 그것을 모르고 부질없이 생을 마감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사하다는 것이다.>
다음 주일은 ‘행복 나눔 잔치 주일’이고, 그 다음 주일은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고난 주일’이 다가오는데, 오늘은 주님께서 죽으신 목적이 과연 무엇이고,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11절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가리켜 만민구원설의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사람’이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역사 속의 모든 인류를 가리킵니까? 아닙니다. 칼빈은 여기 ‘모든 사람’을 교회에 소속된 각 계층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 설명을 합니다. 유대인의 사고 속에는 여자나 어린아이나 종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차별 없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같은 죄인들이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된 것입니다.
흔히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은혜라든지 거저 주신 다든지 하면서 싸구려인양 치부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받는 나는 은혜였고, 거저 받은 선물이었습니다만, 그 은혜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며 죽게 하시고, 그 공로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결코 값싼 은혜도 아니고 싸구려 상품이 아닌 것입니다.
고층 빌딩마다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돈을 내고 엘리베이터를 타본 일이 없습니다. 미국의 경우 무역센터 빌딩이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관광객들에게서 돈을 받습니다만, 그러나 대부분의 빌딩은 공짜로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베이터 자체가 공짜인 것은 아닙니다.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당 5천만 원, 1억 혹은 2억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 엘리베이터를 공짜로 탄다고 해서 엘리베이터가 공짜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구원받기까지에는,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에서의 피 흘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보내셨고, 죽게 하신 슬픔을 겪으셨습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주십니다. 단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2. 구원받은 성도는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15절에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고”라고 하였습니다. 출생한 아이에게는 어머니의 지극정성을 다한 양육이 따르듯이,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하신 성도들을 온갖 사랑으로 양육을 하십니다. 구원은 영적으로 출생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태어난 생명은 양육과 보호가 필요합니다. 미숙아로 태어난 생명은 인큐베이터 안에서 보호받으며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기간 동안으로 끝나야 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갓 태어난 새 생명은 엄마의 품속에서 고동소리를 들으며, 사랑받고 보호받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자라고 신앙이 자라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양육되는 것이 제일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내가 누구의 보호를 받고 양육 받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대통령은 경호원들의 철통같은 경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는 간수의 경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지키는 사람은 마귀의 소유인 것입니다. 미국의 시인이었던 롱팰러는 보통 종이 위에 그의 시를 써내려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그의 시는 6천 달러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10불미만의 종이 위에 그렸던 모나리자나 만종은, 지금 수십만 달러의 명화가 되었습니다. 누구의 것이 되느냐, 누구의 보호를 받느냐, 누가 나를 키워주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키워주시고 양육해주시는 복된 인생들임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양육한다’라는 말은 본래 ‘어린이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어린이를 가르치다’ 인격을 도야시키기 위해 ‘징계하다’ ‘훈계하다’리는 의미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어린이의 양육에는 단지 젖을 주고 밥을 먹여서 기르는 것만이 아니라, 징계도 따르는 법입니다. 캐넌 해이 에잇킨은 그의 저서 ‘은혜의 학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는 단지 구원하는 일뿐 아니라, 연단하고 훈련하는 일도 한다.” 그렇습니다. 구원과 연단, 훈련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은혜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과거에 한 번 구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에도 양육으로 계속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에게 두 가지로 작용하여 성장케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악을 버리게 합니다. 즉, ‘경건치 않는 것’인 부도덕과, 우상숭배와, 탐욕, 분쟁, 사기, 망령되고 헛된 말들을 버리게 합니다. 또한 ‘세상 정욕’인 쾌락과 권력욕 명예욕 무절제한 소유욕 등을 버리게 합니다. 이렇게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악 된 모습과, 죄 짓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게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로 징계와 채찍을 들어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서, 우리의 탐심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때로는 질병으로 징계하기도 하시고, 사업 실패의 채찍을 사용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징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식과 같이 대우하신다는 증표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그렇습니다. 아들을 징계하지 않는 아비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아들답게 양육하시기 위해서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양육하실 때에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아니라, 때로는 징계와 채찍을 통해서 우리를 훈계하시고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소극적 측면에서는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버리게 하고, 적극적인 측면에서는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양육을 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호화여객선 아틀랜틱호가 핼리팍스 해안에서 조난당해 수백 명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다행히 살아남은 생존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우체국을 찾아가 가족들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보내용은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그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길이 간직하기 위해, 전보용지를 액자에 넣어 사무실 벽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날마다 ‘구원 받았다’는 전보내용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의 채찍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3. 성도가 복스러운 소망을 갖고 살도록 양육하십니다.
13절에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복스러운 소망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같은 뜻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양육하시는 은혜는 또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복스러운 소망을 갖게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복스러운 소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 11절의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라는 말씀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이란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캐넌 해이 에잇킨은 그의 저서 ‘은혜의 학교’에서 두 번에 걸친 그리스도의 강림을 두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학교에는 서쪽 창문을 통해서는 갈보리 산으로부터 장엄한 광선이 흘러나오고, 동쪽창문을 통해서는 더 밝은 소망의 광선이 빛난다. 이처럼 은혜의 학교는 훌륭한 조명을 갖추고 있는데, 우리는 이 두 빛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살 수 없다.”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는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초림과는 달리, 천군 천사를 대동하고 신적 위엄을 지닌 채 장엄하게 오실 것을 나타내기 위해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구원의 완성으로서, 사탄이 결박되고 그리스도께서 심판장이 되셔서 온 세상을 공의와 평화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기쁨과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는 미국 남부 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마가렛 미첼이라는 한 남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썼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그 영화가운데 압권은 역시 마지막 장면입니다. 파란만장한 일들이 지난 후 스칼렛 오하라는 대지 위에 다시 굳게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내일은 또 다시 새로운 태양이 뜰 거야!”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희망을 갖고자 할 때 이 대사를 중얼거리곤 합니다. “그래, 내일은 또 새로운 태양이 뜨겠지!”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내일 반드시 새로운 태양이 뜬다면, 그 태양을 만드신 주님, 그리하여 의로운 태양으로 불리시는 그리스도께서 어찌 다시 뜨지 않으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내일 다시 태양이 뜬다면서 희망을 가지고 주먹을 불끈 쥔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아무리 고난을 당할수록 더욱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고 외쳐야 할 것이며, 마라나타!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신앙으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4.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14절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대적들의 모략이나 강압에 의해서 별 수 없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 위해 기꺼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심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첫 번째 목적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라고 하였습니다. ‘불법’은 ‘법이 없는 상태’ ‘법에 대한 경멸이나 위반’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죄악만을 일삼는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불법이라 했는데, 우리의 죄는 머리털보다 더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노예를 자유롭게 풀어주기 위해서는 그 몸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처럼,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살아가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그 대가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를 눈보다 더 희고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두 번째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신 목적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구역 성경에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는데, ‘친 백성’이란 ‘내 소유’라는 말씀에 기초한 것으로, ‘특별한 보배’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전쟁에서 승리한 왕이 전리품 가운데 자신을 위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구별해 놓은 보화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을 통해 우리를 정결케 하여 특별한 보배로 삼으신 것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선한 일’이란 단순히 윤리나 도덕적 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교회 목사인 모건 박사에게 한 소년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저는 지난밤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집회에 참석한 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 이후로 나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까지 편지를 읽은 모건박사는 깊은 생각이 잠겼습니다. 설교를 듣고 깊은 슬픔에 빠지다니.......그러나 그 다음을 읽는 순간 기쁨이 되살아났습니다. “목사님 제가 그토록 슬퍼하는 이유는 제 아버님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사는 날 동안 해야 할 가장 귀하고, 크고, 위대하고, 절실한 선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 내 동족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 내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개척자 중에 영국의 두 탐험가가 있었습니다. 로드와 리빙스턴입니다. 로드는 아프리카에 황금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노예로 사로잡아갔습니다. 또 엄청난 황금을 본국으로 가져갔습니다. 국민들은 세상을 위해 일하는 로드를 영웅으로 우러러 보았습니다. 반면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 복음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을 사단의 노예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리고 황금을 본국으로 가져가는 대신, 아프리카 영혼의 문제를 가져갔습니다. 또 본국이 아프리카를 침략하는 것을 반대했으니, 국민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리빙스턴을 눈에 가시로 여겼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나간 지금 로드는 죽었고, 그의 무덤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고 합니다. 리빙스턴 역시 죽었지만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혀 있고, 오늘도 많은 사람이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일은 ‘행복 나눔 잔치 주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신 목적을 잊지 마시고,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해서 살려내는,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로 선한 일에 열심 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의 공동체
딛 2:11-14 / 이동원 목사
필립 얀씨의 저서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영국에서 비교 종교학 회의가 열렸을 때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무엇인가라는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성육신의 교리’가 아니겠느냐고 했을 때 어떤 학자가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근거들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아무래도 ‘부활의 교리’에서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자 또 다른 학자들은 죽은자의 환생의 교리는 기독교의 전유물만은 아니라고 말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때 유명한 영국의 C.S. Lewis교수가 일어나 그 대답은 어렵지 않다고 전제하면서 다른 종교에서 찾을수 없는 기독교만이 제공하는 일관성있는 메시지는 ‘은혜’라고 지적하자 결국 모든 이들이 동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그의 믿음의 아들이요 제자인 디도가 그레데 섬이라는 곳에서 목회를 감당할 때 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설교하고 어떻게 교회를 치리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서 한마디로 그는 기독교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은혜에 대한 응답이라는 관점에서 가르침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은혜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미 로마교회를 향한 편지에서도 강조했고, 에베소 교회를 향한 편지에서도 역설한바가 있었습니다. 잘 아시는 유명한 엡2:8-9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같은 강조를 바울은 딛3:5에서도 반복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치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긍휼은 은혜의 다른 표현입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저주가 아닌 사랑을 베푸심이 바로 긍휼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하여 살아가도록 만세 전부터 준비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사도는 동일한 관점에서 목회서신인 디도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진실로 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의 은혜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왜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주님은 각각의 혼자로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공동체안에서 살도록 하셨을까요? 그것은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야 할 삶들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혜받은 성도들이 은혜 공동체를 통하여 추구해야 할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할 것입니까?
1. 과거의 불법들을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본문 14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이유를 설명하며 그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은 우리를 불법에서 구속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구속이란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회복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회복되어 살아가는 삶을 위하여 그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못박아 피흘리시는 희생하는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불법의 대가였던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불법이란 단어는 죄에 대한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죄는 곧 불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안하고 하라고 하지 말라고 하신 법을 어기고 행한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곧 그의 은혜로 우리는 이런 불법에서 사함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구원받은 우리가 다시 불법을 행하던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서신들을 통하여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과거로 돌아가고픈 과거 회귀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땅의 종살이에서 구원을 받아 애급을 떠나서도 자꾸 기회만 있으면 애급을 그리워하고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돌아가면 끝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인 사람들중에 창조적인 미래를 만들어간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자기 아내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아내는 너무 히스토리칼해서 괴롭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히스테리칼을 잘못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히스테리칼이 아니라 히스토리칼이래요.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옛날 결혼전의 자기 과거를 기회만 있으면 이야기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히스토리칼(historical)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아내에게 하나님은 히스토리칼하지 않으시다고 그분을 본 받으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도 않으시는 분”이라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그러나 이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처음 은혜를 받고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과거로 후퇴하지 않고 성장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적절하게 양육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양육의 첫 스탭은 과거의 죄나 불법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버릴 것을 버리고 떠날 것을 떠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12절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이것은 성경의 일관성 있는 가르침이 아닙니까? 베드로 전서2:1-2에도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의 은혜 받은 교회 공동체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변화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이유가 오늘의 성도들이 버릴 것을 버리도록 양육하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를 최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 초대교회만 해도 교회가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칠수 있었던 것이 성도들이 일단 예수를 믿으면 버릴 것을 분명하게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바람피우지 않고, 술 끊고, 도박을 포기하고, 이런 분명한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버릴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주의 은혜가 다시한번 우리에게 버릴 것을 버리게 하시는 은혜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 현재의 선한 일에 열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은혜에 대한 응답은 무엇인가를 버리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이 선한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결코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선행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이미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강조한 바가 있었습니다. 엡2:8-9에서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엡2:10에서 바울사도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선한 일-선행)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했습니다. 그는 다시 오늘의 본문 14절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깨끗하게 하심이 우리로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했습니다. 선행가운데 살아감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된 증거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은 결코 우리가 마땅히 이런 선한 일을 해야 하겠다는 도덕적인 당위의식으로 말미암아서는 안됩니다. 그런 선행은 믿지 않는자도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선행은 오래가지 못하며 자신의 이름 석자 선전하는 수준의 선행으로 끝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율법주의적 선행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주님의 놀라운 은혜 그 사랑을 체험한 가슴에서 솟아나는 자발적인 감격의 충동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필립 얀씨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을 명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의 여인 제니의 사랑에 대한 반응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이큐 75의 우직한 저능아 검프-아무것도 의미있는 일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받은-그가 어느 날 한 여인의 사랑을 받고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길에서도 운동장에서도 전쟁터에서도 그는 달립니다. 그에게 영웅이 되고 싶은 충동도 메달을 받고 싶은 충동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제니 때문에 사랑 때문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간증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이유-그 은혜, 그 사랑의 감동이 우리를 지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시 선한 일을 위해 달려가는 자가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저앉을 때마다 우리는 조건없는 첫 사랑을 알게 해준 그분의 음성-그리고 그의 사랑을 겅험한 동료들의 소리를 듣고 일어납니다. “포레스트-런, 런, 런(달려, 달려, 달려야 해)”
3. 미래의 소망으로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이나 공동체가 반드시 부딪치는 장애가 있다면 세상이 우리의 선의를 몰라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상처받고 좌절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선행을 보상받고 싶어할수록 더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행의 목표를 남들이 알아주기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선행의 유일한 동기는 은혜이며 차선의 동기가 있어야 한다면 자신의 경건의 유익을 위해서 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12절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것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버리고 포기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12절 하반부에는 우리가 버리면서 동시에 붙잡아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고”라고 가르칩니다. 이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한 인격의 표상이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 이시지요. 이렇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삶의 결과가 선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경건을 단순히 죄를 피하고 안 짓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약1:27을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서 돌아보는”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런 적극적인 선행을 함께 수행하도록 이 선행의 미숀을 주께서는 교회 공동체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선행을 하다가도 지칠 것입니다. 그리고 선행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욕심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괴로워 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13절의 교훈이 그것입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남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우리의 못다 한 선행의 마지막 과제를 완성시켜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못다 자란 인격의 마지막 부분을 채워 그분을 온전히 닮은자로 그분앞에 우리를 세우기 위하여 그분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에 우리에게 주실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경건이십니다. 우리의 행복이십니다.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공동체의 비전이십니다.
제가 “비전의 신을 신고 걷는다”에서 인용한 마더 테레사의 “어쨋거나”(Anyway)라는 시를 다시 한번 인용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때로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느껴진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용서하십시오/당신의 친절에 사람들이 오히려 당신의 동기를 의심하고 당신을 이기적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친절하십시오/당신의 성공을 보고 주변에서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친구들이 함께 모여온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성공하십시오./당신의 솔직함과 단순함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당신을 속인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정직하십시오/당신이 여러 해에 걸쳐 성취해온 모든 것을 사람들이 하룻밤에 다 무너뜨리려 할지라도 어쨋거나 성취 하십시오/당신이 찾아 낸 행복과 평화를 누군가가 질투한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행복하십시오/당신이 오늘 베푼 선함을 사람들이 내일은 다 잊는다고 할지라도 어쨋거나 선을 베푸십시오/당신이 가진 최선을 이 세상에 다 내어 주어도 세상은 여전히 부족함 투성이라 해도 어쨋거나 당신의 최선을 내어 주십시오.--”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할까요
딛 2:11-14 / 최창훈 목사
바울사도는 그의 믿음의 아들이요, 제자인 디도가 그레데 섬이라는 곳에서 목회를 감당할 때, 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설교하고, 어떻게 교회를 치리해야 할 것인가를 디도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서 기독교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것이며, 그리고 그 은혜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이미 에베소교회를 향한 편지에서도 역설한바가 있었습니다.
엡2:8-9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딛3:5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된 것”이라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여기 긍휼이란 은혜의 또 다른 표현으로써,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의 교회는 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각각 혼자로 남겨두지 아니하시고 공동체 안에서 살도록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야 할 이 땅의 삶들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 받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할까요?
1.과거의 불법을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구속이란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회복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회복되어 살아가는 삶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신 것으로서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불법의 대가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법”이란 단어는 죄에 대한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안하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어기고 행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불법에서 사함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받은 “우리가 다시 불법을 행하던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서신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누구나 과거로 돌아가고픈 과거 회귀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땅의 종살이에서 구원을 받아 애굽을 떠났으면서도 그들은 자꾸 기회만 있으면 애굽을 그리워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돌아가면 끝장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을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거에 매인 사람들 중에 창조적인 미래를 만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처음 은혜를 받고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과거로 후퇴하지 않고 성장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은 적절하게 양육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양육의 첫걸음은 과거의 죄나 불법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버릴 것을 버리고 떠날 것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했고, 벧전2: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일관성 있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오늘의 교회공동체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오늘의 성도들이 버릴 것을 버리도록 제대로 양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의 초대교회가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이 일단 예수를 믿으면 버릴 것을 분명하게 버렸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버릴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한번 우리에게 버릴 것을 버리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2. 현재의 선한 일에 열심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결코 선행으로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선행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엡2:8-9절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강조한 후 이어지는 엡2:10절에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했고, 본문 14절에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고 깨끗하게 하심이 우리로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행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된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은 “결코 우리가 마땅히 이런 선한 일을 해야 하겠다”는 도덕적인 당위의식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율법적인 선행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선행은 오래가지 못하며, 자신의 이름 석자 선전하는 수준의 선행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그 사랑을 체험한 가슴에서 솟아나는 자발적인 감격의 충동으로 평생동안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며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필립 얀씨는 명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선행이 검프가 여주인공인 제니의 사랑에 대한 반응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명화 “포레스트 검프”에 보면, 검프는 “아이큐 75의 아무 것도 의미 있는 일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받은 우직한 저능아입니다. 그런데 검프는 어느날 한 여인의 사랑을 받고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길에서도, 운동장에서도, 전쟁터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달립니다. 그는 영웅이 되고 싶은 충동도, 메달을 받고 싶은 충동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사랑하는 제니 때문에 달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고현교회 공동체가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의 감동이 우리를 지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위한 선한 일을 위해 달려가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 공동체는 모일 때마다 조건없는 첫 사랑을 알게 해준 예수님의 음성,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의 간증소리로 가득해야 하고, 또한 그들과 연합하여 교회 울 밖의 불신자들을 향해 복음을 전도하는 고현 공동체의 성도님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미래의 소망으로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이나 공동체가 반드시 부딪치는 장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의 선행을 몰라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쉽게 상처를 받고 쉽게 좌절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선행을 보상받고 싶어할수록 더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행의 목표를 남들이 알아주는 것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의 유일한 동기는 오직 은혜이며, 차선의 동기가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경건의 유익을 위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우리가 버리면서 동시에 붙잡아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고”라고 가르칩니다.
이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한 인격의 표상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삶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삶의 결과가 우리들의 선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경건을 단순히 죄를 피하고, 죄를 안짓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약1:27절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서 돌아보는”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적극적인 선행을 함께 수행하도록 이 선행의 사역을 주님께서는 교회 공동체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선행을 하다가도 지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행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욕심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괴로워 할 때도 것입니다.
그때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13절의 교훈이 바로 그것입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남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렇습니다.
우리의 못다한 선행의 마지막 과제를 완성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못다자란 인격의 마지막 부분을 채워 예수님을 온전히 닮은 자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우기 위하여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우리에게 주실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경건이십니다. 우리의 행복이십니다.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공동체의 비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 이유를 바로 알아 은혜를 입은 우리는 열정적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고, 예수님의 종된 신분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섬기며, 또한 우리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소명자로서 열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복음의 전달자가 되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마더 테레사의 “어쨌거나”라는 시를 인용하여 드리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람들이 때로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느껴진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용서하십시오/당신의 친절에 사람들이 오히려 당신의 동기를 의심하고 당신을 이기적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친절하십시오/당신의 성공을 보고 주변에서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친구들이 함께 모여온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성공하십시오/당신의 솔직함과 단순함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당신을 속인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정직하십시오/당신이 여러 해에 걸쳐 성취해온 모든 것을 사람들이 하룻밤에 다 무너뜨리려 할지라도 어쨋거나 성취하십시오/당신이 찾아 낸 행복과 평화를 누군가가 질투한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행복하십시오/당신이 오늘 베푼 선함을 사람들이 내일은 다 잊는다고 할지라도 어쨋거나 선을 베푸십시오/당신이 가진 최선을 이 세상에 다 내어 주어도 세상은 여전히 부족함 투성이라 해도 어쨋거나 당신의 최선을 내어 주십시오”
은혜를 받았으니
딛 2:11-14 / 손상률 목사
기독교를 「변화의 종교」라고 말을 합니다. 이는 세상의 다른 것들처럼 좋은 것이 나쁜 것으로 변질되는 파괴적 변화가 아니라 나쁜 것이 좋은 것으로 새롭게 되어지는 생명적 변화를 가리킵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 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이나(요2:9), 군대 귀신에 사로잡혀 사람 구실을 못하던 사람이 제정신이 들어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눅8:26-39),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변화가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는 역사야말로(고전15:54), 부활 신앙의 특징인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있고 마귀의 권세에 얽매여 있어서 육신의 소욕을 벗어날 수 없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일러줍니다(롬8:1-2).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를 가리켜 「은혜」라고 합니다.
본문 말씀 11절에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확신을 갖게되는 것은 분명히 은혜입니다. 사람이 은혜를 받게되면 몰랐던 것을 깨닫게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것을 알게되면 그 즉시 회개하게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결심을 다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결심이 곧 바로 그의 삶과 직결될 때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면서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는 「영성과 축복의 회복」이라는 주제로 부흥성회를 가져 온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바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그 은혜에 힘입은 새로운 삶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Ⅰ.경건 생활의 실천입니다.
12절에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하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세상의 정욕을 멀리하게됩니다. 은혜 받기 이전에는 세상의 유혹과 육신의 소욕들을 즐기며 거기에 어울리는 삶을 좋아하였으나,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이전에 좋았던 모든 것이 배설물처럼 가치 없이 여겨집니다(빌3:8). 요한1서 2:15-16에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 근신(謹愼)하는 생활입니다.
「근신」이란 자기를 살피며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것을 뜻합니다. 베드로전서 4:7-8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근신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는 사탄의 유혹에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5:8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13에는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고 하였습니다.
(2) 의로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마6:33). 여기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성품을 뜻합니다. 옛날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시4:1). 예수님꼐서는 산상보훈을 강론하실 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마6:33). “의”는 “불의”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곧 공과 의를 추구하는 것으로써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직결되는 삶을 뜻합니다. 예레미야5:1에 “…너희가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3) 거룩한 삶을 말합니다.
본문 12절에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의 거룩한 삶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레11:45). 은혜 받은 사람은 과거의 세속적인 생활 방식과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살던 습관들을 정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에 합당한 생활로 전환하여야됩니다. 에베소서 4:22-24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5:18에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지 아니하면 우리 속에 성령이 근심하거나 소멸하게됩니다. 거룩하고 신령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 하는 것입니다.
Ⅱ. 소망 중에 인내하게됩니다.
13절에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1) 복스러운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복스러운 소망이 있습니다. 이 복스러운 소망을 가리켜 “영생의 소망”이라고 하였습니다(딛1:1). 디도서 3:7에는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영원한 소망이 되지 못합니다. 모두 다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요소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전도사역 가운데 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 이 일은 인간에게 주는 가장 큰 소망을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행23:7).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빌3:19). 한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빌3:20-21).
(2)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아야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고 살게됩니다. 히브리서 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선진들은 믿음의 조상들을 뜻합니다. 아벨에서부터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위시하여 모세와 사무엘과 다윗과 같은 역대의 모든 인물들이 하나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을 대망하면서 믿음의 자취를 남겨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한 성을 예비해 주셨다고 하였습니다(히11:6).
성도에게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어렵게 살아도 언젠가는 오늘의 이 어려움을 옛날 일처럼 간증하게 될 축복의 날이 오고 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총리가 된 요셉은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형들을 향해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라고 간증하였습니다(창50:20).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하였고(고후4:16), 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고후5:1).
(3) 인내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하루아침에 당장 이루어지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소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나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로마서 8:24-25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성도가 가지는 소망을 밭에 나가 씨를 뿌리고 가꾸는 농사에 비유하였습니다. 야고보서 5:7-8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간한 고생을 감수하면서도 인내하며 자기의 일을 충실히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큰 기쁨의 열매가 돌아옵니다(시126:5-6).
Ⅲ. 선한 일에 열심하는 것입니다.
14절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디도서 3:8에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선한 행실로써 그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일들입니다.
(1) 예배하는 일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고 영광 돌려 드리는 것은 신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24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위해서 모든 정성과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되는 것을 말합니다.
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생활이 복잡하고 다양해짐에 따라 하나같이 시간에 쫓기고 분주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소홀히 여기거나 자기 할 일을 우선시 하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것은 곤란합니다. 주일이 되면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교회의 신령한 행사를 위해 봉사하도록 힘을 써야됩니다.
② 십일조와 헌물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보답의 의미를 가집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마음과 물질을 동시에 바치게됩니다. 말라기 3:8에는 “십일조와 헌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헌물”은 감사의 뜻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을 의미하지만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 놓은 것입니다. 성도가 드리는 예배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와 같은 물질을 바쳐야합니다,
③ 말씀을 사모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의 양식이라고 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내물을 찾아 갈급해 하는 것 같이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그 말씀을 탐구하고 귀담아 들어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복이 되는 것입니다(시1:1-3).
(2) 총력 전도와 합심기도입니다.
전도는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성도들에게 당부하신 지상 명령입니다(마28:19-20). 하나님께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도, 보혜사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도,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생명을 구원하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일을 힘써야됩니다(딤후4:2).
옛날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목숨을 걸고 전도하는 일에 임하였고 한편 이 일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행2:37-42). 우리교회가 「총력 전도와 합심기도」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2003 새 생명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주님의 사업을 성취하므로써 우리에게 새 성전을 짓게 하시고 21세기 교회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를 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남녀노소와 직분에 구별이 없고 또 오래된 신자나 새로 믿는 사람들에 상관없이 모든 성도가 한 마음으로 참여하고 열심을 다해서 이루어 나가야 될 사명인 것입니다.
(3) 봉사와 헌신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연합된 신령한 공동체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사람의 몸으로 비유하면서 모든 지체가 제각기 자기의 역할을 다하여 몸을 세우게 된다고 하였습니다(엡4:16). 은혜로운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처럼 자기의 일에 충실하면서 몸 된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합니다. 성도의 믿음은 봉사를 통하여 자라가고 실증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부 불건전한 교회나 잘못된 사람들이 교회를 하나의 휴식처나 인간적인 교제의 공간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도리를 외면한 채 자기의 편안함과 유익이 교회 생활의 요체인 것처럼 잘못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은혜를 받을수록 복음과 함께 고난 받기를 즐겨하게됩니다(딤후1:8). 성령의 은사가 충만해질수록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과 봉사하는 일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진력하게됩니다(엡4:12).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제게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섬기는 일에 앞장서서 헌신하게됩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삶이요(막10:45), 그의 자취를 따라가는 성도들의 승리적인 생활원리입니다(벧전 2;21).
성육신의 능력
딛 2:!1-14 / 임영수 목사
옛날 로마시대에 황제 숭배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 황제는 신적 존재로 숭배 되었습니다. 그러한 황제가 어느 지방 도시를 방문하면 그 지역 전체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세금감면, 도로건설, 극장건립과
같은 특혜가 베풀어졌습니다.
오늘 디도서 본문에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사는 지구라는 항성을 방문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지구 방문으로 인해 특별한 혜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 황제가 줄 수 있었던 세금감면, 도로건설, 외국권력으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인간 구원입니다.
디도서에서 말하는 인간 구원은 베드로전서에서와 같이 “낡고 무의미한 삶의 틀에서 해방‘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세상의 욕망과 하나님의 부재 상태에서 해방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아 갈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전연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법을 어기며, 율법과 삶의 규범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에 지배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사물에 대한 잘못된 표상들이 그들의 욕망을
더욱더 부추깁니다. 그들은 오로지 세속적인 사물, 소유물, 먹고 마시기, 성적 만족감에만 집착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데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신중함, 의로움, 경건함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디도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현현(Epiphany)으로 베풀어지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본문에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 은혜는 우리를 교육하며, 경건하지 않음과 속된 정욕을 버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신중하 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합니다.” (표준 새 번역개역)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구원의 은총이 무신론의 공허한 활동과 기질에 따른 노예화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세속적 욕망, 다른 사람의 눈치, 체면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결정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자유롭게 살도록 성령님을 통해 교육시킵
니다.
디도서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해방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 단어로 표현하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신중함 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하여 건전한 사고를 갖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 목적에 맞는 것 적당하며 예의바름 입니다.
즉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정욕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우선 자기중심대로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실재와는 거리가 멉니다. 실재를 바르게 보지 못할 때 헛된 환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쉽게 좌절하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인간의 불행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신중함으로 교육받은 사람은 참된 실재를 인식하게 되고, 현재를 바르게 의식하고, 매순간 온전히 현재에 머물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온전히 현재의 상태에 머물지를 못합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은 현재에 존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실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다른 나라를 그리워합니다.
그 곳에 가면 자신의 정욕대로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그를 더욱더 아버지를 떠나가게 만듭니다. 결국 그는 환상의 세계로 달려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곳에는 그를 진정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삶의 비참성 가운데서 실재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참된 실재의 삶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는 비로소 허구와 실재를 바르게 보게 됩니다. 그가 전에 그렇게 동경하던 그 화려함, 멋짐, 아름다움이 얼마나 가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디도서의 저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로마 사회를 바라보게 될 때 로마 사회가 만들어 놓은 만족을 추종하는 삶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실재가 아닌 가상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동역자 디도에게 그 사실을 서신으로 상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신중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은 망상과 허영, 정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입니다. 신중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은 그가 상상하는 대로 세상과 사람이 바뀌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합되게 살아가려는 부담으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그 다음은 의로움 입니다.
의로움은 삶의 질서, 즉 사회질서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생명의 질서에 따라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올바르고 공정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치품을 점점 더 많이 가짐으로써, 즉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하여 더 많은 돈을 벌면서 자신들의 외적 상황을 지금보다 더 낫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다른 사람의 작은 배려를 얻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노력하며 애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고유한 존엄성에 상응하지 않는 것을 좇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달리 번역하면 “자기 영혼에 해를 끼친다면”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 호의, 물질적인 것을 다 얻었다 하더라도 결국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면 심한 공허감, 허탈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삶에는 자유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없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의 분위기가 외적인 명성만을 전부로 여긴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영원한 실재를 감지한 그들은 모든 명성이 가상임을 폭로했습니다.
그들은 당 시대 사회의 헛된 짓들을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해방 되었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사람들은 “60세가 되어서야 자기 자신에게 속아서 삶을 빼앗겼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빼앗았다고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올바르고 조화롭게 진정한 자아와 일치하며 살아가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상실하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사람은 의롭게 살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올바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해서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삭개오는 당시대에 의롭게 살아가지 못한 사람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그는 작은 키에 자신을 잃어버린 상실감,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허를 재물과 권력으로 채워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세리장으로서 백성들의 재물을 불법한 방법으로 착취했습니다. 어느날 그리스도께서 그 지방을 방문했을 때 삭개오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택이 내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의 집안 구석 구석에 빛이 비췄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두운 영혼에도 빛이 비췄습니다. 그는 그 빛 가운데서 자유하는 새로운 사람으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욕심에서 해방되었고, 자신의 삶을 열등감과 정욕에 사로잡혀 결정하지 않고 새로운 자아의 사람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자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진정 재물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이웃에게 새로운 존재로 다가갔습니다.
이웃은 그에게 더 이상 착취의 대상이 아닌 도와주고 협력하며 살아가야할 그의 형제 자매였습니다. 그의 집과 그의 마음에는 재물이 쌓여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머무는 곳이 되었습니다.
자유인으로서 삭개오는 주님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드디어 예수님께로부터 그에게 구원이 선포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마지막으로 경건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를 파멸의 소용돌이에서 떼어 놓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 입장에서 보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를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샘과 접하게 해줍니다.
그 샘은 결코 마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 샘에서 갈증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를 우선 진실로 생기 있게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면 우리는 인간의 비극 전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비극이란 인간이 자신을 보지 않으며 살아가고 환상을 좇으며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한 채 항상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은총과 함께 나타나십니다. 그 분이 내가 사는 도시에 나의 일상생활 안에 나타나십니다. 왕이 지방 도시를 방문할 때 그 도시 전체가 왕을 맞기 위해 단장하고 꾸미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는 하나님의 사랑어린 깊은 배려가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사랑으로 어루만지시고 그의 사랑으로 나의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비추시며 그 사랑의 빛으로 내 영혼의 구석구석을 밝혀 주기 위해 오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의 삶은 모든 면에서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사는 도시가 사람이 살 수 없고 더럽고 궁핍해서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무가치한 곳이라고 한탄하지 않게 됩니다.
나의 열등감에 대해서도 한탄 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인 나에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사랑을 지니고 나타나십니다. 즉 나의 내면의 도시에서 거리를 활보하고 어디에서나 호의와 동의를 선포하십니다.
그 때 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닿지 않거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정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정의 빛 가운데서만 실재적인 것과 비 실재적인것을 분별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된 후에 서로 상반되는 현상이 일어나게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비 실재적인 것들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사항들이 달라집니다.
그전에는 소박한 것, 유행의 풍조에 따르지 못하는 것, 양이 적은 것, 겉으로 아름답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전에는 소위 사회에서 상류층들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의 축에 끼여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모두 비 실재적인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무엇이 진정 값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 없이 살던 삶에서와 정욕의 노예적인 삶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새로운 자유인으로 살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시대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유인으로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디도서 2장 11-14절 / 김우생 목사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보내는 목회서신을 통해서 "바른 교훈" 즉 건전한 교리를 가르쳐야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며, 생활에 대해서도 말해야한다고 강조한다. 교회의 놀라운 면은 하나님의 가족 누구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격차가 없다는 것이다. 남녀노소, 신분, 학식, 빈부의 경계가 없고, 민족의 구분도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는 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Ⅰ. 은혜는 우리를 구원한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가 없다. 하나님이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임하였다. 죄의 굴레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다. 값을 치르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모든 불법에서 구속하셨다함은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Ⅱ.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구원은 '위치의 변화'를 가져다준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변화된다. 뿐만 아니라 태도의 변화, 욕구의 변화, 포부의 변화, 행동의 변화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킨다. 성화의 목표는 믿는 자가 '더욱 예수같이' 되는 것이다. 성별 깨끗하게 함은 죄로부터 분리될 뿐 아니라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다.
Ⅲ. 은혜는 복스러운 소망을 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린다. 이는 우리의 소망이요 영광이다. 주님 오시기를 소망하므로 깨끗한 생활을 하고 그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고 모이기에 힘쓴다. 그리고 물질을 나누며 이 세상 것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며 인내한다. 인간의 소망은 쇠잔해진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소망은 영광의 소망이다.
10월 31일 주일 낮 설교 말씀
<희망 (격려의 덕성)>
로마서 8장 24-25절
희망을 갖는 덕성을 개발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이어야 한다. 이 시간은 희망을 갖는 것이 무엇이며 그 바탕이 무엇이며 삶에 미치는 영향과 희망의 기초 및 개발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Ⅰ. 희망의 바탕 (롬8:24-25)
신약에서 희망은 '좋은 것에 대한 확신을 갖고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희망을 가진 사람은 그가 어떤 일을 당하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좋은 것이 있게 되리라고 확신을 갖고 기대한다. 신구약에서 희망은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데 희망을 갖는 것은 가는 길을 위해서 감동과 힘을 주는 것이다.
Ⅱ. 희망의 축복
첫째로 희망은 어두움을 밝게 한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상황도 견디게 한다. 둘째로 희망은 곤란한 자에게 힘을 준다. 셋째로 희망은 필요한 동기를 부여한다. 이 세상에서 행해진 모든 것은 희망 때문에 된 것이다.
Ⅲ. 어디에 희망을 두어야 하는가?
성경은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말한다. 육체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떨어진다. 그리스도인은 천지를 지으시고 주재하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 참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분이 오시면 우리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덧입게 된다.
Ⅳ. 희망을 갖게 하는 길
첫째로 희망은 믿음과 사랑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희망이 바탕이 있게 된다. 둘째로 성경의 약속을 주장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들을 가지리라는 희망을 갖게 하셨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주장할 때 희망이 있게 된다. 이처럼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과 연관되어 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친백성
딛 2:11-14 / 최낙중 목사
우리나라의 근대사는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 개화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 조선왕국이 일본에 거의 합병되어 가고 있던 1908년 여름에 미국의 콜로라도 덴버에서 해외에 있는 한국인들이 모여 애국 동지회 집회를 열었습니다. 조국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출해 보려고 열린 민족회의 였습니다. 이 회의에 당시 33세의 나이로 하버드대학 석사과정에 있던 이승만씨가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회의가 끝났을때 영국의 친한파 기자인 프레데릭 맥켄시씨로부터 위로와 격려의 편지가 왔습니다.
“비록 조선은 나라를 잃어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을 확신할 것은 기독교 신자가 민족의 지도자로 선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프레데릭 멕켄지의 예언대로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이 되었고 1948년 7월에 그의 주도하에 처음으로 열린 국회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승만 정부 때에 한경직 목사님의 제안으로 군목제도를 실시하였고 군대에 들어온 청년들을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군대에서 주님을 믿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독교 복음으로 우상숭배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니 하나님께선 우리나라의 경제를 축복하셨습니다. 1945년 일본에서 해방되던 해의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오늘날 아프리카 케냐와 비슷한 35달러에 불과했으나 50년이 지난 1995년도에는 1만달러가 됐습니다. 무려 2714배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항으로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중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오늘날 연세대학교를 세웠고 알렌선교사와 광해원, 오늘날의 세브란스병원을 세웠으며 새문안교회를 세웠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4대째 한국에서 일해 왔습니다.
새 역사를 일으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어린아이나 노인이나 가난한자, 병든자 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그들을 돌보라고 세우신 부모님이 있습니다. 노인들에게는 그들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자를 돌보라고 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세상은 따스한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버려진 자식들이 있습니다. 정성어린 돌봄으로 평안해야 할 노부모님을 돌보는 자식이 없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신음하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짐을 지는 사람들입니다.
어둔 세상이 짐을 짊어지는 사람들로 인하여 밝아집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어 집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선한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라 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께서 지라하신 사명의 십자가를 집니다. 십자가야 말로 본인을 기쁘게 하고 남을 기쁘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2 에 각 사람이 심은대로 거두리라고 하십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함으로 남을 기쁘게 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 기쁨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선한일에 열심하는 사람은 남을 칭찬하고 격려합니다.
벌과 나비는 달콤한 꿀이 있는 꽃을 찾아오지만 모기와 파리는 썩어서 악취가 난 곳으로 모여듭니다.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꿀을 가진 꽃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평안, 기쁨을 주신 성령님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악한 감정을 품은 사람은 스스로 원수 맺는 자이며 마귀가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일에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은 언제나 남을 섬기고 대접하며 친선을 도모합니다.
예) 지금으로부터 30년전 저희 교회가 김포집 예쁜이네의 술집사이에서 개척교회를 시작 했을 때에 저는 기도원에 다녀오는 길에 길을 찾는 한 자매님의 길잡이가 되었는데 그 작은 친절로 인해 그 자매님이 집 한 채에 해당하는 거액을 연보함으로 저희 교회는 술집사이에서 2층 콘크리트건물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화를 당한 사람들을 남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도모하려합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자기의 시간과 몸, 재물까지도 남을 돕는데 쓰는 사람입니다.
이런자들에게 약속한 복이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복있는 사람이 되려면 많이 베풀고 나누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건강하려면 ‘소욕다시’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욕다시’란 욕심을 버리고 많이 베풀라는 뜻입니다. 욕심은 건강을 헤치게 되나 후하게 베푸는 사람은 건강이 아주 좋아집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 하실 때에 남에게 선을 베풀 때에는 뇌 속에서 건강에 도움을 주는 세로토닌, 베타엔돌핀, 노에피네비린 등 여러 가지가 분비되어 온몸이 건강해진다고 합니다.
신경성질환으로 사경을 헤매이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다가 건강이 좋아진 일도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록펠러입니다. 록펠러는 53세에 세계적인 부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경성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머리가 다 빠지고 잠이 않오고 몸이 쇠약해져서 살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다가 “네 가진 재산을 어디에 쓰려느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의 쌓아놓은 재물이 죽음 앞에선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병이 돈 독으로 생긴 병임을 깨닫고 그 돈 독에서 해방되기 위해 예배당을 짓기 시작하여 그의 일생에 4928개의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또한 국가를 위해, 인류를 위해 24개의 대학교를 세웠습니다. 록펠러는 자기의 것을 남에게 베푸는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신경성으로 오는 모든병이 떠났습니다. 건강이 회복되어 98세나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어릴때 아주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 중 “돈돈” 하다가 돈독이 올라 죽는자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너무 큰 부자로 태어나서 돈 귀한줄 모르고 돈을 물쓰듯 쓰다가 나중에는 돈이 없어 거지가 되어 굶어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사람들에게 베푸는 즐거움으로 열심히 사는자 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큰일에도 작은일 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의 짐을 다 하나님 앞에 맡기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예) 몬트리올 대학의 한스셀리 박사님이 쥐에게 실험을 했습니다. 쥐들이 평화롭게 놀고 있는데 매일 아침 고양이를 그 앞으로 지나가도록 한 것입니다. 1주일 후에 쥐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쥐들이 위궤양을 앓고 있고 어떤 쥐는 위가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또한 심장이 망가져 있는 것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정신적 불안은 온몸을 병들게 한 것을 보여주는 것 입니다.
분노의 힘을 측정키 위해 사람들이 화를 낼 때 그 입김을 고무풍선에 담아서 냉각시킨 후 그 입김이 액체로 변했을때 그 액체를 주사기에 넣고 쥐에게 투입 시켰더니 쥐가 3분 동안 발작하더니 죽었다고 합니다.
복있는자로 살려면 분노의 감정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폭발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분노의 감정을 품고 잠자리에 들면 그 밤은 자기 몸을 병들게 하는 밤이 되고 맙니다.
시편 37편의 말씀입니다.
1.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2.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4.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5.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6.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7.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지어다.
8.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사람들이 성을 내어 도움이 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성을 내면 자살행위요 또한 남을 죽이는 살인행위가 될 것입니다. 사람이 성을 내는 것은 분명히 범죄행위인 것입니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잠29:22)
분노의 감정으로 십자가에 못박은 자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일수 없습니다. 분노의 감정은 사람들이 자기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소위 자존심이 상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삶의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 2:19-25)
예)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자인 빌케이츠씨 에게 당신은 세계 제1의 갑부요.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빌게이츠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나는 매일 자신을 향해 “나에게는 좋은일이 일어난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성공의 배경은 자신감이었습니다. 그 자신감은 하나님께서 내게 능력주실 때 나는 무엇이든지 할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결론) 선한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은 복의 근원이며 그들은 어둔 세상의 짐을 지고 남을 칭찬하며 격려하고 언제나 남을 섬기며 대접하며 친선을 도모합니다. 또한 작은일에도 큰일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분노의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한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으로 우리에게 삶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좇아갑시다.
열심있는 그리스도인
딛 2:14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주대망 2013년 공동체 전도축제를 앞두고 태신자들을 구역으로 초청하는 첫 주간을 잘 보내셨습니까?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열심 있는 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위대한 일의 배후에는 열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의 배후에 있는 추진력이 바로 열정입니다. 위대한 음악이나 문학, 드라마나 건축의 배후에 있는 힘이 바로 열정입니다. 열정은 위대한 일을 이루게 합니다.
열정은 전쟁에서 군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희생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운동선수로 하여금 기록을 갱신케 하는 동력입니다. 열심은 바로 과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업적을 이루게 하는 추진력입니다. 열심이야말로 토인비로 하여금 엄청난 대작 역사의 연구를 집필케 하는 원동력입니다.
열심 없이는 그 어떤 위대한 작품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열정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케 합니다. 열정은 생을 활기차게 만들며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열정이 식으면 삶이란 따분하고 피곤하고 무료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열정을 회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말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단 한 마디로 요약해서 사랑하는 것이고, 둘로 구분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풀어서 설명합니다. “너의 모든 열심을 다해, 모든 기도를 다해, 모든 지성을 다해, 모든 힘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앙은 가진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자주 “마음을 다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열정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열심을 다해 주님을 섬겨야 한다고 합니다. 마음을 다해 복종하고 신뢰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은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무엇을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열심을 다해서 하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상관이 없이 모든 마음을 다해서 하십시오. 어떤 일이라도 대강하지 마십시오. 대강하려면 아예 시작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12장 11절은 말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자동적으로 열심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불을 댕기고 잘 붙도록 부채질을 하라는 뜻입니다.
표준새번역은 말합니다. “열심을 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롬 12:11, 표준새번역) 영적 열정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부채질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심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연세 드신 분도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열정은 성격과도 무관합니다. 내향적인 사람도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외향적인 사람도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실 때 감정을 주셨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로 인해 느끼도록 만드셨습니다. 때로는 환경이나 체제가 우리를 억누를 수 있지만 인간에게 열정이란 자연적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기분이 좋아도, 나빠도 감정 표현이 분명합니다.
자, 그러면 왜 우리의 열정은 식습니까? 매사에 대한 이전의 열심이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직장생활이나 결혼생활이나 이전 같은 열정이 사라지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심지어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이전 같은 가까운 느낌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열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1. 사는 목적을 분명히 하십시오. 목적이 없는 삶은 사람들의 열정을 빼앗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입니다. 삶의 목적이 없으면 왜 살려고 노력하겠습니까? 누가 애를 쓰겠습니까? 아침에 일어나려고 애쓰며, 먹고 살려고 발버둥 치겠습니까?
삶의 목적을 잃으면 산다는 것은 무료해집니다. 여러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잃고 나면 점점 더 열정은 사라집니다. 열정과 목적은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없는 삶이란 무덤덤해집니다. 사는 것이 고달플 따름입니다.
이사야도 한 때 자신의 삶을 이렇게 느꼈습니다.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사49:4, 표준새번역)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느낌을 느껴보지 못했습니까? 목적 없이는 열정은 없습니다.
반면에 분명한 목적은 열정을 창조합니다. 삶의 목적이 뚜렷해지면 사는 것이 새로워지고 활기가 넘치기 마련입니다. 기껏해야 자신을 위해서 산다면 삶에 대한 커다란 열정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삶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가진다면 하나님이 의도하신 일에 대한 열심을 품게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으로서 열정이 타오를 것입니다.
나이가 많던 적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잘 할 수 있는 중대한 일이 기다리면, 잠자리를 박차고 아침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꾸물거리고 지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상한 목적은 뜨거운 열심을 품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열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둘째로 2. 잠재된 능력을 사용하십시오.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재능과 은사를 능력을 목적이 있어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하는 일이 그 재능과 은사와 능력과 크게 상관이 없다면 삶에 대한 열정을 상실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태어날 때 하도록 의도된 직업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직업에 매여 있으면 열심히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삶의 열정을 잃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자기의 잠재력을 100% 다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질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은 밥 먹고 살려고 주신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능이나 능력은 먹고 살기 위해서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성도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은사를 사용하는 즐거움을 맛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목적이 있어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재능과 은사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섬기면 삶의 열정을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각 사람은 주께서 그에게 나누어 주신 대로, 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그대로 살아가십시오.”(고전7:17, 표준새번역)
여러분이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를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직업보다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에게 적합한 사역을 찾아, 섬기는 기쁨을 회복하십시오. 받은 은사와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하면 여러분의 삶은 한결 활기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모습으로 창조되었는지 배워보십시오. 울산교회는 훈련받은 모든 성도들이 적재적소에서 섬길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앞으로도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사역을 발견하고 섬김으로 섬김의 기쁨을 찾도록 노력합시다.
어떻게 하면 열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셋 째로 3. 시간을 균형 있게 사용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고민하는 분야입니다. 과로해도, 아니 빌빌 놀아도, 삶의 열정은 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은 일에 시달려서 열정이 식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계속 빈둥댐으로 삶의 열정을 상실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삶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에 균형이 요구됩니다. 언제나 주기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변에는 언제나 도와야 할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섬겨주어야 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쉬지를 못하고 받지를 못하고 재충전할 기회를 얻지를 못합니다.
하기는 정반대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언제나 받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저기서 받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집회에 참석해서 말씀을 듣고 여기 저기 성경공부라고 하면 다 참석합니다. 배우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성경공부는 무언가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양자의 해결책으로 하나님은 딤전 4장 8절을 주셨습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건강을 위해서 운동하는 사람들은 시간을 드립니다. 영적인 훈련을 위해서도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신체적으로 건강한 것도 유익이 크지만, 영적으로 건강을 유지하면 그 유익이 매우 큽니다. 여기 이 땅에서만 아니라 저기 하늘에서도 그 유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균형 있는 식단이 몸에도 필요하듯이 균형 있는 프로그램이 영적 건강에도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을 향한 다섯 가지 하나님의 목적을 알면 영적 건강을 유지합니다. 영적 건강을 위해서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성경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차이를 만들게 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섬기십시오.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열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넷 째로 4. 죄를 고백하십시오. 재빨리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고 신속히 우리의 열정을 앗아가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백하지 않은 죄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잘못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면 의식적으로는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칩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 . 온종일 괴로움과 슬픔에 싸여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시38:4) 여러분은 열정과 죄의식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는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죄의식을 처리할 수 있는 아주 손쉬운 방안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우리가 잘못한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새롭고 산 길을 새로 시작하도록 요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미쁘고 의로우사 우릴 용서하시길 기뻐하십니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몇 달씩, 몇 주씩, 아니면 며칠씩 두지 말고 곧 바로 용서하시길 원하는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무언가 잘못된 일이 생각나면 곧 바로 하나님께 아뢰고 용서받은 삶을 시작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열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다섯 째로 5. 갈등을 해결하십시오. 하루에 대한 기대를 갖고 일어났는데 아침 밥상에서 함께 사는 가까운 사람과 티격태격하고 나면 기분이 상하고 하루 종일 회복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펑크 난 타이어와 같습니다. 해결하지 않은 갈등도 우리의 기쁨을 삼키고 열정을 앗아갑니다.
어디 가정에서뿐이겠습니까?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등이나 충돌이 생기면 당사자가 모두 기분이 상합니다. 이기고 지고가 없습니다. 아랫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 모두의 일입니다. 누구든 갈등을 풀지 못하면 삶의 열정을 빼앗깁니다.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열정적인 삶을 살기 원하면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든지 세 가지 열정을 앗아가는 일은 피하시길 바랍니다. 1) 분노와 2) 시기와 3) 원한입니다.
욥기 5장 2절은 말합니다.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욥5:2) 18장 4절도 말합니다. “분통 터뜨려 봤자 자네 몸만 상할 뿐이지. 자네가 그렇게 화를 낸다고 해서 땅이 뭐 버림받기라도 할 것 같은가 ? 바위가 끄떡이라도 할 성싶은가?”(욥18:4, 현대어성경)
분노와 시기, 분통과 화는 언제나 삶의 열정을 빼앗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용서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거듭거듭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노와 시기가 미움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는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분노하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도록 내어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열심과 열정을 회복하길 원하면 용서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열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여섯 째로 6. 후원공동체에 속하십시오.혼자서 외롭게 지내면 삶의 열정이 식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아무라도 홀로 독처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독처하는 것”은 낙원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유일한 좋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결혼을 한 사람이든지 독신으로 지내는 분이든지 상관없이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상대방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고안해낸 무서운 형벌이 독방에 지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혼자 살도록 만들어지지 아니했기 때문에 독방수감은 본성을 거슬리는 처벌입니다. 결혼을 하든지 독신으로 살든지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어려움에 봉착할 때 지원공동체는 아주 소중합니다. 혼자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도 함께 풀면 풀립니다. 후원공동체가 있어서 여러분을 격려하고 지원하며 때로는 책망도 해야 우리는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혼자 낑낑대다가는 삶의 기쁨과 의욕을 상실하기 십상입니다.
전도서 4장은 말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4:9-10)
아직도 소속된 구역이 없습니까? 여러분이 속한 소그룹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속고 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 살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도움이 필요 없다고 느낀다면 다른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꼭 친구가 필요합니다. 많지 않아도 좋지만 누군가 여러분을 이해하고 편들어주고 지원해 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편들어주는 조부모가 있는 아이가 정서적으로 건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길을 혼자 걸으려고 들지 마십시오. 혼자서 그 먼 길을 걸으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외로이 혼자 걷다보면 여러분의 삶의 열정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일도 함께 해야 힘이 나고 밥도 함께 먹어야 맛이 있다고들 합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열정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7. 영적인 회복을 시도하십시오. 열정의 맨 밑바닥에는 영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심령의 문제입니다. 돈으로 열정을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건강으로만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약물 복용으로 열심을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마음 안에서부터 새로워져야 합니다.
사람은 육체만 가지고 있질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사귀고 사모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에 영양을 공급해야 합니다.
매주일 여러분의 심령과 영혼을 소진시키는 상황을 만납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함부로 대하기도 합니다. 비난하고 잘못 생각하기도 합니다. 실망하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한 여러분은 매주일 이와 같이 여러분을 침체시키는 상황에 봉착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지 않으면 여러분의 영혼은 굳어지고 차가와지고 맙니다. 여러분의 영은 움츠려 들고 시들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많은 은 죽기 전에 이미 죽고 맙니다. 자신의 영이 뒤틀리고 못쓰게 되고 맙니다.
처방이 없을까요? 의도적으로 영을 먹이고 살찌워야 합니다. 어떻게? 골로새서 2장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믿었으니 일상생활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생기 넘치는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스도께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분의 터 위에 서서 살아가십시오. 주님 안에서 성장하고 진리 안에 서서 강하고 건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일에 감사하며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십시오.”(골2:6, 현대어성경)
열정적으로 한 평생 살아가려면 항상 하나님께 접속하십시오. 매일 매일 주님과 더불어 조용한 시간을 갖도록 일정을 조정하십시오. 구입하신 울산교회 GT를 매일 가까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영적인 뿌리를 주님께 깊이 내리도록 시간을 드리십시오. 그러면 날마다 여러분과 주님의 관계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열정에 넘치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당신처럼 열정을 갖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흔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을 말합니다. 수난(Passion)이란 단어는 바로 열정(Passion)이란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열정의 산물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그 사랑의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알고하시며 여러분이 그분을 알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구약 출애굽기 34장은 소개합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34:14) 어떤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너는 다만 주님만 예배하라 왜냐하면 그분은 너희와의 관계에 열정을 쏟으시는 분이시 때문이다”(출34:14, NLT)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어떻게 온 우주를 지으신 분께서 하필이면 여러분과 관계를 그처럼 사모하시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회복에 모든 것을 거셨습니다. 모든 열정을 쏟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에 감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창조주께서 여러분이 그분을 알기를 원하시며 친밀한 관계를 갖기를 열렬히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백성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은 무엇입니까? 간음입니까? 동성연애입니까? 도적질입니까? 살인입니까?
계시록 3장은 말합니다. 교회의 주인 예수님께서는 크리스챤의 가장 큰 죄는 미지근함이라고 지적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
예수님이 보시는 가장 큰 죄악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는 것입니다. 적당한 헌신이란 말은 결코 크리스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말합니다.
“‘적당’이란 말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할 때만큼은 ‘적당’한 말이 아니다. 그 분의 거룩하심과 광대하심 그리고 우리를 위해 드리신 영원한 희생에 감사하는 정신에 휩싸일 때, 최선을 드리고자 하는 자세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열정을 다해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된다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더 알게 된다면 더 깊은 사랑에 빠져들 것입니다.
그분을 향해 마음을 드리게 되고, 그분을 향해 땀 흘리는 노력을 자원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가문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멋있는 사람이 아니라, 부자들이 아니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에 충격을 주는 사람들은 열정의 사람들입니다. 열심을 다해 사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속에 불타는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어왔습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아니하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자신을 던진 사람들입니다.
보십시오. 새롭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열정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찬양이 있습니다. 모든 죄가 사함 받았다는 놀라운 진리로 감격한 사람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목적을 가지고 나를 창조했다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그 마음에 기쁨이 자리하고 그 입술에 감사와 찬송이 있으며 그 삶에는 주님을 향한 뜨거운 헌신이 있습니다. 지금 그 삶을 주님께 드렸기에 영원을 주님과 함께 보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 헌신했기에 장차 하늘 빛 가운데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우리가 처음 접했을 때는 감격하다가 세월과 함께 당연한 사실로 여기게 됩니다. 죄를 용서받고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한 날 하늘에 간다는 사실이 당연하게 생각되면 열정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 놀라운 축복이 값없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회상하십시오. 그러면 열정이 되살아 날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하나님을 가까이 했던 적이 이전에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누구를 원망할 수 없습니다. 자신 말고는 비난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라도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멀리 있다고 느껴지면 누가 여러분을 멀리 밀쳤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전에 더 가까이 주님을 섬겼다면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금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아침에 기대를 가지고 일어나며 새로운 열심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처방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먼저 주님의 진단입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이어서 주님의 처방을 들으십시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5)
현대어 성경은 더욱 실감나게 번역합니다.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그러기 위해서 살핀 열정을 회복하는 일곱 가지 방안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영적 기쁨을 되찾고 영적인 활기를 회복하며 열심히 남은 길을 달려가는 복된 한 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