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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에 관한 단상
신 홍 근
40초반쯤 어느 날 저녁, 한 잔하고 집에 들어가던 중에 우연히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났다.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와는 이런저런 얽힌 추억들이 있었기에 근 30여년이란 오랜 세월, 변한 모습 속에서도
서로를 쉽게 알아보았다.
“야! 너 누구 맞지? 오랜만이다. 정말 반갑다. 도대체 이게 얼마만이냐? 하하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명함을 건네면서 뭐하며 지내냐고 묻자
“야! 너는 그 때 무협지 읽고 민간요법, 한의학 등에 관심이 많았었지? 그러더니 결국 한의사가 되었네! 정말 딱 어울린다야.”
이어서 다소 풀 죽은 목소리로 “난 그 때처럼 아직도 신문 밥 먹고 있어. 신문배달사무소 총무 노릇하고 있어.”
지친 친구의 뒷모습과 어깨를 바라보면서 문득 옛 추억에 잠겼다.
초등학교 6학년 때쯤 그 친구의 소개로 처음으로 신문배달을 하였다.
같은 반인 그는 나보다 1년 정도 먼저 입문한 배달 인생의 선배였다.
그 때는 자전거도 귀해서 많은 부수의 무거운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걷다가 뛰다가 하면서
‘신문이요. 신문 왔습니다.’를 외치면서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다녔었다.
인접한 구역을 맡았던 그는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간에 자주 만나, 가끔씩 내게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도 사주고
신기한 것들을 구경시켜주곤 했다. ‘역시 선배란 좋은 거야’ 하면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 보급소에 도착하자 총무라는 사람이 그 친구를 거의 샌드백 두드리듯 무자비하게 때리고 있었다.
코피가 터지고 피멍이 여러 군데 들어 무시무시한 분위기였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본 나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한 쪽 구석에서 벌렁대는 가슴으로 몹시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오래 배달을 해온 다른 선배나 동료들은 의외로 담담하게 배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런 상황을 가끔씩 경험해서 적당히 익숙해지고 무뎌진 것이었다.
그 때는 신문 배달원이 신문 구독료를 직접 수금하여 보급소에 갖다 주었는데 이 친구는
아주 상습적으로 배달료를 임의로 써 버리고는 했던 것이다.
그러다 걸리면 두드려 맞고 월급에서 감봉당하고, 정작 월급날에는 받은 돈이 적어서
며칠 안가면 다 쓰고 모자라면 또 수금한 돈을 쓰고 그러기를 어언 1년간 반복한 것이다.
참 대단한 친구였고, 대단한 보급소에 대단한 총무였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친구와 좀 떨어졌고 친구가 사주는 맛있는 음식, 군것질과도 멀어졌다.
그 때 그 골목 모퉁이, 그 언덕의 감나무, 해바라기 밭, 감자와 고구마 밭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눈앞을 스쳐간다.
그 후 3~4년 쯤 지난 어느 가을, 우연히 또 다른 중학교시절 친구를 만났다.
“야! 너 오랜만이다. 넌 지금도 책을 들고 다니는구나. 그 때도 책읽기를 좋아하더니만,
난 네가 무엇이 되도 될 줄 알았지, 네 소식은 많이 들었다. 홍대 앞에서 한의원 잘 하고 있다며, 그래 참 대단하고 장하다.”
“그래 나도 가끔 네 생각하고 보고 싶고 궁금했다. 반갑다. 그래 어떻게 지내니?”
“흐~ 누가 그렇게 물어 올 때마다 정말 부끄럽다. 모 구청 뒷골목서 구두 수선한다. 그 옛날 너랑 함께 잠깐 했던 것이 이제 업이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그 친구와 3학년 선배와 함께 셋이서 한동안 구두를 닦은 적이 있었다.
수입은 선배가 5할, 친구가 3할 그리고 내가 2할의 비율로 나누었다.
구두를 닦던 틈틈이 선배는 재미난 얘기들을 했었고, 친구는 요즘 모 가수가 불렀던 노래 말처럼
그 당시 막 유행하던 상하이 춤, 알리 춤, 트위스트 등을 추면서 내게도 가르쳐 주었다.
소심하고 부끄럼이 많던 내가 전혀 어울리지 않던 그 당시 최첨단의 유행 춤을 배우고 조금이나마 흉내를 내게 된 것이다.
선배와 친구는 구두 닦는 일을 마치면 가끔 학교 앞 분식점에서 이것저것 사주고는 했다.
나름대로 행복했었고, 재미도 있었고, 보람도 있었다.
신문배달과 구두를 닦으면서 내게 은밀하고 행복한 월중행사가 하나 생겼다.
자장면을 몹시도 좋아했던 나는 월급날 중국집으로 날아갔다.
일 년에 고작 한두 번 먹던 자장을 이제는 매달 한 번씩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너무나 맛있어 거의 정신을 놓고 먹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죄책감이 들었다.
나 혼자만 몰래 먹으며 가족들에게 특히 동생에게 미안했다.
돈이라고 조금 받았지만 워낙 책을 좋아해서 월급의 거의 8~9할을 헌 책방에서 책을 사고 나면 쪼들리기는 매일반이었다.
그걸 핑계로 그나마 위안하고 변명하며, 은밀한 나 홀로 만찬은 그 후로도 몇 년간 이어졌다.
처음으로 혼자서 몰래 자장을 먹고 들어간 날 동생이 냄새를 맡고는 “형! 이게 무슨 냄새야?” 하기에
아예 다음부터는 자장을 먹으면 한참을 수돗물로 입가심을 하고는 했다.
가끔 두 친구 생각이 날 때면 우리네 인생이란 것이 참 우습고 얄궂은 것 같다.
당시엔 누구도 2~30년이 지난 후 자신이 계속 신문을 배달하고 구두를 닦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그 때나 지금이나 나름대로 좋은 친구, 착한 친구, 재미있는 친구들인데 그들을 누르는 삶의 무게와 애환에,
그리고 그 간의 서로 다른 삶으로 인한 거리감과 서먹함에 가슴이 아려올 때가 있다.
‘오만잡생각’이란 말이 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듯, 생각이 너무 많아도 뜻과는 다른 일이 펼쳐진다.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산다는 말도 있다.
이 또한 제대로 된 뜻이 없으니 뜻과 같은 삶을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
“사람은 항상 하는 일에 따라 규정되고, 자신이 늘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 된다.”
생각이 너무 많아 번잡하든, 멍청하게 아무 생각 없이 살든
생각과 마음의 방향과 목적이 없으면 익숙한 짓거리, 친숙하고 늘 보고 접하던 그 일, 그 모습을 반복하는 듯싶다.
내 몸과 행동에도 신문과 구두가 익숙한 것이었지만
더 익숙한 뭔가가 내 생각과 마음속에 있었기에 또 다른 삶을 만난 것이 아닌가 싶다.
익숙하다는 것이 이렇게 삶에서 반복되고 재현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행의 추억
한 참 어린 여자와 바람이 났다.
불혹(不惑)을 넘긴 나이에 참으로 철딱서니 없게도 말이다.
원래도 휴일을 좋아하지만 요즈음 일요일은 더 마음 설레고 기다려진다.
벌써 한 달을 매 주마다 단둘이서 차를 타고 멀리 놀러간다.
여기저기 다니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며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매 번 선물도 사준다.
인천 영종도와 실미도에서 서해바다 바람을 음미도 했고,
충청도 서산의 예쁜 절 개심사(開心寺)와 용현 계곡을 열린 가슴으로 다녀도 왔고,
양수리가 굽어보이는 운길산의 산사 언덕을 오르고,
경기도 여주의 목아 박물관, 세종대왕 영릉과 효릉 등을 돌아보기도 했다.
얼마 전 비가 조금씩 부슬부슬 내리는 일요일 아침에 아내와 그 어린 여인이 만나서 서로 언성(言聲)을 높인다.
아내가 먼저 소리를 지른다. “야! 너는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그렇게 가고 싶으냐?”
그 녀 역시 지지 않고 목청을 높인다.
“엄마! 나도 비가 와서 더 자고 싶지만 휴게소에서 아빠가 사주는 우동이 또 먹고 싶단 말이야!”
여섯 살 딸의 대답이다.
가을은 유혹(誘惑)의 계절이다.
공연히 가슴 한 구석에 바람이 불고 아련한 뭔가가 스멀거린다.
그럴 때면 어디론가 아무 계획 없이 텅 빈 마음, 가벼운 차림으로 바람처럼 구름처럼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산책과 여행을 좋아하는 피와 기운이 흐르는 것 같다.
네다섯 살쯤이었을 게다. 흐린 기억속의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남산공원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너무 어려서 어딘지도 몰랐으나 나이 들어 가 보고서야 남산인줄 알았다.
갓난아기 동생과 두 누이는 버려둔 채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신 어머니는 고사리 같은 내 손을 꼭 잡고는
긴 한숨과 허허로운 걸음으로 남산 여기저기를 하릴없이 배회하셨던 것 같다.
매일 궁색한 동네 구석에서만 지내다가 넓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니 낙원이고 별천지였다.
맛있는 군것질에 처음으로 보는 많은 사람들과 나무, 풀, 꽃, 동물들, 형형(形形)의 산색(山色)에
어린 나는 한껏 흥분하고 마냥 즐거웠다. 내 기억 속의 첫 여행이었다.
여덟 살 쯤 친구의 속삭임에 홀라당 넘어 간 적이 있었다.
촌구석 보다 못한 서울의 변두리에 살았던 나는 뺑뺑이와 그네, 미끄럼틀 등 놀이기구가 많다는 친구의 말에
2시간 가까이 걸어서 경기도 부천 못 미쳐 대장리란 곳에 있는 놀이터까지 놀러갔다.
저녁 어스름 무렵까지 정신없이 놀다보니 배도 고프고 좀 무섭기도 해서 빠른 걸음으로 돌아오다가
뺑뺑이를 너무 탄 탓에 그만 메스껍고 어지러워 한 참을 쓰러져있다 일어나 밤에야 집에 돌아왔다.
사주(四柱)에 세 개씩이나 있는 역마살(驛馬殺)이 발동 걸린 것일까?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고, 동네 앞뒷산을 쏘다니곤 했다.
이른 봄 들불놀이 구경을 시작으로 꽃구경,
여름에는 멱 감기, 물고기 잡기, 장맛비 맞고 뛰어 다니기,
가을에는 도토리며 밤줍기,
겨울에는 썰매 타고 눈싸움 등등….
학교와 집으로 이어진 길도 매 번 이 길 저 길을 바꿔가며 다녔다.
그려면 왠지 후련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들곤 했다.
중학교 시절엔 멀쩡한 넓은 길을 두고는 일부러 논둑길로 다녔다.
그러던 3학년 어느 여름날 아침 논둑 중간쯤서 논 뱀을 만나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잠시지만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고 겁먹은 채로 몸은 굳어지고 놀란 가슴은 쿵쾅거렸다.
그 날 이후 논길을 벗어나 다시 큰 길로 나왔다.
고1 때는 학교 가는 버스에서 만난 뽀얀 얼굴의 눈이 동그랗고 볼이 통통한 여학생한테 반했다.
소심하고 겁 많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감히 말도 못 붙이고, 고작 한 것이란
매일 아침 그 동네까지 걸어가 몇 달간을 그 여학생과 같은 정류장서 같은 버스를 탔던 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학년이 바뀌자 또 다른 짝사랑이 시작되었고,
다른 동네 다른 정거장으로 다니기를 졸업 때까지 두세 번은 한 것 같다.
재수를 하고 들어간 대학은 경치가 멋져 길을 따라 나무와 꽃들과 새들이 반겨주는,
산책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매일 아침 2~30분씩 나만의 순례의식이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시험 중에는 아침에 못가면 대신 오후에 걷기도 했다.
풀과 나무, 잎사귀와 꽃들이 매일 마다, 아침저녁, 볼 때마다 다른 모습이라는 것도 그 때 알게 되었다.
예과 본과 6년을 다니는 동안 거의 5년 반 이상을 중고등학생들의 입주과외 아르바이트를 했고
덕분에 해마다 거처를 바꿔가며 살게 되었다.
늘 쏘다니더니 결국엔 집을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졸업 후 제대로 돈을 벌게 되면서부터는 새로운 술 여행이 시작되었다.
명동, 종로 피맛골, 이태원, 영등포 시장, 동대문, 노량진 골목 술집에서
모교인 경희대와 고대 연대 홍대 숙대 건대 등 대학가 주점에 이르기까지
서울 장안은 물론이고 경기도, 강원도까지
산으로, 들로, 강으로 버스타고 기차타고 즐겁게 마시고 다녔다.
몇 년은 산에 미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매달 네다섯 번씩 주말마다 멀리 무박산행을 다녔다.
어느 산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일요일 새벽 서너 시에도 일어나
홀로 차를 몰고 달려 산 아래서 아침을 먹고 산을 오르기도 했다.
그 때 그 산과 들과 길이 엊그제처럼 또렷하다가도 금세 아련하고 가물거린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약간씩 잦아들고 가라앉던 여심(旅心)이지만,
해마다 가을이 오면 다시금 한 번씩 흔들린다.
여행하면 으레 따라 오는 다음 말은 ‘길’이다.
쾌적한 여행, 고단한 여행, 길고 짧은 여행, 기쁘고 슬픈 여행, 쓸쓸한 여행,
왁자지껄하고 떠들썩한 여행, 가슴 뿌듯한 여행, 허탈한 여행, 시작과 끝이 다른 여행,
한결같은 여행, 단조로운 여행, 변화무쌍한 여행 등등,
너무 많은 종류의 여행이 있다.
어쩌면 세상사는 사람만큼 많은 종류의 여행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길이 있을 것이고….
모두 다른 여행길이지만 전부 다 독특하고 소중하고 유일한 여행이요 길이다.
때론 여행과 길이 그 자체로 목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건대 다양한 여행과 많은 길은
궁극적으로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통로이자 징검다리인 듯싶다.
삶이 그런 것처럼, 모든 여행과 온갖 길은 다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
약력
경희대학교 한의대 졸업
평화한의원 원장
해피브레인 대표
대한한방 최면의학회 회장
한국요가협회 지도위원
우슈(武術) 공인4단
경향신문 칼럼, 스포츠월드 칼럼
KBS 라디오 5분칼럼 “지혜로운 삶”
당선 소감
철부지 어린 시절엔 꿈이 많아 좋았습니다.
그 시절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그랬듯이 내게도
선생님이나 시인, 수필가, 소설가 등 문학인은 아련한 꿈속의 로망이었습니다.
유달리 부끄럼이 많고 수줍던 어린 시절의
나는 별다른 놀이도 재주도 없는 탓에 일찌감치 책 읽기를 즐겼습니다.
「페이터의 산문」, 헤르만 헤세의「데미안」,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와
황순원님의 「소나기」등등을 보며 가슴이 시리고 콧날이 찡했던 기억들이 어제인 듯 새롭습니다.
글은 동, 식물 등과는 또 다른 묘한 생명이요, 향기라는 것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읽고 즐길 뿐 제 글을 써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지내왔습니다.
그랬던 제가 감히 천견(淺見) 졸필(卒筆)을 무릅쓰고 올린 글이 그만 덜컥 당선이 되었다니
한 편 기쁘고, 한 편 두렵기도 합니다.
글을 읽고 좋게 보아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경의를 표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과 지도,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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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대단하십니다.나의 어릴적생각도 나는 군요.앞으로 더 많은 발전기원드림니다.
고맙습니다. 부끄부끄 ㅎㅎ
축하!!!축하합니다~~~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글속에서 감동을 주지요.앞으로도 많은 활약을 기대해 봅니다~
고마워 이종석원장! 놀이가 하나 더 생겼으니 좀 즐겨봐야지~ ㅎㅎ
신원장님--긴---장문--문학상 당선울 축하드립니다--추석 선물인거 같아요----중추명절도 잘 보내시구요----
감사합니다. 뵌지가 오래네요. 잘 지내시죠. 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