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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야간 전투기부대 전술과 방어 조직을 확립한 요셉 캄후버는 1896년에 바바리아의 독일-체코슬로바키아 국경 지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에 육군에 지원 입대했고 바바리아의 공병대대에서 장교 요원으로 선발돼서 1917년에 소위가 됐다. 제1차대전중 1,2급 철십자훈장을 받았고 대전 후에는 10만명으로 축소된 군에 남아서 보병부대 참모 등으로 근무했다.
1930년 소련 내에서 비밀리에 비행교육을 받고 1935년 루프트바페로 옮겨서 전투비행대장, 제2항공대의 참모장 등을 역임한다. 제51폭격항공단 지휘관으로 프랑스와 전투 시 6월에 격추돼서 포로가 되기도 했다. 1940년 6월 새로이 편성된 제1야간전투기사단 지휘관이 됐고 서부독일 지역에 야간 방공망을 구축한다. 1941년 7월 그 공로로 기사십자훈장을 받았고 확대된 야간전투기 부대를 통제하는 제12항공군단장이 된다. 1943년 1월 항공대장으로 진급했지만 1943년 7월 함부르크 공습의 책임을 지고 노르웨이의 제5항공대 사령관으로 전출된다. 독일 항복 시에는 제트기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캄후버(중), 팔크(좌) 야간전투기 부대 시찰을 위해 방문한 이탈리아 장군과 함께(1942)
미군에게 포로가 된 후 1947년 12월 풀려났고 세일즈맨 등 군과 관계없는 일을 하다가 1955년 서독공군이 창설되면서 중장의 계급으로 다시 군의 부름을 받는다. 1962년 상급대장의 계급으로 전역한 후 뮌헨 부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6년에 90세로 타계했다.
리히텐스타인
캄후버는 1940년 말까지 독일과 네덜란드 해안지대에 레이더를 이용한 ‘어두운 야간전투구역'을 구축했다. 동물 이름 암호로 불리는 6개 구역으로 나뉘었으며 지상통제장교는 프레야와 뷔르츠부르크 레이더로 알아낸 정보로 야간전투기를 목표물로 유도했다. 1941년에 8월에는 고도 탐지능력이 향상되고, 회전하면서 360도 감시가 가능한 뷔르츠부르크 레이더가 도입되면서 야간전투기의 전과는 크게 상승했다.
통상적인 전술은 다음과 같았다. 적기가 120km 밖에서 프레야 레이더에 탐지돼서 설정된 힘멜베트(항공전투구역) 중 하나로 진입하면 야간전투기가 출격해서 대기하고 지상통제장교는 ‘붉은’ 뷔르츠부르크 레이더로 탐지를 시작한다. ’푸른‘ 뷔르츠부르크 레이더는 우군 전투기의 진로를 추적하고 적기와 우군기의 위치는 통제소 상황판에 실시간으로 표시된다. 상황판은 처음에는 색연필로 표시됐지만 나중에는 점멸등으로 표시됐다. 통제소에서는 야간전투기를 적기의 수백 미터까지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경험과 기술이 축적되면서 탐지능력은 갈수록 발전했다. 조종사의 눈에 의존하는 적기 식별은 날씨와 시계가 나쁘면 불가능했으므로 야간전투기 기수에는 엔진 배기 열기를 이용해서 전방의 적기를 탐지할 수 있는 ‘스판너’ 적외선 탐지 장치가 탑재됐다. 하지만 이 장치는 탐지거리가 짧고 같은 고도가 아니면 배기 열기 탐지가 어려웠기 때문에 실용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영국은 대전발발 이전에 이미 항공기 탑재용 탐지 레이더를 개발해서 1939년에 브렌하임 야간전투기에 탑재하고 있었다. 성능은 아직 초보적이었고 1년간 전과가 없었지만 1940년 6월 22일 서섹스에서 Do17Z을 격추했고 연말까지 몇 기의 전과가 추가했다. 캄후버도 독일 전자산업체에 야간전투기 탑재용 레이더 개발을 의뢰했다. ‘텔레푼켄’에서는 기존의 전자 고도계 ‘리히텐스타인 A' 를 제안했고 이 장치를 전투기 탑재용으로 개수해서 탑재한 결과 영국 것보다 파장이 길어서 외부 장치가 커진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루프트바페 상층부에서는 비행성능에 악영향을 미치는 이런 장비 탑재를 반대했다. 하지만 리히텐스타인를 시험 탑재한 4./NJG1의 전과는 이 장치가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비행성능이 떨어진다고 부정적이던 대원들의 생각도 차츰 바뀌게 된다.
레이더가 없을 때 후방 탑승원의 역할은 조종사의 항법을 돕고 후방의 기총을 사격하는 임무 정도였지만 리히텐스타인이 도입되면서 그들의 임무는 적기와의 거리 측정, 고도, 방향을 파악해서 야간전투기를 적 폭격기 부근으로 유도해야 했다. 뛰어난 전자장비 조작수는 야간전투기를 적기의 200m까지 유도할 수 있었다. 이것은 갈수록 강화되는 영국폭격기의 야간폭격에 대항하는 엄청난 진보였다. 항공기 탑재 레이더를 사용한 첫 전과는 1941년 8월 9일 00:25에 루드비히 벡커 상사가 웰링턴을 격추하면서 달성됐다. 공교롭게 그는 ‘어두운 야간전투’ 방식으로 첫 격추를 달성한 사람이었다.
레이더를 장착한 Bf110. 야간 초계비행시는 사진처럼 연료탱크가 필수였다.
실전용 레이더 4개조가 처음으로 인도된 것은 1942년 2월이었고 NJG1의 제2비행대장 발터 엘레 대위를 비롯한 우수한 대원들의 기체에 우선 장비됐다. 처음에는 리히텐스타인의 수량도 많지 않았고 많은 시행착오와 좌절, 장비개량의 과정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야간전투기가 리히텐스타인을 장비한 것은 1942년 말이었다.
영국 폭격기 사령부에서 이름 붙인 ‘캄후버 라인’은 리히텐스타인과 함께 영국 폭격기들에게 거대한 장애물이 돼있었다. 영국 폭격기들은 탐조등 불빛이나 레이더 유도에 의해 위치를 공격 받았다. 1940년 말까지는 42기의 폭격기가 격추됐지만 1941년 말에 그 수는 열배로 증가됐다.
무차별 폭격
RAF의 폭격기 부대는 1941년에 2만 7천회로 공격 회수를 대폭 늘렸지만 항법장치가 초보적이었기 때문에 폭격 정확도가 떨어지고 독일에 가한 타격은 미미했다. 어둠속에서 폭격 정확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목표물을 타격하기 보다는 주변을 폭격해서 독일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1942년 3월 ‘텔레코뮤니케이션’ 연구소에서 개발된 'GEE' 라는 항법장치가 도입됐다. 각각 160km 떨어진 3개소에서 발사되는 지상 전파를 폭격기가 수신하고 각 전파의 수신 시간 차이를 계산해서 위치를 파악했다. GEE의 유효 탐지거리는 640km였으며 거리가 가까울 수 록 목표물 탐지능력은 올라갔다. 처음에는 수량부족으로 1/3 정도의 폭격기만 장비했다.
1942년 2월에는 독일에 대한 무차별 폭격으로 적의 사기를 꺾는 것을 목표로 한 냉혹한 아더 해리스 공군원수가 폭격기 부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해리스는 독일이 6개월 내로 GEE에 대한 대항책을 만들 것이라며 이 장비를 빨리 사용하고 싶어했다. 3월 에쎈에 대한 GEE 사용 결과는 장거리 목표에 대한 폭격 정밀도가 매우 부정확하다는 것이었다. 해리스는 정확도 보다는 민간 목표물을 가리지 않은 무차별 폭격으로 적의 사기를 꺾는 방법을 채택하고 첫 번째 희생양으로 뤼벡을 선정했다. 해안에 있기 때문에 찾아내기가 쉽고 중세에 건축된 목조 가옥으로 이뤄져 불태우기 좋았다. 또 전략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대공포의 방어도 미약했다. 1942년 3월 28일 234기의 폭격기가 3파로 나뉘어 뤼벡으로 날아갔다. GEE를 장비한 웰링턴이 1파로 목표물을 불태워서 2,3파가 쉽게 목표물을 찾아낼 수 있게 했다. 한 달 전에 폭격기 부대는 파리 부근의 르노자동차 공장을 이런 식으로 공격한 바 있었다. 소이탄과 고폭탄 400톤이 투하됐고 300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폭격기 손해는 12기였다.
4월 23일 두 번째의 목표로 선정된 발틱해 주변의 로스톡도 대부분의 시가지가 불타고 수백명의 민간인이 죽었다. 독일 언론에서는 이 무차별 폭격을 테러로 규정했지만 해리스는 더욱 더 확신을 가지고 폭격의 규모를 확대시켰다. 당시 영국 폭격기 부대의 신형 4발기 랭카스터와 핼리팩스의 수는 아직 적었다. 같은 시기에 독일 야간전투기 부대는 대부분이 Bf110으로 구성된 265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해 말까지 15개 비행대로 구성된 5개 항공단으로 증강됐다. 1940년에는 적기 격추의 15.5%가 야간전투기의 전과이고 나머지가 고사포에 의한 것이었는데 1941년 말에는 야간전투기의 전과는 50%로 상승했다. 캄후버 라인으로 인한 폭격기 손실이 늘어가자 해리스는 독일 야간전투기가 각각의 구역(힘멜베트) 을 수비한다는 걸 알고 폭격기 전력을 한 곳에 집중시켜서 독일 야간전투기 부대의 요격 기회를 뺏고 피해를 줄이고자 했다.
폭탄 탑재량과 작전고도가 향상된 핼리팩스 폭격기
‘밀리니엄’이라고 명명된 새로운 공격은 5월말 보름달이 뜨는 시기에 계획됐다. 함부르크를 목표로 1,047기의 폭격기가 집결했다. 세 번 연기 끝에 5월 30일 마침내 폭격기들이 이륙했고 90분 동안 목표물을 강타했다. 13,000채의 가옥이 파괴됐지만 RAF에서 의도한대로 야간전투기 부대를 압도하지 못했고 41기를 잃었다. 해리스는 6월 1일 에쎈, 6월 25일 브레멘을 차례로 공격했다. 에쎈 폭격은 악천후로 인해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오히려 에쎈 주변의 도시들이 타격을 입었다. 브레멘 폭격은 두꺼운 구름층을 만났음에도 GEE의 도움으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세 번의 공격 동안 폭격기 127기가 격추됐는데 야간전투기 부대는 절반을 담당하며 선전했다. 캄후버의 지역 방어 전술은 야간전투기 부대를 한꺼번에 집중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지만 브레멘 폭격 시 헬무트 렌트 대위가 이끄는 레이더장비 야간전투기 부대 Ⅱ./NJG2는 영국폭격기 편대 사이로 침투해서 15기를 격추시켰다.
도시 피해가 급증하자 지방장관들은 탐조등이 집중 배치된 캄후버 라인에서 탐조등을 돌려달라고 했다. 이 사실은 히틀러에게까지 전달돼서 총통은 탐조등 벨트를 해체할 것을 명령했다. 탐조등을 돌려주면서 방공전은 레이더에 더 의존하게 되고 야간 방공전력이 오히려 더 강화된 결과가 됐다. RAF 폭격기들의 피해는 늘어났지만 독일을 폭격으로 굴복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중단되지 않았다.
‘오보에’라고 불리는 새로운 항법장치는 무전에 의존하는 GEE와 달리 레이더를 이용했기 때문에 전파방해를 받지 않았다. 오보에를 사용하는 새로운 부대가 패스파인더로 투입돼서 2파에게 조명탄으로 목표물을 알렸다. 악천후 때문에 첫 작전은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모스키토 패스파인더기에 탑재돼서 고공을 비행할 때 매우 효과적이었다. 해리스는 1943년 3월 5일부터 7월 5일까지 에쎈을 중심으로 29회의 대규모 폭격을 실시했다. 처음에는 목표물에서 빗나가는 경우가 있었지만 오보에 덕분에 폭격 정확도는 향상돼서 뒤셀도르프, 쾰른, 도르트문트에 반복된 공격이 가해졌고 중요한 전략목표인 크룹 공장이 파괴됐다. 신형 랭카스터 폭격기의 수는 증가했지만 독일 야간전투기 부대도 전술과 수량 면에서 진보하고 있었다.
재즈뮤직
1942년 말 야간전투기 부대의 전력은 5개 야간전투항공단/17개 비행대 400기였고 격추 수는 1941년 421기에서 1942년에 687기로 증가됐다. 그중 435기는 6~9월 사이의 전과였다. 1943년 초에 야간전투구역은 서로 겹치는 100개 구역이었고 지상근무요원은 4만명에 달했다. 지휘관은 여전히 캄후버 중장이었다.
‘쉬래게 무직’(재즈음악)으로 불리는 적기 아래에서 발사하는 수직발사 병기는 적기에게 발견될 가능성과 격추될 가능성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이미 제1차세계대전 때 사용됐지만 잊혀졌던 이 무기를 캄후버 장군에게 제안한 것은 야간전투기 조종사 루돌프 쇠너트 중위였다. 캄후버는 1941년 8월 최우수 야간에이스들인 헬무트 렌트, 베르너 스트라이프와 수직발사 병기 장착에 대해 의논했는데 그들은 이 무기를 거부했다. 쇠너트는 좌절하지 않고 7.92㎜ 기총을 자신의 Do17Z-10에 장착해서 실험을 계속했다. 1942년 7월 25일 기사십자훈장을 받기 위해 캄후버를 만날 기회를 가진 중위는 쉬래게 무직에 대한 아이디어를 다시 제안했고 짧은 토의 끝에 캄후버는 3기의 Do217에 수직발사 병기 시험 장착을 허용했다.
Bf110의 조종석 후방에 장착된 쉬래게 무직
1942년 가을 가상 목표물을 대상으로 시험이 진행됐는데 무기를 90도로 장착하는 경우 조종사가 목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수평비행이 어렵다는 문제가 들어났고 65도로 고정한 경우가 가장 이상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23기를 격추한 에이스였던 쇠너트는 1942년 12월 Bf110을 장비한 제5야간전투항공단 제2비행대장으로 부임하면서 수직발사 기관총을 장착한 Do217 1기를 가져갔다. NJG5의 지상근무요원인 파울 말레 상사는 이 기체를 참고해서 자신의 부대의 Bf110조종석 후방 캐노피 사이에 외리콘 MGFF 20㎜ 기관포를 장착했다.
말레의 Bf110을 보고 쇠너트는 상부의 허가도 없이 전 비행대에 수직발사 기관포를 장착하도록 했다. 쉬래게 무직의 첫 전과는 1943년 3월 30일 저녁 쇠너트 자신이 발틱해 부근에서 격추한 랭카스터였다. 1943년 중반에 쉬래게 무직은 제식 병기로 인정받았고 더욱 강력한 마우저 MG151 20㎜ 기관포가 장착됐다. 대부분의 야간전투기 조종사들이 이 무기를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뛰어난 에이스 한스 요하힘 얍스 처럼 전방 사격용 무기만 쓴 사람도 있었다.
쉬래게 무직을 이용한 전술은 다음과 같았다. 적기가 레이더나 육안으로 확인되면 야간전투기 조종사는 그의 기체를 적기 50~100m 아래로 위치시킨다. 대부분의 조종사는 폭격기의 엔진 사이를 겨냥하는데 그곳에는 연료 탱크가 있기 때문에 사격효과도 뛰어나고 적기 승무원도 탈출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예광탄은 쓰지 않으며 짧은 몇 번의 사격으로 적 폭격기는 불덩어리가 됐다. 영국 폭격기 방어기총 사수들은 어두운 지상을 배경으로 하부에서 접근하는 경우 야간전투기를 찾기 어려웠고 독일 조종사들은 반대로 하늘을 배경으로 한 적기를 찾기 쉬웠다. 적기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 독일 야간전투기는 추락하는 적기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항로에서 이탈했다. 왼쪽 날개를 맞으면 왼쪽, 그 반대면 반대쪽으로 추락했다. 영국 폭격기는 어디서 공격 받았는지도 모르고 당해야 했다.
전쟁말기에 야간전투항공단에 들어온 조종사들이 쉬래게 무직 만 사용한 경우가 많은데 반해 1942년에서 1943년 초반에 야간전투항공단에 들어온 하인츠 쉬나우퍼, 파울 초르너, 게오르그 그라이너 같은 에이스들은 전방 기총과 쉬래게 무직을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썼다고 한다. 어쨌든 쉬래게 무직은 효과적이고 치명적인 병기였다. 1943년 4월~6월 사이에 영국폭격기 부대는 762기를 잃었는데 551기가 야간전투기에 의한 것이었다.
돌아오지 못한 에이스들
야간전투항공단을 발전 시킨 것은 경험 많은 소수의 대원들로서 이들이 시행착오를 거쳐 야간전투 전술을 개발한 바 있었다. 1943년 초 후배들의 모범이 된 가장 경험많고 전과가 뛰어난 에이스 세 사람이 3주간 차례로 전사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세 사람은 전사 시 공교롭게 모두 44기 격추로 헬무트 렌트 다음의 야간전투기 부대 2위의 에이스들이었다.
39기 격추의 발터 엘레 소령(우)은 1943년 11월 착륙 사고로 사망했다.
NGJ1의 제1비행대장 라인홀트 크낙케 대위는 1943년 2월 3일 핼리팩스 폭격기를 격추한 직후 전사했고 후임자인 파울 길트너 중위는 3주 후 길제-리헨에서 엔진고장으로 뒤를 이었다. 야간전투기 부대 창설 시부터 복무했으며 순수한 전파 유도로 첫 격추를 기록한 루드비히 벡커 대위가 1943년 2월 26일 주간에 미공군의 폭격기 요격 중 행방불명된다. 최고의 격추왕 세사람의 연이은 손실은 야간전투기 부대에게 큰 타격이었다. 이들은 모두 백엽기사십자훈장이 추서됐다.
동부전선의 야간 항공전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후인 1941년 여름 소련군의 쌍발, 4발 폭격기들이 동프러시아와 베를린을 폭격했다. 수가 적었기 때문에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루프트바페 상층부에서는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1942년 6월 NJG5의 소부대가 소련 항공기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독일영토를 날아다니는 것을 저지하려고 동프러시아로 배치됐다. 알로이스 레흐너 중위가 지휘하는 이 작은 병력은 열차에 설치된 프레야와 뷔르츠부르크 레이더의 지원을 받았다. 통신차와 발전차 등 방공시스템 전체가 열차에 연결돼 있었다. 이동식 레이더 기지의 유일한 전과는 1942년 8월 18일 레흐너 중위가 격추한 DB-3 2기였다.
소련상공에서 첫 야간격추는 1941년 7월 26일 밤 폭격기들이 3기의 전투기를 격추한 것이었다. 1년 후인 1942년 6월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Ⅲ./JG54가 레이더의 유도 없이 독일군 전선 후방으로 가는 R-5기 수십 기를 격추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야간에 실시되는 소련군의 폭격이나 파르티잔에 대한 보급 작전을 막는 데 부족했다. 동부전선의 야간 방공전을 조사하기 위해 볼프강 팔크가 방문했고 그는 서부전선의 전문 야간전투기 부대를 파견하기 보다는 동부전선에서 스스로 방공부대를 조직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위해 팔크는 요격기과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야간 비행 훈련을 받게 하고 Do17과 Ju88 폭격기 일부에 기관포를 장비해 야간전투기로 개조할 것을 제안했다. 팔크는 폴타바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1942년 10월 폭격기, 요격기, 정찰기 조종사들을 선발해서 훈련을 실시했다. 하지만 훈련이 끝난 11월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이 포위되는 전선의 위기가 닥치며 야간전투 훈련을 받은 기체와 조종사들은 지상공격 임무에 투입됐고 기체들이 그런 식으로 소모되면서 당초 구상했던 야간전투기 부대 편성은 불가능해졌다.
동부전선 5./NJG100의 Ju88G-6(1944)
후에 전선이 안정되면서 제1구축항공단 제10, 12중대를 기간으로 제5야간전투항공단 제4비행대가 편성됐다. 지휘관은 22기 격추 에이스인 공작 하인리히 추 자인-비트겐스타인 대위였다. Ⅳ./NJG5는 동프러시아에 배치됐다. 서부전선과 달리 동부전선은 전파방해가 없었고 소련폭격기들은 독일기의 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귀족 중 가장 작위가 높은 추 자인-비트겐스타인 공작은 Ⅳ./NJG5가 1943년 5월 유보트 기지 수비를 위해 서부전선으로 돌아갈 때 까지 5기를 격추한다.
히틀러는 1943년 7월 치타델레 작전을 위해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는데 독일군의 작전 준비는 소련군 폭격기에 의해 상당히 방해 받았으므로 캄후버는 동부전선 경험이 많은 Ⅳ./NJG5를 다시 투입한다. 이번에는 철도에 실린 이동식 레이더 기지와 신무기인 ‘쉬래게 무직’의 도움을 받으며 추 자인-비트겐스타인은 하루밤에 7기를 비롯해서 7월 11일부터 8월 9일 까지 29기를 격추한다. 그는 후에 서부전선의 제3야간전투항공단 제2비행대장으로 전출된다.
치타델레 작전이 포기된 후에도 Ⅳ./NJG5는 Ⅰ./NJG100으로 개편돼서 동부전선에 남았다. 서부전선의 야간 전투가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루프트바페는 효과적인 전력을 동부전선으로 이동할 여력이 없었다. 동부전선의 독일 야간전투기 부대는 압도적인 소련군 앞에 주도권을 상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