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이 보스턴의 페트로마르티네스를 일컬어 외계인이라고 부릅니다..
하긴 그의 성적과 투구내용을 보면 그렇게 불리우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외계인의 원조는 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전 개인적으로 X-file이라는 TV프로그램을 즐겨보는데요, 얼마전 이 프로그램의 시리즈중에 야구선수가된 외계인편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내용인 즉, 외계인이 지구인들이 즐기는 야구를 보면서 야구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고, 야구에 관심을 가진 몇몇 외계인이 지구인으로 변장하여, 야구를 즐기게 된다는 내용인데요..
믿거나 말거나(?), 물론 믿지 못할 황당한 내용이지만....
도저히 인간이 낼 기록이라고는 믿지 못할 엄청난 기록을 수립한 몇몇 선수들에게, 사람들이 외계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들게할 정도라면 그선수의 활약이 어느정도인지 지레 짐작을 가능케 합니다.
물론 X-file에 소개된 선수는 타자였지만, 이 시리즈 내용의 소재가 된 실제 인물은 당연 사첼페이지라는 투수입니다..
이 선수와 관련된 글은 블루원님이 간략하게 설명해 주셨는데요..사실 사첼에 관한 내용을 좀 더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 블루원님에게 물어본 건데.. 사실 그 때 이후로 저의 지식에는 별 진척이 없었습니다.
그가 썼다던 자서전 원문을 보았으면, 더 좋았으련만.. 그렇질 못했구요..
오늘 게시판을 보다 우연히 이와 관련된 글을 올리셨길래.. 몇자 적어 보았습니다..
그와 관해 알려진 대부분의 기록들이.. 그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한 내용과, 그의 경기를 본 팬들의 기억을 토대로 쓰여진 것 들이라..모두 정확한 데이터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외국의 그와 관련한 홈페이지의 내용과 국내에 소개된 내용이 다소 많이 틀린 부분이 많은 부분도 사실입니다.
그의 관련된 일화와 관련 기록이 궁금하신 분들은 다음 홈피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그곳에서 발췌한 기록의 일부분...
1. 그의 커리어 하이시즌- 1934년 104승 0패 방어율 0.00, 삼진2239개, 939이닝, 102완봉승.
2. 통산 최다승 -2100
3. 통산 최저 방어율 - 0.09
4. 포스트 시즌 최다승 -46승
5. 포스트 시즌 최저 방어율 - 0.08
6. 통산 최다 이닝 - 18944.2
7. 통산 최저 RATIO - 0.1(안타 1609, 볼넷 135)
8. 최고 리그 우승 - 16
9. 최다 퍼펙트 - 700번..
얼핏 보여지는 그의 기록만 보더라도..가히 상상이 안가실 겁니다.
위의 기록은 그가 니그로리그에서 활동한 23시즌 동안의 성적입니다..
기록에서 풍겨나오는 그의 이미지 뿐아니라..흔히 만화책에 등장할 법한 행동들을 자주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일부러 3타자 연속 포볼로 진루시켜 만루의 위기를 자초한 상태에서, 3타자 연속 삼진잡기... 야수들 모두 내야로 불러들여 글러브 벗고 쉬게한 다음 연속으로 삼진잡기..9타자 연속 삼진잡기 등등.. 이런 일면들이 그의 카리스마를 엿보게 하는 부분이죠..
사실 사첼을 빼고 니그로리그를 이야기 할 수 없고, 니그로니그를 빼고 사첼을 이야기 할 수 없듯이, 사첼은 리그로리그의 전설과도 같은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잠시 이해를 돕기 위해 리그로리그를 언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리그로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사첼 페이지, 조쉬깁슨(통산 823의 홈런,1936년 84개의 개인최다홈런) 이 말했듯이 니그로 리그엔 많은 샤첼과 깁슨과 같은 선수들이 존재했었다 . 만일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유명한 행크아론, 윌리메이스,루 브록, 래지 잭슨, 배리본즈, 데이빗 저스티스, 시릴 필터, 캔그리피주니어, 프랭크토마스, 론 갠트,프래드맥그리프, 알버트벨,리키핸더슨,모본,개리세필드 등등 수없이 많은 흑인출신 야구선수들을 볼 수 없었을지 모른다...
1868년 12월 11일 NABP(National Association of Baseball Players)의 최초의 야구리그가 탄생했울 때 흑인들은 배제되었지만 그때 창시주체자들의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한명이나 그이상의 유색인종으로 어떠한 야구팀도 창단할 수 있다는 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공식적으로 흑인이 야구를 하는 것에 대해 원천적으로 봉쇄하지는 않았다고합니다...
하지만 1947년 재키 로빈슨이 흑인 최초로 메이저무대에 등장하기전의 메이저역사에서 단 한명의 야구선수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 것을 보면.엄밀히 말해 이 기간동안의 메이저리그는 백인들만의 리그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 이전에 활동했던 흑인 선수는 없었던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NO!!
최초로 프로리그가 활성화된 1868년, 실질적으로 19세기 말까지 흑인들이 포함된 팀과 흑인뿐아니라 황인종들로 구성된 팀조차도 이 리그에 참가하고 있었고... 일례로 1988년엔 Moses Fleetwood Walkerd와 Welday Walker 두 형제가 메이저 무대에서 활동한 사례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흑인들은 메이저무대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짐작하다시피 인종 편견에 대한 보이지 않는 벽에 의해, 흑인선수는 메이저 무대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원천적인 통로가 통제 되었던 것이죠.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계시겠지만,, 유색인종을 리그에서 배제한 구단주들의 묵시적인 협약과 선수들의 유색인종차별 때문이었구요..
그러나 흑인들은 계속해서 야구를 했고, 그들만의 팀을 구성했고 꾸준히 시합을 가졌습니다.
1885년 첫번째 흑인프로팀인 Cuban Giant은 1920년 첫번째 흑인리그가 구성되기 전까지 독립적인 클럽으로써 꾸준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흑인들의 꾸준한 야구에 대한 정열은 흑인야구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Rube Foster(명예의 전당 헌액자)에 의해 1920년 Negro National League가 만들어지는 결실을 보게 되고,
3년 뒤인 1923년엔 Ed Bolden에 의해 Eastern Colored League가 구성됩니다.
이 두 리그는 몇 년뒤 재정적 어려움으로 해체되기전까지 몇 년동안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다른 몇개의 흑인리그가 구성되긴 했지만 재정적어려움을 극복하진 못해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933년엔 새로이 Negro National Leage가 결성되었고, 1937년엔 Negro American League가 제정되어 두개의 새로운 리그가 구성되어었습니다..
이 두개의 리그로리그는 메이저의 흑인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성황을 이룹니다..
이 기간동안 리그로리그는 11번의 그들만의 월드시리즈(1924-27,1942-48)를 치루었고, 올스타게임(1933-48)도 치룰 만큼 상당한 팬들의 성원과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니그로리그는 사첼이 메이저에 입성한 해인,1948년 시즌을 끝으로 접게 되죠..
당시의 리그로리그의 공식적인 게임수는 최대 60경기였던 것으로 알려지는데요.. 사실 메이저리그(백인리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경기를 메우기 위해, 또 경기의 흥행을 위해.. 많은 팀들이 하루에 두,세번의 경기를 치루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리그로리그에 속한 프로팀들이 실력이 좀 떨어지는 세미프로팀이나,대학팀, 그리고 다른리그(멕시코나 도미니카 등)를 돌며 많은 경기를 치루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사첼의 엽기적인 기록도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니그로리그가 메이저리그(당시의 백인리그)로 흡수된데에는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한 40년대의 시대적 상황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전쟁의 영향으로 메이저리그 선수들까지 전쟁에 참전했으며, 그 영향으로 선수수급의 어려움, 관중수의 급감으로 이어져 리그를 제대로 구성하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구단주들은 선수수급에 어려움을 느껴 중남미계 선수들을 스카우트 하게 되었고, 잘알다시피 역사적인 1947년 로빈슨의 메이저 진출로 흑인 차별이 무너지게 됩니다.
참고로 흑인리그와 백인리그(당시의 메이저리그)로 양분되던 당시의 리그특성상, 단일리그안에서 팀들이 정규시즌을 치루진 않았지만, 시범경기형식으로 양리그슈퍼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여 게임을 벌였다고 합니다.( 1920년대 부터 1940년대 까지..)
당시 사첼과 대결했던 유명한 메이저리거와의 대결기록을 보면 그의 위대한 단면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아래의 내용은 baseball21.wo.to에서 발췌한 대결기록입니다.
1. 조 디마지오
33타수 1안타입니다. 삼진은 무려 28개를 먹었군요. 1안타의 의미는 끝내기 안타 빼면 사첼에게 완전히 망했다는 것입니다. 무쟈게 빠른 사첼 페이지가 디마지오만 보면 더더욱 무서워지는 사첼 페이지 입니다. 디마지오는 마이너 시절 행운의 내야안타를 사첼에게 뽑았죠.
2. 지미 팍스
팍스는 28타수 4안타를 쳤습니다. 홈런은 물론 하나두 없지만 2루타가 4개나 있다니 상당히 신기한 선수이죠. 일부로 봐준다거나 뭐 디마지오랑 싸우거나 둘중에 하나입니다. 팍스두 야수인데 페이지가 들어오면 미남이 되는군요^^. 하여간 허발나게 무서운 선수입니다.
3. 조시 깁슨
깁슨은 단한번의 안타두 치지 못했습니다. 8타수 0안타를 쳤는데요. 8삼진을 당했습니다. 가장 위대한 투수가 가장 위대한 타자랑 싸우면 위대한 타자가 지는군요. 파워두 루스와 비슷하거나 능가하는 선수인데. 쩝! 하여간 8타석 연속 삼진을 당했습니다. 그만큼 사첼이 위대한 투수죠. 파워하난 끝내줘!
4. 알 시몬스
23연속 삼진에 23타수 0안타를 기록했던 분입니다. 이 선수는 32년에 사첼이랑 했을 때 2스트라익이었을 때 알아서 나가버린 선수입니다. 이봐 너무 무서우니 팍스랑 상대해! 와~~ 그렇게두 무식하게 잘때린 시몬스가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지다니..
5. 베이브 루스
상대해보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피한 선수입니다.
6. 루 게릭
뭐 19타수 0안타에 18삼진이군요. 철마가 납마루 변했당^^ 그리구 이 선수가 월터 존슨보다 더 빠르더라구 지껄였던 선수입니다. 레프티 그로브보다 월터 보다 더 오래간다구 말했던 선수입니다. 게릭이나 루스나 사첼 만나면 그렇게두 두려운강^^
7. 루크 애플링
10연속 삼진을 당했습니다. 볼것두 없네여. 유격수 단일시즌 최고 타율이 이 선수 앞에 자존심을 구길대루 다 구겨놓네여.^^
9. 벅 레오나드
레오나드는 그나마 잘쳤습니다. 29타수 3안타에 2홈런을 쳤구요. 니그로리그에서 초반 3타수 3안타를 쳣지만 나중에 25연속 삼진을 당합니다. 사첼이 초반에 좀 봐줬군요. 사첼의 위대함은 계속됩니다.
10. 마틴 디히고
디히고는 38년의 사첼의 1패를 만든 넘입니다. 하지만 사첼에게 홈런을 맞은 넘이 디히고이구 통산 39타수 4안타를 칩니다. 33삼진을 당했구요. 어이구 뭐 장난이 아니네여.
11. 아키 본
모 본의 조상뻘이 아마두 3할8푼7리에 한시즌에 친적이 됬지만 48타수 3안타에 그치는 등 처절함을 느낍니다.
12. 테드 윌리암스
사첼 페이지만 보면 선구안두 여차없이 망가지는 선수입니다. 파워두 묵직한데 46년에두 안타하나 뽑지 못하는군요. 40타수 0안타에 1루에 어쩌다 낫아웃으로 진출한 것 빼군 39삼진으로 처절함을 느낍니다.
2 사첼의 일대기.
본명은 리로리 페이지(Leroy Robert Paige).
그는 1906년 7월 7일 알라바마주 모빌이란 곳에서 정원사인 아버지와 가정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12형제 중 6번째 태어났다고 합니다.. (엄청난 대가족이군요..) 사실 그의 생년 월일에 대한 것도 확실한 것이 아닐 만큼..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진짜 외계인 일런지도(?)...^^
그가 사첼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그가 학창시절 가졌던 나쁜 장난에서 비롯 되었다고 합니다. Satchel을 사전에서 찾아보세요. 이 뜻은 멜방이 있는 가방이나, 여행용 손가방을 의미합니다.. 그가 학창시절 한번은 손가방을 들고가는 한 남자의 가방을 훔치려고 한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후에 그것을 본 친구들이 사첼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놀렸고, 이후 완전히 샤첼이 본명처럼 굳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의 야구입문은 1924년 부터였습니다. 그의 나이 18살... 이 해 그는 세미프로팀인 모빌 타이거스(Mobile Tigers)의 트라이 아웃을 통해 야구 입문하게 되고, 1926년 본격적으로 채타누가 블랙룩아웃스라는 팀에서 본격적으로 프로 데뷰를 했다고 전해 집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27년에 버밍햄 플랙베론스라는 팀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는 이팀에서 뛴 3년동안 28승 18패의 비교적 눈에 띨 만한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야구팬들에게 강력한 어필을 하게되는 계기는 31년 피츠버그 크로포드라는 팀과 사인을 하게 되면서 부터였는데요..
그가 이팀에서 활약하는(31'-37') 동안 97승 15패라는 성적을 올렸다고 알려집니다.. 공식적으로 말이죠..( 1932년 32승7패 , 1933년 31승4패.... )
이 계산대로라면..2년동안 63승 11패.. 그럼 나머지 5년동안 34승 4패(?)가 되나요..^^
뭔가 그의 명성에 비해 빈약하고 데이터의 아구(?)가 맞질 않죠...음..
물론 1934년 그가 105경기의 선발 출전해 104승을 기록했다는 부분도 사실인 것으로 전해 지고.. 이 모든 공식과 비공식적인 기록의 차이를 당시의 리그로리그의 특성에서 찾아야 함에 분명하지만, 흔히 알고 있는 사첼의 기록과는 좀 분명 다른 부분입니다..
리그로리그의 특성을 감안해서, 그의 기록을 모두 환산하더라도 말이죠..
(이와 관련한 기록의 신빙성 문제는 저에게 묻지 마세요...^^)
사첼은 이기간 경기를 치루기 위해 도미니카공화국, 멕시코,등 비슷한 팀을 찾아 과도한 경기를 하였고, 1938년 급기야 심한 어깨부상으로 야구를 그만 두어야할 시련을 맞이합니다.
그가 밝힌 통산승수가 2100승에서 2400승으로 추정되는데..이정도 승수면 20승 투수가 100년을 넘게 던져야 가능한 승수입니다. 그가 밝힌 통산 투구이닝(거의 19000이닝)이닝을 또 생각해 보죠..찬호가 작년 한해 230이닝 가깝게 던졌는데.. 사첼의 통산이닝을 찬호가 따라가려면...826년 정도를 던져야 가능한 수치입니다.. 상상이 되는지...
아무리 철완이라고 하지만, 이정도 투구를 하고 어깨가 성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의 부상도 잠시.. 이듬해 1939년 캔자스시티 모나크와 계약을 한후 그는 완전히 어깨부상에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전의 그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그가 부상당하고 재기를 꿈꾸는 동안, 그만의 커브를 개발했고, bee-ball, jump-ball,trouble-ball,long-ball등 다양한 구질의 레퍼토리를 갖추는 투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 기간동안의 행적을 보면 몇 팀을 전전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가 이런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자주 팀을 옮겼던 것은 크로포드의 구단주인 거스 그리니(Gus Greenlee)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그의 연봉은 박하기 이를 때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다가 흥행을 고려한 구단주입장에서는 계속적으로 그의 무리한 등판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런한 불편한 관계때문에 종국에는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야구를 하러 가게 되고, 이에 화가 난 구단주는 그를 니그로니그에서 야구를 못하도록 금지시키게 됩니다. ( 구단주인 거스 그리니: 니그로리그를 활성화시킨 장본인으로 막강한 파워를 지닌 인물) 그러나 이런 방법이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 는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결성한 Satchel Paige's All-Star이라는 새로운 야구팀을 결성해서, 다시 니그로리그에 뛰어 들었습니다.
1939년에는 마침네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라는 팀에 합류함으로써 니그로리그무대에 다시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기간 동안(39'-42') 4년 연속 팀을 NAL(Negro American League)우승으로 이끌고,특히 1942년 당시 홈스테디 그레이스라는 막강한 팀과의 월드시리즈에서 그의 진가가 나타났는데.. 그는 이 시리즈에서 혼자 3경기 승리를 챙겨 팀을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이후 1946년 그는 또 다시 팀을 페넌트레이스 우승으로 올려 놓았으며. 서부와 중부스타들이 벌인 올 스타게임에도 참가해 2번의 승리를 올렸습니다.
비록 나이때문에 예전과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이진 못했지만, 여전히 많은 야구팬들 사이에 있어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선수 중 한명이었습니다.
1848년 그의 나이 42세.. 환갑진갑 다 지난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입성하게 되는데요..
메이저리그 6시즌 동안 28승 31패 방어율 3.29의 통산성적은 그의 네임벨류에 비하면 평범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그의 나이를 감안하고..몇 경기에서 보여준 그의 기록을 살펴보면 또한 놀라운 일입니다... 메이저 생활동안 하나의 에러도 기록하지 않았을 뿐더러,1952년 한해에 기록한 두번의 노히트노런,65년(당시59세)에 등판 3이닝 완봉을 끝으로 마지막 장식하는 순간 까지..정말 최후까지 엽기적인 선수라 할 수 있습니다..
53년 공식은퇴후 65년 감짝 등판한 그8년 간의 공백기 동안, 그는 여전히 야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기간 동안 완전히 은퇴한 것이 아니라,그는 여전히 마이너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정말 야구에 대한 열정은 못말릴 선수임에 분명합니다..
그의 야구인생동안 수립한 수많은 불멸의 기록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건 사실이지만,그를 더욱 가치있게 만든 부분은 바로 그의 이런 도전 정신이 아닐까요..
아니면, 정말 그는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런지도 모르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