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무렵 실상사에서 시작해 몇 개의 암자를 지나 벽소령대피소에 도착했을 땐 어둑해져 있었다. 박짐을 짊어지고 오르다가 송화가루 하얀 취나물을 뜯어 씻지도 못하고 된장을 찍어 먹으며 힘들게 올랐을 때, 그때는 지금보다는 더 힘이 있었지. 20년 전쯤이었을까? 칠암자라는 말은 들었지만 길이 희미해 초입부터 헤매다 서너개의 암자를 들른 것 같다. 빛고을에이스산악회엔 이제 친근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 다이뻐가 주축인데다 회장이나 총무 산행대장 고문들도 꽤 친해졌다. 그러면 또 술을 많이 마실 가능성이 많다. 어머니상을 치르신 신사형님은 며칠째 연속으로 술을 마시고 잠을 못 주무셨다는데 몇개의 선물을 가지고 오셨다. 7시 약간 지나 비엔날레주차장을 출발한 차는 잠깐 달려 강천산휴게소에 아침 식사를 편다. 관광버스들이 많다. 도리포가 술을 불러 종이컵에 따라줘 거푸 마신다. 인월을 지난 버스가 산내로 접어들자 그동안 말랐던 하천은 흙빛으로 소릴내며 흐른다. 가끔 들른 음정마을 앞에 버스가 멈춘다. 비가 갠 하늘에 흰구름이 피어오르며 산줄기를 드러낸다. 지리산의 줄기에 잠긴 작은 능선들은 제각기의 색깔과 모양으로 아침햇살을 받고 있다. 산행대장의 주도로 게으른 몸풀기를 하고 마을 안길을 오른다. 따지 않아 빨갛게 익어간 감들이 가득 나무에 매달려 있다. 마을을 벗어나 고사리밭 사이로 구비를 돌아가는데, 잘못 들었다고 돌아오란다. 다시 내려간다. 뒤돌아오며 보는 풍경도 이쁘다. 영원사까지 끝없는 시멘트길이다. 검은 호스에서 나오는 계곡물을 마시기ㅗ 구비를 도니 조금 내리막이다. 젖은 낙엽을 한남자가 송풍기로 길가로 날리고 있다. 오르막을 또 가다보니 큰 바위에 영원사가 씌여 있다. 석축 아래 경사를 올라 안내판을 잠깐 읽는다. 화장실 앞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 너른 바위들을 이어놨다. 우린 거기에 앉아 배낭을 풀어 술을 마신다. 절 안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뒤이어 온 일행들이 산줄기를 보며 술을급하게 마시고 이제 합류되어 숲오르막 등로를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