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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항로를 개척한 박옥규 제독
박옥규 해군 제독은 해군본부 감찰국장. 인사국장, 작전참모부장을 역임하고 준장으로 진급하였던 1952년 7월에 화물선 고려호(6,804톤) 선장으로 긴급 차출되었다. 당시 해운업계에서는 고려호를 맡아 책임지고 태평양 왕복 항해를 마칠 수 있는 항해사로 박옥규 제독을 지목하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대통령이 현역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선장을 발탁한 것이다.
부산항의 고려호(사진:위키피디아)
고려호는 원래 1938년 12월 10일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에서 북미산 목재 운반용 화물선으로 진수한 동형 12척 중 마지막으로 건조한 카즈우라마루(화포환, 和浦丸)호로 엔진은 미쓰비시 MB 디젤 400마력으로 속력은 16.5노트였다. 이 배는 건조 후 바로 목재 수송에 나섰지만, 미일 간 외교 마찰로 인해 운항이 중지되어 석탄 수송에 주력했다. 태평양 전쟁 두 달 전인 1941년 9월 24일 일본제국 육군에 징발되어 군용 수송선과 병원선으로 활용되었다. 1945년 5월부터는 한반도에서의 잡곡 수송 등을 담당했다.
화포환(和浦丸)은 7월 중순 일본제국 해군 항공대 수송 임무로 일본 서해안 마이즈루만에 있는 무학항(舞鶴港)을 출항하여 동해를 건너 포항에서 수송 물건을 상륙한 후 부산항으로 항해하여 7월 15일 입항하려고 예정하였다. 당시 부산항은 미군의 기아작전(飢餓作戦)으로 항구가 기뢰로 봉쇄되어 배들이 인근 해역에서 5일간 대기하였다. 7월 20일 기뢰 제거가 완료되어 부산 내항으로 항해했다.
和浦丸은 13시경 부산 북항방파제 1.2km 해상에서 아직 제거하지 못한 기뢰와 접촉해 기관실 뒤쪽 부근에서 폭발이 일어나 배의 기관이 정지하고 정전(停電) 상태에 빠지고 선박이 대파되었다. 배는 테츠에이마루(鉄栄丸) 등에 예인되어 침몰을 피하려고 얕은 여울에 올라 수리하려고 대기하였다. 일본제국이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하여 화포환 승무원들은 육지로 올라왔다.
和浦丸(사진:위키피디아)
일본제국은 신의주환(新義州丸, 708톤)을 정비하여 인양자(引揚者) 수송을 담당하여 8월 18일 일본 민간인들을 잔뜩 태워 부산을 출항해 일본 하카타항에 입항했다. 新義州丸은 1945년 9월 17일 일본 하카타만에서 원인불명으로 침몰했다.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 중 경남과 전남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개별적으로 선박을 빌려 현해탄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연합국 군사령부가 귀환 수송체계를 정비하면서 일본인 대규모 집단 이주가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는 8월 17일 구호본부를 설치하고 업무를 시작해 8월 20일 고안마루(興安丸, 7,079톤, 126m)가 부산항에 입항하여 8월 21일 귀환하고, 8월 22일에는 관부연락선 도쿠즈마루(德壽丸. 3000톤)가 입항해 8월 23일 출항하였다.
고안마루(興安丸, 7,079톤, 126m)(사진:위키피디아)
조선에 머물던 일본인이 일본에 돌아가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일본인들이 자기들 공동체에서만 머물며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해 생존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9월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체계적인 원호 수송이 이뤄졌다. 당시 조선 남부에 약 50만 명, 북부에 27만 명, 만주에서 피난 온 12만 명의 일본인이 머물렀는데, 1946년 2월경에는 민간인 약 70만 명과 군인 30만 명이 부산항을 거쳐 모두 귀국하였다. 무장 해제한 일본 병사는 매일 4천 명을 송환했다. 일본 후생성 자료에 의하면 1961년까지 군인 포함 총 6,288,665명이 해외에서 귀환했다. 남한에서 596.454명, 북한 지역에서 322,585명이다. 일본은 30여 년간 해외 일본인의 귀환과 관련하여 조사하고 ‘引揚援護局史’의 형태로 정리하였다. 중국 본토 154만 명, 구 만주 지역 105만 명, 대만 48만 명, 구 소련지역 47만 명, 쿠릴 사할린 29만 명, 대련 23만 명이다. 귀환자들은 1970년대부터 자서전과 체험기, 수기 등을 발표했다. 한국에서는 최영호 교수가 귀환자를 연구했다.
한국 정부는 부산항 입구에 있는 거대한 화물선 가즈우라마라호를 인양하려고 서둘렀지만, 장비가 없고 배에 필요한 선박 엔진 등 부품이 없어 인양해도 골칫거리였다. 《한국해운 60년사》에 의하면 광복 이듬해인 1946년 7월 미 군정 산하의 해상운수국이 처음으로 국내 선박의 일제 등록을 실시했다. 선대규모는 313척, 1만7,170총톤으로 선박 1척당 평균 톤수가 55톤에 불과하고, 선박이 없어 도서지방에서는 어선을 여객수송에 투입했다.
앵도호(사진:위키피디아)
태극기를 달고 항해한 최초의 국적외항선은 1948년 4월 사과, 한천, 흑연, 오징어, 해삼, 홍삼, 건어물 등을 싣고 홍콩 항로에 투입한 앵도호(櫻桃號, 2281총톤)이다. 이 배는 1918년 일본 하라다 조선소에서 건조한 배다. 박병교 화신무역 사장과 이규재 부사장이 외세에 휘둘리는 무역 판도를 바꾸려고 홍콩 항해를 결심했다. 앵도호는 노련한 황부길이 감독 선장을 최효용이 선장으로 승선했다. 홍콩에 가져간 물건은 막대한 수익을 가져왔다. 돌아올 때는 생고무, 신문용지 등 원자재 10여 종을 만재하고 부산항에 입항했다. 앵도호는 처녀항해를 마치고 12월에 남북교역차 흥남에 갔다가 북한에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1949년 2월에는 동아상사가 김천호(金泉號)를 빌려 홍콩으로 보내 무역 길을 개척했다. 해운업이 어려울 때 젊은 남궁련(1916~2006)이 나타났다.
남궁련은 1916년 경기도 양주에서 측량기사 남궁복의 셋째로 태어나 1940년 일본 니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 극동기업을 세웠다. 그는 미군부대의 용역업과 토목건설업으로 많은 실적과 부를 쌓았다. 한편 청산리 전투로 명성이 높은 이범석 장군이 만든 조선민족청년단에서 청년부장을 맡아 열심히 활동했다. 이범석 장군은 초대 국무총리가 되어 남궁련은 추진하는 사업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남궁련 회장은 배를 수리 후 국적선으로 활용하고픈 욕심에 1947년 극동해운을 설립하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으로부터 선박 인양 불하권을 따내고, 국가에 외화 대부를 신청했다.
침몰한 배는 본래 일본 선박이었으나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1945년 8월 15일 현재 한국 수역에 있는 배는 국적을 한국적으로 인정하여 소유권 주장을 할 수가 없었다. 1949년 일본 살베이지 회사가 선창에 물을 가득 채워 부력으로 배가 뜨는 방식을 채택하여 인양에 성공했다. 정부는 부산항만에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여 한숨을 돌렸다. 배 수리문제로 혼란이 일었지만, 기관이 디젤엔진 기관이라 나가사키조선소로 회향해 선체를 수리하고 요코하마의 일본 강관 쓰루미(鶴見)조선소에서 기관부를 정비했다. 합동통신의 노석찬 기자가 남궁련의 안내를 받아 쓰루미조선소 개수공사 현장을 방문하고 신문에 기사를 썼다, 남궁련은 국적선 보유를 주장하며 정부를 설득하여 정부지원금을 받기를 원했지만, 정부는 반응하지 않았다. 수리 대금이 제대로 정산되지 못한 상태로 배는 일본 조선소에서 1년간이나 방치되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배를 제때 인도받지 못한 남궁련은 도쿄 주일공사로 근무하던 김용주를 찾아가 “큰 배를 고철로 팔면 4만 불 밖에 못 받지만, 배를 재생하여 쓰면 200만 불 이상의 가치가 있다.”라고 호소하고 설득했다. 김용주 주일공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적선이 필요하다고 건의하여 이 대통령은 남궁련을 만났다. 이 대통령은 최순주 재무장관(임기: 1950.4.25.~1951.3.5.)을 만나 잘 설명하라고 말하고 70만 달러의 외화대출을 허가하였다. 남궁련 회장은 후임 백두진 재무장관(임기: 1951.3.5.~1953.9.8.)으로부터 선박 인도 대금을 받아 쓰루미조선소에 대금을 지불하고 배를 인수했다. 배 이름은 월성호(月星號)를 거쳐 고려호(高麗號)로 명명해 1952년 10월 3일 오전 11시 부산항 제1부두에 입항했다.
화물선 고려호(사진:서울경제)
고려호의 길이는 139m, 폭 17m, 적재톤수 10,230톤으로 대한민국에 등록된 863척 가운데 가장 큰 배였다. 남궁련은 배를 부산항으로 가져오는 것은 성공했지만, 힘든 과정이 남았다. 태평양을 횡단할 선장과 선원이 없었다. 남궁련은 황부길을 희망했지만, 황부길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참여가 어려워 박옥규 제독이 선장을 맡았고, 권태춘 대령이 기관장, 2등 항해사에 이건주 중령, 2등 기관사 채수항 중령, 3등 기관사 이학출 소령 등 현역을 모두 차출했다. 당시에는 숙련된 일반 선원이 없어 46명 선원 중 대부분을 해군에서 인원을 조달하고 민간인으로는 1등 항해사 김훈작, 1등 기관사 지석남, 3등 항해사 배순태 3명이었다.
고려호는 1952년 10월 21일 부산항 1부두 3번 선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임석한 가운데 고철 1,460톤을 싣고 부산항을 출항했다. 이 항해는 대한해운공사가 시도하지 못한 태평양 항해 도전이었다. 배는 초기에 별 이상이 없었으나 태평양 날짜변경선을 지날 때 엔진 고장으로 속력이 느려졌다. 고려호는 컬럼비아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만년설이 보이는 후두산(Hoodoo Mountain, 1,850m, 좌표 56°46′18 ″N 131°17′46 ″W) 화산을 바라보며 부산항을 출항한 지 27일 만인 1952년 11월 25일 밤늦게 미국 서부 오레곤주 포틀랜드항4부두에 입항했다. 다음날 고려호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 환영을 해주었다.
Hoodoo Mountain(사진:위키피디아)
박옥규 선장은 현지 신문과 인터뷰를 하여 현지 The OREGONIAN 신문은 “한국 선박 최초로 미국 방문” 이란 제목으로 크게 대서특필했다. 승무원들은 화물을 내리고 엔진을 수리한 후 샌프란시스코에 입항하여 환영식에 참가했다. 고려호는 샌프란시스코 스탁턴(Stockton)항에서 밀 8,236톤과 잡화 1,014톤을 싣고 12월 16일 출항해 부산항에 입항했다.
박옥규 선장과 남궁련 회장(사진:조선일보)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차출된 장교들은 소속 부대로 원대 복귀하고 후임 선장에 1등 항해사 김훈작, 기관장에 1등 기관사 지석남이 승진하였다. 고려호 기관장을 맡았던 권태춘 대령도 해군본부로 복귀했다. 배에서 선장이 아버지라면 기관장은 어머니 역할이다. 기관사는 어둡고 캄캄한 비좁은 통로 사이를 다니며 엔진과 각종 펌프, 전기 시설, 비품, 부속을 돌보는 정말 보이지 않는 공헌자이다. 항해를 시작하면 기관사들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뜨거운 공간에서 연료 주입 및 온도를 수시로 확인하며 배를 유지, 보수, 정비, 검사하며 선장에게 배의 상태를 보고한다. 고려호는 항해 중 태평양에서 기관 고장으로 5일간 표류하였지만, 권태춘 기관장을 포함한 여러 승무원의 노력으로 노후 선박의 기계적 결함을 살려내 기적같이 미국 항구에 입항할 수 있었다. 태평양 횡단 항해는 한국 해기사의 우수성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무역으로 성장하는 한국 해운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미국 해운회사는 배에 경험이 풍부한 일본 해기사 채용을 강력하게 권유했지만, 우리나라 해운 개척자들은 뚝심으로 한국인 채용을 고집해 한국이 해운 강국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들었다. 고려호는 태극기를 달고 1953년 4월 14일에는 홍콩에 처음으로 입항해 미국 및 호주산 곡물을 하역했다. 고려호는 함부르크, 오스트레일리아, 마닐라항 등을 항해하였는데 배가 노후화되어 38년의 선령을 마치고 1976년 8월 본선이 부산의 Dongkuk Steel Mill Co. Ltd.에서 해체되었다.
동국대 김영배(1931~2024) 명예교수는 평북 영변에서 태어나 18세 때인 1948년 여름 영변의 용문고 졸업을 앞두고 목숨을 걸고 월남한 후 작은 무역회사에서 일했다. 하루는 해군본부 예하 군악학교 신병 모집 광고를 보고 악보도 전혀 볼 줄 모르면서 ‘학교’란 말에 너무 기뻐 1949년 7월 20일 해군 신병 14기로 입대해 해군군악학교에 들어갔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해 군악학교는 진해를 거쳐 부산으로 이전했다. 그사이 김영배의 소속이 부두경비대를 거쳐 함정의 정비 계획을 담당하는 해군본부 함정국에 재배치되어 행정업무를 하게 되었다.
약관(弱冠) 20세 때 함정국장 권태춘 중령을 처음 만났다. 권 중령은 김 하사가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을 보고 向學熱이 무척 높은 군인으로 높게 평가하고 자주 격려를 했다. 당시 해군은 인재 양성이 필요한 시기라 장병들의 야간대학 입학을 장려했다. 김 하사가 야간대학 입학을 요청하자, 상관 권 중령은 선뜻 허락했다. 김 하사는 주간근무를 마치고 군인 신분으로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부산 캠퍼스에서 야간 수업을 들었다. 권 중령은 김 하사에게 등록금을 주어 격려했다. 권 중령은 일본 출장을 다녀올 때 귀한 책을 구해와 전달했다. 김 하사는 상관들의 배려 속에 1954년 9월 이등병조(하사)로 전역해 동국대학교에 복학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평안 방면의 음운 체계’로 박사학위를 받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고 문과대 학장이 되었다.
김 교수는 ‘남북한 방언연구’를 하여 1997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김 교수는 해군 감찰실장,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역임하다 1962년에 세상을 떠난 평생 은인(恩人) 권태춘 준장을 잊지 못해 매년 6월 보훈의 달에 서울 국립현충원 장군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그는 꽃을 헌화하면서 어린 시절 자신을 이끌어준 은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85세 때인 2017년 7월 4일 해군 순직 장병 유자녀를 위해 써달라고 ‘바다사랑 해군장학재단’에 장학금 5천만 원을 기부하며 “그동안 해군이 나에게 베풀어준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며, 큰 은혜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도 제대로 갚지 못해 오직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동국대 명예교수 김영배(사진:대한민국 해군)
박옥규 제독은 고려호의 대미항로 제1차 취항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해군으로 복귀하여 함대사령관으로 복무하였다. 이승만 정부에서 손원일 중장에 이어 제2대 해군참모총장(중장)을 맡아 1953년 6월 30일부터 1954년 11월 1일까지 재임했다. 박 제독은 1957년 해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박 제독은 해군의 창립과 육성, 한국전쟁에서의 해상봉쇄, 상륙작전, 군수물자 수송, 적진 포격 등을 완벽하게 수행한 공적을 인정받아 충무무공훈장, 1951년 4월 미국 동성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해군 전역 후 1963년 1월 21일부터 1967년 9월 4일까지 초대 중앙해난심판위원장을 맡았다. 공직을 떠난 후에는 후학을 지도하며 일생을 기록하다 1971년 1월 28일 71세로 타계하여 국립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거성 박옥규(사진:궁인창)
한국해기사협회는 2010년에 해운과 국방에 큰 업적을 남긴 거성(巨星) 박옥규(朴沃圭)를 선정하여 2010년 5월 흉상 헌정식을 개최하였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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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2대 해군 참모총장 박옥규님은 여수시 삼산면 덕촌리 출신입니다.
마을앞에 박제독님의 공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