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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 & Reader 이문열, 시대를 쓰다
교수 자격 따진 학생에 일침…이문열 “나 한가한 사람 아냐”
카드 발행 일시2024.08.19
에디터
신준봉
이문열, 시대를 쓰다
관심
21. 대학 중퇴자가 대학 교수 되다
『맹자(孟子)』에 “사람의 환란은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하는 데 있다(人之患 在好爲人師)”는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선생 노릇을 좋아하는 병통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사범대를 중간에 그만뒀지만 몇 군데서 교편을 잡아 보았다. 군 제대 후 대구에서 학원 강사로 일한 것까지 치면 선생 노릇을 꽤 많이 한 편이다.
작가가 되고 나서도 뭔가 가르치는 자리에 서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금은 운영하지 않지만 이곳 이천 장암리에서 부악문원을 열었던 시절에는 6기까지 30여 명을 헤아리는 원생들이 다만 『소학(小學)』 몇 마디라도 내게서 배워가곤 했다. 어찌 생각하면 직업으로서 가장 많이 한 일이 가르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옛 제자들 가끔 찾아와, 나쁜 선생 아니었던 듯
젊어서야 내게 교사관(敎師觀)이랄 게 있었겠나. 내가 좋은 선생이었는지, 나쁜 선생이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가끔씩 옛날 제자들이 찾아왔던 것을 보면 아주 나쁜 선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1990년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한 이탈리아 잡지(Linea D’Ombra)와의 인터뷰에서 ‘내 작품에 사제간의 관계가 자주 나오는데 어떤 이유에서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금시조’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같은 작품들이 이탈리아어로는 먼저 번역 소개되다 보니 사제 관계 소설이 많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금시조’의 관심사는 예술의 본질에 관한 문제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지식인과 권력관계를 다룬 것으로,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는 내게 있어 중요한 소설적 모티프는 아니라고 답해 줬다.
90년대 중반 3년씩이나 세종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것도 반드시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병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가 대학교수가 됐다고 해서 화제였는데, 한 잡지 인터뷰에서 “비록 중도에서 포기하긴 했지만 사범대학을 택했던 것을 보면 나는 가르치는 일에 대한 본능적인 친화력이 있는 것 같다. 후학을 가르치고 키우는 일은 군자나 장부의 할 일이라는 말도 있지 않으냐”고 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작가로서 긴장의 끈을 다시 한번 조일 필요가 있다는 마음이 컸다. 94년 세종대 국문과 정교수로 임용돼 2학기부터 강의를 시작했을 때 나는 지천명이 멀지 않은 마흔여섯의 나이였다. 제대로 배운 적도 없지만 소설 창작에 대한 이론적인 점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려면 결국 자신도 배우는 학생의 입장으로 돌아가 배워야 한다. 그게 강의를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세종대도 손해나는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문열이라는 작가가 교수로 와 있다고 잘 써먹었겠지.
1994년 세종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된 이문열씨가 8월 29일 첫 강의를 하는 모습. 최고의 인기 작가가 대학 교수가 된 데다 대학 중퇴라는 자격 시비까지 더해져 화제를 모았다. 중앙포토
그해 7월 초순 세종대의 교수직 제안이 있었을 텐데, 수락한 다음 첫 수업일이 다가오자 국민학교 입학 전날 밤새 뒤척였던 것처럼 설렜던 게 기억난다. 참으로 순진한 영혼들을 만나는 일 아닌가. 그런 만남도 반복되면 지겨워질 수 있겠는데, 학기가 바뀌어 사람이 새로워지면 나도 언제까지나 새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늘 있었다.
하지만 가르치는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겁도 났을 뿐만 아니라 좀 비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문학개론’과 ‘소설이론’을 가르쳤던 교수 첫해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95년 들어 언어의 수행(修行) 능력을 따지는 화행론(話行論)까지 건드리는 ‘국어의미론’을 가르치게 되자 막막했다. 몇 시간 수업을 준비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가르치려면 몇 달은 공부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가르치는 보람을 느낄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대학 교수 경력이 나중에 내게 어떤 보증이 된다거나 대구 학원 강사 시절 ‘빵꾸나오시(パンク直し·대타 강사)’ 사연을 소개할 때 얘기했던 것처럼 잘 모르는 분야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결국 문학에 도움이 되는 잡학에 밝아진다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서 어떤 일이든 욕심부리다 보면 몸은 그만큼 고달파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끊임없이 되묻게 된 것은 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어떤 자격이 내게 있는가 하는 자기 확인의 질문이었다.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게 됐다.
세종대에 가기 전해만 해도 나는 미국 유학을 갈 생각이었다. 소모적인 글쓰기에 지쳐 있었고 재충전이 절실했다. 2, 3년간 작품을 쓰지 않을 생각으로 미국에서 다닐 학교와 지낼 곳을 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몇 년씩 나가 있는다는 게 쉽지 않아 포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교수직 제안이 들어온 것이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 모임. 2000년대 사진으로 추정된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소설가 박완서씨, 문학평론가 유종호씨, 소설가 이청준씨, 문학평론가 정과리씨, 소설가 김주영씨, 문학평론가 김화영씨, 이문열씨. 사진 이재유
가깝게 지내던 평론가 유종호 선생과 이청준 선배 같은 분들께 물어보니 “경험 삼아 한번 해 보라”는 의견들이었다. 영문학자인 유종호 선생은 “영어에 ‘Teaching is Learning(가르치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이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단 학교에 너무 오래 있지는 말라”고 하셨다.
이청준 선배는 연약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나와는 많이 달랐는데 이상하게 죽이 잘 맞았다. 87년 중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내가 이상문학상을 받았을 때 심사평에서 내 몇몇 작품을 두고, “현실 질서의 옳고 그름뿐 아니라 거기 대응해 나가는 정·부정 간의 태도나 신념 체계 일체를 재검증과 반성의 소설 행위 범주 안에 포괄하고 있다”는 뜻에서 가치 중립적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90년대 내가 대표적인 우파 논객으로 여기저기 불려다닐 때 사람들에게 알려진 정도로나 세계관으로나 얼마든지 나 대신 나갈 수 있는 분이었는데, 소설 이외의 일을 일절 거부했다. 어쨌든 그는 80년대 중반에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2년간 지낸 적이 있어 내 선택에 대해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8월 초순 국문학과 일부 학생들이 정상적인 교수 채용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내 강의 능력도 검증되지 않았다며 공개 강의를 요구해 왔다. 학생들이 몇 명 찾아왔길래 “내가 먼저 교수시켜 달라고 한 적도 없고,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도 아니다. 너희들보다 문학책은 많이 읽었겠지만 누구를 가르치겠다고 읽은 적은 없어서 자신도 없다. 내 수업을 듣는다면 너희들은 아마 굉장히 주관적이고 편협한 문학 해설을 들어야 될지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해 줬다.
학생들의 문제 제기 뒤에는 아마 교수들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 박사학위가 있어도 얻기 어려운 게 교수 자리인데, 학사 졸업장도 없는 이문열이 교수로 온다고 하니 일부는 불만스러워 하고, 일부는 기뻐하지 않았을까.
교육부, 학위 없지만 창작능력 인정 교수 허용
결국 내 교수 임용은 그해 연말 당시 김숙희 교육부 장관이 위원장인 교수자격심사위원회에서, 교육법이 정한 대학교원 자격에는 미달되지만 뛰어난 창작 능력과 강의 능력을 고려해 세종대의 신청을 받아들인다는 결정을 내리고 나서야 확정됐다. 그때까지는 자격 없이 강의한 셈이었다.
첫 수업은 8월 29일 국문과 3학년생들의 전공 필수인 ‘현대소설론’이었다. 자격시비까지 있었던 터라 취재진이 적지 않았다. 한 여성잡지에 “학생보다 기자가 많아 보여 가르치는 실감이 안 납니다”는 내 발언을 제목으로 뽑은 기사가 날 정도였다.
꼬박 3년을 채우고 97년 1학기를 끝으로 세종대를 그만둔 것은 역시 창작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79년에 등단했으니 20년 가까이 써 온 셈이었는데 따져 보니 앞으로 20년간 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당시 내 작품 목록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겨우 이 정도를 쓰고서 게으름을 떨었나” 하는 각성이 절로 드는 것이었다. 200자 원고지로 4만 장가량이었는데, 러시아의 거장 도스토옙스키는 태작(駄作) 아닌 명작만으로도 그 분량을 훌쩍 넘겼다. 세종대를 그만두고 서울 생활도 정리한 다음 이곳 이천으로 내려온 이유다.
그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세종대 측의 요청으로 당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계셨던 최인훈 선생에게 학교를 옮겨볼 의향이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누차 얘기했지만 선생은 79년 내가 동아일보로 등단할 때와 『사람의 아들』로 민음사 오늘의 작가상을 받을 때 모두 나를 뽑아준 분이다. 선생은 처음에는 흥미를 보이더니 곧 “20년의 편안함이 좋다”며 서울예대에 눌러앉았다. 77년 서울예대 문창과가 생겨날 때부터 가르친 선생은 결국 거기서 정년퇴직했다. 내 후임으로는 소설가 한수산씨가 왔다. 99년에는 소설가 김승옥씨가 교수로 부임해 2003년 초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교편을 잡았다.
1996년 출간된 초판 '이문열의 세계명작산책' 1권 『사랑의 여러 빛깔』 표지.
2020년 출간된 '이문열의 세계명작산책' 개정판 1권 『사랑의 여러 빛깔』. 개정판은 일부 단편을 교체하고 번역도 새로 했다. 개정판은 전체 10권 가운데 1권, 2권, 7권이 나와 있다.
팔자에도 없는 세종대 교수 노릇은 96년 10권으로 구성된 ‘이문열 세계명작산책’을 엮어 출간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현대문학특강’이라는 교양 수업 시간을 듣는 학생들에게 과거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외국 중·단편소설 리스트를 주고 그 안에서 한 편씩을 읽은 다음 독후감을 써오게 하는 과정을 거쳐 수록 작품을 선정했다.
나는 세계문학으로 문학을 접했다. 내가 읽은 최초의 소설책이 국민학교 2학년 때 『걸리버 여행기』였다. 5학년 때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중학생 나이 때 『폭풍의 언덕』을 거쳐 안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도스토옙스키 소설 읽기로 발전했다. 한국문학을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대학에 진학한 이후였다. 황순원·이호철·최인훈의 작품을 탐독하게 됐다.
작가가 되고 보니 일반 독자나 작가 지망생에게 전범(典範)으로 권할 만한 단편소설선은 한국문학의 경우 시대별로나 주제별로 잘 정리돼 있는 편이었다. 반면에 세계문학은 그렇지 못했다. 살림출판사의 제안으로 1권에 열 편씩, 모두 100편의 중·단편을 모은 세계명작산책을 엮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그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세계명작산책’ 책 안 읽는 동료 작가 질타 위한 것
다른 한편으로는 고깝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세계문학을 안 읽어도 너무 안 읽은 경우가 적지 않은 동료 작가들을 질타하기 위한 것이었다. 몇 권 안 되는 작품들만 집중적으로 읽고는 그 안에 들어 있는 걸 쏙쏙 빼내 쓰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이것저것 읽기는 읽었는데 개념 정리가 하나도 안 돼 있는 친구도 있었다. 단순히 독서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에 있어서 어딘가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 이문열씨는 "러시아 문학에서는 동양적인 찍득함이 느껴진다"고 했다.
단편의 감동은 장편과 다를 수밖에 없다. 잘 써진 장편의 울림이나 감동은 참으로 끔찍할 정도여서 읽고 나서 2~3일간 정신이 멍한 경우도 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도스토옙스키를 위시한 러시아 소설에서는 특유의 러시아성(性)이라고 할까, 동양적인 찐득함이 어떨 때는 아주 지긋지긋하면서도 호쾌하고 장대한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그에 비해 잘 써진 단편은 비수로 폐부를 확 찌르는 것 같은 감흥을 주기 일쑤다. 이 정도의 추억과 단어만으로 이렇게 사람을 사로잡고 감동시킬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을 준 작품이 적지 않았다. 운명적인 첫 키스처럼 단편의 첫 키스 같은 느낌으로 기억되는 작품들이 세계명작산책 안에 적지 않게 들어 있다. 그런 작품들은 대개 내 절실한 체험과 연결된 작품들이다.
명작산책 1권 『사랑의 여러 빛깔』에 수록된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를 위한 장미’는 마지막 구절을 읽는 순간 감동이라기보다는 기괴한 전율을 느꼈던 작품이다. 애인이 자신을 버리지 못하도록 독살을 시키고는 썩어가는 그 시체 옆에서 50년을 누워 지낸 소름 끼치는 사랑이라니. ‘에밀리를 위한 장미’를 언제 처음 읽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80년대 후반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 전역을 돌 때 포크너가 생애 대부분을 살았던 미시시피주 옥스퍼드를 일부러 찾기도 했다.
방랑소설이자 귀향소설, 성장소설인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는 방황으로 점철된 10대 후반 내 정신적인 동반자였다. 사대 동기 중에 꼭 크눌프랑 인상이 비슷한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 스스로 그런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모파상도 내가 무척 좋아한 작가다. ‘비곗덩어리’ 같은 작품은 참 어지간한 명편이다.
에디터
신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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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논설위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1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