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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
딛 3:1-7
1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3:1-7 / [선행에 대한 교훈] 정부와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순종하고 정직한 일은 무엇이나 자진해서 하도록 신도들을 지도하시오. 2) 남을 헐뜯거나 싸움을 하지 말고, 올곧은 자세로 모든 사람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도록 가르치시오. 3) 우리도 전에는 미련하게 굴고 순종할 줄 몰랐으며,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잘못된 길에 빠져 들어 온갖 추악한 쾌락과 나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원한과 시기로 가득 찬 삶을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또 다른 사람이 우리를 미워하는 악순환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4) 그러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실 때가 오자 우리의 구세주 하나님께서 5)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우리 속에 살게 하여 새로운 기쁨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6) 하나님께서 이처럼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신 것은 모두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7)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이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함께 누리는 자가 되었으며 그것을 상속할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로 인해 거듭나게 하시고 영생의 소망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기억하게 하라(1-3) 성도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은 교회 밖에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 동시에 이 땅에 속한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때론 이 말이 참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악한 권세와 통치에도 복종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여 일어서는 권력에는 순종하거나 복종하지 않아도 됩니다. 모세도 그랬고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이 말은 지금 그레데 섬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와 대립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도는 선한 일을 행하기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1).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성도들이 예수 믿기 전에는 어리석은 자였으며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였으며 속은 자였으며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한 자였으며 악독과 투기를 일삼는 자였으며 가증스러운 자였고 피차 미워하는 자였다고 고백합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4-7)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죄인으로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이것은 은혜였습니다. 성도는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서 전적으로 타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의로운 행위를 근거로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성도의 구원은 오직 두 가지 은혜로 가능합니다. 첫째, 중생의 씻음으로 가능합니다. 둘째,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가능합니다. 이 두 가지는 한 성령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성도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성령은 성도를 새롭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계속해서 구원받은 성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성도는 계속해서 성령의 풍성히 부어주심을 사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속적으로 영생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적용: 당신은 분명한 삶의 변화가 있나요? 성령 받은 후 어떻게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영생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은 모습은 어떠해야 하나요?
하나님이 특별한 조건과 이유 없이 은혜로 베푸신 구원에는 우리도 선한 일을 하게 하라는 목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았으니 하나님의 선한 일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 삶의 이유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계획과 사랑에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 설 교 >
복 음
딛 3:5-7 / 이정익 목사
지난 우리교단의 총회는 100년차 총회였습니다. 이 100년차 총회에서 저를 총회장으로 선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총회를 마치자마자 공식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미국 시카고 인근인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는 그린우드에 가서 OMS 104년차 선교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OMS는 동양선교회라는 기구로 우리 성결교단을 창시한 선교단체입니다. 그래서 100년차 총회를 맞는 한국성결교단에 대해서 남다른 의미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LA에 있는 갈보리 채플을 방문하여 양교단의 협력관계를 협의하였습니다. 현재 갈보리 채플은 미국 내에 2,800여개의 교회를 가지고 있는 교단입니다. 그리고 그 역할이나 세계적 명성으로 볼 때 우리교단과의 협력은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부분입니다. 논의 결과 양교단간의 공식적인 협정문제는 일단 먼저 교류를 한 후에 점진적으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먼저 갈보리 채플의 실질적 리더인 싸우스 베이 갈보리 채플의 담임목사인 스티브 메이 목사님을 내년 기념행사에 축사를 부탁하였고 오신 기회에 목회자들을 위한 영적 세미나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주사 대학을 방문하여 아주사 대학교와 우리교단과의 협력관계를 논의하던 중 먼저 내년부터 한해에 고교졸업생 2명씩을 유학생으로 받아주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학교에서 줄 수 있는 장학금을 최대한 수여하되 한국성결교회에서는 아주 우수한 고교졸업생을 추천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제 차후 우리교단은 인재육성에 주력하는 문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교단도 100년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말 미국 시카고를 중심으로 하여 영적 대부흥운동이 무디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대단한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1886년에 시카고에 무디신학교가 설립되게 되고 이 신학교를 통하여 2만여 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는데 그 2만여 명 중에 만 오천여명이 선교사로 세계 각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수치입니다.
그들 중에 감리교회 교인이었던 카우만이라는 젊은이가 그의 아내와 함께 친구인 길보른을 전도하여 함께 기도하던중 이 세 명이 무디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고 그들은 공부하는 중에 세계선교에 뜻을 품고 기도하다가 마침내 졸업한 후에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가 성서학원을 설립하게 됩니다. 그때 한국에서 김상준 정빈이라는 두 젊은이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고 이 두 사람은 성서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공부를 마친 이 두 사람은 1907년 귀국 하여 5월 29일 서울 종로의 무교동에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전도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한국 성결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성결교회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보다 약 20년 늦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내년 5월 29일 주일이면 한국 성결교단은 선교 역사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결교회가 시작될 때 성결교회의 중심신앙과 신학을 세웠는데 그것이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라는 네 가지 표제입니다. 이것을 4중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네 가지 신학은 신앙의 점진적인 발전을 뜻하는 것이고 신앙의 골격에서 그 중심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 생
이 중생은 신앙의 첫 단계라고 볼 수 있는 첫 과정입니다. 즉 “나는 과연 천국에 갈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되는 신앙체계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갈 믿음이 있습니까. 오늘 내가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는 과연 천국갈 수 있는가”를 한번 물어보십시오. 이것은 교리 중에서 첫째 되는 핵심내용입니다. 천국 가는데 제1의 조건이 “중생하는 일”입니다. 중생(重生)이라는 말은 “거듭난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3:5를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우리의 구원은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입문입니다. 그것은 중생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이제부터 나는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이 고백은 쉽고 간단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이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백은 성령의 부르심이 있을 때에만 고백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내가 예수를 알고 믿고 제자된 것은 내 뜻이나 공로나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교리인 중생의 교리입니다.
성 결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나 임직할 때 그리고 안수식을 할 때는 “중생하고 성결한 체험을 하였습니까”하고 질문을 받게 됩니다. 그때 대부분은 대답을 시원하게 하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결의 은혜는 대부분 “내적인 은혜로 조용히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의 구주시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할 때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시게 됩니다. 이 고백은 중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내주해 계실 때 그때 우리는 주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나의 자범죄를 용서받게 되고 원죄의 죄책과 영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구원받음의 은혜입니다.
그렇다고 원죄의 부패성 즉 죄성에서 까지 해방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생의 상태에서는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과 구별하고 죄로부터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여전히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각오했는데 또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그것은 중생의 단계에서 성결의 단계에 이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각오했으나 또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각오나 의지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내 각오나 나의 의지는 별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나 각오 가지고 목숨을 버리고 순교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내안에 내주하셔서 도와주실 때 성결의 힘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에게 성령세례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하시면 모든 타락에서 그리고 유혹으로부터 물리치는 힘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보면 마 16:6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중생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나서도 또 실패하고 실수합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는 과정에서 베드로는 본의 아니게 세 번씩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에서는 나의 의지나 각오 가지고는 완성된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후에 아주 완성된 베드로로 거듭나게 됩니다. 베드로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마침내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때 그는 비로소 성결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주어지는 모든 힘과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가 목숨을 걸고 다니며 전도하다가 끝내는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 힘이 자신의 의지나 결단이 아니었고 그것은 성령이 주시는 힘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의 단계는 “주님은 나의 구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하는 중생의 단계에서 주님이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결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신앙의 삶이 여물게 되고 성결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성결의 삶은 내 안에 내주해 계시는 그 성령과 늘 상의하고 동행하고 상담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용기와 능력과 무서운 의지력을 발휘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갈보리 채플을 방문 했을 때 싸우스 베이 갈보리 교회 담임목사인 스티브 메이스 목사를 만났습니다. 이 목사님은 청년 시절 히피로 살았습니다. 마약에 중독되어 머리를 길게 하고 폐인처럼 길거리를 헤매고 길거리에서 잠을 자며 살아가던 청년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어느 날 척 스미스 목사에게 발견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에게 이끌려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되고 마침내 영적으로 회심하고 중생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 후에 이 젊은이에게 성령께서 얼마나 강하게 역사하셨는지 그의 무질서 하던 삶이 일신되어 오늘은 능력의 목회자가 되어 만 명이 넘는 교회를 이루어 목회하고 있습니다.
이 분이 오늘 전립선암을 통고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되느냐고 묻자 그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히피였습니다, 마약중독자였습니다. 마약을 거래하다가 총에 맞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그 후유증으로 몸이 온전치가 못합니다. 나를 여기까지 구원하시고 인도하신 주님이 나의 미래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나는 다만 주님의 인도를 받고 살아갈 따름입니다.”그런데 그의 모습에서 보인 느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삶과 죽음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놓고 살아가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주 비장하고 또 한편 평안한 모습이었습니다. 성령께서 내안에 내주하실 때 하나님은 나의 삶을 주관하십니다. 그때부터 모든 유혹을 극복하는 힘이 주어지고 모든 두려움에서 극복하는 힘도 주어지고 생사의 위기에서 극복하는 힘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성결의 삶의 은혜입니다.
신 유
이 신유라는 용어는 국어사전에도 없는 신앙용어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힙 입어 고침 받음의 은혜를 말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여러 명의 병자들이 예수께 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고침 받음이 모두 신유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모든 것을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몸의 질병도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 사함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영혼의 구원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전제가 있다면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질문하시기를 “네가 믿느냐“라고 먼저 물으셨습니다. 그것이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은 오셔서 육신을 고치시고 우리의 영혼을 고치시고 우리의 정신을 고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중요한 일입니다.
재 림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 하실 때 “너희가 본 그대로 내가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시록22:7,12,20절을 보면 “내가 속히 오리라“고 세 번씩이나 거듭 약속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께서 자기들 세대에 재림하여 오실 줄로 믿고 살았습니다. 사도바울도 독신으로 살면서 “나와 같이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주님이 곧 오실 것인데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보다 주님을 고대하고 살아가다가 재림하여 오실 주님을 만나는 삶이 좋다는 뜻입니다.
이 예수님의 재림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인의 영광입니다. 참고 인내하고 수난과 고난을 이겨낸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악인의 심판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심판한다는 의미입니다. 일제 때 이 재림신앙이 너무나 간절하였고 뜨거웠습니다. 일제의 탄압이 너무나 악랄했고 수탈과 강압이 거세었지만 일본을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약했습니다. 미래와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빨리 재림하셔서 일본을 심판하시고 천황을 심판하시고 이 타락한 세상을 심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일본 군국주의와 배치된다고 해서 마침내 일본은 예배 금지령을 내렸고 마침내는 우리교단을 강제 폐쇄하고 해산령이 내려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성결교회는 이렇게 재림신앙 때문에 무서운 고초를 당하고 감시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350여명이 순교하여 목숨을 잃었고 충남에 있는 병촌교회는 한날한시에 66명이 예배를 드리다가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성결교회가 시작되면서 내 걸었던 신앙표제가 4중 복음입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 이 4중 복음은 신앙이 발전하고 성숙해가는 순서입니다. 시작에서 완성까지를 이끌어 주는 신앙의 길잡이입니다.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중생하고 죄씻음 받고 성령이 새롭게 하심으로 주어졌으니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시민이 되었느니라.”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발전하였으면 합니다. 신앙의 삶이 이렇게 여물어 갈 때 그 역할을 다할 수 있고 내용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가르침을 지켜 행합시다
딛 3:5 / 강성찬 목사
작가 마이클 그린은 하나님 앞에서 삶이 극적으로 변화된 한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은 “나는 이미 사회가 정죄하는 범죄기록을 가졌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를 지은 갱단의 일원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고 하며 이 사람은 군목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는 법관이나, 정신과 의사나, 집행유예 감독관이 줄 수 없는 것을 나에게 주셨다. 바로 죄 용서받은 사실을 아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들과 행복하고 안정된 가정을 갖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이와 같은 삶은 한 때 판사로부터 '사회악'으로 불리웠던 나 같은 사람일지라도 이 사회가 겨우 용납해 줄 수 있는 수준보다 더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그렇게 변화시키셨고 지금도 내 속에서 계속 역사하신다."라고 간증한다고 하였다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양육을 위한 지침을 가르치는가운데 일반 선한사회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한 지침으로 세상 위정자들에게 복종하여 언제든지 기꺼이 선한 의무를 다하는 자들이 되도록 교훈하고(1절),나아가 아무도 비방하거나 다투지 말며 관용과 온유의 자세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도록 교훈하라(2절)고 교훈하고 이어서 선한 삶을 살 수 있고 또 살아야만 할 근거로 구원의 본질 및 그 은혜의 내용을 제시 합니다.
구원 받기전의 모습을 무엇이라고 합니까(3절)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딛 3:3)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자(아노에토이 avno,htoi)는 '지각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바 하나님을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영적 무지를 가리킵니다(고전 2: 14). 참되고 영적인 이해나 지식도 없이 하늘나라의 일에 대하여 무식하여 죄를 범하기 쉬운 자들이었습니다.
순종치 아니한 자 (아페이데이스=avpeiqei/j) 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의도적인 도전입니다(Hiebert, Hervey).
완고하고 고집이 센 자들이었으며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본질적인 율법에 대하여 반대하고 인간 사회가 요구하는 법도를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음과" "불순종"은 언제나 함께 따라 다닙니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것이든 제시된 것이든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께 순종치 않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속은 자 (플라노메노이=planw,menoi)란 거짓 교사나 거짓 종교에 의해 잘못된 길로 인도를 받아 멸망의 길로 빠진 것을 의미하며(벧전 2: 25) 진리와 거룩함의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방황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딴 길로 벗어난 사람으로 잃은 양 한 마리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의 행락(헤도나이스 h`donai/j)이란 즐거움을 뜻하는 말(헤도네 h`donh,)에서 유래한 것으로 쾌락 혹은 향락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인간은 오직 자기만족과 향락을 추구하는 타락된 상태에 사로잡혀 정욕과 행락의 노예이며 종이 되었던 자입니다.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의 악독(카키아 kaki,a|)이란 일반적인 악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악한 기질 혹은 본성을 의미합니다. 악독한 자는 다른 사람을 해하고 그것을 기뻐하는 자입니다. 투기(프도노=fqo,nw|)는 악독으로 인해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으로, 타인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Hendriksen).
가증스러운(스튀게토이=stughtoi,)은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Guthrie). 타락한 사람들의 삶의 잉태는 타인으로 하여금 추악하고 더러운 혐오감을 느끼게 합니다
"피차 미워하는 자였"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성도들의 의무이며 행복인 반면, 서로 미워하는(미세오=mise,w) 것은 죄인들의 불행입니다.
한 젊은이가 어머니의 마음을 찢어놓고 아내의 생활을 망쳐놓곤 했다고 합니다.직장을 얻었다가는 술과 도박으로 도로 잃곤 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아무리 도우려고 해도 안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느 날 예수 믿는 친구에게 “나는 남미로 가서 생활을 새로 시작해 볼래』라고 말하자 그 친구가 『네가 그 곳에 가도 네 옛사람 그대로 가지고,옛 사람의 습관과 죄를 짓게 되면 아무 소용없어 외부적인 조건이나 새로운 환경이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해 자네가 승리할 수 있는 길이 한 가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거야.그러면 분명히 다시 태어나게 될거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때 이 말이 화살처럼 그 젊은이의 가슴을 꿰뚫었습니다. 그는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아 죄를 이길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구원 받은 동기와 방법을 무엇이라 합니까?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4-5)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의로운 행실로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인 자비, 사랑, 긍휼 때문에 허락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공적이나 자신의 힘으로, 그러한 과거의 참담한 상황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요, 오로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자비를 힘입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를 인하여 구원받은 것이다. 이것이 근거이고 동기입니다.
구원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긍휼이 함께 했습니다. 만일 우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의로운 행위로 구원하기로 했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 놀라운 자비와 사랑을 일평생을 다하여 찬송해야 하며(4-5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았습니다. 무조건 사랑입니다. 고통 받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앞바퀴이며, 혹은 바퀴들 안에 있는 정신이며, 이것이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고 계속 움직이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으로 자신의 영광과 완성에 합당하게 만드는 방법을 아시고 그들을 파멸시키시기보다는 구원하고 은혜를 베푸시려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며 기뻐하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풍성 합니다"(롬 2:4; 엡 2:7).
길에는 보통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들 합니다. 첫째는 사람, 차, 배, 항공기가 다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육지에는 도로, 바다에는 해로, 하늘에는 항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라 합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길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방법과 수단이라 합니다. 그런데 죄인이 의인 되고 저주가 복 되고 지옥이 천국 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는 땅과 하늘을 잇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미국에는 샌프란시스코시와 마린반도를 연결하는 금문교가 있는데 이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건너는 데 3일이 걸렸지만 이제는 10분도 안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의 십자가로 연결해 놓은 구원의 길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받는 길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이 사실 깨닫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으로부터 사랑이 적다고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 받음을 만족하며 자족하며, 절제하며 이 은혜에 감사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적인 것은 중생(팔링게네시아=paliggenesi,a)이며 중생은 구원의 한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면 우리가 용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을 통해서 우리의 속사람이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것을 깨닫고 예수를 신뢰하면, 우리의 죄는 깨끗이 씻겨지고 성령께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딛 3:5). 그리하여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걸어가면 (갈 5:25) 성령이 우리를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일하십니다. 진정한 변화는 중생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중생이란 우리의 옛 사람, 육의 사람, 죄악의 사람이 죽고 예수님과 더불어 다시 새 생명으로 태어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함과 같이 생명을 얻음이요 하나님의 저주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는(요3:36) 것입니다.
그래서 신분의 변화 곧 하나님의 백성(요3:3,5)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생활의 변화 곧 이전에는 죄 아래서 살던 자가 중생하므로 성령의 인도와 지배 아래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중생해야 함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하였고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롬12:2)라고 하기 때문이며 새롭게 되기 위해서(고후5:17)이며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8:8)고 하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도다."(약1:8) 하고 "너희가 거듭난 것이... 말씀으로 됨"(벧전1:18)하며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고전4:15)고 하시니 말씀 속에 역사하고 있는 성령의 도움으로 마음이 열리고 생명이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3:9)하신 말씀대로 죄짓던 못된 버릇을 끊어 버리고 지난날에 행하던 죄악 된 마음과 의지와 성품을 가까이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오직...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하신 말씀대로 의의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해서 "우리는 다 실수가 많으니..."(약3:2)함과 같이 부지불식간에 죄 속에 또는 허물 속에 빠질 때가 있기에 이것을 순간순간 회개하며 성령의 도움을 힘입고 죄 씻음 속에 있어야 합니다.
중생은 곧 신생을 뜻하므로 신생아가 자아야 함같이 성장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엡4:13)하신 말씀대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말씀과 기도로 이뤄지는 것이니 참으로 중생한 자는 말씀과 기도로 성장해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양식이요, 등불이요, 기쁨이요, 소망이기에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는 능력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10세에 임종하는 어머니로부터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네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구나 재산도, 돈도 없단다. 그러나 다만 내게 있는 이 성경을 나의 유일한 재산으로 네게 준다. 이것을 읽고 또 읽어라 네 앞길이 축복되리라!"하는 유언과 함께 성경을 받아 깊이 읽으며 삶의 지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는 과연 학력도 돈도 배경도 없었지만 역사에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합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 이란 새롭게 지음 받은 후 점진적으로 성화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하실 때에는 성령을 풍성하게 부어주시는데 "성령으로 흠뻑 젖어지도록 "부어 주시는 상태입니다.(로이드 죤스) 신학적인 용어로 하면 "성령 충만"의 상태입니다. 이로 성령의 내재적 역사가 있게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 예수님이 그를 불러 나무에서 내려오라 하시고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실 때, 삭개오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자원하여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도 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과도 바른 관계를 맺게 됐습니다.
구원 받은 결과는 무엇이라 합니까?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7)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습니다.(롬 8:1)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성별 하시고 의롭다(디카이오오=dikaio,w) 선언하셨기에 정죄할 사람은 없습니다.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며 자유를 위해 싸우다가 흘린 장부의 핏방울을 받아서 천국문을 열려고 했으나 천국문은 열리지 않았고 다시 남편을 잃고 슬피 우는 젊은 부인의 비애의 눈물을 가지고 천국문을 열려 했으나, 역시 천국문은 열리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죄인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서 흘린 회개의 눈물을 거두어 갔더니 천국문이 열렸다합니다. 회개의 눈물은 천국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천국은 보혈공로에 의해 구원 받고 의로워진 은혜에 감사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줄 믿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5:4)고 하시니 구원 받은 자의 존귀함을 깨닫고 세상의 유혹과 시험도 이겨나가며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영생의 소망을 따라 살게 된다고 합니다. 성령과 구원인 은혜와 은사를 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며, 평화며, 머리가 되시며 은혜와 영광을 가져오게 하며 모든 영적 생활과 열매를 얻게 됩니다.
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가 천국 문 앞에 서니, 한 천사가 그에게 암호를 대라고 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디에서나 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가 물러가고, 외모가 훌륭한 다른 남자가 천국 문을 두드렸습니다. 천사가 암호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성직자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의로운 일을 많이 했습니다. 유명한 기관들이 나에게 최고의 영예를 주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왕을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물러나자마자 할머니 한 분이 그 문에 이르렀습니다. 할머니는 허리가 구부정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고, 얼굴은 빛났습니다. 할머니는 손을 높이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피, 나의 대답은 오직 피라오. 할렐루야! 그 피가 나를 씻겨준다네!” 즉시 진주 문이 열리고, 그 귀한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갈 때, 천국의 합창단이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입니다.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후사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클레로노모스=klhrono,moj)가 되는 것도 성령님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풍성히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상속자답게 살게 해 주십니다.
마을 한복판에 커다란 광고가 붙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나라 임금님이 60회 생일을 맞아 모든 백성들의 소원을 한 가지씩 들어준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임금님이 어떻게 되신 것 아냐?” “여기엔 분명 다른 속셈이 있을 거야.” “맞아. 우리 소원을 그대로 적어 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사람들은 아무도 임금님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명이 내려진지 일주일이 지나도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소원을 말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그래, 한번 해보자.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말해서 밑질 것은 없을 꺼야.’ 그리고 이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논이 10평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에게 당장 논 10평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아니! 그 모든 것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따라서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모두 앞을 다투어 소원을 한 가지씩 말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큰 것을 말했다가 오히려 손해를 볼까봐 아주 조심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저는 소가 한 마리 필요합니다.” “저는 집이 한 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저마다 작은 소원을 한 가지씩 성취하여 온 동네가 기쁨으로 떠들썩했다고 합니다. 그때 이웃 마을에 살고 있는 한 지혜로운 청년이 이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도 임금님께 자신의 소원을 말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임금님 저는 임금님의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은 처음엔 깜짝 놀랐으나 잠시 후 껄껄 웃으면서 “마침 나에게 후손이 없어서 누구에게 왕좌를 물려주어야 하나 걱정하고 있던 참이오. 당신은 정말 현명한 사람 같구려. 모든 소원을 들어주기로 약속했으니 당신의 소원도 물론 들어 주겠소. 자, 이제부터 당신은 나의 아들이오. 동시에 당신은 이 왕국 전체를 갖게 되는 셈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 행하며 한 영혼을 전도하되 구원의 가르침을 지켜 행하며 사명 감당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너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
딛 3:1-8 / 오정호 목사
얼마전 ‘노자와 21세기’라는 제목으로 김모 교수의 강의가 교육방송을 통해서 방영되었습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표현력이 돋보인 강의였다는 일반인들의평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강의는 뭇 그리스도인에게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첫째는 신앙적인면에서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신앙인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어머니의 신앙을 곡해한다면 그가 아무리 외형적인 효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본질적인 면에서는 불효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의 강의의 마지막 결론이 인본주의라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의 필연적 귀결은 허무주의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도 그 결국이 허무주의라면 그것은 우리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현세의 문제 뿐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영적인 내세의 문제까지 다룹니다. A.P.깁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철학을 전파했더니 사람들은 내게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했더니 사람들은 회개하고 주께 돌아왔다.” 세상의 지식과 하나님의 진리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회심(回心)의 여부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라는 패스워드(Password)가 없이는 결코 천국(영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나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인간의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5절).
본문은 사도바울이 그레데 섬에서 사역하던 디도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진리가운데 생활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5절). 즉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진리입니다. 어떤 이는 이 부분에 대해서 “법을 준수하고 윤리적인 기준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죄의 문제를 여러 가지 문화적인 차이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기준은 상대적입니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 사람과 사물에 대한 평가 기준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를 바라보시는 기준이 변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우리의 내적인 동기와 마음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양심에 주님의 현미경을 들이댄다면 주님앞에 선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공력과 행위를 가지고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단정적으로 선언합니다(갈2:16). 따라서 자기의 의를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이며 십자가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갈2:21).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절망의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십니다(4절).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닮은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랑이라 할 수 있는 부모의 사랑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자녀들 중에 부모님의 편애로 인해 평생동안 가슴아파하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죄인된 모습, 연약한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은 우리의 지식과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종의 형상인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으며 절대절망의 죄 가운데 있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랑을 놓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며 우리의 생명과 새로운 소망입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를 투자할 수 있는 튼튼한 영적인 기초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랑을 찬송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와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4절)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6절).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주심으로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치유의 영이시며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요14:17).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어떤이도 주지 못하는 영적진리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성령은 또한 거룩한 영이십니다. 거룩한 영이신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악령과 옛사람의 생각으로 다스림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를 주장하시고 붙드신다면 어떤 악령도 우리에게 손을 댈 수 없습니다(사41:10).
우리 주님께서는 예수님과 성령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다(7절a). 우리는 의로운 존재가 아니지만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프리즘으로 우리를 보시기 때문에 우리를 의로운 존재로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4. 천국을 상속받는 후사가 되게 하셨습니다(7절b).
후사(後嗣/heir)란 상속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칭함을 받게 하시고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마25:34).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받은 복음은 이처럼 위력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구원을 얻게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천국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이와 같은 우리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할 수 있는 방편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벧전5:5). 악인은 교만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은혜를 거절합니다(시10:4). 그러나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담고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겸손은 "주님밖에 없어요, 주님의 은혜가 떠나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겸손은 우리가 평생 이루어야 할 영적인 기쁨이면서 거룩한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이 겸손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바랍니다.
둘째, 선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8절).
선한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과 화합하며 남을 격려하는 일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함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구원을 얻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선한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에 형제와 막힌 담들이 허물어지고 선한 역사가 우리의 삶에 아름답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불확실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미쁘신(신뢰할 수 있는/faithful, trust-worthy) 주님의 복음입니다(8절). 구원의 복음을 굳세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힘차게 주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는자에서 확신하는 자로, 확신하는 자에서 굳세게 전하는 자로서 아름다운 삶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의 복음의 소중함을 다시금 우리 마음속에 새기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 사랑의 주님!
무미 건조한 삶에 사랑의 복음으로 가까이 오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은혜를 날마다 더해 주십시오.
사랑의 복음을 간직한 자임을 감격하여, 선한 일에 매진케 하옵소서!
영생의 소망을 따르는 사람들
딛 3:1-7 / 윤태성 목사
들어가는 말)
어느 회사 회식 자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서 모두들 잔을 들고 건배를 하는데, 김부장이 건배사를 하게 됩니다. 생각이 조금은 보수적이고 엉뚱한 데가 있어서 여자 직원들에게 인기가 없는 분입니다. 이분이 잔을 높이 들고는 “다같이 건배 합시다 남존여비” 그때 갑자기 회식 자리가 썰렁해집니다. 남자직원들은 ‘어휴! 저분 왜 저래’ 이런 표정이고 여자직원들은 얼굴이 일그러지며 가뜩이나 불만이 많았는데 여자 직원 모임에서 문제라도 삼을 태세입니다. 그런데 이때 부장님이 껄껄 웃으시며 “여러분이 제가 남존여비라고 하니까 이상해하시는데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남존여비가 요즘 트렌드이고 대세입니다. 남존여비의 뜻이 있습니다 운을 떼어주시죠 남: 남자의 존: 존재의 이유는 여: 여자의 비: 비위를 맞추는데 있다. 남존여비의 뜻은 남자의 존재의 이유는 여자의 비밀을 지켜주는데 있다. 또 다른 남존여비는 남자의 존재의 이유는 여자의 비용을 대는데 있다. 이렇게 말하고 오늘 회식 비용을 제가 쏩니다. 이렇게 말해서 많은 직원들이 박수를 치고 박장대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왜 드리는가하면 오늘 함께 봉독한 말씀이 1절부터 7절까지 중에 3절부터 7절까지가 우리의 신분을 설명하는 말이고, 1절과 2절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 가를 이야기합니다. 즉 남존여비와 같이 순서를 바꾸어서 읽으면 더 이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1. 우리의 변화된 신분
3절에는 우리의 신분을 이야기합니다. 같이 합독합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하던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하는 자이었으나”
우리의 과거적은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열거한 바와 같이 우리의 과거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4절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하심이 나타나십니다. 즉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그분의 형상 따라 지음 받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5절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쫓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이 말씀은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우리의 선행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또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율법을 다 지켜서 된것도 아닙니다. 말씀과 같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거듭나게 하시는 중생의 씻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아멘)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삶의 형태나 성질이나 마음이 바뀌어지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잊어먹고 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법적인 선포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한 것입니다.“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니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네가지 '권세'가 있습니다. ①먼저 자유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양심, 율법,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유. ②명분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롬8:17)
즉 유업을 이을 자이고 기업(골1:12)이 됩니다. ③담대하게 됩니다. 죄인이였던 우리가 의롭게 되고 절대자인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④네 번째가 고난입니다. 이 부분은 조금 의아하시겠지만, 성경에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는 말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데 우리를 훈련하기 위한 고난이며, 성장시키기 위한 고난입니다. 그 고난을 지fot되 삼아서 우리는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확실하다면 이 네 가지 '권세'가 삶 속에 반드시 나타납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시면 우리의 구원은 성부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하여 계획되었으며 성자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성취되었고, 성령 하나님의 거룩케 하시는 사역을 통하여 모두에게 적용되며 성화의 단계에 이르게 하는 단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시민 의식을 통해서 증거 되는 성별된 삶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권세를 받은 우리들은 또한 이 세상에 살아가게 됩니다. 나라와 이웃과의 삶은 어떻게 허락하는가? 이 땅의 삶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허락하신 이유는 이 땅에 삶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아무리 사랑하지만 우리는 자녀들을 계속해서 곁에 두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게 되면 놀이방에 가고 유치원에 보내고 학교에도 보냅니다. 아이들이 많은 곳에 가서 감기를 앓기도 하고 나쁜 습관도 배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곳이 최선의 장소는 아닐 수 있지만 자녀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제공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귀한 자녀로 삼아주셨지만 우리들을 에녹과 같이 죽음을 맞보지 않도록 하시고 금새 불러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시고 주님의 뜻을 이해하며 그곳에서 관계를 이루어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어진 시간은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그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성숙한 신앙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땅에 살면서 선한 시민이며 선한 이웃이 되어야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권세 자들과 관련해서 “너는 저희로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이러한 권면은 당시 그레데 사람들의 정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오늘 디도가 목회하는 그레데는 AD 67년 로마에 정복당한 이후에 로마의 속박에 벗어나기 위해서 저항이 계속됩니다. 한마디로 지역이 드센 곳입니다. 그래서 그레데인하면 악명 높은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들은 반체제적인 끓임 없는 폭동과 살인 등에 가담 합니다.
그런 그레데인의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바울은 “정사와 권세 잡은자들”에게 성도들이 복종하며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사와 권세는 통치자나 어떤 사람보다도 일반적인 정부를 가르킵니다. 이것은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라는 베드로의 가르침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 어제는 우리가 일본에게 독립을 쟁취한지 64주년이 되는 때입니다. 나라사랑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때입니다. 무능하고 나쁜 정부라도 국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나라와 권세를 주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나라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시민이라고 합니다. 시민이라는 영어 단어 Citizen을 살펴보면 중세시대에 성안에 사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영주의 보호를 받으며 영주가 정해놓은 법의 테두리 안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게르만이나 흉노족이 쳐들어 와도 성안으로 들어와서 안전합니다. 나라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반해서 성밖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테두리 안에 살지 않습니다. 구속이 없이 편한 것처럼 보이지만 적들이 침입해오면 아무런 방패막이가 없이 모든 소유와 재산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런면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함을 받고 하나님의 법테두리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우리가 사회적인 질서를 생각하면 공중도덕을 잘 지켜야한다. 시자에서 콩나물 값을 깎지 말아야한다. 자동차 신호등은 꼭 지켜야 한다와 같은 외면적인 윤리로 접근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우리 신앙인들이 지켜야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을 왜 지켜야 하는가 그 이유와 원칙이 필요합니다. 이런 삶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가 존재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속한자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마음입니다.
마태복음 7:12절을 황금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빌2:3절 말씀 “아무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남을 대접하고 남을 높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같이 한번 따라 할까요? “남이 할 수 없는 헌신” 여기에 大義 큰 뜻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부득이한 일로 법의 테두리를 지키지 못 할 때에도 꼭 기억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대립과 갈등이 많은 우리 사회 속에서도 적용을 해볼 수 있습니다.
ex)이번에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끼쳤던 쌍용자동차의 파업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으로 마지막에 극적인 노사 간의 타결로 77일간의 농성이 풀어졌습니다. 격렬한 파업을 통해서 당기순 손실 4428억 원이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공장 정상화가 빨리 진행이 되어서 지난 주간 체어맨이 농성이 시작된 지 83일 만에 출고가 되었습니다. 구조 조정을 통해서라도 회사를 살려야하는 사측의 입장과 자신의 생계가 걸려있는 직장을 포기할 수 없다는 노조 측의 상황을 십분이해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사태를 통해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극한 파업이 진행되었지만 생산 시설은 그대로 였습니다. 그 이유가 “농성현장의 집행부가 설비훼손 엄중처벌 지침을 내렸고 규찰대도 운영됐다”고 합니다. 실제로 사측에서도 “설비가 생각보다 깨끗하다. 이 부분은 노조원들에게 감사한다”
노조와 대치하며 회사가 취한 마지막 조치는 도장 공장 전기를 끊는 것이었다. 그런데 단전되면 탱크 속 페인트가 굳어지고 복구하려면 재료를 수입해야 한다. 다시 회사가 정상화 되는데 몇 개월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회사는 자금이 부족해도 도장 재료가 중요하기에 2억원이 넘는 도장 재료를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마지막 수단을 쓰더라도 공장은 돌리려고 미리 준비한 것이다. 닷새간 전기가 끊겼지만 내부 자가 발전 시스템 덕에 페인트는 굳지 않았다. 노조는 도장 공장에 있는 이 시스템을 차단해 회사에 타격을 입힐 수 있었으나 돌아가게 놔두었습니다. 전쟁 같은 상황에서 어느 쪽도 공장을 포기하진 않았다. 그들은 절박했다. 모두들 쌍용차에 생계가 걸려 있었고, 회사의 미래에 건 꿈이 소중했다. 협상이 마지막으로 진행된 시간 한상균 노조 지부장은 박영태 법정관리인과 마주 앉은 마지막 협상장에서 20분간 펑펑 울었다고 한다. 흉년 가운데서도 씨종자는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절박함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절박함으로 차를 만든다면 경쟁력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쩔 수 없는 상황가운데서도 남이 할 수 없는 헌신을 보여 줍니다.
저는 이러한 일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따라야할 마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미 우리사회는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서로가 다른 정치적인 의견을 개진할 수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토론도 있고 갈등도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말아야하는 것은 우리의 결론은 뭡니까? “결론은 버킹검” 아마도 영국여왕이 살고 있는 버킹검궁을 CF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결론에 도달해야하는 것은 우리 조국의 내일을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앞장서서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헌신을 조국을 위해 바쳐야 됩니다. 그 일을 알았기에 우리 선배 그리스도인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을 서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충성하는 일이 결국 하나님 나라의 일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연습을 게으른 선수가 실전해서 잘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 맡겨진 일을 잘할 때 하나님 나라에서 심은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나라를 위해 충성하도 남이 할 수 없는 헌신을 드릴 때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헌신은 개인 간에도 나타나야 합니다. 선한 시민의식을 강조한 바울은 우리가 선한 이웃으로 이 땅에 살아야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절에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아무도 훼방하지 말라” 사람이나 하나님에 대한 모욕 즉 산대를 경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에 그레데인들이 거칠고 사나왔기에 그레데 성도들이 세상 사람 같은 말로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언어습관을 이야기합니다. 상대방의 말이 거칠고 자극적이라도 우리의 말은 공손해야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태하는 태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말씀처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다투지 말라” 이 말은 싸움을 피하라 우리가 조금 억울한 일을 당해도 우리의 목적은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기에 성도들은 할 수 있는 한 이웃과 화목해야 합니다. 이미 향기로우신 그리스도의 향기는 나를 통해서 증거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모습은 “온유하라”를 통해서 더욱 빛이 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례하지 않고 항상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신 그리스도, 친히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 태도를 닮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모습과 태도는 우리 이웃들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나오는 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후사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후사는 헬라어 “클레로노모스”인데 상속자 후계자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푼 것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이을자 들로 삼기 위함 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영원하신 기업이 되고,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관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듯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는 이중적인 지위를 말하며 어거스틴이 말한 두 왕국 사상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천국의 삶을 살아갑니다. 또한 주님께서 허락하신 이 땅의 나라를 섬기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때문에 남이 할 수 없는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선한 일을 행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라를 위한 우리의 기도
딛 3:1-2 / 인명진 목사
내일이 91번째 맞는 삼일절입니다. 금년 2010년은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지 100 주년이 되는 해이고 온 땅을 피로 물들였던 육이오가 일어난 지 60주년 환갑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또 학생혁명이었던 4.19가 일어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고 광주에서 있었던 5.18 민주화항쟁이 일어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가 금년입니다. 이런 특별한 해에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합니다. 특별히 6.25 전쟁이 환갑을 맞이하 였는데 환갑이란 것이 나라나 개인에게 중요한 의미입니다. 동양철학에 한 바퀴 돌았다는 것은 다시 시 작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6.25가 환갑을 맞은 금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많은 사람들이 긴장을 하고 있 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즘 모든 국민이 우리나라가 참으로 대단한 나라다 대단한 민족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일이 많 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우리나라를 경이적인 눈으로 바라고보 깜짝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얼 마 전에 6.25 전쟁에 참전했던 이디오피아 사람이 찾아와서 천지개벽이란 말도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표 현할 수 없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에서 일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6.25전쟁 때 우리나라에 왔었으니까 지금의 모습을 도무지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 밴쿠버 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세계 사람들 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베트남에 있었는데 우리나라 교민들뿐만이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도 김 연아 선수의 금메달에 흥분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은 자 신들과 비슷한 신체 조건으로 어떻게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느냐고 경이로워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10,000 미터는 그동안 동양 사람의 신체조건으로는 절대로 금메달을 딸 수 없다고 생각되던 종목이었습니다. 그 런데 우리나라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것을 보고 세계가 놀랐습니다. 그동안 서양 사람들은 자기들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가 금메달을 딴 것을 보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김연아 선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잘 할 수 없다고 전 세계가 모두 칭찬을 합니다. 최고 기록으로 금메달 을 딴 김연아 선수가 시상대에 섰을 때 옆에 아사다 마오가 울고 서있는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며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특별히 나라를 잃었던 설움이 있었던 100년 후에 금메달을 딴 우 리 선수 옆에 일본 선수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장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LA타임즈는 우리 나라가 일본에 앙갚음을 했다고 썼다고 하는데 조금 지나치기긴 하지만 일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36년 동안이나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전쟁을 했던 우리나라 선수가 금메달을 땄는데 그 옆에서 눈물을 흘리는 일본 선수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선수들이 거칠 것이 없는 모습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꽉 차 있습니다. 신화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 젊은이들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지 올림픽뿐만 아니라 모 든 분야에서 그렇습니다. 양궁, 세계 골프에서 한국의 낭자들이 누비고 있습니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모 든 예술 분야에서 성악이든 악기이든 우리나라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도 참 으로 대단합니다. 삼성, 엘지, 현대 등이 세계에서 그 이름을 드날리고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보면 한국 이라는 이름보다 삼섬, 엘지, 현대 등 기업에 대한 인지도가 더욱 높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그동안 많은 고생을 했지만 아이들을 당당하게 키웠다는 뿌듯함과 자부심과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지난 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 습니다. 세계 200나라 중에서 원조를 주는 개발원조위원회(DAC)의 서른한 번째 나라가 되었습니다. 세 계 역사상 원조를 받던 나라가 원조를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합니다. 단군 이래에 최고의 국 운 융성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세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프랑스와 경쟁에 서 이겨 아랍 에미리트의 원자로 건설을 수주했습니다. 프랑스는 원자로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국으로 프 랑스를 따라갈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와 경쟁에서 이긴 것입니다. 세계에서 특별히 프랑스에 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깜짝 놀랐습니다. 또한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20개의 나라가 모이는 G20정상 회의가 우리나라에서 열렸습니다. 우리나라가 그 나라의 의장국이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원조 없이 는 살아갈 수 없었던 우리나라가 세계 경제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도 꿈같은 일입니다.
교회적으로 말해도 우리나라가 세계에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숫자적으로 보면 미국이 첫째이 고 우리나라가 두 번째입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미국 선교사로 나가있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인 1.5세거나 한국교포인 경우가 많습니다. 민족으로 따지면 우리 한국 민족이 전세계에 가장 많이 선교사 로 나가 있습니다. 선교사를 보낸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가난한 나라는 선교사를 보내지 못합 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계의 강대국 스페인, 영국, 포루투칼,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선교사를 보냈 습니다. 한국교회는 120년의 짧은 역사를 지낸 교회이지만 세계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적인 위치에 있 습니다. 2013년에는 세계 교회 협의회(WCC) 총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리게 됩니다. 7년에 한 번씩 열리 는 총회인데 제가 목사로 살아있는 이때에 우리나라에서 WCC 총회가 열린다는 것이 참으로 영광스럽 고 그 회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주신 특별한 은혜이며 자랑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당신네 나라가 얼마나 위대한 나라이고 당신네 민족이 얼마나 위대한 민족인지 당사자인 당신네들만 모르고 있다고 말 합니다. 우리는 실감하지 못하지만 온세계 사람들이 이런 시대를 만든 우리들을 인류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세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경제, 스포츠, 예술, 종교 어떤 분야에서든지 다 한국을 주목하 고 있습니다. 놀라운 눈으로 감탄스럽게 우리나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베트남에서 대장금 을 방영했는데 이때 베트남 하노이 시가 조용했다고 합니다. 70%가 대장금을 시청하여 거리가 한산하고 장사가 안 되었다고 합니다.
다 괜찮은데 한 가지 정치만 뒤떨어져 있습니다.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국회에서 여야가 멱살을 잡고 싸우는 나라는 지구 상에 우리나라뿐입니다. 국회의원 중에 예수믿는 사람이 299명 113사람인데 말 입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설움을 겪던 우리 민족이 맨손으로 일제의 총칼에 맞서 독립을 외치던 비운의 날이 삼 일절입니다. 많은 희생자가 있었지만 실패하여 당시 독립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 삼일절이 일어난 지 91년이 지났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철권으로 다스렸고 우리는 그 밑에서 수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우리를 지배했던 이웃 나라 일본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일본은 참으 로 심각한 일종의 패닉현상 공황상태에 빠져있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경제적으로 침체에 빠져있습니다. 세계 경제 2위의 자리를 중국에게 내주고 심리적으로 큰 충격에 빠져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휴대폰, 에어컨 등 일제가 최고 세계 제일이었습니다. 그 어떤 제품도 일제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날개 돋힌 듯 팔리던 전자제품들이 이제는 한국 에 다 추월당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그 유명한 전자제품 회사 소니, 도시바, 파나소닉 등이 다 몰락하 고 말았습니다. 조선 사업도 한국이 추월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섬나라 일본은 배 만드는 일만은 최고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에서 추월당하고 말았습니다. 세계를 자랑하 던 자동차도 한국 자동차에 추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스포츠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추락 하는 일본의 모습을 봅니다. 실제로 이일을 당하는 일본 국민의 마음이 어떠할지 바꾸어서 생각해보시 기 바랍니다.
최근에는 일본이 자랑하던 JAL항공회사가 부도를 맞았습니다. 더군다나 최근 미국에서 리콜 사태를 부 른 도요다 자동차 사건으로 일본 국민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경제적인 충격보다 심리적인 충격이 더 크고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그동안 경제만큼은 믿었습니다. 일본 기업을 믿을 만하 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일본 기업이 무너지자 일본 열도가 침통해하고 있습니 다. 공황상태이고 냉소주의 허무주의에 빠졌다고 합니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난 뒤 심각한 허무주의 에 빠졌던 상태가 일본 열도에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힘이 없어서 나라를 빼앗겼던 100년 전만 하더라도 참으로 보잘 것 없던 한국은 반쪽만으로도 이렇게 승 승장구하고 있는데 일본은 몰락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나라는 잘나가고 있는데 일본 은 망하는구나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승승하던 일본의 몰락을 타산지석으로 생각해 야 합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거침없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대개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서 태어난 아 이들입니다. 이번 동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을 보면 1988 전후로 태어난 20-22살 사이의 아이들 입니다. 이 세대를 가리켜 우리는 G세대, G generation Green 세대, 또는 Global 세대라고 합니다. 우리 민족 역사상 특별한 세대입니다.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 가운데 배고픔을 모르고 부족한 것을 모르고 가 난을 모르는 최초의 세대가 바로 이 세대입니다. 넉넉하게 자라서 자신 있고 당당하고 두려움을 모르고 잘 먹어서 신체적인 조건도 서양 사람에게 뒤지지 않는 세대입니다. 10,000미터를 달리려면 잘 먹어서 체 력이 든든해야 할 수 있습니다. 먹고 사는 것에 걱정이 없어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던 세대입니다. 김연아 선수도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 재미있어서 스케이트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옛날 같으면 어림없 는 일입니다. 우리가 다 잘 할 수 있었는데 먹고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서 못한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는 하고 싶은 것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G세대는 하고 싶은 것을 부모들이 다 뒷바라지 하던 세대 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부모가 보통 47-52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우리보다 20년쯤 앞서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올림픽을 처음 했던 때가 1964 년 우리나라보다 20년쯤 앞이었습니다. 1964년 전후에 태어난 아이들을 신인류세대라고 부릅니다. 일본 에서도 그동안 보지 못했던 특별한 세대로 이 세대 사람들이 지금 대개 50대입니다. 세계 경제대국을 이 루었던 오늘의 일본은 신인류세대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일본의 신인류세대와 우리나라의 G세대가 갖 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 개인중심주의입니다. 이때 우리나라 사람은 드디어 아이를 둘 정도 갖게 되어 아이들이 개인주의적으로 자라게 되어 공동체적인 의식이 없습니다. 국가도 이웃도 가족도 사 회도 직장도 없이 혼자입니다. 아주 자유분방한 세대입니다. G세대의 의식구조에 대해 조사한 것이 얼마 전에 조선일보에 났는데 G세대의 성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모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입니다. 이웃을 모릅니다. 형제가 없이 자라다 보니 자기 밖에 모릅니다. 나눌 줄 모르고 헌신도 봉사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신인류세대의 가치관이 오늘의 일본 을 만들었고 오늘의 일본의 몰락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가지고 건설했던 일본이 무너지고 있 는 것입니다.
일본의 경제학자 모리시만 미치오 교수는 1980년 대에 '일본은 왜 성공하는가' 라는 책을 쓴 후 20년 쯤 후인 1999년에 '일본은 왜 몰락하는가' 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사람은 2050년에 일본은 완전히 몰락한다 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한 마디로 하면 일본 국민에게 정신적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 이 없고, 공동체가 없고 봉사와 이웃을 향한 헌신과 나눔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가 일 본 사회를 몰락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나쁜 짓을 하는 나라입니다. 반면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일을 많이 하 는 나라입니다. 미국에는 봉사정신이 있습니다. 절대로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을 합니다. 레이디와 젠틀맨은 봉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봉사하고 헌신하 는 가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얼마나 돈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돈을 잘 쓸 줄 아느냐로 존경의 대상 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망하지 않은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육이오때 사만 육천명의 미 국병사가 죽었습니다.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천 명의 미국병사가 죽었습니다. 미국에 대해서 비판하 지만 이것만으로 비판을 그칠 이유가 됩니다. 과거의 우리나라의 예산의 삼분의 이가 미국의 원조로 이 루어졌었습니다. 미국이 아니면 우리나라가 지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 니다. 지금도 세계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미국이 제일 먼저 달려갑니다.
일본의 신인류세대는 이 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웃이 없고 봉사와 나눔이 없이 혼자 잘 살았던 것입 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을 이코노믹 애니멀 (economic animal)이라고 합니다. 도요다의 부품이 리콜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수천 개의 부품 회사에서 만든 부품으로 자동차를 만들게 되는데 일본 기업은 평생 식구의 개념으로 일했습니다. 회사가 어려워서 직원을 해고하면 돈을 벌어서 그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습 니다. 회사가 잘되면 퇴직한 사람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러나 식구 정신이 없어지자 부품회사의 환경이 열악해지고 돈을 조금 주자 불량품을 만들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지금의 사태까지 오게 된 것입니 다. 공동체 의식이 없어진 것입니다.
현대자동차도 삼성전자도 이것을 잘 보아야 합니다. 이 회사들이 파업을 해서 월급이 올라가는데 그 돈 이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월급을 깎아서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용직, 임시직을 쓰다 보니 좋은 부품을 만들 수 없었던 것이 이런 일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G세대가 가지 고 있는 가치관이 일본 신인류세대의 가치관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이웃이 없습니다. 공동체 의식이 없고 나누어 가질 줄 모릅니다. 국가 사회 이웃에 대한 감사도 충성도 없고 사회에 대한 책임도 없고 혼자 행복하게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된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옛날에는 밥상 을 대하면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고 감사했지만 G세대는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감사할 줄 모르고 이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가를 알지 못합니다. 으레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줄 알기 때문에 기도할 줄 모릅니다. 이 세대가 앞으로 우 리 사회를 어떤 사회로 만들 것인지 모릅니다. 일본의 이와 같은 세대가 만들었던 사회가 몰락하고 있는 데 우리의 G세대가 앞으로 만들 우리나라의 모습이 일본의 오늘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의 일본의 모습이 20년 후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은 우리가 자녀를 당당하고 두려움 없는 자신 있는 아이로 잘 길렀습니다.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부 모들의 헌신과 수고로 이 아이들을 기렀습니다. 기러기 아빠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자식 때문에 부부가 떨어져서 살지 않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이렇게 희생을 하는 것입 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자식 잘 기른 것만으로 안 됩니다. 이웃을 가르쳐야 합니다. 더불어서 살아가 는 마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나라가 있고 내 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이 나라를 이끌어왔는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어 떻게 이 나라를 만들고 경제를 일으키고 민주주의를 세웠는지 가르쳐야 합니다. 헌신과 봉사 이 민족의 역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나라와 부모와 어른들을 감사하는 마음을 가 르쳐야 합니다.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 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살게 된 것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게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 을 믿는 믿음을 가르치고 기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것을 모르면 일본 신인류세대가 이 룩한 몰락하는 일본의 모습이 20-30년 후 우리들의 모습이 될지도 모릅니다.
오천 년 우리 역사 가운데 오늘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모습은 우리가 특별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갑자기 돌연변이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세대라 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세대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세대, 믿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도우 심으로 이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일정치하에 두 갈래의 독립운동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중국과 소련과 관계를 맺는 독립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과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기독교가 매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미국과 관계를 맺은 세력들이 기독교정신으로 남쪽에 나라를 세웠습니 다. 지금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지만 기독교가 우리 역사에 얼마나 큰 일을 했는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한국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었던 역사입니다. 기독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우 리 선조들이 오천 년 동안 이루지 못했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시편 33편 12절에는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들 세대에 이 땅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 이 계속 되어 우리 후손에게 이어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후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과 지혜와 기도와 믿음과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으로 길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고 기도할 줄 아는 아이가 되게 하고 봉사할 줄 알고 하나님은혜에 감사하는 아이가 되도록 길러야 합니다. 이런 귀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길 바랍니다.
우리도 전에는
딛 3:1-8 / 이사웅 목사 / 마중물교회
혹시 성경말씀 중에 이런 말씀은 없었으면 좋았겠다 싶은 구절은 없으십니까? 저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까지는 참 좋은데 이어지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는 말씀은 기록하지 않으셨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가끔 듭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참 좋은 말씀이고, 백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때로는 외면하고 싶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없었다면 아내와 자녀들에게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했냐, 남편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자신있게 주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면 어떤 반격이 돌아올지를 알기에 섣불리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한쪽에 힘을 실어주셔야 가정의 질서가 바로 잡히는데 이렇게 애매하게 말씀하셨기에 가정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상호간의 존중을 말하고 있습니다. 질서를 위해서 머리됨을 두셨지만 그 지위를 가치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디도서 2장에서는 이런 관계로 어르신과 젊은이들, 남자와 여자, 종과 상전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갑과 을처럼 보이는 관계에서 서로 존중해야할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발주업체와 하청업체와의 관계,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의 관계, 교회에서 담임목사와 부사역자와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질서를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상호간에 존중해야 할 관계들입니다. 그런데 3장 1절에 나오는 통치자들과 권세잡은 자들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는 복종하고 순종하라는 말만 있지 통치자들에게 백성들을 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보통 상호간의 존중을 말씀하셨는데 왜 이 관계에서만은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당시 통치자였던 로마 황제나 그레데섬의 통치자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통치자들중에 그리스도인이 있었다면 그들에게 권력을 남용하지 말고, 정의와 공평, 온유와 겸손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라고 가르쳐서 일방적인 관계를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1. 세상속의 그리스도인들
그렇기에 1절의 ‘통치자들과 권세잡은 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라’는 말씀이 국가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기에 로마 황제를 주라고 하지 않았기에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정치권의 압력에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며 불복종을 선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리적으로는 국가와 권세들앞에 복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권세와 세상의 권세들은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막고 선을 장려하기 위하여 국가에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국가의 권세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2절은 모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그 대상이 누구든지 비방하거나 다투지 말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관용과 온유함으로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도 1절과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에 대해 기본적으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도무지 비방을 하거나 논쟁을 해서는 안되기에 권력이 악용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침묵하고 권력에 순응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절 말씀 마지막에 ‘기억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기억하라는 것은 이것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니 이런 태도를 항상 견지하라는 말씀입니다. 비방하거나 다투지말고, 관용과 온유로 대하라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행동이 아니라 마음가짐과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방하고 다툰다는 것은 교만의 증상입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나 중심적으로 생각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태도가 아니라, 누구를 대하든지 관용과 온유의 겸손한 태도가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임을 잊지말고, 기억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2. 우리 안에 일어난 변화
바울은 통치자들에게 순복하고, 이웃에게 관용과 온유를 나타내라고 한 후에 3절에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2장에서 교회내에서 어르신과 젊은이에게, 남자와 여자에게, 종에게 이렇게 행하라고 한 이후에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 교리적 근거를 제시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3절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우리말 성경에는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생략되었습니다. 통치자에게 순복하고 모든 사람에게 관용과 온유를 나타내야 할 이유는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과거에는 어리석은 자였고, 불순종하는 자였고, 속아서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하는 자였고, 악독과 투기를 일삼는 가증스럽고 서로 미워하는 자였으나 이런 우리를 구원하시고,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주님의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난 변화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잠시 간증을 하겠습니다. 1980년 2월 19일이니까 내일이 꼭 38년 되는 날입니다. 제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며칠 후 아버지께서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장로님이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 수 있냐며 저는 그때부터 삐뚤어졌습니다. 고등학생때 일진회에 들어가서 폭력을 일삼았고,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도둑질도 했습니다. 대학가서는 술에 쩔어서 혼자되신 어머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다가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렇게 목사까지 되었습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그래도 변화가 많았구나,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그렇게 돌아가신 것은 맞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교회생활 열심히 했고, 맞기도 했고, 돈도 빼앗겨 보았지만 남을 때리거나 도둑질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면 “우리도 전에는” 이랬다는 말에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기 계신 대다수가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예수 믿기 전이었다 해도 온갖 정욕과 행락에 빠져, 악독과 투기를 일삼는 가증스럽게 살았다고 하면 억울하잖아요? 못되기는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잖아요? 당시 그레데 사람들에게 해당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었기에 ‘너희가 전에는’이라면 모르겠는데 ‘우리도 전에는’이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간증을 하라고 하면 과거와 지금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서 간증할 것이 없다고 하고 심지어는 구원받은 것이 맞나 의심까지도 합니다. 반대로 어떤 분들은 뭔가 은혜를 끼치겠다는 의도로 자신의 과거를 더욱 죄된 모습으로 과장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악한 삶을 살았는데 예수를 믿고 나서 획기적인 변화된 도덕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았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항상 투기하는 자였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투기를 정당화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향락에 빠져 주색에 물들어 살았다는 말이 아니라 인생을 즐기며 살자는 인생관을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미움에 사로잡혀 살았다는 말이 아니라 내게 손해를 끼치거나 자존심이 상하게 하는 사람을 당연히 싫어하고 미워했다는 말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이 만나주셨고, 이제는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변화의 핵심입니다. 과거에는 이 세상이 나의 소망의 전부였는데, 이제는 영생의 소망을 따라 살아가는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가 된지 20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행위적인 면에서 획기적으로 나아졌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선하게 살고자 하는 동기도 있고, 의지도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실패를 합니다. 그러나 반복적인 실패에도 포기하고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나의 구원이 나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긍휼과 은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기에,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영원한 상속자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은 사람은 당장 눈앞의 이익에 그리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당장 무엇인가 부족해서 불편한 것이 사실이어도 견디고 기다릴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된 자였는데 이제는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상속자가 되었다는 이 사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세 앞에 순복하고, 모든 사람에게 관용과 온유를 나타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3. 구원의 궁극적 목적
3-7절의 말씀은 한 문장입니다. 주동사는 5절에 있는 ‘구원하시되’란 단어입니다. 즉 ‘그가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말이 이 긴 문장의 핵심입니다. 3절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말한 것이고, 4-7절에는 하나님의 자비, 사랑하심, 그의 긍휼하심, 그의 은혜란 표현이 있는데, 이는 구원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말한 것입니다. 5절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구원의 수단을 말한 것이고,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은 구원의 결과를 말한 것입니다. 아마 성경가운데서 구원에 대하여 한 문장으로 가장 잘 설명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절입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한치의 거짓도 없이 신뢰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도에게 이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서 성도들을 굳건하게 세워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궁극적인 목적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하나님 나라에 가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천국가는 것을 구원의 목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영생을 얻게 된 것은 맞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번 평창올림픽에 입양아 출신 선수 2명이 한국 국가대표선수로 참가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대개 입양아는 가난하여 버려진 아이들입니다. 입양이 된다는 것은 입양아의 입장에서는 먹을 것이 있고, 더 나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열리고, 돌봐줄 부모가 생기는 것입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입양한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 아이가 가난하고 불쌍해서 먹을 것을 제공하기 위해 입양한 것이 목적일까요? 아닙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를 입양해서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바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목적일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죄인의 결말이 멸망이기에 이 멸망에서 구원받는 것이 우리의 시급한 처지인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긍휼과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시급한 문제였지 이것이 구원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입양된 사람이 이제 먹을 것이 해결되었으니 감사하다 생각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설교인 마태복음 5:1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착한 행실은 구제하고 남을 돕는 구체적인 행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도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 삶의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것,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는 것이 착한 행실이란 것입니다.
성경은 아주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변화된 삶을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치루신 대속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할수 밖에 없을 만큼 소중하고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된 삶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근원이요, 동력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고 실패하지만 우리 안에 일어난 변화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알기에,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하는 포기하지 않은 싸움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조심할 것
딛 3:1-8 / 이삼규 목사
1962년, 간호학교 졸업반 마리안느 스퇴거라는 오스트리아 여인은 한국의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의 도우미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하나님이 “네가 가라”라고 하시는 것 같아 설레었습니다. 그녀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한국의 버림받은 땅 소록도로 향하였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자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들을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년 후 마거릿 피사레크라는 여인도 동일한 마음으로 소록도를 찾았고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섬겼습니다. 그렇게 40여년이 흐른 후 주름살 가득한 할머니가 된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여러 단체에서 상을 주거나 언론에서 인터뷰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번번이 거절했고 오스트리아 정부에서도 ‘최고의 국민상’을 주겠다고 했지만 “주께 받은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소록도 병원에서 마련한 환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가야 한다며 피했습니다. 월 10만원씩 나오는 장기 봉사자 식비도 마다했는데 병원에서 “식비를 받지 않으면 봉사자 자격을 잃게 됩니다.”라며 간신히 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봉사하던 두 사람이 2005년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라는 편지만 남기고 고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갔습니다. 그녀들은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으니 떠나야 한다며 외국인이 큰 사랑을 받았다고 고마워했습니다. 소록도 사람들은 그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녀들에게는 거룩함과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거룩함과 사랑이 소록도를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꿈을 주었고, 그녀들은 그 일에 헌신했습니다. 진정한 제자의 모습을 보여 준 것입니다.
지난 주간 모든 뉴스 매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바로 지난 9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분에 대해서 자세한 것은 잘 몰랐는데 그분이 죽으면서 남긴 인터뷰와 메모 때문에 지금 권력 실세들이 떨고 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세상을 떠나고 장례식장에 있는 영정 사진 앞에 명패가 있는데 “장로 성완종”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이 장로인지 예수 믿는 사람인지도 몰랐습니다. 그 명패를 보고서야 그분이 장로였구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어떤 신문 칼럼에서는 “사기꾼은 자살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의 글을 쓰기도 하였습니다만 아무튼 우리 예수 믿는 사람 그것도 교회 장로라는 분이 이렇게 되었으니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것이 더 걱정입니다. 나중에 수사를 해서 잘못한 사람들이 밝혀지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정말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믿는 자가 조심할 것”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강론해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는데 곧 바로 하늘나라로 데려 가시지 않으시고 여전히 죄악 많은 세상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성도들을 통해서 행하시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 믿는 성도들이 무엇을 조심하며 살아야 할까요?
1. 사랑과 섬김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두신 이 세상은 불편하고 껄끄러운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들이 그 가운데서 선을 행하며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레데 섬 교회들이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황제를 ‘신의 아들’로 숭배하는 제국 종교를 전하고 있었고, 로마 제국의 승리와 황제의 등극을 ‘복음’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바울의 복음 전파와 교회의 존재는 로마 당국이 정치적으로 오해할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또한 그레데 사람들은 로마 제국에 정복당한 후 식민지 멍에를 벗으려고 저항했던 경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레데 교회가 자칫하면 정치적인 오해를 받아 핍박의 대상이 될 여지가 다분하였습니다. 바울은 교회가 이런 어려움에 빠지지 않도록 디도에게 성도들을 조심스럽게 권면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그 권면은 크게 세 가지로 제시되었습니다.
1) 통치자들에게 오해받지 않도록 그들의 다스림에 순복해야 된다.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1상반절)
이 말은 불의한 통치자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권세의 순기능을 인정하며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라는 뜻입니다.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롬 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롬 13:3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2)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1절하반절)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백성은 선한 모습으로 사는 것이 마땅한데(참조 2:14), 이는 악한 권세들과의 관계와 세상 사회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가정에서 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세상 사람들을 비방해서 불필요한 다툼을 만들거나 싸움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
딛 3: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며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합니다. 디도는 성도들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싸움을 잘 감당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은 사랑과 선으로 원수와 악을 이기는 싸움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이 선을 행하며 구별된 삶을 나타내야 하는 곳은 그리스도인에게 적대적인 세상입니다. 성도는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선한 일에 힘씀으로써 세상과 구별됨을 분명하게 나타내야 합니다.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살면 세상은 그들을 인정하는 동시에 두려워합니다.
행 5: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어떤 성도들은 늘 자신들이 처한 어려운 환경을 탓하며 무력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는 세상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지배 아래 살아가기에 세상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세상을 이깁니다. 깊은 어두움은 빛이 가장 찬란히 빛나는 배경이 됩니다. 지금 기독교에 대한 공격과 비방을 일삼는 세상을 탓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오히려 우리의 구별됨을 드러낼 기회로 삼고 계십니까? 성도의 구별됨은 그들을 향한 세상의 공격이 강할수록 더욱 뚜렷이 나타나야 합니다. 부패한 세상, 교회를 대적하는 세상은 오히려 교회가 적극적으로 그 영광스러운 구별됨을 나타낼 곳입니다. 피하기만 해서는, 편안한 교회 안에 숨기만 해서는 이 구별됨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장 불편한 곳에 서십시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과 섬김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구원받음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과거에 온갖 죄를 지으며 죄와 사탄의 종노릇하던 자였습니다. 어리석고 불순종하며 정욕을 따라 살고 갈등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성도가 의로운 일을 행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이 새롭게 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전에는 죄를 따라 살았던 성도들이 이제는 하나님이 구원하셔서 새롭게 되도록 씻어 주시고 성령으로 회복해 주셨습니다.
딛 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딛 3: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도들이 구원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란 방식으로 이뤄진 것들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도가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은 그가 구원받아 일어난 변화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의 종으로서 악한 본성을 가진 자였습니다(3절). 그런데 하나님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이런 자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이전에 죄를 따르던 본성이 말끔하게 씻기고 성령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도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목적과 관련이 됩니다. 구원받은 자는 새롭게 변화되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쉽게 말씀드려 여러분은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쉽습니까? 안 지키는 것이 쉽습니까? 아마도 어떤 분은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십계명 어기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사람 죽이는 것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중국동포들이 토막 살인을 연거푸 세 번이나 저질러서 중국동포들을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끔찍한 일은 하라고 해도 못합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겠습니까? 죽었다 깨나도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더 편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전에는 죄의 종으로 온갖 죄악 가운데 있었으나 하나님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것입니까? 지금의 우리는 결코 구원 이전의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를 따르던 우리의 본성을 깨끗하게 하셔서 거듭나게 하셨고 성령으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해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이전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성도들이 아직도 자신을 옛 본성을 가진 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정욕과 탐심을 따라 살며 이를 거부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구원받아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것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옛 본성을 가진 성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신 일, 즉 가장 끔찍한 죄인 안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지켜 살아가는 새 본성을 창조하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습니까?
3. 성령의 능력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변화된 본성만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선물까지 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셨음을 말합니다.
딛 3: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딛 3: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전에는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풍성히 부어졌기에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런 삶은 성도가 구원받았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받은 생명이 영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을 확증해 줍니다.
성도가 풍성히 부어진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성도는 새로운 본성 위에 풍성히 부어진 성령에 힘입어 모든 상황에서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에게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롬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부어주셨다는 것은 충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충만하게 거하심으로 성도는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도의 선한 행위는 그가 받은 구원을 견고히 합니다.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성도는 선한 행위를 통해 그가 구원받아 영생을 가진 것을 확신하며 그 구원의 완성을 더욱 소망하고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될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풍성히 부어진 성령님을 의지해 날마다 살아가십니까?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께 아무 관심도 두지 않고 의지하지도 않는다면 무력한 성도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성도는 성령님을 그저 몇 가지 신기한 은사를 주시는 분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성도는 선한 일을 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성령님을 풍성히 보내주심으로 행하실 일들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힘써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 성령님께 더욱 주의하십니까?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선한 일을 행하는데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딛 3:8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아름답고 유익한 신자의 삶
딛 3:1-11 / 이수영 목사
디도서는 사도 바울이 그레데에 남겨두고 온 디도가 그레데 교회에서의 목회를 바르게 잘 하게 하기 위해 써 보낸 권면의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권면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서 바울은 디도에게 먼저 교회 안에서 장로 또는 감독을 어떤 사람들로 세워야 할지를 가르쳤습니다(딛1:5-9). 또 거짓 교사들이 어떤 자들이며 그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명했습니다(딛1:10-16). 그리고 교인들 가운데 남녀별로 나이가 든 이들과 젊은이들, 신분별로 자유인들과 종들을 각각 신앙적으로 어떻게 지도할지를 일러주었습니다(딛2:1-10). 이 모든 권면이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에 관한 것들이라면 오늘 본문에서의 권면은 신자들의 사회생활에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8절 끝에서 바울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즉 그리스도인들이 아름답고 세상 사람들에게 유익한 삶을 살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교인들이 세상 통치자들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를 가르칩니다. 본문 1절에서 그는 쓰기를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의 우선적인 충성을 우리의 참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속해 사는 나라와 이 세상의 법과 질서와 정당한 명령에도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하나님 앞에 죄인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인간사회가 하루아침에 악마들의 세상이나 짐승들의 세계처럼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법과 질서가 있는 세상, 그래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평화롭고 편안한 세상에서 살게 하시려고 각 나라나 지역마다 통치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나라와 각 지역을 다스릴 권력을 부여하셨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국민이나 각 지역의 주민들은 통치자들이 정당하게 제정한 법이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납세와 병역의 의무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은 그래서 누구보다도 선량하고 진실하며 충성스러운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다만 불의하고 부당한 법과 명령에는 저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저항하되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정부나 공권력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나 헌법정신과 민주주의의 원칙에 위배되는 악법을 제정하려고 할 때는 적법하고 평화적인 시위나 SNS를 통한 적극적인 의사표현으로 그런 시도를 저지하는 것은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디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도록 가르쳐야 할지를 말합니다. 본문 2절을 봅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아무도 비방하지 말고 누구와도 다투지 말며 관용으로 대하되 특히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함을 잊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공통되고 기본적인 성품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 내게 배우라.”(마11:29)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대하여 언제나 온유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모든 일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대하여 언제나 온유해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복 있는 사람에 관한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3-5) 하셨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인지를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순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씀하시고, 그 다음 애통하는 자를 말씀하신 데 이어서 온유한 자를 말씀하신 순서입니다. 이것은 매우 논리적이고 의미 있는 순서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종종 “겸손하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일리가 있는 해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에서 말하는 겸손은 단지 인간관계 속에서의 덕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는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우리의 참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죄인의 모습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천국 문을 열 수 없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완전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심령으로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과 가난해진 심령이 그리스도인의 다른 모든 덕목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고백으로 자신의 심령을 깨끗이 비울 때 많은 다른 덕목들이 가득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도 심령이 가난할 때에만 비로소 풍성히 맺힐 수 있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 즉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진정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외관상 그 비슷한 모습을 얼마간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열매는 볼 수 없습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진정한 인식과 고백이 없는 사람은 한 마디로 말하면 아직 하나님을 대하지 못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질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눈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들에 관해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언급하신 사람은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 바로 이어서 “애통하는 사람”을 말씀하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진정 깨달은 사람은 애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바로 이 하나님 앞에서의 근본적 애통입니다. 그런 뜻에서 영적인 애통인 것입니다. 이 애통이 없는 사람은, 달리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 됨을 깨달아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은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도 너무나 맞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애통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밖에는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되고 그를 찾는 사람만이 그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한 절망을 체험한 사람만이 위로부터 오는 위로를 구하게 되는 것이고 그 때 그런 사람을 위한 크고 완전한 위로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대신 속죄의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복 있는 사람들에 관해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과 “애통하는 사람”에 이어 “온유한 사람”을 말씀하신 것 또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은 심령이 가난해질 수밖에 없으며,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해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온유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이 어떻게 남을 비방할 수 있으며 남과 다툴 수 있겠습니까? 관용할 수밖에 없으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어지는 본문 3-7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비방과 다툼을 삼가고 관용과 온유함을 나타내야 하는 이유를 같은 관점에서 제시합니다. 첫째 이유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는 꼭 같은 죄인일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3절에서 먼저 말하기를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합니다. “속은 자”라는 말은 진리를 알지 못해 거짓되고 헛된 것을 좇아 길을 잃고 헤매던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비방과 다툼을 삼가고 관용과 온유함을 나타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로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긍휼하심과 은혜로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소망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4-7절을 다시 봅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한 진리의 말씀이고 굳세게 전하고 증언해야 할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함부로 비방하거나 다투려 하지 말고 관용과 온유함으로 대하도록 조심하며 선한 일을 힘써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권면합니다. 본문 8절입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사도 바울은 언제나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소망을 얻은 자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비방하지 않고 누구와도 다투지 않으며 언제나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는 사람이 모든 이에게 유익한 사람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의 목회를 위해 써 보낸 모든 권면의 끝에 다시 한 번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경고하기를 잊지 않습니다. 본문 9-11절을 다시 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는 것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도 한 권면입니다. 같은 권면을 디도에게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정말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은 이단들이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서 즐겨 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위에 그런 이단들에 빠지거나 접촉된 사람들에 대해서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더 깊이 빠지기 전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설득하여 참된 복음과 바른 믿음에로 돌아오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훈계를 듣지 않는 자들은 교회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 멀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단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관용과 온유함으로 아름답고 유익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단을 경계하라
디도서 3:1-11 / 양인순 목사
오늘은 총회가 정한 <이단경계주일>입니다. 지금까지 이단이나 사이비 집단에 관한 설교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진리를 바르게 배우고, 깨달으면 이단, 사이비 집단에 넘어갈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은행에서 진짜 지폐와 가짜 지폐를 구별하는 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가짜 지폐를 유형별로 분류해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느 부분이 틀린지를 세밀하게 배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진폐와 위폐를 가리는 훈련은 간단하다고 합니다. 바로 진짜 지폐를 정확하게 구별하게 하는 것입니다. 굳이 가짜에 대해서 많이 연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짜를 확실히 알면 가짜는 저절로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단, 사이비 세력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하려고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실하게 배우고, 체험하면 아무리 이단, 사이비 세력이 미혹해도 가짜임을 알기 때문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부터 신천지 집단이 한국교회를 한바탕 휘젓고 지나갔습니다. 저희 교회 게시판에도 <신천지 및 이단, 사이비 세력의 출입을 금합니다> 라는 글귀가 붙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을 총회 차원에서 붙이라고 했을 때 망설였습니다. 굳이 10만 명도 안되는 신천지 세력 때문에 한국교회가 흔들거리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신천지에서 오신 분이 있다면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시고, 복음의 능력으로 새롭게 거듭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써 붙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면 어느 종교단체든 들어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이단세력들이 이용합니다. 처음에는 소리 없이 들어와서 교인행세를 하다가 교회 내에 부정적인 소문을 퍼뜨립니다. 목사를 비방하고, 교인들을 이간질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나중에는 자신들의 신분을 드러내놓고 활동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단출입금지 글씨를 써 붙이지 않은 상태에서 이단들을 제재하면 목사를 고발합니다.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할 수 없이 게시판에 붙여 놓았습니다.
최근에는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구원파> 라는 이단이 사회이슈로 부각됐습니다. 요즘 이단들은 이름을 정통교단의 이름을 흉내 내기 때문에 분별이 어렵습니다. 이들은 <기독교복음 침례회> 라는 간판을 걸고 있습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으로 애꿎게 정통 침례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구원파는 권신찬 계열, 박옥수 계열, 이요한 계열이 있습니다. 이번에 사건을 일으킨 유병언 씨는 권신찬의 사위입니다. 이미 이들은 오대양 사건을 통해서 신도들 수 십 명을 암매장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집단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위장을 해서 다시 재기를 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유병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교주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구원파는 10가지 질문으로 접근합니다.
▶ 첫번째 : 선생님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실히 믿습니까?
▶ 두번째 : 선생님은 거듭나셨습니까?
▶ 세번째 : 성령님이 마음 속에 계심을 믿습니까?
▶ 네번째 :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짐 것을 확신합니까?
▶ 다섯번째 :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 여섯번째 :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까?
▶ 일곱번째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은 아닙니까?
▶ 여덟번째 : 구원받은 것이 확신되어집니까?
▶ 아홉번째 : 재림주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 열번째 :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질문들의 초점과 그 문제점은 첫째로,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시간, 영적생일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구원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둘째로, 회개를 계속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합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하나님께로 돌이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회개를 계속한다는 것은 사죄의 확신이 없는 증거이므로 구원받지 못한 지옥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주기도문도 외우지 않고, 회개의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지옥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천국은 의인들만 가는 곳이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하면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고, 성령의 역사 속에서 성화되어 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며 사는 것이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이런 잘못된 진리를 가르치는 이단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원파에 빠져있습니다. 자신들의 인생과 운명을 잘못된 교주에 매여서 신음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인 디도에게 보낸 목회서신입니다. 디도는 바울의 제자로서 헬라인입니다. 바울이 1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와 AD 50년경에 예루살렘 총회를 방문할 때에 이방인의 구원을 알리기 위해 할례를 받지 않았던 디도를 동반 시킵니다(행전 15장). 그 후 디도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부터 동행을 합니다. 자신을 대신하여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에 파송할 정도로 믿었던 제자입니다.(고후 2:4).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 이방지역에 있던 교회들의 구제헌금을 모아 어머니 교회(mother church)인 예루살렘 교회를 돕게 하는 일도 역시 디도에게 맡깁니다(고후 8:16-17).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 8:23)
디도는 바울이 로마로 가자 그레데 섬에 가서 목회를 합니다. 그레데 섬은 헬라 문화의 기원지로서 “크레타 문명”의 발생지입니다. 헬라어 ‘크레티조(kretizo)’는 ‘거짓말하다’ ‘속인다’는 뜻입니다. 그레데가 바로 이 ‘크레티조’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즉 그레데라는 호칭 자체에 “속이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름만 보아도 그레데라고 하는 곳이 얼마나 험악한 곳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레데인들을 향하여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 되도다”(딛1:12)라고 합니다. 이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런 환경에 있는 그레데 교회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속이는 자들이 많은 곳입니다. 할례당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곳입니다. 더러운 이익을 구하는 자들, 가정을 무너뜨리는 자들이 많은 곳입니다. 그레데 교회는 기독교 신앙과 세상의 문화가 혼합된 골치 아픈 지역입니다. 바로 그들을 바로 잡고, 바른 목회를 하라고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 두었다고 말합니다. 그레데 섬에서 어렵게 목회하는 디모데에게 바울은 AD65년경 격려와 조언의 편지로 디도서를 보냈던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당시 그레데 교회 안에 있는 자들 가운데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를 합니다. 분쟁을 일으킵니다. 율법을 신봉하는 할례당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이단 사상을 무익하고 헛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단 사상을 쫓는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다같이 10-11절을 읽습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딛3:10-11)
이단에 대해서 한두 번 경계한 후에는 멀리하라고 경고합니다. ‘멀리하라(paraitomai)’는 ‘거절하다, 일축하다, 멸시하다’는 뜻입니다. 이단들을 단호하게 거절하거나 멸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바울의 가르침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단(heresy)이라는 말은 헬라어 ‘하이레시스(hairesis)’인데요 ‘멸망케 하는 의견들, 거짓 가르침’ 이라는 뜻입니다. 이단의 특징은 글자 그대로 ‘다를 이(異), 끝 단(端)’입니다. 처음과 과정은 정통교리와 비슷한데 끝에 가면 속셈이 들어납니다. 이단은 무익하고 헛된 것입니다.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단을 경계해야 합니다.
왜 이런 이단들이 생겨나는 것일까요?
이단은 우리 몸에 암이 생기는 과정과 흡사합니다. 흔히 암이 발생하는 과정을 네 단계로 구분합니다.
① 개시단계(initiation)로 체내에 들어온 발암물질이 세포 속으로 침투하여 세포내 유전자에 손상을 주는 단계입니다.
② 변이단계(mutation)로 세포내 유전자가 손상을 받은 조직이 정상으로 회복되지 못하고 변이세포가 되는 단계입니다.
③ 촉진단계(promotion)로 변이된 세포가 전 암세포(前 癌細胞)로 변하는 과정입니다. 아직은 정상세포로 돌아갈 수 있는 단계입니다.
④ 진행단계(progression)로 전 암세포가 암세포로 진행되는 단계입니다. 이제 일단 암세포가 되면 정상세포로 회복은 불가능하게 되고 암 환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 이단이 생기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개시단계로서 미혹하는 영들이 있습니다. 딤전 4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딤전4:1)
아담과 하와를 뱀이 찾아와서 미혹하듯이 믿음이 약한 자들이나 문제가 있는 자들을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교만을 부추겨서 선악과를 먹게 합니다. 결국 죄에 빠진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합니다.
구약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고, 신약에서는 거짓 선생들이 생깁니다. 이들이 바로 마귀와 사탄의 영에 미혹된 자들입니다.
이들이 변이단계처럼 교회 내로 침투하여 성도들을 넘어지게 합니다. 진리의 말씀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교회는 촉진단계에서 이들을 건져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과 기도로 이단의 유혹에서 건져내야 합니다. 여기서 방치하면 진행단계에 빠집니다. 암세포가 회복 불능인 것처럼 이단에 한번 빠지게 되면 영적으로 완전히 파멸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단들은 영적인 암세포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계를 늦춰서는 안됩니다.
이단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교주가 있습니다.
지난 주 말씀처럼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주인이 아닌 곳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반드시 그 집단을 만든 사람, 교주가 있습니다. 사람은 결코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이단, 사이비 집단은 교주가 곧 재림 예수다, 보혜사다 하여 신격화와 우상화를 시킵니다. 예수님이나 교회가 아닌 교주나 집단에 충성을 강요합니다.
대표적인 토종 이단 가운데 통일교가 그렇습니다. 이미 죽었지만 문선명 씨가 자칭 재림 예수입니다. 우리 주변에 활개치는 모든 이단들 안상홍 증인회(하나님의 교회)의 교주는 안상홍입니다. 이들은 종말론을 주장합니다. 1988년에 재림이 온다고 주장했습니다. 안상홍이 죽자 그의 부인 장길자 어머니 하나님의 대리자로 군림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어머니 하나님을 숭배하며 따릅니다.
문제를 일으켰던 신천지 역시 이만희 씨가 교주입니다. 종교는 토종 브랜드가 좋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단으로 규정된 것만 100개 정도가 됩니다. 해외에서 수입된 이단들도 있습니다.
요셉 스미스가 만든 몰몬교(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가 있습니다. 이들은 몰몬경을 믿습니다. 미국 유타주에 신세계를 세우고,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일부다처제를 용인합니다. 술과 담배, 카페인을 거부합니다. 누가 보아도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쉽게 속습니다.
찰스 테제 러셀이 만든 여호와증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국가는 사탄이 세운 집단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애국가나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합니다. 병역을 거부하고, 총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의무인 군 입대를 거부하고, 감옥에 갑니다. 수혈을 거부하고, 결혼도 포교의 수단으로 삼습니다. 여호와증인들끼리만 결혼합니다. 다른 종교인들과 결혼할 때는 아무도 가서 축하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안식교가 있습니다. 제임스 밀러가 만든 것으로 천년왕국설을 주장하며 1843년 8월 21일에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언이 틀리자 다시 1844년 10월 22일로 재림 날짜를 수정했습니다. 이 뒤를 이어 베이츠와 화이트부부가 계속적으로 재림 신앙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안식교는 안식일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믿고 있습니다. 1904년 한국에 들어온 이후 이들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활발히 했습니다. 현재 삼육재단과 삼육병원을 운영합니다. 금주 금연 운동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이단들은 한 사람을 신격화 내지는 우상화시켜서 자신들이 받은 계시나 가르침을 믿고 따르게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이단은 집단생활, 공동생활을 합니다.
그 이유는 폐쇄성을 유지하면서 신비함을 과시하거나 자신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집단으로 들어갈 때는 헌금을 강요합니다. 통장을 빼앗거나 집을 팔아서 바칠 것을 강요합니다. 한순간의 미혹으로 재산을 정리하여 들어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 지옥이 되고 맙니다.
셋째, 이단은 잘못된 종말론이 있습니다.
대부분 요한계시록을 잘못 해석합니다.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종말의 징조로 보고, 임박한 종말론을 강조합니다. 이것을 세대주의적 해석이라고 하는데요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잘못해석하여 무리를 일으킵니다. 90년도에 있었던 다미 선교회처럼 주님의 재림 날을 날 잡아 놓고 기다립니다. 종말신앙은 중요하지만 그것을 미끼로 학교나 직장생활을 포기하게 하고 주님 오실 날만을 기다리는 것은 잘못된 이단의 행태입니다.
넷째, 이단은 가정을 파괴시킵니다.
교주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기 위해 무조건 복종을 요구합니다. 많은 이단 집단에 빠진 자들이 성적인 순결을 뺏깁니다. 공동생활을 강조하기에 가출을 합니다. 심지어 가족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잠깐 동영상을 보실까요?
이처럼 이단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금번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똑똑히 봤습니다. 결국 이단들의 득세는 개인의 영혼을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가정을 깨뜨립니다.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결국에는 사회문제를 야기 시키는 암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단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럼 누가 이단에 빠질까요? 무식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빠집니다. 그 이유는 지적인 호기심 때문입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가인 C.S. 루이스가 쓴 ‘스크르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고참 악마인 스크르테이프가 젊은 악마 웜우드에게 인간을 유혹하는 방법을 전수하는 내용입니다. 거기서 스크르테이프가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가 유혹하려고 하는 그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머리속에 서로 모순되는 사고체계들이 열두 개나 뒤죽박죽 뒤엉켜 있는 데 익숙해 있다네. 그래서 교리를 생각할 때 기본적으로 진리인가 거짓인가를 따지기보다 그것이 학문적인지 실용적인지를 따지게 되지. 그러니까 그 사람을 교회에서 멀리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논리가 아니라 궤변이란 말일세.”
따라서 이단들은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니까 이단과는 얘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단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 명확한 논리나 설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혹해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닦았고 이 기독교를 세계종교가 되도록 널리 전했던 바울 사도마저 이단과의 논쟁이 아무런 유익이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한다고 했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해서 금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단의 주장을 원천봉쇄하고 그저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나친 지적 호기심을 조심하십시오.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는 것을 알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이미 계시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얼마든지 진리를 깨닫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헛된 미혹에 빠져 성경 공부한다고 잘못 따라갔다가는 큰일 납니다.
또한 정서적으로 불안정 하거나 문제가 있는 자들이 이단에 쉽게 넘어갑니다. 또 교회 내에 불만이 있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이 빠집니다.
그러면 이단에 빠지지 않고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 본문 8절에서 사도바울은 디도에게 “굳세게 말하라”고 권면합니다. 무엇을 굳세게 말하라는 것일까요? 4절에서 7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의 은총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굳세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것을 말합니다. 영생의 소망을 얻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구원을 굳세게 믿고,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지지 않는 비결은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단을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인 호기심에 빠져서 헛된 길에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짜를 알게 되면 가짜는 저절로 구별됩니다.
이단, 사이비 집단은 양의 탈을 쓴 흉악한 이리와 같습니다. 암세포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단 세력들이 지금도 교묘한 방법으로 개인을, 가정을,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게시판에 붙어있는 이단이 경영하는 사업체와 기관, 학교들을 눈여겨보십시오. 자녀들이나 여러분이 미혹되지 않도록 멀리하십시오. 특별히 여러분의 자녀들이 명문학교라고, 잘 가르친다고 이단학교에 보내지 않도록 하십시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교묘하게 이단사상에 미혹되면 인생이 파멸하게 됩니다.
이단을 경계하고, 신앙생활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터전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5가지 중심을 잘 잡으면 됩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가정 중심, 그리고 목회자 중심입니다. 중심을 바로 잡고 있으면 아무리 사탄이 유혹해도 오뚜기처럼 넘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의 무게중심을 바로 잡고 있으면 진리 안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날마다 고백하십시오. 참 진리인 성경말씀을 신앙의 교과서로 삼으십시요.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십시요. 헛된 이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십시오. 가정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목회자를 존경하고 따르십시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진리 안에서 살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바른 신앙, 바른 믿음으로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선한 일을 힘쓰는 크리스천
딛 3:1-8 / 김철한 목사
어느 시대를 살든 권세를 잡은 이들을 향한 성경의 가르침은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 권세자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지 않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성도를 평안하게 하는 일을 한다면 복종해야 한다. 종족과 전통, 사람에 따라 복종을 잘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다. 바울이 ‘복종하며 순종하라’고 권하는 그레데인은 어떤 기질의 사람이었는가? 그들은 격정의 성격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폭동, 살인, 격전에 가담했다. 사실 그레데는 BC 67년, 로마에게 정복을 당했는데 그 후 계속적으로 저항 운동으로 하였다.
딛1:16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하였다.
딛1:12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고 하였다. 그들을 목회하는 디도에게 바울은 복종과 순종을 말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라고 한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의 목회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레데인은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고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인데 그들을 복종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노라”고 했으니 목회는 간단하고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그레데 사람들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생각해보라. 사회의 법과 질서, 규범 안에서 이런 변화된 삶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감동이 되겠는가?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 생각한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기에 행함이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내 좋은대로 살고 선한 일은 안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다. 믿음의 사람은 선을 행하여야 하고 남의 것을 빼앗던 강도가 예수를 믿고는 다 나눠주는 선을 행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선한 일을 준비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거듭 거듭 강조되고 있는 이 디도서는 이렇게 권면한다.
1. 교회 지도자들 (딛1:8)
딛1: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교회의 지도자, 감독을 향해 주는 권면인데, 선행을 좋아하라고 되어 있다. 선행이 부담스러우면 안된다. 선행의 기회를 피해가서도 안된다. 선행에 마음이 끌리고 선행하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 왜 지도자, 감독에게 선행을 좋아하라고 하는가? 지도자의 영향력 때문이다. 지도자가 선행의 빛을 나타내야지 악행을 되풀이 한다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지도자는 눈에 잘 띈다.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2. 가정의 어른들 (딛2:3~4)
딛2:3~4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라고 하였다. 가정의 어머니들은 많은 것의 좋은 교사가 되고 훈육자가 되어야 하지만 선한 것을 가르치라고 하였다. 어른들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정에서 많은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중에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살도록 가르치자. 그것이 어른들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선한 일에 빨라야 한다. 어른들이 선행을 외면한다면 가르칠 수 없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3. 대속자가 되신 주님 (딛2:14)
딛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자신의 전부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이유, 자신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어주신 이유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선한 일을 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것도 ‘적당히’가 아니다. ‘열심’이다. ‘열심’이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목적이 이것이다. 선한 일이다.
이제 주님이 그것을 원하셨으니 선행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면 올바른 성도가 아니다.
오늘 딛3:1에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그레데에 목회하러 보내어진 디도가 해야할 일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말이 있겠는가? 선한 일을 행하도록 준비시키는 것, 그것이 목회 사역이다. 그래서 믿음이 참 믿음이 되고, 변화가 참 변화가 되고 성도가 이렇게 산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목회인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딛3:3~8에 기록된 구원을 살펴보자.
첫째, 구원을 받기 이전 사람들의 영적 형편 (딛3:3)
성도들도 이전에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어리석은 자, 순종하지 아니한 자였다. 속은 자요, 정욕과 쾌락에 종노릇하는 자였다. 약속과 투기의 사람이었다. 가증스럽고 피차 미워하는 자였다. 중생하기 이전 우리의 모습은 참으로 부끄럽다. 찾아보면 그 영적 상태가 죄 밖에 없으니 사망에 놓여졌던 것이다. 소망이 없었던 것이다.
둘째, 구원의 원천 (딛3:4)
그 원천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은혜를 모르는 악한 자, 육체에 속한 자들에게 임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부어주셨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구원의 원천이며 자비와 사랑 대문에 예수님을 보내시고 죄의 값인 사망을 대신 짊어지게 하셨다.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뜨겁게 끓고 있는 하나님의 심장에서 비롯되었다. 즉, 하나님이 냄새나는 죄된 인생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건지신 것은 그냥 죽게 할 수 없는 사랑 때문이다.
셋째, 구원의 방법 (딛3:5)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의로운 행위가 아니다. 오직 긍휼하심을 좇아 자비와 사랑 때문에 예수를 보내셨다. ‘자비와 사랑이 나타날 때 구원하셨다’고 하였으니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사건이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자신을 내어주셨다.(딛2:14)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은 나를 위해 예수가 죽어주신 것이고 부활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나게 된다. 성령의 역사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더러운 죄인인데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구원의 방법을 생각하면 감사할 것 밖에 없다. 자기 아들로 대속해주시므로 사망의 값을 지불하신 것이다.
넷째, 구원을 얻은 자에 대한 약속 (딛3:7)
딛3:7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로 인해 아무 소망도 없던 인생이 이제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졌고 놀라운 약속에 서 있다. 그것은 영생의 소망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소중한 삶의 약속이다. 그리고 우리는 상속자이다. 하나님의 것, 하늘의 기업을 다 물려받을 후사다.(롬8:16~17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 하나님의 상속자라 하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구원을 받은 것도 감사한데 상속자의 권리가 주어졌다.
이상과 같이 중생하고 거듭난 크리스챤은 영생의 소망을 간직한 상속자로서 삶을 산다. 그것을 가지고 누리는 삶이란 무엇인가? 결코 아무 것도 안하는 삶이 아니다. 딛3:8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역시 구원을 얻은 자로서 사는 삶은 결국 선한 일을 힘쓰는 삶이다.
우리는 분명히 안다. 선행은 구원의 방법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확인해두어야 한다. 선행은 구원 얻은 자에게 따라오는 필연적인 열매이며 뗄 수 없는 증거이다. 선행에 힘쓰는 이 삶이 아름다운 것이며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선한 일, Good Works 에 대한 표현이 디도서에서 8번이나 나온다. 딛1:8, 16, 2:3, 5, 7, 14, 3:1, 8이 그것이다. 이런 성경 구절의 반복됨을 보면서 선행에 무심한 우리 신앙의 오해를 버리고 오직 선행을 하려고 선행에 힘을 써야 한다. 기독교의 색깔은 선한 일이다. 은혜 받은 자의 색깔은 선한 일이다. 오래 믿은 자일수록 색깔은 선한 일이다.
① 선행은 구원된 목적이다.
우리는 선행을 도덕과 인격의 덕목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선행은 신자의 존재론적인 것이다. 엡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우리가 지어진 이유, 구원을 받은 이유가 분명하다. 선한 일을 위하여서다. 그러므로 선에 대해 핑계하고 손이 오그라들고 발이 오그라든 생활을 하지 말자. 우리의 믿음의 멘토이신 웨슬리는 선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하라. 모든 처지에서 선을 행하라.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 모든 힘을 다하여 선을 행하라. 모든 장소에서 선을 행하라. 내가 살아있는 동안 선을 행하라. 모든 방법을 다하여 선을 행하라. 모든 기회에 선을 행하라. 모든 선을 행하라.”
선한 일이 이렇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