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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7년(2013년) 9월 5일 후기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12)
서울경기강원지역방 2523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523
의 후속타입니다.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를 열두 번째 읽었습니다. 오늘 불서읽기 모임은, 책쫌읽자 법우, 보리연꽃 법우, 환희장엄 법우, 클나라 법우, 그리고 저 관문, 이렇게 5명이 참석했습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중 ‘Chapter VI. The Doctrine of No-Soul: Anatta’와 ‘Chapter VII. 'Meditation' or Mental Culture: Bhāvanā’를 읽었습니다. 관문이 가지고 있는 책으로 65페이지 첫째 줄부터 72페이지 밑에서 8째 줄까지입니다.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를 읽는 동안의 후기는 저희가 그 날 읽은 부분의 영어 본문과 그 번역서인 <이승훈 옮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경서원> 의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Chapter VI. The Doctrine of No Soul: Anatta
Some people take 'self' to mean what is generally known as 'mind' or consciousness. But the Buddha says that it is better for a man to take his physical body as self rather than mind, thought, or consciousness, because the former seems to be more solid than the latter, because mind, thought or consciousness (citta, mano, viňňāna) changes constantly day and night even faster than the body (kāya).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무아))
어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아'가 일반적으로 '마음'이나 '의식'으로 알려진 것을 의미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부처는 사람이 마음이나 생각이나 의식보다는 육체적 몸을 자아로 여기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몸은 마음 같은 것보다는 고정적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나 사상, 관념은 몸보다 빨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늘 변화하기 때문이다.[각주1]
[각주1] 어떤 사람들은 대승불교의 '아뢰야식阿賴耶識'(alaya- vijnana),
즉 "저장의 의식"(藏識(장식):여래장(如來藏;Tathagatagarbha)을 '자아'와
같은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능가경(楞伽經)》은 그것이 아뜨
만이 아니라고 단호히 말한다.(Lanka. pp.78~79)
It is the vague feeling “I AM' that creates the idea of self which has no corresponding reality, and to see this truth is to realize Nirvāna, which is not very easy. In the Samyutta-nikāya there is an enlightening conversation on this point between a bhikkhu named Khemaka and a group of bhikkhus.
대응되는 실재가 없는 자아관념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나는~'이라는 막연한 느낌이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 열반을 깨닫는 것인데 그렇게 쉽지는 않다. 《상윳따-니까야》에 케마까Kemaka라는 비구와 한 무리의 비구들 간에 이 점에 대한 깨달음의 대화를 한 것이 있다.
These bhikkhus ask Khemaka whether he sees in the Five Aggregates any self or anything pertaining to a self. Khemaka replies 'No”. Then the bhikkhus say that, if so, he should be an Arahant free from all impurities. But Khemaka confesses that through he does not find in the Five Aggregates a self, or anything pertaining to a self, 'I am not an Arahant free from all impurities. O friends, with regard to the Five Aggregates of Attachment, I have a feeling “I AM”, but I do not clearly see “This is I AM”.' Then Khemaka explains that what he calls 'I AM' is neither matter, sensation, perception, mental formations, nor consciousness, nor anything without them. But he has he feeling 'I AM' with regard to the Five Aggregates, through he could not see clearly 'This is I AM'.
이 비구들은 케마까에게 "다섯 가지 모임" 중에 자아나 자아와 관계된 어떤 것이 보이는지 아닌지를 물었다. 케마까는 '안 보인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비구들은 만약 그렇다면 케마까가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난 아라한이 분명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케마까는 자기에게는 "다섯 모임" 속에서 자아나 자아와 관계된 어떤 것을 어떤 것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내가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난 아라한은 아니다'라고 고백하였다. '오! 벗들이여. "집착하려 하는 다섯 가지 모임"(五取蘊)에 있어서 '나는~'이란 느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나다'라고 보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리고 나서 케마까는 자기가 '나는~'라 부르는 것이 물질(色)도, 감각(受)도, 지각(想)도, 정신이 형성한 것(行)도, 식(識)도, 또 그 밖에 어떤 것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것이 나다'라고 보는 것은 분명 아니더라도, 그는 "다섯 가지 모임"에 있어서, 단지 '나는~'이란 느낌이 있었다.[각주3]
[각주3]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자아를 일컬어 말하는 것이다.
He says it is like the smell of a flower: it is neither the smell of the petals, nor of the colour, nor of the pollen, but the smell of the flower.
그는 그것이 꽃향기와 같다고 말한다. 그것은 꽃잎의 향기도, 색깔의 향기도, 꽃가루의 향기도 아니다. 단지 꽃의 향기일 뿐이다.
Khemaka further explains that even a person who has attained the early stages of realization still retains this feeling 'I AM'. But later on, when he progresses further, this feeling of 'I AM' altogether disappears, just as the chemical smell of a freshly washed cloth disappears after a time when it is kept in a box.
케마까는 더 나아가 깨달음의 처음 단계에 도달한 사람에게도 '나는~'이란 느낌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더욱 발전하였을 때 '나는~'이란 느낌이 완전히 사라진다. 마치 깨끗하게 빨래한 옷감의 세제 냄새가 상자 속에 넣어두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듯이.
This discussion was so useful and enlightening to them that at the end of it, the text says, all of them, including Khemaka himself, became Arahants free from all impurities, this finally getting rid of 'I AM'.
이 토론은 아주 쓸모가 있어서 토론이 끝나자 그들은 깨닫게 되었다. 경(經)에서 말하길 케마까를 포함한 그들 모두가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난 아라한이 되었다. 결국, '나는~'이란 느낌이 제거되었다.
According to the Buddha's teaching, it is as wrong to hold the opinion 'I have no self' (which is the annihilationist theory) as to hold the opinion 'I have self' (which is the eternalist theory), because both are fetters, both arising out of the false idea 'I AM'. The correct position with regard to the question of Anatta is not to take hold of any opinions or views, but to see things objectively as they are without mental projections, to see that what we call 'I', or 'being', is only a combination of physical and mental aggregates, which are working together interdependently in a flux of momentary change within the law of cause and effect, and that there is nothing permanent, everlasting, unchanging and eternal in the whole of existence.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나는 자아를 가졌다"(상주론자(常住論者)의 이론)라는 견해를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자아를 가지지 않았다"(단멸론자(斷滅論者)의 이론)라는 견해를 주장하는 것도 그릇 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둘 다 족쇄이고 그 둘 다 '나는~'이라는 거짓된 관념에서 발생되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없음"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어떤 주장이나 견해도 취하지 말고, 단지 사물들을 정신을 내어 비추는 일없이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나' 또는 '존재'라고 부르는 것을 단지 육체적, 정신적 "모임"(蘊)들의 결합체로 보는 것이다. 그 모임들이 순간적인 변화의 흐름 속에서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서로 상호의존하며 작용하는 것이라고 아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것 중에 영원하고, 늘 그러하며, 변화하지 않고, 무궁한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 "나 없음"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태도이다.
Here naturally a question arises: If there is no Ātman or Self, who gets the results of karma (actions)? No one can answer this question better than the Buddha himself. When this question was raised by a bhikkhu the Buddha said: 'I have taught you, O bhikkhus, to see conditionality everywhere in all things.'
여기서 자연스레 한 의문이 일어난다. "아뜨만이나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행위)의 결과를 받게 될까?" 아무도 이 질문에 부처 자신보다 나은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비구에게 이 의문이 일었을 때 부처가 말하였다. '나는 너희들을 이렇게 가르쳐왔다. 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그 어디서나 조건에 따라 있음을 보아라.'
The Buddha's teaching on Anatta, No-Soul, or No-Self, should not be considered as negative or annihilistic. Like Nirvāna, it is Truth, Reality; and Reality cannot be negative. It is the false belief in a non-existing imaginary self that is negative. The teaching on Anatta dispels the darkness of false beliefs, and produces the light of wisdom. It is not negative: as Asanga very aptly says: 'There is the fact of No-selfness' (nairātmyāstitā).
"영혼 없음" 또는 "자아 없음"에 대한 부처의 가르침을 부정적인 것이나 단멸론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열반과도 같이 그것은 진리이고 실재이다. 그리고 실재는 부정적일 수 없다. 부정되는 것은 존재치 않는 허구적 자아에 대한 거짓된 믿음이다. "나 없음"(Anatta;無我(무아))에 대한 가르침은 거짓된 믿음의 어둠을 몰아내고 지혜의 빛을 발한다. 그것은 아상가[無着(무착)]가 아주 적절히 말한 대로 부정적이지 않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Chapter VII. Meditation or Mental Culture: Bhāvanā
The Buddha said: 'O bhikkhus, there are two kinds of illness. What are those two? Physical illness and mental illness. There seem to be people who enjoy freedom from physical illness even for a year or two… even for a hundred years or more. But, O bhikkhus, rare n this world are those who enjoy freedom from mental illness even for one moment, except those who are free from mental defilements' (i.e., except arahants).
일곱째 가름: '명상' 또는 마음 닦기
부처는 말했다. '오! 비구들이여, 두 가지 병이 있다. 그 두 가지란 무엇인가? 육체의 병과 정신의 병이 그것이다. 일 년 동안 또는 2년 동안, ..... 심지어는 백 년 동안이나, 아니 그보다 오래도록 육체가 병에 걸리지 않는 행복을 만끽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 비구들이여, 정신적 더러움에서 벗어난 사람을 제외하고는 (즉, 아라한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 단 한 순간이라도 정신이 병들지 않는 행복을 만끽하는 사람이 드물구나.'
The Buddha's teaching, particularly his way of 'meditation', aims at producing a state of perfect mental health, equilibrium and tranquility. It is unfortunate that hardly any other section of the Buddha' teaching is so much misunderstood as 'meditation', both by Buddhists and non-Buddhists. The moment the word 'meditation' is mentioned, one thinks of an escape from the daily activities of life; assuming a particular posture, like a statue in some cave or cell in a monastery, in some remote place cut off from society; and musing on, or being absorbed in, some kind of mystic or mysterious thought or trance. True Buddhist 'meditation' does not mean this kind of escape at all. The Buddha's teaching on this subject was so wrongly, or so little understood, that in later times the way of 'meditation' deteriorated and degenerated into a kind of ritual or ceremony almost technical in its routine.
부처의 가르침은, 특히 '명상'하는 방법은 정신이 평안하여 완전히 건강한 상태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불제자건 불제자가 아니건 간에 부처가 가르친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명상'에 대해 아주 심하게 오해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명상'이란 말을 듣는 순간 일상의 활동에서 도피하는 것을 생각한다. 사회와 단절된 좀 먼 곳에서, 어떤 석굴이나 절간의 불상같이 특별한 자세를 취하는 것을 예상한다. 그리고 신비스런 것이나 비밀스런 사상이나 황홀경에 몰두하는 것을 예상한다. 진정한 불교의 '명상'은 전혀, 이런 종류의 도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주제에 있어서 부처의 가르침은 아주 잘못 이해되거나 아니면 아주 조금만 이해되어서, 후대에는 '명상'의 방법이 판에 박힌 거의 전문적 의례나 예식의 한 종류로 전락하여 타락하였다.
Most people are interested in meditation or yoga in order to gain some spiritual or mystic powers like the 'third eye', which others do not posses. There was some time ago a Buddhist nun in India who was trying to develop a power to see through her ears, while she was still in the possession of the 'power' of perfect eye-sight! This kind of idea is nothing but 'spiritual perversion'. It is always a question of desire, 'thirst' for power.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이 갖지 못한 제 3의 눈 같은 좀 영적이고 신비적인 힘을 얻기 위한 '명상'이나 요가yoga에 흥미가 있다. 얼마 전에 인도에는 온전한 시력을 지녔으면서도 귀로 보는 능력을 개발하려 애쓰는 비구니가 있었다! 이런 종류의 생각은 '영적 도착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욕망이 일으키는 문제이다. 즉, 능력에 대한 "목마름"이다.
The word meditation is a very poor substitute for the original term bhāvanā, which means 'culture' or 'development', i.e., mental culture or mental development. The Buddhist bhāvanā, properly speaking, is mental culture in the full sense of the term. It aims at cleansing the mind of impurities and disturbances, such as lustful desires, hatred, ill-will, indolence, worries and restlessness, skeptical doubts, and cultivating such qualities as concentration, awareness, intelligence, will, energy, the analytical faculty, confidence, joy, tranquility, leading finally to the attainment of highest wisdom which sees the nature of things as they are, and realize the Ultimate Truth, Nirvāna.
'명상'이란 말은 바바나bhavana(修行(수행))라는 원어에 대해 매우 빈약한 상당어이다. 바바나의 원 뜻은 '수양' 또는 '개발', 즉 정신수양이나 정신개발을 의미한다. 불교의 바바나는 제대로 말하자면 그 용어의 완전한 의미로서의 정신수양이다. 그것은 애욕, 증오, 악의, 게으름, 걱정과 불안, 회의적인 근심들 같은 더러움과 흔들림으로 가득 찬 마음을 정화하고, 정신집중, 일깨우기, 지성, 의지, 활력, 분석 능력, 자신감, 즐거움, 안정 같은 성질의 배양을 목적한다. 궁극적으로는 사물들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는 최고의 지혜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한다. 그래서 '궁극적 진리' 즉 열반을 깨닫는다.
There are two forms of meditation. One is the development of mental concentration (samatha or samādhi), of one-pointedness of mind (cittekaggatā, Skt, cittaikāgratā), by various methods prescribed in the texts, leading up to the highest mystic states such as 'the Sphere of Nothingness' or 'the Sphere of Neither-Perception-nor-Non-Perception'. All these mystic states, according to the Buddha, are mind-created, mind-produced, conditioned (samkhata). They have nothing to do with Reality, Truth, Nirvāna. This form of meditation existed before the Buddha. Hence it is not purely Buddhist, but it is not excluded from the field of Buddhist meditation. However it is not essential for the realization of Nirvāna. The Buddha himself, before his Enlightenment, studied these yogic practices under different teachers and attained to the highest mystic states; but he was not satisfied with them, because they did not give complete liberation, they did not give insight into the Ultimate Reality. He considered these mystic states only as 'happy living in this existence' (ditthadhammasukhavihāra), or 'peaceful living' (santavihāra), and nothing more.
두 가지 형태의 '명상'이 있다. 그 하나는 경전에 기술된 여러 방법대로 정신집중력을 개발하는, 즉 마음을 한 점으로 모으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영역"(無所有處(무소유처))이나 "지각하지도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영역"(非想非非想處(비상비비상처))같은 최고의 신비로운 경지에 이끄는 것이다. 부처에 의하면 이 모든 신비로운 경지는 마음이 창작해낸 것이고,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며, 조건에 따르는 것이다. 그것들은 실재, 진리, 열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형태의 '명상'은 부처 이전에도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순전히 불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 '명상'의 장외로 배제시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열반을 깨닫는데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부처 자신이 깨닫기 전에 다른 스승 밑에서 이런 요가 수행을 하였고 최고로 신비로운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부처는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완전한 해방을 주지 못했으며, '궁극적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처는 이 신비로운 경지들이 단지 "이대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나 "평화로운 삶"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상은 아니라고 여겼다.
He therefore discovered the other form of 'meditation' known as vipassanā (Skt. Vipaśyanā or vidarśanā), 'Insight' into the nature of things, leading to the complete liberation of mind, to the realization of the Ultimate Truth, Nirvāna. This is essentially Buddhist 'meditation', Buddhist mental culture. It is an analytical method based on mindfulness, awareness, vigilance, observation.
그래서 그는 위빠사나vipassana로 알려진 다른 형태의 '명상'을 개발하였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을 '통찰'하는 것인데 마음이 완전히 해방되게 하고 궁극적 진리, 열반을 실현토록 이끌어준다. 이것이 핵심적인 불교의 '명상', 불교의 정신 수양법이다. 그것은 마음이 깨어있기, 일깨우기, 주의집중, 관조(觀照)에 기초를 둔 분석적인 방법이다.
It is impossible to do justice to such a vast subject in a few pages. However an attempt is made here to give a very brief and rough idea of the true Buddhist 'meditation', mental culture or mental development, in a practical way.
몇 쪽에다 그런 광범위한 주제를 정확히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실천적인 방법으로, 정신수양 또는 정신 개발법인 진정한 불교의 '명상'에 대해 아주 간략히 개괄적인 개념을 알아보기로 하자.
The most important discourse ever given by the Buddha on mental development ('meditation') is called the Satipatthāna-sutta 'The Setting-up of Mindfulness' (No. 22 of the Digha-nikāya, or No. 10 of the Majjhima-nikāya). This discourse is so highly venerated in tradition that it is regularly recited not only in Buddhist monasteries, but also in Buddhist homes with members of the family sitting round and listening with deep devotion. Very often bhikkhus recite this sutta by the bed-side of a dying man to purify his last thoughts.
정신개발('명상')에 대해 부처가 해 준 설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띠빳타나-경Satipatthana-sutta》이라 일컬어진다. 이 설법은 전통적으로 아주 높이 숭상되어서 불교사원에서 일과적으로 낭송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교 가정에서 가족들이 둘러앉아 깊은 애정으로 경청하면서 낭송되고 있다. 아주 흔히 비구들이 죽어 가는 사람의 침상 곁에서 그 사람의 마지막 생각을 정화하려고 이 경을 낭송한다.
The ways of 'meditation' given in this discourse are not cut off from life, nor do they avoid life; on the contrary, they are all connected with our life, our daily activities, our sorrows and joys, our words and thoughts, our moral and intellectual occupations.
이 설법에서 가르쳐준 '명상'의 방법은 생활을 저버리지 않고, 회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명상'들은 모두 다 우리 생활에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일상 활동과, 우리의 슬픔과 즐거움, 우리의 말과 생각, 우리의 도덕적 그리고 지적 활동들과 연관이 있다.
The discourse is divided into four main sections: the first section deals with our body (kāya), the second with our feelings and sensation (vedanā), the third with the wind (citta), and the fourth with various moral and intellectual subjects (dhamma).
그 설법은 네 가지 주요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 첫 부분은 우리의 몸(身(신))을 다룬다. 둘째는 우리의 느낌과 감각(受(수))을, 셋째는 마음(心(심))을, 넷째는 여러 가지 도덕적, 지적 주제들(法(법))을 다룬다.
It should be clearly borne in mind that whatever the form of 'meditation' may be, the essential thing is mindfulness or awareness (sati), attention or observation (anupassanā).
어떤 형태의 '명상'이든지 그 필수적인 것은 "마음이 깨어있기" 또는 정신 차리기(sati;念(염))이며 주의집중 또는 지켜보기(anupassna;隨觀(수관))임을 명확히 마음에 새겨야 한다.
One of the most well-known, popular and practical examples of 'meditation' connected with the body is called 'The mindfulness or Awareness of in-and-out breathing' (ānāpānasati). It is for this 'meditation' only that a particular and definite posture is prescribed in the text. For other forms of 'meditation' given in this sutta, you may sit, stand, walk, or lie down, as you like. But, for cultivating mindfulness of in-and-out breathing, one should sit, according to the text, 'cross-legged, keeping the body erect and mindfulness alert'. But sitting cross-legged is not practical and easy for people of all countries, particularly for Westerners. Therefore, those who find it difficult to sit cross-legged may sit on a chair, 'keeping the body erect and mindfulness alert'. It is very necessary for this exercise that the mediator should sit erect, but not stiff; his hands placed comfortably on his lap. Thus seated, you may close your eyes, or you may gaze at the tip of your nose, as it may be convenient to you.
가장 잘 알려진 것의 하나로서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몸에 관계된 '명상'의 예는 '들숨과 날숨에 대해 마음이 깨어있기 또는 일깨우기'(anapanasati;安般守意(안반수의))라고 부른다. 경에서 특수하고 제한적인 자세를 취하라고 기술한 것은 오직 이 '명상'에 대한 것뿐이다. 이 경에 주어진 다른 형태의 '명상'은 당신이 좋을 대로 앉거나, 서거나, 걷거나, 또는 눕거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에 의하면, 들숨과 날숨에 대해 마음이 깨어있는 수행을 위해서는 앉아서, '다리를 교차시키고, 몸을 곧추세워 두고, 마음을 깨어있게' 해야 된다. 그러나 다리를 교차시키고 앉는 것[跏趺坐(가부좌)]이 모든 나라의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것은 아니며, 쉽지 않다. 특히 서양 사람들에게 그러하다. 그래서 다리를 교차시키고 앉는 것이 힘든 사람은 의자에 앉아도 좋다. '몸을 곧추세워 두고 마음을 깨어있게 한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곧추세워 앉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수행에 있어서 아주 필수적이다. 그러나 뻣뻣하게 긴장하는 것이 아니다. 손을 무릎 위에 편안히 올려놓는다. 그렇게 앉아서 당신이 편한 대로 눈을 감거나 코끝을 응시한다.
You breathe in and out all day and night, but you are never mindful of it, you never for a second concentrate your mind on it. Now you are going to do just this. Breathe in and out as usual, without any effort or strain. Now, bring your mind to concentrate on your breathing-in and breathing-out; let your mind watch and observe your breathing in and out; let your mind be aware and vigilant of your breathing in and out. When you breathe, you sometimes take deep breaths, sometimes not. This does not matter at all. Breathe normally and naturally. The only thing is that when you take deep breaths you should be aware that they are deep breaths, and so on. In other words, your mind should be so fully concentrated on your breathing that you are aware of its movements and changes. Forget all other things, your surroundings, your environment; do not raise your eyes and look at anything. Try to do this for five or ten minutes.
당신은 하루 종일 숨을 들이쉬고 내쉬지만 결코 그것을 염두에 두는 일 없을 것이다. 당신은 단 일초라도 숨에 집중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바로 그것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노력도, 어떤 억제도 하지 말고, 평소처럼 들이쉬고 내쉬어라. 이제 마음을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고 숨이 들고 나는 것을 지켜보고 관찰하여, 숨이 들고 나는 것을 마음이 알아차리고 경계하도록 하라. 당신이 숨을 쉴 때에 어떤 때는 깊은 숨을 쉴 것이고 어떤 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것 모두 상관할 필요가 없다.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숨 쉬어라. 다만 할 일은, 깊은 숨을 쉴 때 그것이 깊은 숨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다른 숨도 이와 같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의 마음이 숨에 완전히 집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움직임과 변화를 알아차려야 한다. 주변 환경 같은 다른 모든 것은 잊어버려라. 눈을 들어 어떤 것을 쳐다보거나 하지 말라. 5분이나 10분 동안 이것을 하도록 시도하라.
At the beginning you will find it extremely difficult to bring your mind to concentrate on your breathing. You will be astonished how your mind runs away. It does not stay. You begin to think of various things. You hear sounds outside. Your mind is disturbed and distracted. You may be dismayed and disappointed. But if you continue to practice this exercise twice daily, morning and evening, for about five or ten minutes at a time, you will gradually, by and by, being to concentrate your mind on your breathing. After a certain period, you will experience just that split second when your mind is fully concentrated on your breathing, when you will not hear even sounds nearby, when no external world exists for you. This slight moment is such a tremendous experience for you, full of joy, happiness and tranquility, that you would like to continue it. But still you cannot. Yet if you go on practising this regularly, you may repeat the experience again and again for longer and longer periods. That is the moment when you loose yourself completely in your mindfulness of breathing. As long as you are conscious of yourself you can never concentrate on anything.
처음에 당신은 집중하기위해 숨에 마음을 가져다두는 것이 엄청나게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마음이 어찌나 잘 달아나 버리는지에 놀랄 것이다. 마음은 가만있질 않는다. 당신은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밖에서 나는 소리들을 듣게 된다. 마음은 소란스럽고 산만해 진다. 당신은 당황하여 실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수행을 하루 두 번 아침과 저녁에, 한 번에 오 분이나 십 분 가량을 계속해 나간다면, 점점 마음이 숨에 집중되기 시작할 것이다.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당신의 마음이 완전히 숨에 집중되는, 즉 가까이서 나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당신에게 아무런 외부세계가 존재치 않는 그런 순간이 닥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짧은 순간은 엄청난 경험이다. 즐거움과 행복, 평안이 가득하여, 그것을 지속하고 싶어 하는 경험이다. 그러나 아직은 지속할 수가 없다. 그렇더라도 이것을 규칙적으로 수행한다면 자꾸자꾸, 그리고 점점 더 긴 시간 동안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숨에다 마음을 두어 당신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순간이다. 자신을 의식하는 한 결코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This exercise of mindfulness of breathing, which is one of the simplest and easiest practices, is meant to develop concentration leading up to very high mystic attainments (dhyāna). Besides, the power of concentration is essential for any kind of deep understanding, penetration, insight into the nature of things, including the realization of Nirvāna.
이 숨에 마음이 깨어있게 하는 수련은 가장 간단하고 쉬운 수행의 하나인데 지고한 신비적 경지(dhyana;禪(선))에 도달하도록 이끄는 집중력의 계발을 의미한다. 그 밖에, 집중능력은 어떤 종류의 깊은 이해에 있어서나 필수적이다. 꿰뚫음에 있어서도, 사물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에 있어서도, 열반의 깨달음까지 포함해서도 그러하다.
Apart from all this, this exercise on breathing gives you immediate results. It is good for your physical health, for relaxation, sound sleep, and for efficiency in your daily work. It makes you calm and tranquil. Even at moments when you are nervous or excited, if you practice this for a couple of minutes, you will see for yourself that you become immediately quiet and at peace. You feel as if you have awakened after a good rest.
이 모든 것과는 별도로 이 숨쉬기에 대한 수련은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다준다. 육체적인 건강과 긴장이완과 숙면 그리고 일상 업무에서의 능률에 있어 유익하다. 그것은 당신을 고요하고 안정되게 만든다. 신경성이 되거나 흥분이 되어 있는 순간이라도 이것을 단 2분만 수행한다면 당신 스스로 즉시 고요하고 평화로워짐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깨어난 것같이 느낀다.
Another very important, practical, and useful form of 'meditation' (mental development) is to be aware and mindful of whatever you do, physically or verbally, during the daily routine of work in your life, private, public or professional. Whether you walk, stand, sit, lie down, or sleep, whether you stretch or bend your limbs, whether you look around, whether you put on your clothes, whether you talk or keep silence, whether you eat or drink, even whether you answer the calls of nature- in these and other activities, you should be fully aware and mindful of the act you perform at the moment. That is to say, that you should live in the present moment, in the present action. This does not mean that you should not think of the past or the future at all. On the contrary, you think of them in relation to the present moment, the present action, when and where it is relevant.
또 다른 아주 중요하고 현실적이며 유용한 형태의 '명상'(정신개발)은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즉 몸으로 하건, 말로 하건, 생활에서 사사로운 일을 하건, 공적인 일을 하건, 직업적인 일을 하건 간에 하루의 일과를 하는 동안 알아차리고 마음을 놓지 않는 것이다. 걷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잠자거나 간에, 팔․다리를 뻗치거나 굽히거나 간에, 주위를 바라보거나, 옷을 입거나, 말을 하건 침묵을 지키건, 먹건 마시건 간에, 심지어는 똥누고 오줌눌 때에도―이런 행위들을 하거나 다른 행위를 할 때에 행위 하는 그 순간에 완전히 일깨워 마음이 깨어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당신은 현재 순간에, 현재의 행위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이것은 과거와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현재 순간과 현재의 활동에 관련시켜서 그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People do not generally live in their actions, in the present moment. They live in the past or in the future. Though they seem to be doing something now, here, they live somewhere else in their thoughts, in their imaginary problems and worries, usually in the memories of the past or in desires and speculations about the future. Therefore they do not live in, nor do they enjoy, what they do at the moment. So they are unhappy and disconnected with the present moment, with the work at hand, and naturally they cannot give themselves fully to what they appear to be doing.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행위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 그들은 과거나 미래에 산다. 지금 여기서 어떤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은 생각 속, 상상하는 문제들과 걱정들 속 같은 다른 곳에서 살고 있다. 보통 과거의 기억 속이나 미래에 대한 욕망과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자기들이 일하는 그 순간에서 살지 못하고, 그것을 즐기지도 못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손에 잡은 일이 행복하지 않으며 불만스럽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지금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다.
Sometimes you see a man in a restaurant reading while eating a very common sight. He gives you the impression of being a very busy man, with no time even for eating. You wonder whether he eats or reads. One may say that he does both. In fact, he does neither, he enjoys neither. He is strained, and disturbed in mind, and he does not enjoy what he does at the moment, does not live his life in the present moment, but unconsciously and foolishly tries to escape from life. (This does not mean, however, that one should not talk with a friend while having lunch or dinner.)
언젠가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책을 읽는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흔한 광경이다. 그는 밥 먹을 시간도 없는 매우 바쁜 사람이란 인상을 준다. 당신은 그가 밥을 먹는지, 책을 보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누구는 그가 한꺼번에 두 일을 한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사실, 그는 일하지도 못하고, 즐거움을 맛보지도 못한다. 그는 긴장되어 있으며 마음이 흐트러져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하는 일을 즐기지도 못한다. 그의 삶은 현재의 순간에 살고 있지 않으며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어리석게도 생활에서 도피하려고 한다.(그렇다고 이 말이 점심, 저녁을 먹으면서 친구와 이야기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You cannot escape life however you may try. As long as you live, whether in a town or in a cave, you have to face it and live it. Real life is the present moment-not the memories of the past which is dead and gone, nor the dreams of the future which is not yet born. One who lives in the present moment lives in the real life, and he is happiest.
당신이 애쓴다고 생활로부터 도피할 수는 없다. 당신이 살아있는 한, 시내에 있건 동굴 속에 있건 간에 삶에 부대껴서 살아가야만 한다. 진정한 삶은 현재 순간에 있다. 그것은 스러져 가 버린 과거의 기억 속에 있는 것도 아니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꿈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순간 속에 사는 이는 진정한 삶을 영위하며 행복하기 그지없다.
When asked why his disciples, who lived a simple and quiet life with only one meal a day, were so radiant, the Buddha replied: 'They do not repent the past, nor do they brood over the future. They lived in the present. Therefore, they are radiant. By brooding over the future and repenting the past, fools dry up like green reeds cut down (in the sun).'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서 소박하고 조용한 삶을 사는 부처의 제자들이 왜 그렇게 밝은 모습인지에 대해 물었을 때, 부처는 '그들은 과거를 후회하지 않으며,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밝은 모습이오. 미래를 걱정하고 과거를 후회하는 바보들은 베어진 푸른 갈대같이 (햇빛 속에서)말라 버린다오.'라고 대답하였다.
Mindfulness, or awareness, does not mean that you should think and be conscious 'I am doing this' or 'I am doing that'. No. Just the contrary. The moment you think 'I am doing this' you become self-conscious, and then you do not live in the action, but you live in the idea 'I am', and consequently your work too is spoilt. You should forget yourself completely, and lose yourself in what you do. The moment a speaker becomes self-conscious and thinks 'I am addressing an audience', his speech is disturbed and his trend of thought broken. But when he forgets himself in his speech, in his subjects, then he is at his best, he speaks well and explains thing clearly. All great work- artistic, poetic, intellectual or spiritual- is produced at those moments when its creators are lost completely in their actions, when they forget themselves altogether, and are free from self-consciousness.
마음이 깨어있기는 '나는 이것을 한다.'라든지 '나는 저것을 한다.'라고 생각을 하여가지고 의식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니다. 정반대이다. 당신이 '나는 이것을 한다.'라고 생각을 하는 순간 당신은 자기를 의식하게 되어, 그 행위 속에 살지 못하고 '나는~'이라는 의식 속에 살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당신의 일을 망치게 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려야 한다. 당신이 하는 일 속에서 당신 자신을 잊어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연설자가 자기를 의식하게 되어 '나는 청중들에게 연설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연설은 흐트러져서 생각의 흐름이 막히게 된다. 그러나 말할 때 자기 연설 속에서 자신을 잊게 되면 최상의 상태가 되어 말을 잘하고 명료하게 설명한다. 예술이든, 시이든, 지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간에 모든 위대한 작품은 창조자들이 자기 행위 속에서 완전히 망각하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을 모두 잊고 자기를 의식하는 데서 떠난 그 순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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