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은퇴 후 삼식이·하와이
안 되려면, 집안 일 신입사원 돼라
67세 은퇴자 빈센트의 남다른 노후
아침 식사 도맡는 셰프이자 집사, 요리·와인·목공 재주 많은 ‘쓸모인류’
한창 일할 때 은퇴한 것처럼 살아야...낮엔 아내와 따로, 밤엔 함께 산책
매일 아침마다 식사를 준비하는 빈센트. 제대로 요리를 할 땐 앞치마와 모자까지 갖춰 입는다. |
①매일 식사를 만든다 ②항상 정리·정돈한다 ③집안 손 볼 거리를 알아서 고친다 ④ 혼자서 시간을 보낼 줄 안다
⑤아내 친구들이 좋아한다.
중년의 보통 남자라면 여기에 몇 개나 해당될까. ‘할 수 있지만 지금은 바빠서’라는 건 핑계다.
사회적 타이틀을 떼고 자연인으로 돌아온 은퇴자 중에도 찾기가 쉽지 않은 건 매한가지다.
‘삼식이’(집에서 세끼 먹는 남편)·
‘하와이’(하루종일 와이프와 붙어있는 남편) 같은 신조어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예순일곱의 빈센트 리(Vincent Yee)는 이 다섯 가지 항목에 예스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인물이다.
아시아계 미국인(아버지는 중국인, 어머니는 한국인)인 그는 미국에서 뱅크오브아메리카·휴즈항공 등 금융·항공우주업체에서 일하다 에너지·우주 관련 회사를 차렸고, 5년 전부터는 본격적인 은퇴 이후의 삶에 돌입했다.
지난해 오랜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인 아내와 서울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는데, 그 ‘주체적 삶’이 어느새 주변인들의 눈에 띄어 책까지 나올 예정이다.
제목은 『쓸모 인류 빈센트』. 나이·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유용함을 갖춘, 이른바 ‘호모 유스풀니스(Homo Usefulness)’라는 뜻이다.
프렌치 코스 요리 만드는 요리 실력
커다란 테이블을 둔 주방에서 아내와 차 한 잔을 나누는 모습. |
서울 가회동 한옥으로 그를 만나러 갈 때마다, 그 ‘쓸모’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빈센트는 늘 부엌에서 분주했다. 마주 앉아서 하는 여느 인터뷰와 달리 그는 싱크대 앞에서, 기자는 식탁에서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질문에 답하는 그의 손놀림이 정교했다. 갓 구운 빵에 차를 내오더니, 어느새 테이블을 정리해 과일을 깎고, 바로 설거지를 하는 식이었다. 마치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 동선에 오차가 없었다. 요리 실력도 수준급이다. 프렌치 코스 메뉴까지 가능해서 한식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식사를 매일 만들고, 빵이나 케이크도 늘 직접 굽는다. 식사를 도맡는 게 귀찮을 법도 한데, 그의 생각은 다르다. “내가 왜 밥을 해, 라는 데 의문이 들면 명분은 충분하다. 내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스스로 책임지고 챙길 수 있지 않나. 또 요리라는 건 반복하면서 실패를 줄여가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매력 있는 프로젝트다.” 그래서 그는 한번 맛있다고 해서 같은 조리법이나 재료만 고집하지 않는다. 요리는 나를 발전시키는 수단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를 ‘버틀러(집사)’라 부르며 집안 곳곳을 더 살기 좋게 업그레이드한다. 현대식으로 개조한 한옥은 곳곳에서 손길을 필요로 한다. 세탁기와 벽 사이에 공간이 30cm 뜨자 바퀴 달린 수납장을 짜 넣어 세제 두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양변기는 배변에 쉽게 높이를 낮춰 제작했다. 집을 리모델링을 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크고 작은 것들을 손보는 중이다. 옮기기 쉽게 수저통에 손잡이를 단다거나, 중고로 산 의자에 페인트칠을 새로 하는 식이다. 요즘엔 매일 대문 밖에 물을 뿌리며 폭염에 달아오른 골목을 식히는 것도 주요한 일과다. “동네 할매들이 내가 이 집 일꾼인 줄 알았다네. 하하.” 일상은 즐길 것들로 넘쳐난다. 조깅·요가·다도에 최근엔 신재생에너지발전설비기사(태양열 같은 친환경 에너지를 이용해 공간을 설계 및 관리하는 사람) 자격시험을 치르는 중이다. 언젠가 멕시코 오하카에 가서 요리를 배우겠다는 계획을 세우다가, 건강한 도넛을 만들어 드론으로 팔겠다는 사업 아이디어도 구상한다. “스스로 몸을 움직여 쓸모를 찾아 나서는 것이 나의 삶을 응원하는 방식”이라는 그는 말한다. “인생의 정산은 맨 마지막 눈 감는 순간에 하는 거다. 그러니 최소 마이너스는 되지 않게 노력할 수 밖에.” 나이 들며 자신의 쓸모를 쉽게 체념하는 이들과는 분명 다른 길이다.
남들 기준보다 부부만의 취향으로 살아야
멀티 플레이어로 살아가는 일상을 화장실 포즈로 연출했다. width=560>
|
Q : 은퇴 이후 삶이 달라진 건가.
A : “아니다. 한창 일할 때도 마치 은퇴한 것처럼 살았다. 갑자기 시간이 넘친다고 이렇게 살기가 쉬운가. 삶은 습관이다. 일에 번아웃되기 전에 규칙적으로 나만의 시간을 가졌고, 또 즐겼다. 요리도 그 중 하나다. 대학 때 교양 수업으로 들은 와인 수업이 계기였다. 전공이 이공계(코넬대 환경공학)지만 가장 유용한 수업으로 여겼는데, 삶이 풍요로워지는 법을 터득했달까. 보드카 시음·패러글라이딩·경비행기 조종·요가·다도·목공 등을 하나하나 익혀가며 일상에서 즐겼다. 지금도 배우고 싶은 게 많아 늘어질 틈이 없다.”
Q : 현실적으로 나만의 시간이란 게 어렵다.
A : “특히 한국에서는 더 그럴 거다. 딱히 시간이 안 나도 좋다. 핵심은 일정한 휴식에 익숙해지는 거니까. 하루에 못 열개씩을 박는 건 어떤가. 도 닦는 것처럼 반복하다 보면 정교한 결과물에 성취감을 느낀다. 매일 밤 10분씩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에너지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인생이란 결국 연출이요, 스스로 만드는 이벤트다.”
집안의 바꾸고 고칠 것들을 직접 만들고 손본다. 가지런히 정리된 주방 수납장과 애플파이를 만드는 모습.
집안의 바꾸고 고칠 것들을 직접 만들고 손본다. 가지런히 정리된 주방 수납장과 애플파이를 만드는 모습. [사진 빈센트 인스타그램] width=560>
|
Q : 취미가 혼자 하는 것들이다.
A :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나 홀로 하면 장점이 많다. 골프처럼 여럿이 일정을 맞출 필요도 없는 데다, 요가 같은 건 매일 꾸준히 할 수 있다. 은퇴하고도 이어가기가 편하다. 그렇다고 사는 자체가 혼자는 아니다. 벌써 직접 기른 채소나 먹거리를 나누는 이웃이 생겼다. 며칠 미국만 다녀와도 궁금해 한다. 세탁소·마트 주인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며 지낸다.”
Q : 이런 준비가 안 돼 있다면.
A : "일단 지금부터 시작하면 된다. 수명은 계속 늘어나지 않나. 가령 요리라면 학원에 갈 게 아니라 아내에게 몇 가지를 배우는 게 낫다. 처음엔 당연히 실패할 거다. 그래도 뭐 어떤가. 집안에서 당신은 다시 신입사원이 된 거다. 집안 일도 열심히 배우고 도전해 보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그러려면 고정관념도 바꿔볼 필요가 있다. 집의 주인이자 어른은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거다. 내가 요리하고 청소하면 가족들이 저절로 존경하게 돼 있다.”
Q : 남다른 남편이라 아내가 좋아하겠다.
A : “오히려 이제는 내 맘대로 메뉴를 정하니 투덜대기도 한다. 정리정돈 역시 내 스타일대로 하는 거라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래도 집으로 자기 친구들을 불렀을 때 내가 스스럼없이 어울리니 흡족해한다. 처음에는 내가 부엌에 있어 친구들이 불편해했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대접받는다. 나는 우리 집이 아지트가 됐으면 싶다. 그 관계를 주도하려면 내가 셰프이자 버틀러가 될 수밖에.”
Q : 나이 들수록 부부가 멀어지기 쉬운데.
A : "낮엔 각자의 시간을 갖는 걸 중시한다. 서재를 따로 뒀다. 혼자 시간을 보내야 자신을 객관화하고, 상대를 대할 때 여유가 생긴다. 대신 매일 밤 동네 산책을 함께 나간다. 늘 같은 코스로 다니다 보니 아주 사소한 것들의 차이를 발견한다. 어떤 집 담벼락에 꽃이 피었다거나, 어떤 집 대문 주변이 참 관리가 잘 됐다면서 감탄한다. 이 모든 게 부부 사이에 대화 소재이자 공통 관심사다. 내 대학 동기 한 명은 치열하게 일해서 출세도 했고, 부촌에 큰 집도 장만했다. 하지만 부부가 늘 바쁘다 보니 집에서도 늘 테이크아웃 음식으로 때우고 살았다. 이제 나처럼 은퇴했는데, 부부끼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가 됐다. 우리를 초대해놓고도 삐걱대는 게 보여 안타까웠다.”
Q : 노후 자산·건강에 대한 걱정은 없나.
A : “남들 기준으로 살면 끝도한도 없다. 우리 부부는 소유 대신 취향을 택했다. 미국에서 LA 마리나 델 레이(산타모니카 부근)에 살았는데, 33년간 한 집을 계속 렌트만 했다. 집이 마음에 들었지만, 매매가 안 되는 공공주택이었다. 이사를 가 다른 집을 살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 집이 딱 좋았다. 대신 문고리 한 개도 우리 취향에 맞춰 바꿔 달았다. 하루를 살더라도 가장 마음에 드는 공간에서 지내고 싶었다. 주변에서는 손해라고 했지만 우린 충분히 즐거웠다. 지금 서울에 와서는 냉동실 없이 냉장고만 두고 산다. 음식을 쟁여놓지 않고 신선한 재료로 건강하게 살겠다는 아이디어다. 부부만의 진정한 삶의 가치를 만들어 산다는 것,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진짜 자산이다.”
이도은 기자, 중앙일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