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인열왕후탄생지비.정충각
일시:2024년 2월 23일 금요일
장소:강원도 원주시 개운동 인열왕후탄생지비,벽화거리,정충각 등
* 인열왕후탄생지비
강원도 원주시 원주고등학교 근처 도로변 소공원에 있다. 비석이 아주 크고 우람하다. 곁에는 자연보호헌장비가 하얀 학동상과 함께 있다. 인열왕후의 영혼인듯 하늘 향한 하얀 학이 고아하면서도 애잔하다. 사람은 갔어도 그 혼은 살아서 흐르고 있다. 오늘 현명한 왕비, 지혜로운 아내, 엄격한 어머니였던 인열왕후를 잘 배우고 가슴속에 담아 갈 것이다.
인열왕후는 조선 제16대 인조의 정실부인으로 소현세지와 효종, 인평대군의 어머니다. 강원도 원주 출신이다. 아버지 한준겸은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호를 부탁받은 유교 7대신 중 한명이다. 인열왕후는 1594년 선조 27년에 원주읍내 우소에서 태어났다. 1610년 광해군 2년에 17세의 나이로 능양군과 결혼하였다. 1612년 광해군 4년에 장남 이왕을 낳고, 7년 후에 차남 이호를 낳았다. 1623년 광해군 15년에 남편 능양군이 쿠테타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보위에 오르면서 왕비가 되었다. 남편 인조에게 진심으로 조언을 하기도 하였다. 1635년 인조 12년에 창경궁 여휘당에서 아들을 사산했는데, 그 충격으로 산욕열에 걸려 나흘 후 4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인(仁),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열(烈)이라 하여 '인열(仁烈)'의 시호를 받았다. 원래 인조는 명헌(明憲)의 시호를 내리길 원하였으나, 대사헌이었던 김상헌이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 관원이 아닌 군주의 의향대로 할 수 없다고 하여 바꾼 것이다. 능호는 장릉이다. 인조는 인열왕후의 장릉 곁에 자신의 수릉을 만들어두었다. 인조 승하 후에 효종이 그곳에 아버지를 봉릉하고 장사지냈다. 장릉은 원래 파주 운천리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묘 주위에 뱀과 전갈이 살기 시작하자 영조가 현재의 파주 갈현리로 이장하였다.
자녀는 6남 1녀이나 안타깝게도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제외하면 모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왕실의 며느리로서 시집을 왔지만 일개 군부인임에도 후덕하면서도 강단있는 성격으로 보였다. 현부인 시절에 살림이 어려워졌는데, 직접 자신의 재물을 모아 팔아서 살림을 꾸렸다고 한다. 왕비가 된 이후에 내명부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중전으로서 엄하게 다스려 내명부가 안정되었으며 자녀교육에도 엄격했다고 한다. 다만 자애롭고 관대한 면모도 보인 일화가 있는데, 인열왕후는 광해군과 폐비 류씨를 따른 내인들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기용했다. 그러던 중 오랫동안 광해군을 모신 한보향이라는 상궁이 광해군을 그리워하며 통곡한다는 것을 밀고받았다. 그런데 이를 듣고 인열왕후는 이는 의로운 사람이며 한보향을 불러 우리 임금이 하늘의 덕으로 보위에 있지만 훗날 폐조처럼 왕위를 잃게 될지 어찌 알겠느냐며 너의 마음가짐이 이러하니 내 아들을 보육할 만하다하고는 소현세자를 그녀에게 맡겼다고 한다. 반면 밀고한 이에게는 오늘 날 너의 행동이 다른 날의 마음을 알 수 있다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종아리를 때렸다. 이는 광해군을 모신 상궁 내인들에게 찬탈자로 인식된 인조정권에 대한 반감을 없애고 궁인들이 모두 안심하고 복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인열왕후는 인조반정 이후 피를 보는 일을 줄이려고 노력했으며, 남편 인조에게도 항상 살생을 하지 말고, 긴장의 경계를 풀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녀의 노력으로 인해 민심은 인조에게 향했다고 한다. 인조와 사이도 좋아서 6남 1녀를 낳았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한씨의 내조 덕에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이라는 위기를 넘겼다고도 평가하기도 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1635년 42세로 7번째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왕자는 곧 죽고, 인열왕후는 정신적 충격그오 산후 7일도 안 되어 사망했다. 인조는 왕비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왕실의 봉보부인인 응옥이 벌을 받아 강령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소현세자와 강빈의 장남 석철이 이 직후에 탄생했는데 할머니의 관이 혼전에 모셔져 있던터라 아버지는 상주로서 장례진행을 도맡아 빴고, 어머니는 할머니 대신 내명부를 총괄해야 해서 평시에 원손 탄생시 치러지는 행사를 대폭 생략해야했다. 인열왕후가 사망하고 후금은 왕비 조문을 구실로 사신단을 파견했는데 정작 그들은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려는 요구를 하였다. 조선은 당연히 요구를 거부했고 인열왕후의 조문도 거절하며 천막으로 만든 가짜 빈소에 조문하라했다. 하지만 천막이 바람에 날라가고 뒤에 서 있던 호위병을 자객으로 오인해 사신단의 반감을 샀다. 이것이 병자호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다음해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고 인열왕후의 아들인 소현세자,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다.
내명부는 수장 자리는 왕비를 들이는 것 외엔 채울 방법이 없으니 3년 후 인조는 당시 15살이었던 조창원의 딸과 혼인하니 장렬왕후다. 장령왕후는 세자보다 어려 권위가 확고되지 못했다. 1645년 청에서부터 병치레를 하던 소현세자가 사망하자 봉림대군으로 후대를 교체하는 작업이 진행됬다. 이때 장렬왕후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는데 청에게서 자유로우며 수렴청정을 해줄 수 있는 왕실 어른 인열왕후가 살아있다면 판도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원주시 인동은 그녀의 출생지인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인근 이곳 개운동에 인열왕후탄생지비를 세웠다. 이 지비는 6.25 전쟁에 불타 이후에 새로 건립된 것이다. 특이한 점은 대부분 언덕이나 도시 외곽에 보존되는 비석들과 다르게 도심 한복판에 있다. 그것도 도로 바로 앞에 있다. 임진왜란 때 이후 왕비들 가운데 유일하게 3명 이상의 대군을 낳았던 덕분에 철종 이후 단절된 왕통은 그녀의 3남인 인평대군의 후손인 고종이 즉위히면서 이어졌다. 즉 후기 조선 왕실의 갈라진 왕위 계승은 모두 인열왕후를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오늘 이런 훌륭한 연열왕후의 탄생지비에 온 것은 참으로 보람되고 뜻깊은 탐방이다.
* 자연보호헌장
원주고등학교 옆, 아파트 앞 소공원에 자연보호헌장이 있다. 오랫만에 만나는 자연보호헌장이다. 교직시절 아주 중요시 다뤘던 기억이 나서 정겨웠다. 솟구쳐 오르는 하얀 학 동상이 순수한 자연을 예찬한다.
* 벽화거리
인열왕후탄생지비에서 정충각으로 이동하는데 치악로 거리가 온통 벽화거리다. 거리의 미술관이다. 예전 군부대가 가까이 있어서 미술전공한 군인들과 원주시민들이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원주에는 이런 벽화거리가 많다. 매우 아름다워서 붉은 낭만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행복을 선사하는 거리다.
* 정충각
생육신 관란 원호의 충정을 기리는 비각이다. 원호는 원주 출신이다. 1423년 세종 5년 문과 급제하여 관직을 지냈다. 문종 때는 집현전직제학이었다. 1453년 단종 1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병을 핑계 삼아 고향 원주에서 은거하였다. 1457년 세조 3년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영월 서쪽에 관란재라는 집을 지어 살았다. 강가에서, 집에서 글을 지으면서, 조석으로 영월의 단종을 향해 눈물을 흘렸다. 단종이 죽자 삼년상을 마치고 원주 고향에 돌아와 문 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원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단종의 장릉이 집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앉을 때는 단종이 있는 동쪽을 향해 앉았고, 누울 때도 동쪽으로 머리를 두었다. 조카인 판서 원효연이 찾아와 만나기를 청했으나 거절하였다. 세조가 호조참의에 임명했으나 거부했다. 한평생 단종만을 사모하다가 죽었다. 손자 원숙강이 사관이 되어 직필로 화를 당했다. 그 후 원호는 자기의 저술과 소장을 모두 꺼내어 불태웠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다시는 글공부로 세상의 명리를 따르지 말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집안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경력과 행적도 전해지지 않는다. 1699년 숙종 25년 판부사 최석정의 건의로 고향 강원도 원주에 정려가 세워졌다. 1703년에는 원천석 사당에 배향되었다. 1782년 정조 6년 김시습, 남효온, 성담수와 함께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원주의 칠봉서원에 제향되었다. 원주의 훌륭한 인물의 숨결이 흐르는 정충각를 둘러보았다. 문을 닫아 문 밖에서 서성이며 단종을 사모하던 애뜻한 사랑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