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오피니언
[김형석 칼럼]나라 병들어도 ‘나’와 ‘우리’ 이기면 된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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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3-11-16
본인 명예 회복에 정치력 발휘하려는 지도자들
公을 위해 私를 희생하는 애국심 필요한 때다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
나는 비교적 여러 사람의 말을 듣는 편이다. 책과 글의 독자들이 있고 방송과 강연회를 갖기 때문이다. 대학을 떠난 후에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더 많이 듣고 깨닫게 된다.
군사정권 때였다. 초등학교 선생들의 편지를 받았다. ‘교육하면서 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어도 교육계통의 상위기관과 교육청이 과도한 지시와 공문 처리까지 요청하기 때문에, 제자들을 지도할 시간이 부족해서 고민이다’라는 호소였다. 나는 그 뜻을 당시 일간지에 전달 홍보해 준 적이 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사회와 공직 생활에는 권리가 있는 만큼 의무가 따르고, 책임이 있으면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 때에는 어린 학생들의 인권은 앞세우면서 교사들의 교권은 배제해 왔다. 정부는 정권을 강화하면서 산하 각 기관의 실무자들에게는 책임만 추궁하는 과오를 범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많은 일이 잘못되고 있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 지금도 정치계 지도자들은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스스로 치켜세운다.
문재인 정부 때 일이다. 지방에서 강연을 끝냈는데 한 지방 유지가 찾아와 안병욱 선생의 저서에 사인을 해달라면서, 안 교수님께 드리려고 썼던 편지인데 안 계셔서 대신 드린다며 주는 두툼한 봉투를 받았다.
‘정치의 첫째 과제는 경제와 민생 문제인데 문 대통령 주변에는 경제에 도움을 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 경제정책의 방향이 평등을 위한 소득주도성장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이 어느 때라고, 정규직이나 비정규직 같은 문제에 매달려서 되는가. 많은 자영업자를 문 닫게 했다. 일 없는 어르신들을 찾아 하찮은 일들을 주고는 취업자의 수가 증가했다는 통계 숫자를 조작하였다.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로 갔던 때의 실정과 중동 지역에서 고국의 가난을 걱정하면서 땀 흘리던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국내의 부를 평등화하는 경제가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정책을 볼 때는 걱정이 앞선다. 일부 기업 총수들의 사생활에 대한 반항심을 부추기면서 그 기업체들이 국민경제를 이끌어 왔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계급투쟁을 앞세워서 경제성장에 성공한 나라는 없다’라는 내용이었다. 지도자의 편견과 무지가 국민 분열과 사회악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를 탓하기보다 앞으로 주어진 국가적 정책을 세우고 추진하는 시점에 직면했다. 국민도 정치지도자들에게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도록 강력히 요청하여야 한다. 우리 옆에는 공산 중국의 나무가 있고, 자유 민주의 일본이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어떤 나무로 키워야 하는가. 언젠가는 주변 나무들과 아시아의 숲을 만들어야 한다. 크게 성공한 국가들은 무엇을 위해 어떤 나라로 성장했는가. 세계 역사와 선진 국가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휴머니즘 운동에서 승리를 거둔 나라들이다.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구현한 국민이다. 그에 역행한 국가들은 쇠퇴했고 국가 안에서 사회적 질환을 잘 치유한 국민이 선진 국가가 되었다. 그 결과는 정치지도자들과 국민의 수준에 따라 결정되었다.
모든 국가의 사회적 질환의 순서는 비슷하다. 공산 국가, 전체주의 국가에서 나타난 그대로다. 북한이 그 하나의 실례이다. 진실과 정직을 거짓과 불신으로 둔갑시킨 것이 첫 단계다. 국민은 정치지도자들을 믿을 수 없었고, 공직자와 국민 간의 갈등을 유발했다. 우리도 그랬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 본연의 자세인 신뢰를 거부했다. 최근 알려진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철근 결함 건축을 방치했다. 국가에 대한 신뢰 기준인 정부의 통계까지 허위로 꾸몄다. 지도자들의 인격까지도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진실과 정직이 없는 국가는 병들어 자라지 못한다.
다음 단계는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싸워서 이기면 정의가 된다는 위험한 발상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나’를 구하기 위해 정당이 뭉쳐 ‘우리’가 되고, 우리가 싸워 상대방을 밀어내면 승리할 수 있다는 현상을 만들고 있다. 나의 명예 회복을 위해 법을 등진 정치력을 발휘하겠다는 지도자들이 보란 듯이 앞장서고 있다. 그런 ‘나’와 ‘우리’ 때문에 국민과 국가가 병들어도 좋다는 모습들이다. 여야 정당 안에 그 한계를 넘어선 지도자가 많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정권이나 공직과 사회기관의 지도자나 책임자가 되면 대한민국은 더 존립해 갈 수 없다.
그 해법은 간단하다. 나라를 위해 더 유능한 사람에게 양보할 수 있고,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할 수 있는 애국심이다. 그런 지도자가 많아지는 대한민국이 동북아시아를 이끌고 갈 선진국으로 자라게 된다.
김형석 칼럼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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