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서화 작 제운스님>
무유에 대하여(對無有)
무무혜불무 無無兮不無
본시무무유 本是無無有
약월무유경 若越無有境
수간견자모 須間見慈母
없다 없다한다면 없는 것이 아니고
근원으로 보면 있다 없다 할 수 없어
만약 있다 없다는 경계를 넘어선다면
순간 관세음(慈母)을 친견하리라.
불교 수행에 있어 ‘무’다 ‘유’(존재)다는 말은 관념적으로 많이 쓴다. ‘무’라는 한 글자를 쓰면 없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무자를 두자이상 붙이면 없다는 부정에서 긍정으로 돌아온다.
무자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는 조주(趙州)스님이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話頭)다. 구자 무불성이란 “개는 불성이 없다.”는 뜻이다. 한 날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기를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하니 조주스님께서 “무”라 했다. 이 말은 불성이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의 화두가 된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했다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는 뜻이다. 조주스님이 불성이 없다 하니 이것이 큰 의심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참선하는 수행자들이 필수로 갖추는 것이 화두다. 화두란 참선에 있어 길을 갈 수 있는 차와 같아서 반드시 이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
무를 무라고 하면 이 또한 관념의 무에 빠진다. 무를 무가 아닌 무로 받아드려야 한다. 그렇다고 유로 받아드려 그 존재의 가치에 갇히면 이 또한 단견(斷見)에 늪에 빠지게 된다.
보라 저기 고요한 정처(定處)가 있다. 그것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 무라 할 것인가, 유라 할 것인가. 공이라 할 것인가, 그것은 무도 유도 공이라 단정 할 수 없다. 그대로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 현상자체는 유라 할 수 있겠지만 영원히 그대로의 현상은 아니다.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에 유라 단정 할 순 없다. 또한 고요하고 텅 빈 것 같아 무라 할 것 같으나 그렇게도 단절 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조주스님이 개가 불성이 없다고 해서 “무”라 했지만 다른 분상에서는 “유”라 답을 했다. 표면적으로는 무다, 유다 들어내지만 모든 것은 하나의 관념의 테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관념이란 본시 실체 없는 그림자 같은 것.
저기 고요하게 보이는 호수를 보라, 고요해 보이는 그대로 부동(不動)이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할 것인가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 다름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꿈속에 청산을 밟았는데 다리가 아프지 않는 것은 꿈이기 때문이다. 꿈이란 실체가 없는 허황된 것이다. 반야심경에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치 꿈속의 모든 행위는 전도몽상과 같다. 전도몽상이란 ‘뒤집힌 생각’으로 꿈속이 아닐지라도 착각을 해서 전혀 비현실적인 장난을 한다면 이 또한 전도몽상이요, 꿈속의 행위와 같은 것이다.
일찍이 달마대사가 양나라 무제(武帝)임금을 만나서 인사를 나눈 뒤 무제가 불사에 대해 언급했다. 탑을 세우고 전각을 세우고 등 은근히 불사(佛事)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런 말을 들은 달마는 별로 대꾸하지 않았다. 무제가 기분이 안 좋았다. 끝내는 무제가 마주앉은 달마대사에게 “짐을 대하는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달마는 즉시 말하길 “모르오”(不識)했다. 진정 달마가 몰라서 모른다 했을까? 그리고 불제자라면 불사를 많이 했다는 자랑일지라도 칭찬을 하고도 남을 진데 퉁명하게 받고 훌쩍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양자강을 건너갔다. 기록에 의하면 양자강에 갈대를 띄워 넘었다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장강(長江)의 물을 다 마셨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고불(古佛. 옛 부처)이 세상에 출현하기 전에 이미 중생을 다 제도해 마쳤다면 이 또한 무엇으로 말 할 것인가?
본시 중생도 부처도 없음이여
구제할 일도 구제받음도 없음이여
강을 건넌 뗏목은 이미 뗏목이 아님이여
일 마친 목동이 소도 버리고 피리도 던졌다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