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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일로 복음을 빛나게 하라
딛 3:8-15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1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12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노라
13 율법교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고
14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딛 3:8-15 /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모두가 진실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이러한 점들을 강조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착한 일에 전념하도록 가르치시오. 이것이야말로 곧 올바르고도 보람 있는 일입니다. 9) 쓸데없이 족보 이야기나 온당치 않은 논쟁에 말려들지 마시오.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는 일을 두고 토론이나 싸움을 하지 마시오. 그런 일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오히려 해를 가져올 뿐입니다. 10) 만일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가 있거든 한두 차례 엄하게 경고해 보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그와 관계를 끊어 버리시오. 11) 그런 자는 올바른 가치 판단을 잃고서 뻔히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12) [개인적인 권고와 마지막 인사] 나는 아데마나 두기고를 그대에게 보낼 예정입니다. 둘 가운데 누구든지 먼저 그곳에 도착하는대로 그대는 니고볼리로 와 주시오. 나는 거기서 겨울을 지낼 작정입니다. 13) 율법교사 세나와 아볼로를 내게 우선 보내 주시오. 그들이 길을 떠나는 데 불편이 없도록 잘 보살펴 주시오. 14) 우리 교우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앞장 서서 도와주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보람 있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15)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문안합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믿음의 형제들에게 안부를 물어 주시오.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빕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선한 일’과 ‘좋은 일’에 힘써야 합니다. 바울은 사역자들을 재배치한 후 문안과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선한 일에 힘쓰라(8-11) 바울이 디도에게 강조하는 핵심 메시지는 ‘선한 일’입니다. 1장부터 3장까지 계속해서 선한 일에 대하여 반복해서 말합니다. 선한 일은 구원의 이유와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서 나타나야 하는 열매입니다. 이것은 아름답고 사람들에게 유익합니다. 그래서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피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 분쟁,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무익하고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단에 속한 자들도 다수 발생했습니다. 이들이 그레데교회 성도들과 친분관계가 있다 할지라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돌이키지 않으면 멀리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줄 알면서도 계속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에 힘쓰라(12-15) 바울은 앞에서 ‘선한 일’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바울은 ‘좋은 일’에 대하여 권면합니다. 먼저 바울은 아데마나 두기고를 그레데에 있는 디도에게 먼저 보냅니다. 그들을 보내는 목적은 디도를 니고볼리로 부르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니고볼리에서 디도와 겨울을 같이 보낼 계획입니다. 그리고 율법교사 세나와 아볼로를 먼저 보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없도록 하고 필요한 것을 준비시켜 주기를 당부합니다. 서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사역자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힘 쓰는 것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바울 주변에는 바울과 뜻을 같이하여 복음을 전하고 각처에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디도서가 디모데전서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볼 때, 바울의 생애 마지막 때까지 이처럼 변함없이 복음을 위해 힘쓰는 동역자들이 있었던 것은 큰 복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적재적소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이제 마지막 인사를 전합니다. 믿음 안에서 서로 문안하라고 합니다. 언제나 편지 말미에 그랬듯이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적용: 하나님의 일은 절대로 혼자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사역자들을 섬기고 동역해야 할 내용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 투쟁이 되도록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의 삶으로부터 성령이 흘러나와야만 합니다. 내 능력과 내 힘이 아닌 그 분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당신이 허용한다면 그분은 당신을 통해 자신의 삶을 사실 것입니다.
< 설 교 >
교회를 교회되게
딛 3:8-15 /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교회를 교회되게”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교회를 교회되게” 지난 한 주일 동안 제게 계속 다가왔던 찬양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릴 사용하소서!라는 찬양이었습니다.
그 찬양의 후렴구는 이렇습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예밸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
‘교회를 교회되게 예밸 예배되게’ ‘말씀을 말씀되게 기도를 기도되게’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루과이의 한 작은 교회당 벽에 주기도문을 가지고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 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라고 기도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노여움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고 기도하지 마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기도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는 삶을 전혀 살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기도하지 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본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도 성도로써의 본질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이 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소금의 본질은 짠맛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소금이 만약 짠맛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닌 겁니다.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면 그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교회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요?
교회는 엄밀히 말하자면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을 교회가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어디로 와야 하지요? 교회로 와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만나는 길을 제시하는 곳입니다. 상처 있는 사람, 병든 사람,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 삶에 문제 있는 사람들이 어디로 와야 합니까?
당연히 교회로 와야 하지요. 교회는 세상에 답을 주는 곳입니다. 예수님 당시 수많은 병든 사람들이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해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처럼 교회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한국 교회가 정말로 세상에 분명한 답을 주고 있을까요?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당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 통계에 의하면 무당들의 70%가 옛날에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집사도 권사도 있고, 남선교회나 여전도회 회장 출신도 있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은 무당이 되어 있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교회가 그들 삶의 문제에 해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당이 그냥 무당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당이 되기 전 그들은 대부분 커다란 질병을 앓았거나 삶의 엄청난 문제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와서 그 문제를 해결 받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정확하게 답을 주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무당을 만나 내림 굿을 하고는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는 무당이 된 겁니다. 아니, 그렇다면 교회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귀신보다 못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예수님의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제대로만 알려주었더라면 어떻게 교회 나왔다가 무당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예수님 그 분의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떠나간 후 그레데 교회는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론 일종의 성장통(growing pain)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교회의 안정을 바라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디도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레데 교회에 닥친 위기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개인에게 신앙의 위기가 찾아오는 것처럼 교회도 신앙의 위기를 겪을 수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어렵고 힘든 것이지만, 어떤 의미로는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교회의 겨울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교회가 순탄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영광스럽게 부흥하고 성장하는 그런 때가 있는가 하면, 어느 순간 갑자기 영적으로 어두워지는 위기를 맞을 때가 분명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위기! 꽁꽁 언 겨울을 잘 넘기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생기있는 봄을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함께 나누는 디도서 마지막 부분을 통해서 그레데 교회가 경험했던 어려움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발견하고 다시금 힘차게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레데 교회의 위기는 교회 안에서 논쟁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이단이 침투한 데 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외부에서 이단이 침투한 것이 아니라, 교인 가운데서 이단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밖에서 침투하는 이단은 막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가운데서 한 사람의 신앙이 변질되어 잘못된 복음을 퍼뜨리기 시작하면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레데 교회에서는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요? 9절 말씀 제가 읽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먼저 어리석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이 변론이란 말이 주는 느낌은 강하지만 원문대로 하면 무엇을 찾는다, 무엇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울이 어리석은 변론이라 말한 이유는 그레데 교회 사람들이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지 않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채 잘못된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과 계시에 근거하지 않은 진리 추구는 어리석은 변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도 바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족보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족보는 우리 조상들의 족보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의 여러 인물들에 관해서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성경이 말씀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많이 꾸며서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신화와도 같고, 전설과도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가령 아브라함에 대해서도, 이삭에 대해서도, 야곱에 대해서도, 요셉에 대해서도, 모세에 대해서도 성경에 없는 이야기들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파벌이 생기게 된 겁니다.
‘나는 아브라함에게 속한 사람이다. 나는 모세에게 속한 사람이다.’ 해가면서 구약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을 우상화 시켜서 만들어 낸 이야기를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적인 전통을 정당화 하려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 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 같은 허황된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는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 겁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분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지기 시작한 것을 말합니다. 왜 이런 분쟁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어리석은 변론과 자기 주장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고집 때문이었습니다.
잠언 17장 14절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디모데후서 2장 23절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야고보서 4장 1절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성경 어디를 보아도 다투지 말라 했지 다투라고 한 곳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레데 교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다툼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율법에는 두 가지 이단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한 것처럼 소위 율법주의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율법주의는 율법 중에 어떤 조항은 반드시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예수만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율법주의였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와 정반대되는 이단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지 못하니까 율법이나 계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도덕적인 방탕을 정당화 하려는 그런 사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를 다 이단이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주의도 이단이고, 무율법주의도 이단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대한 가장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접근은 어떤 것입니까?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율법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죄를 피할 수 없었던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율법주의도 무율법주의도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동기가 다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볼 때 그레데 교회 안에 있었던 위기의 원인은 변론과 허황된 이야기로 분쟁함으로써 성도의 교제가 끊어졌으며, 우리가 정말 믿어야 할 교리가 무엇인가 하는 교리적인 교육이 실패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그레데 교회가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첫째로, 무익한 논쟁을 그치고,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서로 유익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같이 8절과 9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여기에 보면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두 낱말이 있습니다. 8절 마지막에 ‘사람들에게 유익하다.’는 말이 있고, 9절에는 그 반대로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익한 것에 대해서는 길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익한 것 가지고 매달리다 보면 교회에 분열이 생길 수 있고, 교제가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익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정말 유익한 것은 사람들을 구원받게 해서 그들이 새로워짐으로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성화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가령 성경 공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만을 얻기 위해서 하는 성경공부는 우리를 더 타락시킵니다.
우리에게 왜 지식이 필요합니까? 그 말씀을 우리 삶속에 적용해서 ‘어떻게 해야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기에 합당한 상속자가 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것을 알게 하는 선한 일을 북돋우는 데에 우리 모든 일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유익을 만드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그레데 교회 성도들은 근거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고 있었으며, 성경적인 분명한 해석을 떠나 왜곡된 가르침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주장하고 고집하다 보니 교회 안에 분열과 다툼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그레데 교회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고,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일찍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언제나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언제나 관용을...”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데 있어 본질적인 것은 ‘사람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뭐 이런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절대적인 문제들입니다. 아주 본질적인 문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타협할 수도 없고, 변질되어져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변질되면 그게 바로 이단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본질적이 아닌 것! 소위 절대적이지 않은 일에 관해서는 의견이 서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계시하지 않아서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에 관해서는 서로를 존경하고, 다른 생각을 용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번 자문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 구원을 받았는가? 구원받고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는가?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가?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삶은 어떤 삶인가?’
이런 질문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애쓰고 힘쓰게 될 때 우리 교회는 그만큼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관심이 집중되고 의견이 갈라지면 결국 불행한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기대와 간절한 소망은 서로의 유익을 위해 주님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의 유익을 위해 허심탄회하게 주님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건강한 성도들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진정 기쁘시게 해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진리를 수호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수호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참으로 단호했습니다.
다같이 10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단하고 토론하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단에 대해서는 훈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단하고는 ‘내가 옳다. 네가 틀렸다.’ 하면서 토론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똑바로 믿으라고 훈계해야 합니다. 그레데 교회의 경우에도 이단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밖에서 침투한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단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잘못된 교리에 영향을 받아 신앙이 변질된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할 때 언제나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면에서 사랑을 강조하던 사도 바울도 진리에 있어서만큼은 아주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서 이탈한 사람, 진리를 흐리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라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썩는 지체는 빨리 자를수록 다른 지체에 손해를 덜 끼친다는 겁니다.
잘라내는 것! 사도 바울은 이것이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편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이단의 영향을 받게 되면 우리가 진정 예수 믿고 구원받았기에 그 구원을 잃어버릴리야 없겠지만, 주님을 위한 순결한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주님의 상급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단호한 경고를 다시 한 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 2서 9-11절 말씀입니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요한도 이처럼 교리적인 순결이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대하는 데는 그것을 포기하든가 아니면 그들을 떠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잘못된 영향력에 흔들리기 시작하면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쓰실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오늘 주신 말씀 11절에 보면 이단들의 모습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단에 속한 사람은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에게 교회가 영향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신앙의 순결을 온전히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를 흔들려고 하는 이단들을 훈계한 후에 멀리하여 진리를 단호히 지킴으로써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든든히 세워져 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주님 사랑을 나누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사랑을 나누는 교회” 여러분? 사도 바울은 그레데 교회를 수습하기 위해 아데마나 두기고를 보냈으며, 교법사 세나와 아볼로도 보냈습니다.
또한 14절에 보면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이 세워지기를 바라면서 사랑으로 격려하는 사도 바울의 뜨거운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전혀 흔들림 없이 복음 위에 든든히 서가는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단에 속지 말고 복음 안에서 똘똘 뭉쳐서 서로 서로 말씀 붙잡고 뜨겁게 주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여러분? 특별히 목회서신인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사도 바울 말년의 편지입니다.
그는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자기가 세운 교회들이 복음 안에서 든든히 세워져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뜨거운 마음으로, 간절한 심정으로 마지막 편지를 동역자 디도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우리도 사도 바울의 뜨거운 심정으로 다같이 15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도 그레데 교회처럼 서로 유익을 주는 교회, 진리를 수호하는 교회, 주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교회가 되어 우리 주님께 온전히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자
딛 3:8-15 / 박조준 목사
오늘 그 동안 생각해 온 디도서 강해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훌륭한 목회자요 위대한 학자요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 서 온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습니 다. 주변에서는 너무 열심히 복음을 전하니까 바울을 가리켜 그의 많은 학문이 저를 미치게 했다. 고 말할 정도 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하고 교회를 설립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미 받은 복음의 횃불 을 물려주기 위해서 믿음의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는 일을 맡기기 위해서 훈련시켰습니 다. 그래서 쓴 것이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였습니다.
이 편지들을 흔히 목회서신이라고 합니다. 그 런데 바울의 선교 행적을 보면 그는 가는 곳마다 동역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는 자기 주변에 항 상 신뢰할 만한 동역자를 두고 함께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디모데를 위시해서 바나바, 마가, 디 도 같은 사람들이 바울을 도와서 하나님의 일을 한 것입니다. 제 경우를 보아도 지금까지 목회를 하는 동안 저 혼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교역자의 도 움을 받아가면서 일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지금까지 저를 도와 하나님의 일을 한 교역자들이 성실 하게 도와주셔서 목회를 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축복인 줄 믿고 감 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함께 일하시던 분들이 독립해서 교회를 잘 해나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그 렇게 고맙고 흐뭇할 수가 없습니다. 이따금 저를 도와서 사역하시던 목사님의 교회에 초청을 받아 가 보면 감격스럽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선배가 후배의 성장을 보면서 느끼는 흐뭇함이라고 생각합 니다. 바울은 그 당시 알려진 전세계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큰 비전과 꿈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맡기신 새로운 사역지를 향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떠나가면서 그는 함께 일하 던 디도를 그레데 섬에 남겨 놓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과 디도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 님을 믿게 된 사람들을 계속적으로 양육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는 것보다는 이미 익 숙해진 지도자를 통해서 계속 양육받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개인의 신 앙만 자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제 갓세워진 그 레데 교회를 좀더 견고하게 세우는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바울의 후임 목회자로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 두게 된 것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무엇보다 소중 한 보람 중에 하나는 내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계속해서 주 안에서 자 라가는 모습을 보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것을 성취하고 많은 것을 남긴다고 해도 우리의 삶이 끝이 나는 그 순간에 무엇이 이 세상에서 남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우리에게도 디모데가 있습니까, 디도가 있습니까? 정말 우리의 생 애를 통해서 한두사람이라도 신앙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쳐서 복음을 가지고 또다른 사람들에게 그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키웠습니까? 디도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은 디도로 하여금 복음을 전할 사람들을 계속해서 잘 돌보아 주도록 격려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레데 섬에서 처음으로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세운 이 어린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기를 원하는 바울의 애타는 심정을 디도서 전체를 읽으면서 짙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을 예수 믿게 해서 신앙이 자랄 수 있게만 하면 되지 그 다음 누가 어느 교회에서 신앙생 활 하든 상관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생각은 그렇 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교회가 든든히 세 워지기를 바울은 그렇게 소원했습니다. 왜냐 하면 바울은 교회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세계복음화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중국 선교를 위해서 평생을 바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를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중 국에서 의사로 한동안 일하다가 중간에 영국으로 돌아가 몇 년을 보내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습니 다.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의 그의 사역과 몇 해 후에 중국으로 다시 돌아와서 그 곳에서 그의 생을 마칠 때까지의 사역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에 허드슨 테일러는 복음만 전하면 된다는 생각 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원에서 의사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자기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으로 돌아가서 지난날의 사역을 결산할 때 그의 마음 속에 좀더 조직적으로 중국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역이 자라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다시 읽으면서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 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통해서 기쁨과 만족과 보람을 얻지 못할 때 어떤 일을 해도 마음 속에 참된 기쁨과 보람이 없게 됩니다. 더구나 나의 신앙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나에게만 머물러 있을 때 사실 그것은 신앙생활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을 알고 복음을 맛본 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양육한 사람들이 자라서 주님의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고 세계복음화를 위해 한 몫을 담당하는 모습을 볼 때 그보다 더 큰 보람과 기쁨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떠나간 후 그레데 섬의 이 어린 교회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종의 성장의 고통(growing pain)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이 생 각하고 기대했던 대로 교회가 자라지를 못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의 마음은 교회의 안정을 바라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디도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레데 교회에 어떤 위기가 닥쳤습니까? 개인에게 신앙의 위기가 찾아오는 것처럼 교회도 신앙의 위기를 겪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렵고 힘든 것이지만 어떤 의미로는 필요하기도 합니 다. 이것을 교회의 겨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교회가 순탄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 하면서 영광스럽게 부흥하고 성장하는 그런 때가 있는가 하면, 어느 순간 갑자기 영적으로 어두워 지는 위기를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 겨울을 잘 넘기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봄을 맞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생각하게 되는 디도서 마지막 부분을 통해서 그레데 교회가 경험했던 어려움의 원인 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그레데 교회의 위기는 한 마디로 말하면 교회 안 에서 논쟁의 분위기가 조성이 되고 이단이 침투한 것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외부에서 이단 이 침투한 것이 아니라 교인 가운데서 이단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사실 밖에서 침투하는 이단은 막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 가운데서 한 사람의 신앙이 변질되어 잘못된 복음 을 퍼뜨리기 시작하면 문제는 훨씬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레데 교회에서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어리석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이 변론이란 말이 주는 느낌은 강하지만 원문대로 하면 무엇을 찾는다 , 무엇을 추구한다 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울이 어리석은 변론 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레데 교 회 사람들이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지 않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채 무슨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과 계시에 근거하지 않은 진리 추구 는 어리석은 변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족보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족보는 우리 조상들의 족보와 같은 것이 아닙니 다. 구약시대의 여러 인물들에 관해서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성경이 말씀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많 이 꾸며서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신화와도 같고 전설과도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가령 아브 라함에 대해서도, 이삭에 대해서도, 야곱에 대해서도, 요셉에 대해서도, 모세에 대해서도 성경에 없는 이야기들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파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브라 함에게 속한 사람이다. , 나는 모세에게 속한 사람이다. 해 가면서 구약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을 우상화시켜 만들어 낸 이야기를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적인 전통을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허황된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는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분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지기 시작한 것을 말합니다. 왜 이런 분쟁이 생기게 되었습니까? 어리석은 변론과 자기 주장 만이 옳다고 생각 하는 고집 때문이었습니다. 잠언 17장 14절에 보면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2장 23절에 보면 어리석 은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에 뭐랬어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했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다투지 말라 했지 다투라 고 한 곳은 어디도 없습니다.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레데 교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다툼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만 율법에는 두 가지 이단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는 언급한 것처럼 소위 율법주의가 있었습니 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율법주의는 율법 중에 어떤 조항은 반드시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했습 니다. 예수만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도 지녀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율 법주의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율법주의였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와 정반대 되는 이단입니다. 율법을 시켜서 구원받지 못하니까 율법이나 계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고 주 장함으로 도덕적인 방탕을 정당화하려는 그런 사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를 다 이단이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주의도 이단이고 무율 법주의도 이단입니다. 그러면 율법에 대한 가장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접근은 어떤 것입니까? 율법 을 지켜서 구원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 러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율법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율법을 깸으로 하나님의 정죄를 피 할 수 없던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율법주의도 무율법주의도 아 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동기가 다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다시 말하면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 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으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렇게 생각할 때 그레데 교회 안에 있었던 위기의 원인은 변론과 허황된 이야기로 분쟁함으로 성도 의 교제가 실패됐고, 우리가 정말 믿어야 할 교리가 무엇인가 하는 교리적인 교육이 실패했었던 것 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그레데 교회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까? 첫째로, 무익한 논쟁을 그치고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나눌 수 있는 나눔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 니다. 8절과 9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 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 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 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했습니다. 여기 보면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두 낱말이 있습 니다. 8절 마지막에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는 말이 있고 9절에는 그 반대로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익한 것에 대해서 길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무익한 것 가 지고 매달리면 교회에 분열이 생길 수가 있고 교제가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유익한 것입니까? 바울은 정말 유익한 것은 사람들을 구원받게 해서 그들이 새로 워져서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다시 말하면 지난 시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후사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성화야말로 무엇보 다도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가령, 성경 공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만을 얻기 위해서 하는 공부는 우리를 타락시 킵니다. 우리에게 왜 지식이 필요합니까? 그 말씀을 우리 삶 속에 적용해서 어떻게 해야 정말 하나 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기업을 받기에 합당한 후사가 될 수 있는가를 알 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 것을 알게 하는 선한 일을 북돋우는 데 우리의 모든 일의 초점이 맞추어져 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익을 만드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그레데 교회 성도들은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고 성경적인 분 명한 해석을 떠나서 왜곡된 가르침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주장하고 고집하다 보니까 교회 안에 분열과 다툼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레데 교회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고 오 늘의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어거스틴은 일찍이 이런 말을 했습니 다. 본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언제나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언제나 관용을 .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느냐? 또는 예수님이 누구시 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신앙에서 절대적인 문제입니다. 아주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은 타협할 수도 없고 바꿔져서도 안됩니다. 이것을 바꾸면 이단이 됩니다. 그러나 본질적이 아닌 것 소위 절대적이지 않는 일에 관해서는 의견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계시하지 않아 서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에 관해서는 서로를 존경하고 다른 생각을 용 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스스로 한번 물어 봅시다. 나는 정말 구원을 받았는가? 구원받고 변하고 있는가?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가?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어 떤 것인가? 이런 것들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 리에게 유익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같이 관심을 가지고 힘쓰게 될 때 우리 교회는 그만큼 건강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하지 않은 것에 관심이 집중되고 의견이 갈라지면 결국 불행한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대와 간절한 소원은 서로를 유익하게 만들기 위해서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순결한 교리를 지킬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단호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을 보세요.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여기 자세히 보 세요. 이단하고 토론하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단에 대해서는 훈계하라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단하고는 내가 옳다 네가 틀렸다 하면서 토론하려고 하지 마세요. 똑바로 믿으라고 훈 계해야 합니다. 그레데 교회의 경우에도 이단이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밖에서 침투한 것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났 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잘못된 교리에 영향을 받아 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교회는 단호 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할 때 언제나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가 사 랑으로 대하지 않는다. 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사랑을 강조하던 사도 바울이 그 교리 적인 순결면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서 이탈한 사람, 진리를 흐리게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라내는 것밖에 없습니다. 썩는 지체는 빨리 자를수록 다른 지체에 손해를 덜 끼칩 니다.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편입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이단이 영향을 받게 되면 이미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니까 구원을 잃어버릴 것은 아니지만 정말 주님을 위해서 순결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상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단호한 경고를 다시 들어보세요.
요한 2서 9-11절 말씀입니다. 지내쳐 그리 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 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이처럼 교리적인 순결이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대하는 데는 그것을 포기하든가 아니면 그들을 떠나야 합니다. 잘못된 영향에 미치기 시작하면 교 회는 하나님이 쓰실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 오늘 주신 말씀 11절에 보면 그들의 모습을 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 죄를 짓느니 라 무엇이 진리인가를 알면서도 그것을 거절하고 이탈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은 그런 사람을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왜요? 그들에게 교회가 영향을 받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신앙의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셋째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레데 교회를 수습하기 위하여 아데마나 두기고를 보내고 교법사 세나와 아볼로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14절에 보면 우리 사람들 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했습니다. 이러한 지도자를 잘 섬기면서 우리는 정말 열매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 다. 바울은 그레데 교회 하나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얼마나 애썼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이 세워지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바울의 뜨거운 심정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정말 우리 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흔들림이 없이 복음 위에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단에 속지 말고 서로서로 뜨겁게 격려하고, 복음 안에서 뭉쳐야 합니다 이 목회서신을 생각하는 첫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바울 사도의 마지 막 편지입니다. 바울은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자기가 세운 교회들이 복음 안에서 든든히 세워져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간절한 심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나누는 교회, 교리적인 순결을 지키는 교회,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을 세워주기 위해서 격려하는, 뜨거운 사랑으로 뭉쳐진 교회가 되기 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부탁
딛 3:9-15 / 김철한 목사 / 오목천교회
디도서 3장은 바울이 디도에게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들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불복종하는 이들이 순종하는 이들로 변화되어야 할 근거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있음을 밝혀 주었다. 즉 구원 얻은 자는 선한 일을 해야 하기에 구원이 변화의 동인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제 마지막으로 디도에게 몇 가지를 부탁한다.
1. 다른 교훈을 가진 자를 멀리하라.
딛3:9~10의 말씀은 피해야 할 것 4가지를 말하고 해야 할 것 1가지를 언급한다. 그것은 다른 교훈을 가진 자에 대한 지침이다. 이단이 전하는 다른 교훈은 4가지이다.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이다. 이 4가지에 대해서는 아예 무익하고 헛된 것인 줄 알고 피하라고 하였다.
변론이라는 것은 이단 사설을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신학적 논쟁이라기보다 다른 교훈을 가지고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딛1:11, 13을 보면 거짓 교사의 입을 막고 엄히 꾸짖으라고 하였으니 변론의 상대로 삼지 말고 마주 대하여 말을 주고 받지 말라는 것이다.
족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거짓 교사들의 다른 교훈은 족보 이야기를 통해 영지주의의 구원론을 전하려 하였다. 딤전1:3~11을 보면 “거짓 교사들이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며”라고 하였는데 이 족보 이야기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무익하고 헛된 것, 영혼을 썩게 만드는 것을 피해야 한다. 도박을 피하고 마약을 피하고 술 취하게 하는 것을 피해야 하듯 족보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도 마찬가지다. 다른 교훈을 가진 자의 말을 받아주고 갑론을박하면 생기는 것이 분쟁이다. 분쟁은 세상 사람이 보면 교회가 더러운 곳인 줄 안다. 진리와 거짓이 충돌하는 분쟁을 이해하지 못한다. 율법의 다툼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고 율법을 붙잡아야 구원이 된다고 한다면 이단의 주장에 대해 싸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분쟁과 다툼은 말장난과 말다툼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런 것을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 다만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훈계하는 것이다. 훈계한 후 멀리하는 것이다.
디도서는 이단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딛3:11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는 자다. 죄를 짓는다는 것이 문제다. 썩어서 정죄된 이들, 죄를 짓는 이들이기에 수용할 수 없다. 물론 훈계를 들으면 수용한다. 훈계를 회개와 회복의 기회로 삼으면 그들을 받아들인다. 허나 부패해진 것이 이단이기에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다. 요이1:10 그리스도의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요이1: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이단을 멀리해야 한다. 그것이 목회 지침이다. 다른 교훈을 가진 자를 멀리하라. 그것은 썩게 하는 악성 바이러스다.
2. 니고볼리로 와서 만나자.
바울은 딛3:12에서 디도를 니고볼리로 초대한다. 자신이 니고볼리에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니고볼리가 지금의 어디인지는 잘 모른다. 대체로 학자들은 그리스의 가드리안 해안에 위치한 에피루스의 수도라고 추측한다. 그 니고볼리는 어떤 면에서 바울이 과동(월동)하는 도시였으며 목회 현장에서 수고하는 디도를 거기서 만나 교회의 전반적인 전략과 목회를 나누려는 뜻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디도를 만나고 싶은 바울의 사적 심정이 디도를 초청한 것 같다.
딛3:12을 보면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고 하였다. 가능한 최선을 다해 시간을 끌지 말고 어서 오라는 초청이다.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시 디도는 고린도에 갔다. 고후2:12~13을 보면 후에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기로 했지만 만나지 못하고 바울은 심히 섭섭하였다. 고후2:13을 그대로 옮겨 보면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라고 하였다. 얼마나 바울이 디도를 만나 교제하려 했는지 알게 된다. 바울도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지 못하면 슬픈 마음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리운 디도를 이번에 니고볼리에서 만나려 한다. “급히 오라” 이는 가능한 방법, 여건이 되는대로 길을 찾아 어서 오라는 바울의 마음이다.
우리는 성도가 교제하기 위해서 만나는 만남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 만남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제의 초대를 받은 디도가 니고볼리에 가지 못한 것 같다. 딤후4:10을 보면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오늘날 유고슬라비아로 디도는 나아갔던 것이다. 생각하면 만남과 교제도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회가 주어지면 함께 하라. 교회에서 종종 선교지를 방문한다. 이국 땅에서 만나는 만남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가지만 파송 선교사가 나가있는 곳으로 가라.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보고하며 살아온 날들을 나누고 거기서 새 힘을 회복하라. 교제가 주는 기쁨은 더욱 일체감을 주고 사역의 에너지가 된다.
3. 돕는 사역을 가르치고 배우게 하라.
딛3:13을 보면 “율법교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라고 한다. 바울이 머무는 자리에 도착하려면 사역을 마무리 할 세나와 아볼로를 떠나보내야 한다. 문제는 새로운 선교지로 가는 이들을 보낼 때 그들로 하여금 매일 필요한 것들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해주는 일이 요구된다.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고”
딛3:14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이라고 하였다. 그레데의 교인들로 하여금 변화시키는 것이 목회다. 부족한 점을 고치고 채워서 선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이 목회다. 그래서 사람의 선교 전략과 거기에 따르는 물질을 돕도록 가르치는 것이 목회다. 디도는 바울로부터 마음과 물질을 가지고 돕는 사역을 권면 받았고 그레데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을 드려 매일 매일 필요한 것을 준비할 줄 아는 성도가 되도록 배우게 하였다.
여기 딛3;14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좋은 일이란 지금까지 디도서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선한 일을 의미한다. 성도는 말만 가지고 생활하는데서 말을 넘어 행동으로 선한 일을 취하여야 한다. 그 행동의 구체화 중의 하나가 물질이다. 사역자 세나와 아볼로를 돕고 쓸 것을 넉넉하게 하라는 헌금 생활을 배워야 한다. 디도서를 읽으면서 돕는 사역을 잘 배우고 선한 일을 하기에 힘쓰기 위해 얼마나 헌금 생활에 원칙이 세워졌는지 점검해야 한다. 그것이 열매있는 성도의 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돕는 사역을 가르치는 일이다. 이제부터 받기만 하고 나만 잘되면 되는 이런 어린 아이 같은 신앙을 떠나자. 행20:35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함처럼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일꾼을 돕기 위해 내놓을 줄 알아야 한다. 배우고 훈련한 것 중에서 물질로 섬기고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 생활을 잘 배워두어야 한다.
고향 교회에서 향교 땅을 사서 비전 센터를 지을 때의 일이다.
제사도 지내지 않는 것들에게 100억을 주어도 안판다고 했던 향교 땅을 8억에 샀다. 1,000평이 넘는 이 당에 비전 센터를 지은 게 기적이다. 온 교회가 새벽에 나아와 기도하는데 드리고 싶은데 많이 드리지 못하여 울고 구하는 성도들이 많다고 한다. 채소를 팔고 농사를 짓는 등 삶이 어렵지만 100만원을 들고 와서 이것 밖에 못 드려서 미안해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하든지 교회 사역에 드리므로 협력하고 도우려는 사람들! 그 교회 담임목사가 말하길 목회자가 정말 목숨이라도 내어주어야 한다는 각오를 하게 한다고 한다. 교인들과 함께 한다는 것, 돕는 손길이 없어도 당연한 각오이지만 너무나도 물질을 드리는 성도에게 고맙다는 것이다.
우리는 움켜잡고 드리지 않으려고 반대하는 이들을 배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드리려는 섬김을 배워야 한다. 오늘은 맥추절이다.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움켜잡고 원망만 하는 삶이 변해 주님을 향해 손이 펴진 성도가 되자. 보릿고개 시절 전쟁 후 옥수수죽, 술찌꺼기를 먹던 시절, 교회가 있어서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 교회를 다니는 그 한 가지로 감사하자.
전설에 의하면 디도는 후에 그레데 섬으로 되돌아와서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거기서 목회하고 교회를 돌보면서 장수하고 부름을 받았다고 한다. 불복종하고 짐승 같고 말만하는 교인들이 선한 일을 행할 줄 아는 성도가 된 것이 디도를 평생 머물게 한 것이 아닐까? 디도는 바울의 마지막 부탁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딛3:15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문안하는 것은 사랑의 인사다. 돌봄의 과정이다. 디도는 그레데에서 바울의 권면을 따라 사랑으로 목회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이 끝날 때까지 목회 지침을 지키며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으려고 힘썼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좋은 일, 착한 일에 힘쓰기를 배우는 성도가 되자. 서로 서로를 돌보며 드릴 줄 알고 선교를 돕는 것을 배우는 성도가 되자.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변화되어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피해야 할 것
디도서 3:9-11/ 이상웅 목사
누군가 칼빈에게 질문을 했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뭘하고 계셨을까요? 저도 궁금합니다. 칼빈이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하나님은 당신처럼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사람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면 왠지 질문을 하기가 두려워질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 예화는 칼빈의 이야기가 아니라 질문을 받기 싫은 목사가 만들어낸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저희 교회에서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과 성경공부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준비해서 공부를 하다가 언제부턴가는 제가 준비한 것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본인이 교회밖에 있었을 때 그리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궁금한 것을 질문하도록 했습니다. 어떤 분의 경우는 매주 한 두 페이지씩 빼곡하게 질문을 적어 와서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2시간 정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질문이 가장 좋은 학습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의 기능을 말할 때 많은 경우 예배, 교육, 교제, 선교와 봉사라고 합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기 위하여 교회는 가능하면 비본질적인 것에 많은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는 주일예배, 성경공부, 목장모임, 선교와 봉사에 참여하는 것을 중심으로 교회생활을 하시고, 말씀의 원리에 따라 사회생활에 적용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저희 교회는 소그룹으로 이루어진 성경공부모임이 많습니다. 마중물교회가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았을 때 후배 목사가 저를 만나러 왔다가 수요학교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모임이 끝난 후 그 후배 목사가 제게 좀 심각하게 원래 교회 분위기가 이러냐고, 저보고 괜찮냐고 했습니다. 그 날 한 집사님이 어려운 질문을 했고, 제 대답에 자신은 동의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No problem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그 집사님이 안 계셔서 좀 그립습니다.
어떤 분들은 질문을 하면서 ‘바보같은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혹은 ‘이런 것을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하면서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마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것은 자신은 정말 궁금한데 남들은 아무도 묻지를 않기에 자신만 모르고 있다고 생각을 해서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것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아니면 자신이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하기에 상대방을 진땀 흘리고, 난처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해서 이렇게 말문을 열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어떨 때는 끝내야 할 시간인데 계속 같은 질문을 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눈총을 받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어떤 질문이든지 쓸모없는 질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이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할 수도 있고, 질문에 대답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꼭 답을 얻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문제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질문의 역할은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은 배움의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무익하고 헛된 것
그런데 바울은 9절에서 디도에게 무엇을 권면했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바울은 디도에게 무익하고 헛된 것이기에 피해야 할 것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8절 말씀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미쁘다고 한 이 말은 복음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유익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울이 유익하고 아름다운 복음에 반대되는 무익하고 헛된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첫 번째는 어리석은 변론입니다. 어리석은 변론이 KJV 에서는 ‘foolish question’ 바보같은 질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질문이 학습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는데 바울은 그것을 막고 있었던 것입니까? 바울은 두 번째 피해야 할 것으로 족보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지만,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족보로 시작합니다. 창세기에도 곳곳에 10개의 족보가 기록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역대상 1-9장까지가 모두 족보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12지파의 족보를 기록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분쟁이라고 했는데, 문맥적으로 보면 이것은 토론에 해당합니다. 네 번째도 율법에 대한 다툼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법원에서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많이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법리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법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부터 그 법을 적용하는데 있어서는 치열한 법리 싸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다툼이라고 했는데, 예를 들면 율법에는 이런 음식을 먹지 말라고 했는데, 두 직물을 혼합한 옷감으로 만든 옷은 입지 말라고 했는데 아직도 유효하냐? 부모에게 거역하는 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 과연 이 율법에 순종해야 하느냐? 법리다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치 이 모든 것이 무익하고 헛된 것이니 피하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구절의 말씀이 많은 오해를 낳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는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믿어라’는 주장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삼일절에 뭐하셨습니까? 저는 큰 애 기숙사 짐 나르느냐 부산에 다녀왔습니다. 카톡을 통해 여기저기에서 삼일절 ‘구국기도회’ 참석하라는 요청의 글을 받았습니다. 혹시 삼일절 ‘구국기도회’에 다녀오신 분 계십니까? 물론 개인적인 판단과 결정에 따라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날 저녁뉴스를 보면서 구국기도회라는 명목으로 태극기에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까지 들고 나가서 ‘공산주의로 개헌하려는 빨갱이 정권이 물러나게 하옵소서’라며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목사의 한마디에 버스를 대절하여 동원되어 저런 집회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현 개신교회의 심각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그렇게 외쳤던 보수 교회들은 그 장로 대통령의 비리가 끝없이 나오는 이 상황에서 진정한 회개의 기도회부터 했어야 합니다. 많은 거짓 뉴스들, 보수 야당의 논리를 그대로 외치는데 그 논리에 그대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판단력을 상실한 모습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런 작금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건전한 토론과 질문을 막고, 하나님의 말씀이니 무조건 믿어라는 반지성주의가 만들어낸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은 복음을 위한 수많은 논쟁에 휘말렸었습니다. 바울서신 자체가 복음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에게 변증으로 제시한 글이 경우도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끊임없이 논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떤 의도로 질문과 논쟁을 막은 것일까요?
2. 바울이 의도했던 것
10절 말씀입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악한 의도를 가지고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거짓 선생들을 용납하지 말라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바울은 거짓 선생들을 경계할 것을 교훈한 바가 있습니다. 1:10-11절입니다.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 당시 디도가 사역했던 그레데 교회에는 여러 부류의 거짓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할례파가 많았다고 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구약의 율법, 특히 할례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의식법을 따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던 자들입니다. 이런 거짓 선생들은 질문을 통해 논쟁을 일으켜 그레데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았고, 결국 이들의 활동으로 여러 가정과 교회가 무너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거짓 선생들, 이단들의 논쟁에 휘말리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단들이 교회에 들어와 논쟁을 일으켜 교회가 나뉘거나 아예 교회를 이단이 차지한 사례들이 근래에 꽤 있습니다. 어떤 이단은 이들을 ‘추수꾼’이라고 부릅니다. 추수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교회를 논쟁을 몰아가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몰라서 하는 질문들, 엉뚱한 생각에서 비롯된 질문들, 정답이 없는 질문들, 우리의 이해로는 한계가 있는 질문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질문들은 유익합니다. 질문의 내용이 어떠하냐가 아니라 질문을 하는 의도가 어떠하냐가 유익한 질문인가, 무익한 질문인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피하라고 한 것은 악한 의도를 가지고 교회를 분쟁으로 몰아가서 무너뜨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하는 질문을 막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멀리하라는 말은 교회에서 징계하라, 추방하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이런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죄를 짓고 있기에 이런 사람은 피해야 한다, 교회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게 매정하게 그렇게 하느냐, 회개할 수 있도록 계속 도와야 하지 않느냐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를 보호하고, 도리어 그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3.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마음의 의도를 판단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디도의 입장에서는 저 질문이 배움의 열정에서 나온 질문인지, 악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질문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그 질문의 내용을 가지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럼 태도로 분별이 됩니까? 원래 사회적 제스처를 잘 못해서 태도가 껄렁껄렁해 보인다고 그 마음까지 매도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단의 추수꾼들은 신뢰를 얻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매우 겸손함과 신실한 태도를 가지기 접근하기에 태도로 분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결국은 공동체의 교제권 안에서 그 삶이 드러나기에 분별력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리가 수많은 이단의 교리를 다 이해하기에 분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며 주님의 제자로 살고자 하는 열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가, 주님의 제자로서의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르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 순수한 관심이 있는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나의 상황에서 최선의 순종을 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그렇게 살려고 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선생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도 수많은 질병균들이 들어옵니다. 우리 몸에 들어온 바이러스가 어떤 것인지 알고 이겨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몸의 면역력이 강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겨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그렇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가르침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피해야 할 것은 맹목적이고, 잘못된 교회의 관행에 빠져서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누군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살아가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오늘 말씀은 건강한 토론과 질문을 막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오늘부터 시작된 성경공부가 기대가 됩니다. 함께 참석하여 질문을 던지고, 무엇이 진정한 신앙의 자세인지 토론함으로 주님의 제자들이 모두 되시길 축복합니다.
바울과 동역자들
디도서 3:12-15 / 이상웅 목사
지난 화요일에 옥천군 청산이란 곳을 방문했습니다. 저희 집사님 중 한 분이 장학생으로 추천한 학생을 만나기 위한 방문이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3년전 학교에서 시험공부를 마치고 늦게 아버지의 경운기를 타고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음주 운전한 트럭과 부딪혀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이 학생은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 가정에는 필리핀 어머니와 동생 3명이 있었습니다. 저희 집사님이 그때 일을 기억하고 청산파출소에 연락을 해서 그 학생의 근황을 물었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연락에 방문을 한 것입니다. 파출소 소장님을 만났고, 그 학생이 입학한 청산고등학교를 찾아가 교장선생님과 학생을 만났습니다. 건강하고 밝게 성장했고, 입학성적도 2등이었다고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격려와 용기를 줄 수 있다는 것이 기뻤고, 감사했습니다.
파출소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오가면서 파출소장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소장님은 금년에 청산파출소에 부임했기에 3년전의 사건에 대하여 몰랐다고 합니다. 처음에 전화를 받고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때 일을 기억하고 연락을 하고, 돕겠다고 찾아오는 것을 통해 마음에 감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직업상 늘 어두운 일만 보아왔었기에 의심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늘 앞섰는데, 이번 일을 통해 자신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장님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 한편으로 요즘 교회가 나쁜 짓도 많이 했는데, 조금이라도 만회가 되었으면 좋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는 내게 오라!
디도서의 마지막 본문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권의 책을 마칠 때는 두 가지 마음이 교차합니다. 책 한권을 마쳤다는 뿌듯함과 함께 이제 다음에는 어떤 본문을 준비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시작됩니다. 디도서는 바울이 그레데섬에서 사역하는 후배 사역자 디도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교회의 장로를 세울 것과 거짓 교사들을 물리치고,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주의 백성이 되도록 성도들을 가르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좀 의아했습니다. 12절에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교회에 장로들을 세우고, 성도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열심히 말해놓고, 아데마나 두기고를 보낼테니 그에게 교회를 맡기고 너는 빨리 니고볼리로 와서 나와 함께 겨울을 보내자고 했던 것입니다.
디도 입장에서는 아직 성도들도 미숙하고, 교회를 바로 세우려면 할 일이 태산이었습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울이 함께 겨울을 보내자고 급히 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그레데에서 사역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기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새로운 사역지로 옮기라고 한 것입니까? 바울이 무슨 목적으로 니고볼리로 급히 오라고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애를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디도서는 바울의 로마 1차투옥과 2차투옥 사이에 쓰여진 편지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61-63년 2년간 투옥되어 있다가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67년경 2차 투옥되어 순교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길어야 4년정도의 시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풀려나서 서바나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런후 디도와 함께 그레데에서 전도를 하고, 디도를 남겨놓고, 골로새와 에베소를 방문하고 에베소에 디모데를 남겨놓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니고볼리에서 디도를 만나기로 했다가 아마 그곳에서 체포되어 2차 투옥되었고,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니고볼리에서 디도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노사도였던 바울은 아마도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아들인 디도와 마지막 겨울이 될지도 모르는 그 시간을 함께 보내기 원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디도를 대신하기 위해 아데마나 두기고를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아데마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두기고는 몇 번 등장합니다. 에베소서 6:21입니다.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바울의 입장을 대변할 만큼 신뢰하는 일꾼이었고, 바울이 쓴 옥중서신인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전달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 4:9과 12절입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두기고를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바울이 2차투옥 되었을 때 에베소에 있던 디모데를 속히 오라고 하면서 대신 두기고를 보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두기고는 배달부에, 전문 대타요원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바울에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울의 사역이 가능했던 것은 바울 주변에 이런 동역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차원에서 보면 바울 같은 주연급 사역자나, 두기고 같은 조연급 동역자들이나 모두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들의 헌신과 충성은 동일하게 평가될 것입니다. 어떤 모습이든 주님의 나라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라!
바울은 13절에서 또 다른 동역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교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고” 세나는 율법교사라고 했는데, 이 말이 구약율법의 교사라는 뜻인지, 세속적인 변호사를 말하는 것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나’라는 뜻이 ‘제우스의 은사’의 축약형이라면 세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변호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학자출신이었으나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가르침을 받고 고린도에서 사역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웠고, 이어서 아볼로가 와서 그 교회가 자라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누가 더 훌륭한 사역자인가를 가지고 바울파, 아볼로파로 나뉘었습니다. 정작 두 사람은 하나였고, 동역자였습니다.
세나와 아볼로는 순회전도자였습니다. 바울이 쓴 디도서를 가지고 그레데를 방문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도에게 세나와 아볼로를 먼저 보내라고 했습니다. 세나와 아볼로를 어디로 보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바울은 이 두 사람이 순회사역을 하는데 필요한 것을 부족함 없이 채워줄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사역자들의 왕래가 의외로 잦았습니다. 그래서 서신서에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라는 언급이 많습니다. 로마서 12:13입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히브리서 13:1-2입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말라” 여기에서 말하는 손님대접이라는 것이 주로 순회전도자들의 방문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당시는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이 많았고,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이기에 이런 순회전도자의 역할은 매우 컸습니다. 순회사역자들이 목적지까지 갈 때, 가는 도중에 있는 몇몇 교회를 거쳐서 은혜를 나누고, 각 교회는 다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물질적인 필요와 사역에 필요한 것을 공급했던 것입니다. 각 교회의 손대접이 없었다면 순회사역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우리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누구입니까? 그레데 성도들입니다. 세나와 아볼로와 같은 순회 전도자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잘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열매 없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제적인 공헌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말씀은 디도를 통해 교회에 가르치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교회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을 성도들의 마음에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회전도자가 복음의 열매를 맺게 되면 그것은 누구의 열매도 되는 것입니까? 그 사역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열매입니다. 물질적 필요를 채웠던 사람들, 기도했던 사람들, 모두 그 열매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디도는 그레데 성도들이 세속적 직업의 노동과 수고도 가치있는 일이며, 성실하게 일해야 함을 배우도록 하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일도 가치있는 일이며, 우리의 직업도 가치있는 일입니다. 선교사들이 열매를 맺게 된다면 우리도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3. 서로 문안하라!
바울은 15절에서 마지막 인사말로 편지를 마치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과 함께 있는 자들의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함께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는 불명확하지만 바울의 동역자들인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바울에게 또 다른 동역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역을 하는데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레데 성도들에게 바울의 안부도 전해달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레데 성도들이 자신과 동역자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사역자와 성도간에 서로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마음이 맞는 동역자가 있고, 사랑하는 성도가 있는 교회와 목회자는 행복합니다.
바울은 짧은 몇 구절을 통해 사역자의 재배치와 순회전도자들을 위한 부탁, 문안인사, 그리고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축도로 디도서를 마쳤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을 적용하는 원칙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울은 그레데에 아데마나 두기고를 보낼테니 디도에게 빨리 니고볼리로 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사역자들의 재배치를 지시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오늘 본문을 근거로 감리교의 감독제도나 천주교에서 신부와 수녀의 사역지를 발령내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합니다. 농촌교회는 사역자가 없고, 도시만 몰리는 이런 상황에서 중앙에서 적절하게 사역자를 재배치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성경적인 원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이 하나의 사례인지, 규범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규범이라면 하나의 원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규범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례입니다. 사도행전에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제자를 뽑을 때 어떻게 뽑았습니까? 제비뽑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일꾼을 뽑을 때는 제비뽑기를 해야 한다고 하면 이 구절을 규범으로 보고 원칙으로 삼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일꾼을 뽑을 때는 이렇게 선출하라는 말씀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한 사례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원칙보다는 사례가 많습니다. 사례는 원칙이 아니니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역자 재배치와 교회 일꾼 선출은 꼭 이렇게 해야 한다가 아니라,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했는가를 통해서 원칙으로 삼을 만한 것은 무엇인가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원칙으로 삼을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역자 배치에 성도들의 권한은 없고, 감독이나 교단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까? 교회는 교단 선교사들의 재정의 일정부분을 감당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지역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즉 우주적 교회의 일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가 오늘 본문을 통해 찾을 수 있는 원칙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울이 사역자를 재배치하는 것은 그레데 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여러 교회들을 고려했고,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무엇이 유익한가를 생각한 것입니다. 순회전도자인 세나와 아볼로의 필요를 채우는 것도 그레데 교회가 넉넉하기에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기에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너무 개교회 중심적입니다. 자신이 속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내 교회 사랑이 지나쳐서 남의 교회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도 서로 무한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건물 크게 잘 짓고, 좋은 프로그램 만들어 주변 교회 성도들을 흡입하면서도 전혀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물론 저도 목사로서 저희 성도가 다른 교회를 간다고 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돌아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본다면 이 교회 성도든, 저 교회 성도든 한 형제입니다. 우리가 모든 교회와 선교사를 알고 사랑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맡기시고 허락한 교회와 선교사들과는 더욱 깊이 형제의식을 가지고 동역해야 합니다.
저희 교회가 재정의 50%를 밖으로, 해외선교와 지역사회를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교회가 그렇게 해야 하는 원칙은 아닙니다. 건물을 무상으로 제공받는 교회로서 적용한 한 사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적용하는 이유는 내부적으로 넉넉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의식을 가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여러 선교사와 기관을 돕고,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중물 성도님! 마중물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마중물교회만 사랑하는 성도가 되지 마시고, 마중물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됨을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열매맺는 자가 되는 길
딛 3:12-15 / 이한규 목사
한 사람이 열매 맺는 자가 되면 세상은 조금씩 달라지고 공동체도 점차 힘을 얻는다. 사도 바울이 극심한 시련 중에도 선교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열매 맺는 자를 통해 큰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열매 맺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보고 싶은 사람이 되라
바울은 디도에게 아데마나 두기고 중 한 명이 도착하면 급히 니고볼리에 있는 자신에게 오라고 했다(12절). 왜 바울이 아데마나 두기고를 디도에게 보냈는가? 디도가 그레데 교회를 비울 때 둘 중에 한 명이 대신 교회를 돌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디도가 그냥 그레데 교회를 비우면 그 사이에 거짓 교사가 교인을 미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체 목회자까지 보내면서 왜 디도를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한 니고볼리로 오게 했는가? 마게도냐 서북쪽의 달마디아 선교를 위해 함께 기도하며 선교 전략을 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바울에게 디도는 보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존재였다. 이상하게 디도와 함께하면 힘과 위로를 얻고 선교 사역에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보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대상이 되라. 바울 같은 성인에게도 세세히 따지면 허물과 약점이 많다. 함께 긴밀히 지내면 그런 허물과 약점을 보일 텐데 그렇게 보여도 편하면서 충성스러운 사람은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함께하고 싶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큰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처럼 영혼을 헐떡이게 만들기보다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라.
가족이 곁에 있어 달라고 하면 피곤하고 바빠도 힘써 같이 있어 주라. 식당이나 카페에 가자거나 드라이브나 여행을 원하면 귀찮게 여기는 대신 고맙게 여기고 같이 있어 주라.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해 달라는 요구를 잘 들어주려면 건강과 기력도 필요하기에 그것을 위해서도 기도하라. 그렇게 사심 없이 곁에 있어 주려고 하면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풍성한 삶의 열매도 많이 맺힐 것이다.
2. 부족함을 채우려고 하라
바울은 디도에게 선교지로 파송되어 가는 세나와 아볼로의 필요를 채워 부족함이 없게 하라고 했다(13절). 초대 교회 때부터 선교지로 파송되는 사역자의 필요는 후방 교회가 힘써 채워 주었다. 그처럼 사역자의 필요를 채워서 부족함이 없게 하려면 교회와 교인의 재정 능력도 필요하다. 물론 재정 능력이 있어도 인색해서 드리고 나누고 베풀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에 재정 능력과 나누는 심력을 겸비하도록 힘쓰고 기도하라. 왜 경제적인 성공도 필요한가? 교회와 사역자의 필요를 넉넉히 채워서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해서다.
부족함을 채워 주는 삶에는 물질적인 것만 있지 않다. 리더는 팔로워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인내하며 이끌고 팔로워는 리더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인내하며 뒤따르라. 너무 완벽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의 완벽을 요구하지도 말라. 리더가 완벽하게 보이려고 하면 위선과 고집을 부릴 가능성이 커지면서 차갑고 매력 없게 보인다. 리더의 부족함이 보일 때 더 채워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반전의 리더십을 갖추라.
완벽주의 리더십보다 반전의 리더십을 가지고 겸손한 매력으로 사람을 이끌라. 리더가 허점을 보일 때 팔로워가 그 허점을 메워 주려고 하면 리더십은 더 견고해진다. 팔로워가 리더의 부족함을 채워 주면서 리더의 완성과 함께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면 얼마나 복된 관계가 되겠는가? 신뢰관계가 깊다면 남의 부족함을 보면서 오히려 채워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생긴다. 그처럼 서로의 부족함을 힘써 채워 줄 때 좋은 열매가 많이 맺힌다.
3. 좋은 일을 힘써 배우라
바울은 선교 사역자의 필요를 채우려는 일을 ‘좋은 일’이라고 표현하며 그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고 했다(14절). 교회에서의 헌금이나 선교 사역 후원은 적선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에 간접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교회 리더가 노골적인 돈 얘기로 교인들의 주머니를 털어 자기 배를 불리면 결코 안 되지만 헌금하고 후원하는 삶 자체는 힘써 가르쳐야 한다. 그처럼 헌금이나 후원도 좋은 일이지만 그 외에 수많은 좋은 일들을 계속 배우라. 인생은 끊임없이 배우고 성숙해지는 과정이다. 좋은 일도 더 좋게 만들려고 힘쓰라.
유머 중에 수준 낮은 유머가 많다. 타인 감수성을 가지고 유머 수준도 높이라. 단체 경기에서 자기 쪽으로 오는 공이나 선수를 막지 못해 점수를 먹게 하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족구나 배구에서 어떤 선수에게 공이 가면 그 선수 때문에 점수를 먹는다. 그때 유머로 그에 대해 “구멍이야.”라고 한다. 그러면 처음에는 모두가 악의 없이 웃어도 계속 그 소리를 들으면 점수 먹게 하는 당사자는 점차 유머가 아닌 상처로 받아들인다.
구멍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유머로라도 “구멍이야.”라고 하지 말고 “힘내세요.”라고 하라. 계속 격려하면 힘내어 게임에 참여하고 동료 의식이 높아지면서 다른 참여도 잘하고 다른 일도 잘 협조하면서 공동체에 좋은 열매가 맺힌다. 힘을 빼는 수준 낮은 유머를 지양하고 힘을 주는 수준 높은 유머를 지향하라. 유머 쓰는 것 하나도 타인 감수성을 발휘하는 성숙함을 얻도록 계속 자라 가라. 또한 어느 분야에서든지 나이를 거스리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려고 하라.
4. 은혜가 있는 사람이 되라
사도 바울은 편지 말미에 자신과 동역자의 마음을 담아 문안하면서 은혜를 빌어 주는 축복 기도로 편지를 끝냈다(15절). 주일 예배 후 “오늘 말씀에 많이 은혜를 받았어요.”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은혜를 주중에 삶으로 넘치게 표현해 내는 것이다. 은혜가 넘치는 사람을 영어로는 graceful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단어가 실생활에서는 ‘우아한, 품위 있는’이란 뜻으로 변형되어 사용된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사람은 우아한 옷과 명품을 걸치고 고급 차를 타고 우아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가 넘치는 사람이다.
특히 은혜롭게 말하면 더 우아하고 품위 있게 된다. “은혜를 받았어요.”라고 말한 후 저 차원의 언행을 보이는 것은 진짜 은혜 받은 모습이 아니다. 은혜가 넘치면 교양과 도덕과 윤리 문제에서도 수준이 높아진다. 평소의 언행이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이단 교주의 “믿음은 교양이 아니다. 기독교는 윤리가 아니다.”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 바른 성경적인 믿음을 가졌다면 도덕과 윤리에서도 수준이 높아져야 진짜 은혜를 받은 모습이다.
또한 은혜롭게 살라는 말은 기적적인 은사를 많이 보여주라는 말도 아니다. 기적적인 은사를 많이 보여도 교양과 품위가 없고 헌신할 줄 모르고 교회 직분과 자리에 집착한다면 은혜를 받은 모습이 아니다. 교회에서 은혜롭게 나눌 때 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자리와 직분에 집착하지 않을 때 더 자리와 직분이 주어지는 은혜가 있다. 그런 반전의 은혜를 추구하라. 성령 충만을 오해하지 말라. 성령 충만하다면서 은혜롭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면 모순이다. 은혜로운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은혜로운 사람이다.
< 참된 성령 충만을 추구하라 >
예전에 한 교회에 60대 중반의 집사가 등록해 묵묵히 충성했다. 얼마 후 교회에 큰 시련이 닥치면서 소수의 교인만 남았다. 그래도 그 집사 부부는 떠나지 않고 충성했다. 그 후 그 가정의 사업이 무너져 교회에서 1시간 30분 떨어진 시골로 이사 가면서도 그 부부는 교회를 떠나지 않고 한 번도 주일을 어기지 않고 지키면서 충성했다. 그러면서도 매달 헌금을 상당히 했다. 그 헌금을 볼 때마다 담임목사는 기쁘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 헌금이면 시골로 이사를 갈 필요가 없이 교회 근처에 집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집사는 오랜 세월을 묵묵히 교회를 섬겼고 담임목사의 매일의 묵상 글을 7년 이상 하루도 빠짐없이 줄을 치고 문제를 풀어가고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다. 담임목사는 그의 수고가 명예와 자리를 얻기 위한 계산적인 수고가 아닌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오랫동안의 수고에 대해 이 땅에서도 작은 보상을 주고 싶었고 세상을 떠나면 묘비나 납골함에 ‘아무개 장로’라는 명칭이라도 쓰게 하고 싶었다. 그 문제를 위해 그 집사가 교회를 등록하고 10년이 지난 시점부터 장로 피택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렇게 3년쯤 기도하던 어느 날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다. 그 교회가 속한 교단은 목사와 장로의 정년이 없는 교단이었기에 70세가 넘어도 장로 임직이 가능했다. 70세가 넘으면 다른 교단이나 교회에서는 은퇴하기에 보통 장로 피택을 하지 않지만 그 교회 담임목사는 교회에 헌신한 세월이 15년이 넘고 70세가 넘으면 장로 피택 자격을 주고 3분 2 이상의 성도가 찬성하면 피택하라는 마음의 감동을 주셨다. 그러면 그의 장로 피택 제안을 성도들도 기쁘게 동의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교단에 그 의향을 전하자 사무총장도 기쁘게 동의했다. 전 과정이 은혜롭게 되어서 담임목사는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그 의향을 피택 몇 달 전에 그 집사에게 알렸다. 그런데 피택 며칠 전에 그가 말했다. “목사님!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아 나중에 장로 직분을 받고 싶습니다.” 진심인 것 같았다. 담임목사는 그 말을 듣고 그 사양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감동하실 것 같아서 더 기뻤다. 또한 그 모습이 다른 성도에게도 좋은 교훈이 될 것 같아 그 전 과정에서 아름답고 멋지게 역사하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다.
명예심을 버린 최상의 헌신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라. 이 땅의 복과 소유와 명예와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순수하게 교회를 섬기면 이 땅에서도 보상의 때가 오고 혹시 이 땅의 보상이 없다면 천국 보상은 더욱 찬란할 것이다. 그렇다고 천국의 보상을 더 얻겠다는 계산으로 이 땅의 보상을 거부하지는 말라. 어떤 상황에서든지 보상을 얻을 생각은 버리고 더 헌신하려는 생각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더 기억해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