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HnE_JN_nVkI
현종 15년(1674) 7월 초하루. 윤휴(尹?)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목욕재계했다. 정성스레 머리를 감고 몸을 닦았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가묘(家廟)로 올라갔다. 그의 손에는 여러 날 동안 침식을 잊다시피 하면서 작성한 상소문이 들려 있었다. 윤휴는 상소문의 내용을 가묘에 고했다. 그리고 상소문을 밀봉했다. 이른바 비밀 상소인 밀소(密疏)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uBoLoQUCiAQ
가묘에서 나와 아들 하제(夏濟)를 불렀다.
“이 상소문을 대궐에 나아가 올려라.”
윤하제의 가슴은 떨렸다.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지 대략 아는 까닭이었다. 평생을 초야에 은거해오던 부친이 드디어 세상을 향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생 공부하면서 가슴에 품고 있던 뜻이었다. 드디어 그 뜻을 세상에 펼칠 때가 되었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윤휴의 나이 이미 만 57세. 아직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포의(布衣)지만 그 이름만은 천하에 드높았다. 서인 영수이자 산림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에 비길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비록 벼슬은 없지만 거대 집권당인 서인에 맞설 수 있는 학문적 권위를 갖고 있었다. 현종 즉위년에 발생한 기해(1659) 예송논쟁 때 송시열과 맞서자 사방에서 비난이 들끓고, 절교 편지가 잇따랐지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다만 시대를 개탄할 뿐이다.”라고 초연했던 인물이다. 그간 여러 번 벼슬이 내려졌지만 한 번도 응하지 않았던 그가 세상을 향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대의소(大義疏)」였다. ‘큰 의리가 담긴 상소’라는 뜻이다. 밀봉 상소였지만 그 내용이 은밀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급기야 조정 대신들도 밀소(密疏)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_1장 〈요동치는 대륙과 북벌의 희망〉 중에서
『대학』은 『예기』 49편 중 제42편이었던 것을 남송의 정호, 정이 형제와 주희가 따로 떼어내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사서(四書)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일부 글자를 바꾸어놓았다. 원래 『예기(禮記)』의 42편이었을 때는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과 친한 데 있으며(在親民) 지극한 선에 지(止)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였다. 이렇게 원래 ‘백성과 친하다(親民)’로 되어 있던 원문을 정이, 정호 형제와 주희가 ‘백성을 새롭게 한다(新民)’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의 왕양명은 『전습록』 「서애록」에서 주자학자들이 친민(親民)을 마음대로 신민(新民)으로 바꾸어놓았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윤휴도 신민이 아니라 친민이 바르다고 생각했다.… 주자학자들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윤휴는 독서기에서 백성을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 이외의 천하라고 여겼다. 자신과 백성 사이에 계급적 차별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 관점으로 천하 사해의 모든 백성을 한 가정처럼 여긴다는 사해동포주의의 발상이 친민에 담겨 있었다.
_2장 〈주자를 거부하고 진리를 탐구하다〉 중에서
북벌대의를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 사대부들의 이중 처신이었다. 말로는 북벌을 외치면서도 내심으로는 북벌은 꿈도 못 꾸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 처신이었다. 이런 사대부 대신에 윤휴가 주목한 세력이 백성들이었다. “신이 일찍이 생각하기를 지금 사대부들은 그 마음속에 이해가 엇갈리고 보고 들은 것이 지식을 가리기 때문에 의논이나 행동이 본심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민들은 비록 무식해도 하늘이 부여한 성품이 어둡지 않아 지극히 어리석은 듯하면서도 신령하고 정성을 다하면서 신의가 있습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대부 대신에 윤휴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바로 그 백성들이 북벌의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_5장 〈신분제를 해체해야 조선이 살아난다〉 중에서
백골은 죽은 사람의 군포를 아들에게 대신 씌우는 것이고, 아약은 갓난아이에게도 군포를 매겨 아버지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유민은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백성들에게 군포를 거두자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강백년처럼 묘당에 의논하자거나 허적처럼 잠깐 중지하자는 말은 모두 시행하지 말자는 말이었다. 의정부에서는 의논 자체를 하지 않았다. 양반 사대부도 군포를 내야 한다는 당위성을 반대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었다. 기껏 한다는 말이 강백년같이 “유학을 높이고 선비를 기른다.”는 뜻의 숭유양사론(崇儒養士論)이었다. 부자인 양반 사대부가 면세되고 가난한 백성들이 이중, 삼중의 부담을 지는 현실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 윤휴가 주장한 것은 호포제를 바탕으로 한 구산제(口算制)였다. 호포제보다 한발 더 나아간 개혁법으로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은 더욱 심했다. 호포제는 양반 사대부가도 모두 군포를 납부하자는 방안인 반면, 구산제는 양반 개개인의 숫자를 조사해 모두 군포를 내게 하자는 법이었다.
_5장 〈신분제를 해체해야 조선이 살아난다〉 중에서
5월 20일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윤휴가 머무는 서대문 밖 여염집에 사약이 내려졌다. 사약을 마시기 전 윤휴는 필묵을 요청했다. 그러나 금부도사 홍수태(洪受泰)는 거부했다. 마지막 유서까지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윤휴가 남길 말이 두려운 것이었다. 유서 작성도 거부당한 윤휴가 말했다.
“내 주량이 있는데 이 약이 목숨을 끊지 못할까 두렵다. 소주(燒酒)를 가져와야 되겠다.”
사약을 마셨는데도 죽지 않으면 낭패였으므로 금부도사도 소주는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윤휴는 소주를 많이 마신 후 사약을 들고 운명을 마쳤다. 학문과 북벌대의와 백성들의 민폐 제거에 바친 인생이 이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야사에는 윤휴가 사약을 마시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_9장 〈금기가 되어버린 이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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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주자학의 교조에 얽매이지 않았던 자유로운 사상가
윤휴, 일반 독자들에게는 낯선 이름일 것이다. 1617년에 태어나 1680년에 사망한 유학자이자 경세가다. 성장기에 전란을 겪었던 윤휴에게는 특별한 스승이 없었다. 이 때문에 어떤 제약도 받지 않은 채 학문 세계에 몰입할 수 있었다. 주자는 본래 장과 절의 구분이 없었던 『중용』을 33장으로 나누고 장의 끝에 장하주(章下註)라는 이름으로 해석을 붙인 후 다시 130개의 절로 나누었다. 그런데 윤휴는 이런 주희의 구분을 따르지 않고 10장 28절로 나누었다. 윤휴는 『중용 독서기』에서 중용을 「천명(天命)」, 「중용(中庸)」, 「비은(費隱)」, 「행원(行遠)」, 「문왕(文王)」, 「박학(博學)」, 「자성(自成)」, 「성인(聖人)」, 「중니(仲尼)」, 「상경(尙絅)」의 10장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이상 『중용장구』 차례를 이와 같이 교정하였다.”라고 밝혔다. 윤휴가 『중용 독서기』에서 주자의 설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주희와 다른 장절 구분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주자를 절대화하던 서인 세력들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던 것이다. ‘사문난적’이라는 낙인은 훗날 윤휴가 사형당하는 주요한 구실이 된다. 당시는 주자의 학설이 절대적인 이데올로기로 굳어가던 때였다. 특히 송시열 등 서인 세력은 주자학을 통해 신분 질서를 강화하려 했으며 양반 사대부의 특권을 굳히고자 했다. 이러한 시대에 유학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으로 반상을 차별을 뛰어넘으려 했던 윤휴는 서인들에게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말뿐인 북벌에서 행동하는 북벌로
윤휴는 57세가 되어서야 조정에 출사했다. 비록 벼슬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산림山林이었지만 그 학문적 권위만큼은 송시열과 겨룰 정도였다. 초야에 묻혀 있던 그가 정치 일선에 나선 것은 평생 가슴속에 품어왔던 뜻, 즉 북벌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당시 집권층이던 서인들은 겉으로는 북벌을 외쳤지만 속으로는 북벌 불가가 당론이었다. 그들에게 북벌은 군주를 압박하고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공허한 슬로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윤휴는 청나라를 치는 북벌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여겼다. 당시 대륙에서는 오삼계, 상가희 등 삼번의 난이 일어나 혼돈에 휩싸인 상태였고 대만을 장악한 정성공 등 우호 세력도 있었다. 윤휴는 백성들이 주체가 되는 북벌을 통해 조선을 동아시아의 맹주로 만들려 했고, 평민들을 위한 무과인 만인과를 실시하고 전차를 제작하는 등 실제적인 북벌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집권 사대부들은 청나라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고 윤휴의 북벌 플랜을 그저 큰소리치기 좋아하는 사람의 헛된 공상으로 치부했다. 윤휴는 북벌 준비를 위한 구체적인 기관으로 체부(體府)를 설치하고 황해도에서 전차를 만들었지만 이 역시 역모의 빌미가 되었을 뿐이다.
반상의 차이를 넘어 남녀의 차별까지
윤휴는 벼슬을 하지 않은 백두白頭의 신분으로 백성들의 질고를 몸소 함께했다. 그러기에 죽은 사람과 간난아이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군적수포제 대신 양반 사대부들이 군역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호포법과 구산제를 주장했다. 또한 성현의 말씀을 배우는 데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고 여기고 여성들에게도 학문을 가르쳤다. 『효경(孝經)』과 『시경(詩經)』의 「주남(周南)」, 「소남(召南)」 등이었다. 성리학이 남존여비의 이론적 무기로 변해가던 조선 후기에 여성들에게도 경전을 가르친 것이다. 조선 초 권근(權近)은 『시경』 주석서인 『시천견록(詩淺見錄)』의 첫 머리에서 “「주남」은 규문(閨門: 여성의 거처)의 일로부터 시작해 천하의 일에 통달하는 것이요, 「소남」은 천하의 일로부터 말미암아 규문의 일에 근본을 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남」, 「소남」은 여성들에게 삼종지도를 강요하는 책이 아니라 가정사와 천하의 일이 하나임을 말해주는 책이었다. 윤휴는 반상의 차이를 넘어 남녀의 차별까지 넘어서려 한 것이었다.
지금 왜 윤휴를 말하는가?
윤휴는 조선 개혁에 대한 그랜드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윤휴에게 조선은 소변통(小變通), 즉 작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에 가까운 대변통(大變通)이 필요한 나라였다. 그는 평민을 위한 무과인 만인과와 서얼 허통 등을 통해 인재를 길러 동아시아의 맹주가 되고자 하는 북벌을 추진했다. 이러한 그랜드 디자인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윤휴가 주자의 해석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소신으로 학문 세계를 수립한 자유로운 사상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을 보면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진영 논리에만 집착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 모두 대한민국을 개혁할 그랜드 디자인과 정책이 없고 정치인들의 이미지 메이킹에만 주력하는 모습이다. 지금 대한민국을 업그레이드할 그랜드 디자인은 무엇인가? 금기어가 되어버린 조선 개혁가의 삶과 사상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