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천성인지天性人地 자유 율법
이 책의 첫 장에서 고차원 정신세계의 존재로서 자유 율법을 설했지만, 이번 장에서는 인의예지 천성을 가진 天性人地차원에서 자유 율법을 설하고자 한다. 천성인야의 자유 율법이란, 양심의 지시대로 인의예지신을 실천합이다. 누구의 강요와 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실천하고 행함이 자유 율법이다. 성경에 이르기를 '너회는 마지막 때 자유 율법 대로 심판받을 줄 알라'는 구절이 있다. 자유 율법이란 인의예지신의 양심의 법이다. 인의예지신 양심 법으로 사람이 태어났다. 사람의 모든 잘못은 하늘이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양심과 이성이 감시한다.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쁜 감정 생각들을 하늘이 감시하고 신들이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양심이 기록하고 감시하며 마지막 때는 하늘이 심판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재판관이 스스로에 대한 습관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하늘은 속여도 스스로의 양심은 속이지 못한다고 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도 있다. 아무리 숨어서 하는 잘못도 남들은 보지 않지만 자신의 양심은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지켜본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에게 떳떳한 삶을 살아야 한다. 스스로 떳떳하면 남들이 뭐라 해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 우주의 모든 이치는 정당하면 존재하고 부당하면 무너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주에서 발생하는 파동과 기운은 자정하는 힘이 있다. 우주의 속성은 항상 원형의 본질을 지키려 한다. 우주에 태어나는 어떤 개체적 특성도 본질의 원형과 똑같지는 않지만 닮아 가기 위해서는 노력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학설이기도 하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착하다고 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질의 원형이 착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질의 원형은 인의예지를 이름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본성의 본질적 원형이 인의예지 천성이라 할지라도 타고난 각자의 기품氣稟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우주의 메시지는 늘 초의식의 자아로서 스스로에게 본질의 원형을 유지하라고 명령한다. 의식이 깨어나고 영성이 밝아질수록 우주의 초의식적 자아로부터 전해지는 메시지에 반응하고 의식이 닫히고 영성이 흐려질수록 우주의 메시지에 귀를 열지 않고 반응하지 않는다. 우주의 초의식에 반응하지 않는 상태를 양심의 마비라 한다. 양심이 완전히 마비되지 않을 때 사람은 사람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이면서 사람이기를 포기한 삶들이 양심과 이성적 기능이 완전하게 손실된 상태들이다. 우리 몸속에 양심과 이성의 눈이 밝혀져 있음은 누구도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절망적 비극을 초래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사람의 몸속에는 짐승의 마음도 살아있고 신성한 마음도 공존한다. 그래서 인간의 맘속에는 천사와 악마가 함께 살고 있다. 사람은 스스로를 생각할 때 어찌 보면 성인군자 같고 어찌 보면 치졸함의 극치다. 스스로의 마음이 한없이 넓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스스로의 마음이 좁쌀처럼 작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짐승의 마음이 살아나면 천박해지는 것이 인간이요. 신성한 마음이 눈을 뜨면 고귀함이 넘치는 존재가 인간이다. 짐승의 마음은 눈앞의 이익만 생각한다. 신성한 마음은 넓고 높고 멀리 생각한다. 짐승의 마음은 눈앞의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신성한 마음은 인류와 우주를 생각한다. 그래서 짐승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신성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천지의 차이다.
사람들이 짐승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은 싫어하면서 짐승의 생각과 마음은 쉽게 버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신성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희망하면서 신성한 마음을 품고 신성한 언행을 실천함은 더디다. 인간의 본질은 누구나 신성하다. 사람의 몸속에서 더부살이하는 짐승의 의식 때문에 신성한 본질이 감춰지고 묻힌다. 사람의 몸속에 짐승의 의식이 활동한다고 하여 사람의 신성함이 변질되지는 않는다. 사람의 신성함이 병들고 변질되어서 짐승의 의식으로 짐승과 같은 언행을 일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스스로도 아니면서 스스로라고 착각하는 병든 기억의 짐승 의식이 어지럽히는 현상이 사람의 탈을 쓰고 짐승처럼 행동하는 천박함 들이다. 사람의 본질을 진아眞我하고 푸루샤라고도 부른다. 진아는 순수 무결하고 신성하다. 본질의 신성함은 변질되지 않는 보석과 같다. 짐승의 의식으로 짐승과 같은 언행을 일삼는 천박한 삶이라도 인의예지의 실천을 통해 본질의 신성함은 회복된다. 신성함의 회복이 가능하기 때문에 천박한 짐승의 삶에 함몰되어 있는 어느 인류의 삶도 구제가 가능하고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류의 원죄는 아담과 이브가 여호와의 명을 어겨 선악과를 따먹은 죄가 아니라 사람의 몸속에 더부살이하는 짐승의 의식이 원죄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려 주신 이벤트는 인류의 원죄를 씻어서 신성함의 본질을 찾아주기 위해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벤트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인류의 원죄를 벗는 일은 한 번의 이벤트에 의해 가능하지는 않다. 원죄라고 부르는 짐승의 의식은 사람의 몸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그 원죄의 깊은 뿌리가 쉽게 뽑히지는 않는다. 뿌리 깊은 나무라도 바람이 불어서 쉬지 않고 흔들어대면 결국은 깊은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서 넘어지고 만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넘어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뚫듯 흔들고 흔들면 뿌리 깊은 나무도 넘어진다. 우리 몸속의 뿌리 깊은 원죄라도 쉬지 않고 빛담금질로 흔들어대면 결국은 다 뽑히게 된다. 짐승의 의식은 우리 마음속에 쉬지 않고 병든 기억의 쓰레기를 어지럽힌다. 짐승 의식이 어지럽혀 놓은 병든 기억들에 의해 우리 몸의 무의식 공간에서는 쉬지 않고 악한 감정들이 솟아나고 심술보가 솟아나고 집착과 탐욕과 시기 질투심이 유발된다. 우리 맘속을 온통 짐승 의식으로 접령당하면 본질의 원형 진아가 포로 상태가 되어 이성과 양심의 지배에서 멀어진다. 이성과 양심의 지배에서 멀어진 마음은 방종 된 야생마와 같다.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는 고삐가 풀린 채로 함부로 날뛴다. 주인의 말을 듣기는커녕 길러 준 주인을 공격까지 한다. 우리 생각과 마음은 끝없는 이성과 지성의 훈련이 필요하다.
사람은 마음속에 각인刻印된 인식대로 살아간다. 마음속 깊이 새겨진 지각적 의식을 각인이라 한다. 각인된 인식은 마치 삶의 내비게이션과 같다. 각인된 인식은 무의식 공간에 저장되어 있고 무의식 공간에 새겨진 인식대로 삶이 흘러간다. 마음속에 각인된 의식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각인된 의식이 무의식의 공간에 새겨지려면 어떤 계기가 충족되어야 한다. 그 계기는 다름 아닌 처음으로 겪게 되는 감동, 충격, 깨달음 등이다. 감동. 충격. 깨달음 등의 인식이 마음속에 각인되어 새겨지면 좀처럼 그 내용의 기억들이 지워지지 않고 지워졌다가도 문득문득 무의식 공간에서 되살아나곤 한다. 사람들이 마음속에 각인시키고 살아가는 의지들이란 반드시 좋은 인식의 각인만 새겨 두지 않고 나쁜 인식의 각인이나 슬픈 인식의 각인이나 처절한 인식의 각인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기도 한다. 나라를 잃은 자들은 독립의 의지를 각인시키고 살 것이요. 가난하게 살았던 자들은 부자로 살기 위한 의지를 각인시켰을 것이요. 큰 웅지를 품은 자들은 성공에 대한 의지를 각인시키고 살아갈 것이다.
청년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웅지의 각인은 청년의 미래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도구가 될 것이요. 정치인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혁명의 꿈은 국민의 미래를 새롭게 발전시키는 뜻깊은 각인이 될 것이요. 위대한 지도자의 가슴에 새겨진 신천지 건설의 꿈은 인류의 미래를 책임지는 숭고한 각인으로 새겨져 있을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강한 의지의 삶으로 이성적 지혜를 갈망하고 어떤 사람은 방종적인 삶을 살아가기도 할 것이다. 참된 웅지의 꿈을 가슴에 각인시키고 살아가는 자들은 결코 짐승의 의지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처럼 허송세월 보내지 않을 것이며 견디고 참고 기다리는 감인대堪忍待 정신을 발휘하며 순간순간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유 율법의 채찍을마다 않고 쉬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고 각성하며 짐승의 의지에 삶이 유린되지 않도록 앞으로 매진邁進할 것이다. 사람은 왜 사람인가? 약한 것을 불쌍하게 여기는 측은지심으로 하여 사람이요. 잘못을 부끄러워하여 스스로 책망하는 수오지심을 실천함이 사람이요 남을 존중하고 겸손한 미덕의 사양지심을 실천함이 사람이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분별력을 가진 시비지심으로 인하여 사람이 된다. 그중에서 인의예지人義禮智 넉 자 중에 믿을 신信이 으뜸이라. 항상 성경지심으로 사람의 할 도리를 다함이 사람중에 사람이 되는 자유율법인自由律法人, 곧 이러한 인의예지신 하늘 오적五賊을 가슴에 품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사람의 본질 원형을 잘 지켜 신성한 진아를 회복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아무리 짐승의 의지가 떠올라 신성한 자아를 유린하고 병든 기억들로 마음을 어지럽힌다 하여 마음속에 고이 갖추어져 있는 그 순수 무결의 참 자아가 훼손되고 변질되고 병들어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속의 짐승 에고를 몰아내고 신성한 자아가 마음속을 온전히 점령하고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하늘이 물려주신 본질성을 바르게 자인시키며 누가 시키고 누가 권하여 양심의 자유 율법을 실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양심의 자유 율법을 좇아 행함이 성인군자로서 올바른 실천의 방법일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법을 제정함은 천성모독이다. 사람이 사람의 법에 구속됨은 자아모욕이다. 사람의 본성은 천성인야天性人也로서 사람의 마음이 인심기야 人心機也로서 사람의 신분은 본래 하늘과 땅 그 누구에게도 구속받고 구속당하며 살아갈 신분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 천권天權이 존재하니 사람의 타고난 천권이 자유 율법이다. 천권을 부여받고 세상에 태어난 인간들은 인의예지신 천성인야天性人也의 자유 율법을 실천하며 양심의 지시를 받아 스스로 분별심으로 시비지심을 실천함이 인간천권人間天權이다. 흔히들 양심껏 살아가는 사람을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남이 권한다고 바르게 살고 남이 권하지 않는다고 그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천성인야天性人也 자유 율법을 실천하며 짐승의 길이 아닌 천권의 길을 살아야 할 것이다.
마음의 향기香氣를 찾아서 2권 중
도선당 저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