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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12월 13일, 정문부는 6진 순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경원으로 가다가 종성의 부계리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정문부는 그 마을이 사통오달하여
여진족 도둑이 지나가는 요충지라고 판단하여
온성,종성,행영(경성)에서 각각 진군 50명을 뽑아서
부계리 3개 방면에 각각 매복시켰습니다.
1593년 1월 15일, 온성판관 이눌과 행영 복병장 토병 이운로와
종성 복병장 토왜군 공 1등 급제 강언수가 보낸 공문이
정문부에게 도착 했습니다.
공문의 내용은 1593년 1월 7일 온성 부계리에서 벌어진
전투들에 대한 것 이었습니다.
그날, 수많은 여진족 도둑들이 온성 진군이 매복한 곳으로
에워싸며 쳐들어왔고
또한 100여명의 여진족들은 행영과 종성 진군이 매복한 곳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때 온성 진군은 맹렬히 활을 쏴서 많은 여진족 도둑들을 사살하였고
행영과 종성의 진군은 여진족과 접전을 치루었습니다.
조선군의 맹렬한 공격에 여진족은 모두 패하여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온성 진군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여진족 도둑들을 추격하였고
행영과 종성의 진군은 힘을 모아 추격하면서
여진족에게 화살을 쏘아댔습니다.
거기에 신형 등 또다른 조선군이 때에 맞추어 추격하여
여진족들을 쳐서 목을 베어버리고
잡혀가던 조선인들을 빼앗았습니다.
이날, 종성 진군 소속 토병 박언주와 오득침이
각각 여진족 1명씩 목을 베어버리고
말 안장 끼운 여진족 말 2필과 활 1장, 화살 9대, 비단 칼집 1벌 등을
노획 하였습니다.
또한 행영과 종성의 진군은 잡혀가던 남녀 33명과 말 1필,
큰 가마와 솥 각각 2개 등
도둑들이 약탈했던 물품과 조선인들을 되찾았으며
예전에 여진족에게 사로잡혔다가 배신하고 여진족에게 합세한
역졸 박세정과 김억수를 추격하던 도중에 사로잡아 종성에 가두었습니다.
이때 조선군의 손실로는 온성 통사(통역관) 도막동이
화살에 맞아 죽은 것이 전부 였습니다.
정문부는 이운로와 강언수가 일본군을 치려고 의병을 일으킬 때에
제일 먼저 호응했다고 하여 그 공로로 안릉 참봉직의 공명첩을 발행하였고
신형 등의 공로를 포상할 것을 장계를 통해 건의 하였습니다.
1월 12일, 정문부는 길주와 임명의 전투와 6진 순행에 대한 장계를
지원병 공 1등 지방 사람 급제 차응린을 통해 순찰사에게 보냈습니다.
이무렵, 함경감사 윤탁연은 정문부를 계속 미워하여
그가 북병사의 지휘로 인해 마음대로 북행 순시를 한다고 추고 하였습니다.
1592년 12월 14일, 비변사가 정문부에게 공문을 보내니
그 내용은 평사가 대장의 명령을 행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는 윤탁연이 조정에 함경도의 장수들이 월권을 한다는 장계를 보내서
조정이 함경감사의 말을 믿고 장계를 보낸 것 이었는데
이때 윤탁연이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노리는 상대는 바로 정문부 였습니다.
한편, 정문부가 대장 직에서 해임된 이후에
일본군과 대치하는 함경도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정문부의 공적을 알고 있었던 함경도 군사들과 백성들은
정문부가 출세하리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가 대장직에서 해임되자 그들도 분하게 여기고
자신들의 공 또한 인정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군중에서 속속 떠났습니다.
거기에 윤탁연은 함경감사로서 함경도 조선군을 장악하려고
함경도 군사 지휘관들을 일일이 간섭하고 공문을 남발하였고
또한 각 진의 장수들을 바꾸고 진장에 2,3명 씩 중복 임명을 하여
장수는 본직을 알지 못하고 군졸들은 지휘관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인해 조선군은 크게 줄어들었고
윤탁연은 1592년 12월 29일에 정현룡을 대장 직에서 물러나게 하여
겸절도사로 전임하여 6진 순행 하게 하고
경원부사 오응태로 하여금 대장 직을 맏게 했지만
악화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무렵 함경도에 숨어있던 반민들이 다시 틈을 노리고
일본군은 다시 활개치기 시작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윤탁연을 지지하던 사대부들 마저 위협을 느껴
윤탁연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윤탁연은 잘못이 자신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염려하여
마침내 정문부를 다시 대장으로 임명시켰습니다.
1593년 1월 13일, 정문부에게 함경감사 윤탁연의 공문이 도착했습니다.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오응태 대장을 바꾸고 전 평사로써 다시 대장에 정했다.]
이리하여 정문부는 다시 조선군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정문부가 조선군을 살펴보니
1월 10일 오응태가 보낸 공문에
전 대장 정현룡이 겸절도사로서 6진의 정예 병사 100여명을 데리고
6진으로 떠났다고 하여
부족한 조선군의 군세가 더욱 줄어져 있었고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일단 정문부는 1월 16일에 종성 부계리 전투에 대한 보고와
함경도에서 과거를 치르자는 건의를 장계에 써서
윤탁연에게 보냈습니다.
1월 18일,정문부는 길주성 밖 10리 지점인 다신리에 있는
우위장 한인제의 군중에 가서
좌위장 유경천, 중위장 오응태 휘하의 병사들도 불러모아 위로한 다음,
그들을 먹여서 사기 진작 하였습니다.
정문부가 다시 대장에 임명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군중을 떠났던 군졸들이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이후 정문부는 다신리에 머물변서 길주성과 영동 방면의 일본군을 살펴
대응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단천군수 강찬이 직접 다신리의 정문부에게 찾아와 말하길
[단천에 있는 적이 마음대로 횡행하는데
우리 군사는 모두 보병이라 겁을 내어
먼저 무너지므로 손을 대지 못하겠소.
평사의 휘하 기병들을 나누어 주어
단천의 일본군을 향해 달리며 쏘는게 어떠하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정문부는 휘하 장수들과 단천의 일본군을 치는 것에 대해
논의 하였습니다.
단천은 길주나 영동 보다 남쪽에 있고
마천령 북쪽에 위치한 곳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정문부의 군사들은 길주와 영동의 일본군을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수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고
군대를 남쪽에 파견하는 것은 불편한 처사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때 정문부가 생각하길
`길주의 두 적이 형세가 꺾여 머리를 움츠렸으니
앉아서 강한 군대를 그대로 쉬게하면서
한 나라 한 도의 적을 치지 않는다는 것은 사리에 안맞는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여 마침내 단천의 일본군을 섬멸하기로 결심 했습니다.
1월 19일, 일본군 100여명이 길주성 남문 1마장(500~600m)에 나타나
진을 치고
일본군 장수가 휘하 기병 2기를 데리고 남쪽으로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1마장을 더 가다 이번엔 기병 2기를 뒤에 두고
혼자서 말타고 1마장을 더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복병장 원충서가 직접 기병 10여기와 함께
근처에서 잠복하여 망을 보고 있었습니다.
원충서는 일본군 장수가 혼자 말을 타고가자
휘하 기병들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일본군 장수에게 달려들었고
일본군 장수과 그가 탄 말은 이에 놀라서 허둥지둥 하다가
일본군 장수가 말을 제어하지 못하고 떨어지니
원충서가 그를 활로 맞추고 종성갑사 신수가 목을 베었습니다.
원충서와 그의 부하들은 이에 멈추지 않고 일본군에게 활을 쏴서
보병 1명을 맞춰 거꾸러뜨렸고
성 밖에 진을 치던 일본군은 이에 기겁하여
쓰러진 병사을 메고 성 안으로 도망쳤습니다.
이날 원충서는 일본군 장수의 목 이외에도
그가 입었던 비단옷 3벌, 일본도 1자루, 비단 안장,
가죽 안장, 말들을 노획하였는데
정문부는 이것들을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편 정문부는 날랜 기병 200기를 뽑고 그들을 4대로 나누었습니다.
제 1대는 구황, 2대는 박은주, 3대는 인원침, 4대는 고경민이
각각 50기의 기병을 지휘하게 하고
1월 20일에 그들을 다신리에서 출격시켰습니다.
이들은 산길을 통해 영동을 돌아서 단천으로 나아갔고
1월 22일 단천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날인 1월 23일 아침, 구황이 이끄는 1대가 성 바로 밑까지 나아가서
일본군을 도발하였습니다.
이에 일본군은 이미 여러번 이긴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조금도 꺼리지 않고 성문을 열었고 일본군 200여명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조선군을 치니 조선군은 도주하였고
이때 피로한 말을 타고 있던 단천 기병 2명이 일본군에게 죽게 되자
일본군은 더욱 승리한 기세를 타고 조선군을 끝까지 쫓아왔습니다.
이리하여 일본군이 조선군을 쫓아 단천성에서 20여리 떨어진 곳까지 오자
매복하고 있던 기병들이 사방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미 구황이 단천성 밑에서 도발하던 아침에
나머지 기병들이 이 지점에 도착하여 매복하고 있었던 것 이었습니다.
구황의 기병은 뒤돌아 나머지 3대와 함께 한꺼번에 돌격하여
그들의 앞을 막거나 그들의 허리를 자르거나 그들의 뒤를 끊으며
일본군을 사냥하였습니다.
단천군수 강신이 요청했던 대로
조선군 기병들은 화살을 빗발치듯이 쏘며 일본군을 죽여나갔고
일본군은 당황하여 조총을 난사했지만
급한 마음에 발사하는 조총의 철환들은 모두 빗나가기만 했습니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다시 20여리에 걸친 도주를 해야 했고
그들을 조선군 기병들이 집요하게 활로 착실히 쏴죽이며
성 밑까지 추격하니
최소한 백여명 이상 일본군이 사망하고
단천성 안으로 불과 30여명 밖에 안되는 일본군이 간신히 들어갔는데
모두 조선군에게 화살을 맞은 상태 였습니다.
이날, 정문부의 조선군 기병들이 일본군을 화살로 쓰러뜨렸고
단천 보병들은 그들의 뒤를 쫓으며 목들을 베어가니
나중에 4대가 일본군의 수급을 벨때,
1대는 21급, 2대는 14급, 3대는 15급, 4대는 11급을 베어
조선군 기병이 노획한 수급은 모두 61급에 이었습니다.
또한 각종 군수물자들도 노획했지는데
이때 정문부는 조선군중에 물자가 부족하다 하여
그것들을 군의 상용품으로 쓰게하고
다만 예전에 비변사에서 공문을 통해 조총 진상을 요구하여
단천 전투 이전에 노획한 조총 20대를 보냈다가
이번에 또 조총 20대를 장계와 함께 보내게 하였습니다.
또한 이무렵 길주목사 정희적이 정문부에게 통보하여
길주 백성 사노비 사랑금이 일본군 1급을 베었고
복병군 윤희 또한 1급을 베었다고 하며 목을 보내왔고
원충서도 통보를 보내어 부령 정로위 차덕홍이
일본군 1급을 베었다고 하여 목을 보내니
정문부는 도합 65급의 일본군 목을 확보하여
1593년 1월 27일에 길주와 단천의 전투에 관한 장계를 써서
함경감사 윤탁연에게 보냈습니다.
이외에도 정문부의 조선군은 가부와 임명 두 곳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기고 전공을 세웠지만
정문부는 벼슬과 상은 한정이 있고 왜놈의 귀는 끝이 없는데
조정의 은혜 베푸는 것이 난처한 바 있으리라 생각하여
이 전투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출처:농포집(권 3~7)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