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철수 리를 비롯해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한국계 이민자들의 석방 운동에 앞장섰고 많은 언론인들과 활동가들에게 멘토 역할을 한 한국계 미국 언론인 K W 리가 96세를 일기로 세상과 작별했다고 로스앤젤레스(LA) 타임스가 15일(현지시간) 전했다. 지난 8일새크라멘토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연사로 숨을 거뒀다.
고인은 지난 1958년 찰스턴 가제트에 입사하면서 미국의 메이저 주류 신문사에서 일하는 최초의 한국계 이민자가 됐다. "아시아계 미국인 저널리즘의 대부"로 통하며 그는 미디어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더 많이 눈에 띄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딸 다이애나 리건은 "우리 아빠는 항상 사람들의 배경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또 친구와 지인들에게 그들의 가족사와 가계에 대해 열심히 묻곤 했다"면서 "그는 진정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고인은 웨스트버지니아주 작은 마을들의 빈곤과 부패, 새크라멘토에서 세금이 잘못 쓰인 사례 등을 심층 보도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악명 높았던 갱 단원을 살해한 철수 리 사건을 탐사 보도했다.
리는 일간 새크라멘토 유니언을 위해 6개월에 걸쳐 취재해 철수 리를 "미국화란 이름으로 소년을 삼켜버린 정교하게 비열한 시스템에 의해 배반 당한, 곤경에 빠진 젊은이"로 묘사한 프런트 페이지 기사를 두 차례나 썼다. 그의 두 번째 기사는 철수 재판 과정의 실수들을 들여다 보며 그에 대한 유죄 판결에 의문을 갖게 했다. 거의 동시에, 철수 리는 옥중에서 두 번째 살인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재판부는 유죄 판결과 함께 사형을 언도했다. K W 리의 1978년 차이나타운 기사는 범아시아계 미국인 운동으로 오인받을 소지에다 철수 리 방어위원회를 발족시키는 계기가 됐다. 결국 철수 리는 1982년 무죄 방면됐다.
K W 리가 철수 사건에 대해 쓴 기사는 100건이 넘었는데 새크라멘토 유니언의 스타트업 기업인 코리아타운 위클리 인 LA를 통해 본사가 그의 스토리를 쫓게 만들었다. 이 신문은 미디어에 의해 공평하게 다뤄지지 않는다고 느낀 한국인들에 대해 쓰는 통로가 됐다.
에미상을 수상한 다큐멘터리 '프리 철수 리'를 공동 연출한 줄리 하는 고인이 철수와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 다 한국 이민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인생 경로는 상당히 달랐다.
줄리 하는 철수 사례가 리 기자의 한국인 정체성을 각성시켰는데, 그는 그 이야기를 취재하는 일을 가장 위대한 저널리즘 업적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그 다큐는 지난해 에미상 역사 다큐 부문 상을 받았다.
줄리 하는 1990년 여름 고교 졸업생으로 코리아 타임스 미주판의 인턴 기자로 고인을 처음 만났는데 열정 넘치고 시끄러운 기자였다. 그는 툭하면 F로 시작하는 욕설을 내뱉고 한 번은 너무 심하게 웃다가 의자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자주 갑작스럽게 움직여 그녀 같은 젊은 기자들이 붙들면 밀어내곤 했다.
고인은 1928년 6월 1일 개성에서 일곱 자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한국 이름은 이경원이었다. 부친은 가난한 행상인 줄로만 알고 자랐다. 작고하고 나서야 부친이 일제에 항거하다 옥살이를 할 때까지는 상류층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리는 1987년 아시아계 미국인 기자협회의 평생공로상을 맨처음 수상했으며, 1994년 프리덤 포럼의 프리 스피릿상을 받은 첫 아시아계 미국인 기자가 됐다.
그의 미국 내 여정은 20대 초반이던 1950년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과 일리노이 대학에서의 저널리즘 연구에 매진하기 위해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찰스턴 가제트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아내 페기 플라워스를 만났는데 그녀는 찰스턴 종합병원의 응급실 간호사였다. 그는 지방정부의 부패를 폭로하는 기사를 썼다. 한 시리즈에서 그는 애팔래치아 사람들의 삶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힘들게 싸우는 가족과 나흘을 지내기도 했다.
1970년 그가 지금은 폐간된 새크라멘토 유니언의 심층취재 팀장으로 일하기 위해 왔을 때 그는 이미 끈질긴 취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 신문의 라디오 광고에는 “K W 리는 관료제를 파고, 조사하고, 씨름하며 미지의 세계에 잠입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LA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한국인과 흑인 거주자들 사이 공동체를 구축하는 일을 추구했다. 코리아타운 위클리를 접은 뒤, 그는 코리아 타임스 미주판을 운영했다. 1992년 4월 로드니 킹 구타 사망으로 인한 LA 폭동이 일어난 뒤 리는 간 손상으로 입원했을 때도 기사를 다듬고 사설을 집필했다. .
그는 다른 인종의 매체들과 파트너를 맺었고 LA 센티널과 기사를 교환했다. 그의 작업들은 시민권 투쟁과 깊숙히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그에게 일제 점령 치하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때 압제받는 사람들은 서로를 강하게 결속시키는 "텔레파시" 같은 것이 있다고 믿었다고 했다.
고인의 딸 소니아 쿡은 부친이 희생과 상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말했다. K W 리 센터의 리더십 연례 갈라가 열릴 때마다 그녀는 부친이 LA 폭동 와중에 코리아 타운 동네를 사수하다 살해된 18세 소년 에디 리의 부모를 발굴한 것을 두고 "그는 누구라도 그들이 견뎌온 희생과 상실을 절대 잊지 않도록 그 일을 해냈다"고 연설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