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는 원제 ‘노르웨이의 숲’으로써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유명해진 까닭도 아마 이 상실의 시대라는 작품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 소설 이후로 한국에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입지는
갈수록 넓어졌고, 요즘도 신작이 나왔다하면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보증수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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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버린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 ‘버닝‘이란 영화를 본 후 ’상실의 시대‘가
궁금해졌고 다시보기를 했습니다. 후기를 기록해 놓으면 가끔씩 시간벌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예주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에
대해서 조금 알면, 상실의 시대가 왜 그런 분위기로 써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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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가 일본에 팽배하던 시절, 그는 서구 문화에 굉장히 익숙했습니다.
더욱 즐겼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체는 굉장히 서구적으로
깔끔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가집니다. 더불어 허무함이 문체를 감싸 그의 작풍을
'고독'으로 하는 것이 맞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간혹 들려오곤 합니다. 그는 시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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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개인의 인생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작가 중 하나입니다. ‘상실의 시대’는 역시
영화보다는 책이 더 유명합니다. 영화 자체는 나온 지 얼마 안 되었고, 그렇게까지
평이 좋았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책 자체의 줄거리를 찾아보자면 이렇습니다.
시작은 와타나베라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상실의 시대 스토리 라인은 이 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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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와타나베의 1인칭 시점으로써 그가 만나는 기즈키, 나오코
그리고 미도리와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삼각관계식으로 이루어져 가는
그들의 사랑은 와타나베가 30대가 될 때까지 이어집니다. 분명 사랑이야기이건만,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무언가 가득하고 기름진, 그런 긍정적인 감정으로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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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고 볼 수 없는 이미지들입니다. 와타나베는 무언가 텅 비어있습니다.
한 명의 여자로는 끝나지 않는 그의 연애생활. 질투와 고독, 미움까지 그런 허무한
감정들을 망라하여 집어넣은 것이 바로 ‘상실의 시대’의 줄거리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읽고 같이 고독을 느끼며, 자신이 느꼈던 고독에 공감하며 보는 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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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시대에서 상처가 많은 이들을 대변하는 그런 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실의 시대를 너무나도 좋다며,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매일같이 상실해가는 젊은이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매일같이 얻어가는 것을 잃어가는 그들. 허무한 나날 가운데 사랑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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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 조금 고인 자리는 썩어버리지 않을까?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많은 이들이 공허하고 상처받았다는 사실인데, 이런
사회현상이 그렇게 썩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걱정되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상실의 시대, 그 줄거리들을 보다보면 이런 명대사들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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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나는 아무데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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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심금을 울리는 명대사들은 상실의 시대 한가운데 살고 있는 와타나베의
상실감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이런 상실의 시대의 줄거리와 명대사들을 살펴
보다보니, 나 역시 허무해지고 무언가 없어진 뜻한 상실감에 굉장히 우울해지고
기분이 착 가라앉습니다. 그렇게까지 질질 짤 정도로 슬프지 않지만,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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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해서 진득하게 나를 괴롭히는 무언가보다 더 힘든 감정이라고 생각됩니다.
매일같이 이런 허무감을 무시하며 살아왔는데, 그것을 일깨워 사회의 한 면을
콕콕 찌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들. 모두들 가득 찬 자신을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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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실은 어떻게 치유하는 것일까? ……등대(燈臺)에……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
하여야 한다.
2019.2.6.wed.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