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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초의 성공으로 야간전투기 부대의 사기는 고양됐다. 베를린 폭격 시 영국군 폭격기의 엄청난 손실 중 대부분은 야간전투기에 의한 것이었고 해리스는 결국 폭격을 포기했다. 하지만 무차별 폭격만이 빠르게 전쟁을 끝내는 방법이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었다.
영국 폭격기 부대는 마지막 베를린 폭격 이틀 후인 3월 26일 밤 705기를 동원해서 루르지방의 에쎈을 폭격했다. 중부 독일에 대한 폭격을 예상하고 야간전투기를 집중시킨 루프트트바페에게는 기습이었다. 영국 폭격기 부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정확한 선도기의 유도에 의해 에쎈에 상당한 피해를 안겼다. 야간전투기의 손해는 20기에 달했고 폭격기 격추는 9기에 불과했다. 자신을 회복한 해리스는 4일 후인 3월 30일 밤 나치의 정치적 수도이고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뉘른베르크를 노렸다. 랭카스터를 주력으로 하는 795기의 폭격기가 집중됐는데 위장공격으로 49기의 핼리팩스가 헬리고란트에 기뢰를 부설했고 모스키토는 아헨, 쾰른, 카쎌의 야간전투기 부대 기지를 습격했다.
루프트바페는 RAF의 무선통신을 모니터해서 대규모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영국 폭격기 부대 출격 후 독일 레이더는 진로를 예상해서 프랑크푸르트와 본 부근에 야간전투기를 집결시켰다. 윈도우가 살포됐지만 독일 지상 관제소는 폭격기 진행 방향을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큰 효과가 없었다. 독일 신형레이더인 SN-2는 윈도우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그날은 보름달이어서 폭격기의 위치는 육안으로도 파악 가능했다.
RAF의 기상 정찰기는 진로에 폭격기를 숨겨줄 수 있는 구름이 없다고 보고했지만 해리스는 공격 강행을 명령했다. 폭격기들이 벨기에-독일 국경을 통과 했을 때 첫 번째 야간전투기 부대가 나타났다. Ⅲ./NJG1의 마르틴 드레베스 대위는 적기 50m 아래로 접근하면서 쉬래게 무직을 발사해 첫 번째 랭카스터를 격추했다. 구름을 몰아낸 바람은 폭격기 부대를 분산시켰고 차가운 날씨 속에 몇몇 폭격기들은 뚜렷한 비행운을 남겨서 그들의 위치를 폭로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 한시간 동안 랭카스터 41기와 핼리팩스 18기가 격추됐다. 쉬래게 무직은 굉장한 위력을 발휘해서 대부분의 폭격기 승무원들은 공격 받고 있는 것도 모르고 당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날 가장 큰 전과를 올린Ⅰ./NJG6의 마르틴 벡커 중위는 쉬래게 무직이 부착되지 않은 Bf110을 몰고 23:43분 마인츠를 이륙해서 지상 유도로 폭격기群에 침투했고 적의 우측 하부에서 접근하다가 기수를 쳐들고 사격하는 방법으로 6기를 격추했다. 폭격기들은 공격도 시작해보기 전에 80기를 잃었다. 512기가 천신만고 끝에 뉘른베르크에 도착했지만 정작 도시 상공에는 구름이 덮여서 폭격 효과는 미미했다. 폭격기들이 돌아갈 때는 재급유를 받은 야간전투기들이 다시 그들을 기다렸고 벡커 중위는 자르브뤼켄 상공에서 7기째를 격추했다. 벡커의 기록 중 1기만이 힘멜베트 전술에 의한 것이었고 나머지 6기는 자메자우 전술이었다. 이날 밤 영국 폭격기 부대 손실은 95기, 9기는 대파되서 귀환 해 하루의 전투로는 가장 큰 피해를 기록했다.
NJG1 제3비행대장인 마르틴 드레베스(좌)와 그의 Bf110
한편 1944년 3월 이후에는 폭격기 부대들이 프랑스와 벨기에의 철도, 군사시설 등 임박한 상륙을 앞두고 전술목표 공격에 동원됐다. 독일에 대한 공격은 줄어들었기 때문에 Ⅱ.,Ⅲ./NJG1, Ⅰ., Ⅲ./NJG5가 임시로 프랑스로 전진 배치됐다. 1944년 3월 3일 346기의 랭카스터가 파리 서쪽의 독일기지를 폭격했을 때 통신 문제로 폭격기 도착이 늦어졌고 야간전투기부대가 집결할 시간을 허용했다. 폭격기 42기가 격추됐고 8./NJG4의 헬무트 베르그만대위는 하루밤에 5기를 격추했다.
골치아픈 야간전투기 세력 제거를 위해 RAF와 USAAF는 정기적으로 야간전투기 부대 기지를 습격하고 있었고 이 공격은 야간전투기 부대를 상당히 위축시켰다. 모스키토는 기지를 폭격하거나 기총 소사했고 야간전투기 이착륙 순간에 기습했다. 낮에는 연합군 전투기들이 상공을 장악하고 있었다. 야간전투기는 그전에는 비교적 안전했던 낮에 훈련 비행하다 이런 공격으로 피해를 입는 사례가 빈발했다. 무거운 야간전투기가 단발전투기를 격추 한 드믄 사건도 있었다. 1944년 4월 29일 낮에 6기의 스피트파이어가 네덜란드의 데엘렌 기지로 접근중인 Bf110 야간전투기를 습격했다. 이 전투기는 다름 아닌 NJG1 지휘관인 톱에이스 한스 요하힘 얍스소령이 타고 있었고 그는 도망치는 대신 기수를 스피트파이어에 정면으로 향하면서 반격해서 2기를 격추했고 남은 스피트파이어의 공격에서 빠져나와 불시착하는데 성공했다.
신형 레이더 기밀누설
1944년 7월초 RAF가 전자전 분야에서 야간전투기 부대의 우위에 서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7월13일 새벽 4:30에 7./NJG2의 맥클 병장이 조종하는 Ju88G-1이 북해에서 기뢰를 부설하는 스털링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한 후 항법 착오로 영국의 우르리지 비행장에 손상없이 착륙한 것이다. 이 야간전투기에는 최신 SN-2, 플렌스부르크, 낙소스 레이더가 모두 탑재돼 있었고 RAF는 이를 분석하여 윈도우가 효과가 없었던 까닭 등 여러 가지 비밀을 알아냈다. SN-2의 주파수도 밝혀져서 이에 대응한 레이더를 개발이 가능해졌고 SN-2 교란의 효과가 뛰어난 새로운 윈도우도 개발됐다.
1944년 초에 도입된 낙소스는 영국 폭격기에 탑재된 H2S 레이더의 전파를 역탐지하는 효과적인 장비였다. 해리스는 대응방안으로 H2S가 목표에 근접하기 전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플렌스부르크는 영국폭격기 후미에 장비된 후방 경보장치 모니카의 전파를 역탐지하는 장치였다. 이들 레이더의 분석이 끝난 1944년 9월 모니카는 폭격기에서 제거됐다. 우연한 사건으로 RAF는 독일 신형레이더 3종의 비밀을 한꺼번에 알아내서 야간전투기 요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944 후반 이후의 전투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후 연합군 지상부대의 진격으로 루프트바페의 서부유럽 일선 경보시설들이 상당 수 연합군 점령지가 됐고 경보 시스템은 효과가 반감됐다. 폭격기들이 점령지에서 출격하기 시작하면서 야간전투기들이 대응할 수 있는 시간도 짧아졌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전 독일군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연료 결핍이었다. 소련군의 진격으로 독일이 많은 양을 의존하고 있던 루마니아의 플로에스티 유전지대를 상실했고 미국공군은 독일 합성석유공장을 맹폭격했다. 또한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의 야간전투기 부대 전진기지가 차례로 연합군 손에 넘어갔고 9월말까지 이곳을 기지로 했던 야간전투기부대는 독일이나 덴마크로 후퇴해야 했다.
기종 | Ju88C | Ju88R | Ju88G | Bf110G | Do217N | He219 | Ta154 |
수량 | 92 | 29 | 618 | 574 | 54 | 32 | 1 |
1943년 초에 모습을 나타낸 가볍고 빠른 모스키토 목제 야간전투기의 습격이 1944년 여름부터 증가하고 있었으므로 1944년 말 독일은 모스키토 요격부대를 창설했다. 쿠르트 벨터 소위는 Me262A-1a 단좌전투기를 사용해서 시험적인 야간 요격전을 실시했다. 소위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수의 정예 조종사로 구성된 ‘벨터부대’가 1944년 11월 2일 편성됐고 이는 후에 10./NJG11이 됐다, 이 부대는 주간형과 같은 Me262를 사용해서 베를린 상공에서 빌데자우 전술을 구사했고 모두 42기의 모스키토를 격추했다. 1945년 3월에는 SN-2와 낙소스를 장비한 본격적인 야간전투형인 복좌 Me262B-1a/U1 2기가 부대에 배속됐다. Me262 야간전투기 부대는 규모가 작았고 야간전투기 형식도 너무 늦게 실전에 도입돼서 전쟁의 결과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전후 영국군의 손에 들어간 야간전투형 Me262
한편 독일 산업의 항공기 생산량은 1944년 말까지 계속 증가해서 야간전투기 부대 보유기수는 오히려 1,355기로 최고에 달했다. 하지만 연료 부족이 너무 심각해서 기수 증가는 전투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소수의 경험많은 조종사들만이 비행 허가를 받고 출격하는 지경이 됐다. 피해도 상승해서 1944년 12월에는 1,070회의 작전에서 66기를 격추한 반면에 114기를 -주로 적 야간전투기에게- 상실했다. 1945년 1월에는 352기를 격추했지만 94기를 잃었다. NJG4의 사령관인 쉬나우퍼는 2월 21일 도르트문트 상공에서 하루밤에 9기를 격추하면서 분전했지만 이런 작은 승리와 관계없이 드레스덴, 폴츠하임, 보름스가 차례로 잿더미로 변했다.
1945년 3월 3일 야간전투기 부대에게 영국을 기습 공격하라는 명령이 시달됐다. 작전명 기젤라는 100여기의 야간전투기가 3파로 나뉘어서 도르트문트 운하와 카멘 합성석유 공장을 폭격한 영국군 폭격기들이 영국의 비행장에 귀환하는 순간에 기습하는 작전이었다. 야간전투기 부대가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보여준 이 작전으로 22기의 폭격기를 격추했지만 야간전투기 33기를 잃으면서 실패했다. 이어서 2회의 규모가 좀 줄어들은 비슷한 작전이 실시됐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야간전투 사상 최고의 에이스
하인츠 볼프강 쉬나우퍼는 1922년 쉬투트가르트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성공한 와인 유통업자였기 때문에 가정은 유복했다. 어릴 때부터 공부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고 군사 분야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16세에는 나치에서 설립한 엘리트 청소년 정치교육조직의 일원이 됐고 학업과 동시에 뷔르템부르크의 군사지도자 교육을 병행했다. 졸업 후 루프트바페의 장교 후보생으로 포츠담에서 글라이더 교육을 받았고 과정을 이수한 후인 1939년 11월 15일 루프트바페에 입대했다. 1940년 8월에는 쌍발기 조종 훈련을 받고 1941년 4월 1일 소위로 임관했으며 Bf110을 이용한 야간 계기비행과 구축기 조종 훈련을 마쳤다. 훈련이 마무리 될 무렵 4년간 그의 레이더 조작수가 되는 프리츠 룸펠하르트와 함께 야간전투기 부대에 지원했다. 그들은 탐조등과 협동으로 적기를 추격하는 훈련 등 야간전투 훈련을 마치고 1941년 11월 벨기에 생 트롱에 있는 실전부대 Ⅱ./NJG1에 배속됐다.
그는 1942년 6월 2일 첫 격추를 시작으로 1942년 중 7기를 격추했다. 1943년 초 영국 폭격기 부대는 베를린이나 뮌헨 같은 독일 깊숙한 목표물에 대한 공격을 실시했고 북해나 프랑스 상공을 통과함에 따라 벨기에에 주둔한 쉬나우퍼가 적을 만날 기회는 줄어들었다. 그래서 그의 1943년 첫 기록은 5월 14일 보쿰을 폭격한 핼리팩스와 스털링이었다.
생 트롱의 기지에서 촬영된 야간전투기 부대 최고의 에이스 2명 렌트(좌), 쉬나우퍼(그옆)
RAF의 루르 지방에 대한 공격이 증가됨에 따라 격추기록은 증가해서 7월 20일 12기가 됐고 중위로 승진했다. 하지만 쉬나우퍼는 적을 만날 기회가 더 많은 네덜란드의 레오이바르덴으로 전출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그는 8월 13일 NJG1의 제4비행대 제12중대장으로 임명됐다. RAF는 베를린에 대한 폭격을 시작했고 적 야간전투기의 위협이 높아짐에 따라 세 번째 승무원으로 빌헬름 갠슬러 하사가 추가됐다. 4개월간 쉬나우퍼는 20기의 4발 폭격기를 추가해서 42기에 도달했고 고대했던 기사십자훈장을 받았다. 1943년 3월 25일에는 51기를 격추해서 야간전투기 부대에 떠오르는 스타가 됐고 1944년 3월 1일에는 불과 22세의 나이에 NJG1의 제4비행대장이 됐다.
1944년 4월에는 10기, 5월에는 13기의 격추기록을 추가해 6월 24일 백엽기사십자훈장을 받았고 격추기록은 84기로 현역 조종사 중 헬무트 렌트에 이어 2위가 됐다. 하지만 렌트, 모이러, 길트너 같은 선배들은 쉬나우퍼 기록의 절반 일때 같은 훈장을 받았으므로 쉬나우퍼의 수상운은 없는 편이었지만 89기를 기록한 7월 30일 검부백엽기사십자훈장을 받음으로써 보상됐다. 그의 탑승원들인 갠슬러와 룸펠하르트도 공적을 인정받아서 기사십자훈장을 수상했다.
1944년 10월 쉬나우퍼의 기록은 100기에 도달했고 전군에서 21번째로 다이아몬드검부백엽기사십자훈장을 받았다. 1944년 11월 6일에는 렌트의 기록을 넘어섰고 14일에는 소령으로 진급하면서 제4야간전투항공단 지휘관으로 임명됐다. 쉬나우퍼는 1945년 2월 21일 저녁에 2기를 격추한 후 다시 출격해서 도르트문트를 폭격한 랭카스터 편대를 요격, 19분간 7기를 격추해서 자신의 하루 최고기록을 세웠다. 그의 대전 중 마지막 격추는 3월 7일이었고 격추 누계는 121기로 아직 까지도 역사상 야간전투 중 가장 많은 적기를 격추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독일 항복 후에는 영국군에게 포로가 되서 철저한 심문을 받았고 디프테리아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도 했다. 1945년 말에 석방돼서 고향으로 돌아왔고 전쟁으로 기울었던 가업을 재건했다. 하지만 1950년 7월 13일 와인 구매를 위해 프랑스를 방문했다가 트럭에 실린 화물이 도로변에 있던 그의 스포츠카를 덮치는 바람에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고 이틀 후 보르도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전쟁 중 수많은 위험을 이겨낸 영웅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그의 사체는 고향 묘지에 묻혔다.
항복
1945년 3월 13일 뤼츠켄도르프의 합성석유 공장이 폭격을 받았는데 NJG6의 마르틴 벡커는 랭카스터 대군 사이로 침투해서 쉬래게 무직의 도움 없이 전방 기관포를 사용해서 22분간 랭카스터 6기를 격추했고 탄약이 떨어지자 레이더 조작원인 칼 루드비히 요한센 소위가 후방 방어기총으로 37분간 B-17 1기를 포함한 3기를 더 격추했다. 벡커는 한번의 출격에서 가장 많은 적기를 격추한 야간전투기 조종사가 됐다. 그는 3월 16일 밤 뉘른베르크 부근에서 전쟁 마지막 기록인 랭카스터를 추가해서 58기를 기록했고 백엽기사십자훈장을 받았다.
주간에 비행 중 연합군 전투기에게 공격받기 직전의 Ju88 야간전투기
연합군 전투기의 독일 비행장 공격 직전의 순간, 우측에 Ju88 야간전투기
연합군이 독일 본토 깊숙이 진입한 후에는 독일 내에 더 이상 공격할 전략목표가 사라졌고 야간공습도 줄어들었다. 1945년 4월말에는 서부에 있는 대부분의 야간전투기 부대가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몇 개 부대만이 5월까지 전투를 계속했고 마지막 야간 격추는 5월 2일 밤 함부르크 북쪽에서 Ⅳ./NJG3의 프리츠 브란트 중위가 기록한 핼리팩스였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 항복 후 연합군은 가동되는 야간전투기의 프로펠러와 방향타를 제거하도록 요구했지만 많은 승무원들은 그들의 기체가 연합군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불이익을 각오하고 그들의 기체를 교묘하게 파괴했다. 연합군은 상당수의 기체를 노획해서 최신 제트기 등을 남기고 나머지는 폐기 처분했다. 대부분의 대원들은 풀려날 때까지 포로 신세가 됐고 뛰어난 대원 몇 명은 RAF의 철저한 심문을 받았다.
야간전투기 부대는 인력과 물량면에서 압도적인 적에게 패했지만 자국 민간인 보호를 위해 용감히 싸웠다. 야간전투기 부대도 루프트바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최고위층이 잘못된 정책의 피해를 입었다. 편성 당시부터 전용 야간전투기가 필요한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개발된 전용 야간전투기 He219가 충분한 수량이 생산됐다면 전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겠지만 루프트바페는 1935년 창설된 이후로 수비적인 장비는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고 결국 폭격기나 구축기를 개조해서 야간방공전을 치러야 했다. 레이더와 전자전 분야에서도 영국의 뒤를 따르는 형편이었다.
이런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독일야간전투기 부대는 영국 폭격기 부대를 두려움에 떨게한 강력한 조직으로 항공 역사상 불멸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