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24.12.14(토) 12;00-15;00 ★장소;명륜진사갈비 부천역점(032-655-6181) ★참가;4명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서울에서 세무공무원으로 근무하셨기 때문이다. 그동안 두 집 살림이 불가피하였지만 이제부터는 모든 식구들이 한 집안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그 때가 1960년 봄이다. 그 당시는 4.19민주혁명이 일어나고 그 다음해 5.16군사혁명으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고향 친구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먼저 서울 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70년 중반 이후부터는 친구들이 고향을 떠나 하나 둘씩 서울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소꼽친구 14명 중 10명이다. 4명은 아직도 시골에서 생활하고 있다. 내가 군대생활이 한결 여유러워 질때인 1991년부터 시골 친구 모임을 결성하여 주도하였다. 그 당시에는 14명의 친구들이 모임이 있을때마다 참석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연증세가하다 보니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5명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에 거주하는 2명과 시골에 머무르는 친구들은 전화로 안부를 묻고 지내고 있지만 나머지 친구들은 어디서 무얼하고 지내는지 통 알 수가 없다. 초창기 모임때는 계절별로 만났지만 지금은 송년회 때마다 만나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해미읍에서 4km, 서산읍에서 7km 떨어진 평화로운 바닷가 근처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는 신작로가 가로지르고 신작로 너머에는 드넓은 논이 펼쳐진다. 논 뒤와 옆으로는 하천이 흐르고 이 하천은 서해바다로 흘러든다. 바닷물이 밀물일때는 고향마을 까지 들어와 갯벌을 형성한다. 마을 뒷편으로는 야트막한 동산이 자리하고 있어 지형상으로 배산임수형 마을이다. 지금까지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는 단 한 명뿐이다. 그리고 작고한 친구는 3명이다. 시골마을에서 초등학교 입학할때는 해미초등학교와 오산초등학교로 나뉘어 있었다.
해미초등학교는 4km, 오산초등학교는 2km 거리에 있다. 나와 몇명은 해미초등학교를 다녔지만 그밖의 친구들은 모두 오산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해미면은 조선의 500년 역사가 살아 숨쉬는 해미읍성과 천주교 선열들의 순교성지를 중심으로 서해안에서 제일 높은 가야산(678,2m)이 있다. 그리고 15km 이내에 수덕사와 한서대학교, 천년고찰 개심사가 자리하고 있다. 개심사와 수덕사는 소풍 여행지였다. 해미초등학교는 해미읍성 안에 위치해 있어 진남문을 통과하여 등하교하였다. 진남문은 해미읍성의 세 관아문 중 유일하게 본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해미읍성은 1417년(태종17) 부터 1421년(세종3)까지 4년여에 걸쳐 축성했다. 성곽의 둘레는 1,800m, 높이 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성 안의 면적은 19만6천4백평방미터(약 6만평)를 이를 정도로 광활하다. 이순신 장군은 선조 12년(1579년) 이곳에서 충청병마절도사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하였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해미읍성 안에는 우체국, 면사무소, 민가 등이 있었으며 조선시대 건물은 없었다. 그리고 탱자나무가 울타리용으로 심어져 있었다. 일제시대인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시설물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성안으로 민가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일제시대의 문화 말살 정책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1866년 천주교 박해때 충청도 각지에서 신자가 끌려와 이곳에서 처형되었는데 무려 1,00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수감됐던 옥사터와 나뭇가지에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하여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회화나무(수령 300년)가 그 자리에 있어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당시 회화나뭇가지에 철사로 신자들의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거나 교수형에 처했다. 회화나무에는 철사가 박혀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처럼 천주교의 중요한 역사 현장인 해미읍성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10년 전 아시아 청년대회 미사집전을 위해 방문한 이래 역사와 현재의 서사가 공존하는 특별한 관광지로 여행객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다. 복원사업은 1973년부터 시작되었으며 1997년부터는 발굴이 이루어져 예전의 모습으로 재탄생하였다. 해미초등학교는 1912년에 설립되었으며, 그 해 5월10일에 학생 33명을 입학시켜 개교하였다. 1975년 5월1일 해미읍성 복원사업으로 성밖으로 이전하였다. 나는 해미초등학교 46회 졸업생으로 이택호와 홍성균(28기)과 학교 동기동창이다.
해미초등학교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생전 처음이다. 홍성균은 공주사대부고 출신으로 구재림, 박양우와 고교 동창생이기도 하다. 그 이후로 해미초등학교 출신들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나는 초등학교 다닐때 이택호와 축구부에서 생활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택호와 홍성균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7년만에 이택호를 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감개무량하였다. 2024년 고향 친구 송년회 모임장소는 부천역 부근 명륜진사갈비집이다.
1명을 제외한 4명이 참석하였다. 80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그래도 건강한 편이다. 죽마고우들 간에는 허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아 마음이 편하다. 돼지갈비를 굽는 연기속에 우정의 깊이가 쌓여가고 구수한 냄새에 술잔이 오고간다. 그리고 가슴에 품었던 이야기들이 실타레처럼 나온다. 어릴적 아기자기한 추억들을 소환하여 정겹게 웃음꽃을 피웠다. 그리고 건강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는다. 서로 건강하게 살면서 즐겁게 지내자고 한다. 80을 바라보는 나이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마치 지뢰밭을 밟는 기분이다.
항상 건강관리를 잘해야 한다. 다시말해서 조기검진. 조기치료다. 이제 살 날이 머지않았는지 계절별로 만나자고 한다. 자주 만나서 수다를 떨고 즐겨야 건강에도 이롭다. 강원도 어느 산골마을에 살고 있는 100세 가까운 친구 두명이 거리가 멀다하지 않고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그게 락(樂)이라고 한다. 식사를 하고나서 커피숍으로 향한다. 커피숍은 여유롭게 차를 음미하면서 수다를 떨기에 좋은 장소다. 30분간 수다를 떨다가 부천역에서 각산진비하였다. 내년 3월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면서 2024년을 아듀하였다.
밝아오는 새해에는 모두 건강하고 즐거움이 가득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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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는 삼척 초등학교 48회인데 1961년에 고향을 떠났으니 그 사이 60년이 훌쩍 넘어 버렸네. 후배의 도움으로 뒤늦게 친구들 몇 명을 찾아내서 아직도 연락을 주고 받지만, 직접 보지는 못 하고 이메일 등으로 연락하는데, 시간이 흐르며 그 사이 하나둘 씩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으면 서글퍼 진다네, 언젠가 고국을 방문하여 만나보면 좋겠지만, 그게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네. 미국에서는 사관학교에 지원하려면 상원의원의 추천서를 받아야 할 정도로 절차가 엄격한데, 합격하면, 출신 고등학교와 그 지역이 떠들썩 할 정도로 명예롭게 여긴다네. 제복에 대한 존중이 유별난 나라이기는 하지만, 사관학교 출신이 대단히 존경받는다는 걸 느낄 수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