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나들이
나는 위로 형님 넷인 다섯 번째 아들이다. 그래서 내 이름에 다섯 오(五)가 들었다. 돈(暾)은 항렬자다. 내 밑으로 누이동생이 둘인 칠남매다. 광복과 전후 베이비붐 세대는 어느 집에서나 자녀들이 많았더랬다. 천수를 다하신 부모님은 형제들이 임종하고 염을 해서 꽃상여 태워 선산에다 모셨다. 음력으로 삼월 보름이 아버님 기일이고 유월 스무여드레는 어머님 기일이다.
우리 형제들은 큰형님이 고향을 지키는 의령 본가에서 부모님 기제사면 그날이 평일일지라도 다 모인다. 그리고 설과 추석에도 귀성해 차례를 모시고 성묘를 다녀온다. 성혼해 분가한 조카와 손자들까지 모이면 대가족이다. 세월 따라 조카나 손자들에게 집안 행사 중심축이 옮겨져 가고 있다. 여럿인 조카들 가운데 미혼은 내 둘째 녀석과 누이의 아들과 딸인 생질뿐이다.
이태 전 여름 셋째 형님이 갑자기 건강이 기울어져 걱정을 많이 했다. 교직에서 은퇴한 내성적이고 꼼꼼한 성격이다. 퇴직 이후 가덕도에 들어가 전원생활을 누렸다.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멀쩡한 육신마저 순식간 무너졌다. 몇몇 병원을 전전하다 까까스로 반전의 계기를 맞아 서서히 회복해 갔다. 지난겨울부터 예전과 거의 같은 건강한 상태로 되돌아왔다.
셋째 형님이 와병 중일 때 형제들은 많이 염려했다. 없는 시간도 틈을 내었고 먼 길도 마다 않고 병문안을 갔다. 본인의 의지와 형제들의 성원으로 셋째 형님은 병석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 예전처럼 돌아와 마음이 놓인다. 지금은 가덕도 여러 등산로를 누비고 갯가를 산책한다. 현지인이 힘이 부쳐 묵혀둔 밭에다 고구마를 비롯해 농작물을 가꾸어 이웃들과 나누기도 한단다.
셋째 형님은 가덕 주민자치센터와 노인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여러 문화강좌를 수강하고 건강 단련 프로그램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틈이 나면 친구들을 가덕도로 불러들여 산행을 함께 하거나 해운대나 태종대로 나가 어울리기도 했다. 아우보다 월등한 컴퓨터 수준으로 블로그를 개설해 사진이나 글을 올려 일기처럼 기록해 남기고 있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에 들기 전 장맛비 틈새 칠월 중순이다. 셋째 형님이 전에 볼 수 없는 파격 제안을 하나 해 왔다. 원근에 살고 있는 형제 내외를 가덕도로 불려들어 얼굴을 본 후 하루 부산 나들이를 다녀오자고 했다. 시골에 계시는 큰형님과 울산에 사시는 둘째 형님을 우선 고려하셨다. 그 아래로 나를 포함 진주에 사는 여동생 내외도 참석 대상에 빠지지 않아야 했다.
칠월 둘째 일요일 아침나절 내 바로 손위 형님은 신접살림을 차려 나간 조카 일로 빠지고 여섯 남매 내외가 가덕도로 들어갔다. 셋째 형님은 공들여 가꾼 텃밭 농사와 정원을 보여주었다. 다과상을 물린 후 경제자유구역청으로 나가 차를 두었다. 신항만에서 해운대와 송정으로 가는 1011번 좌석버스를 탔다. 언제가 들은 바 있던 부산항 외곽 교량을 모두 건너는 버스였다.
을숙도대교에서 장림을 지나 남항대교를 건너니 영도였다. 거기서 부산항대교를 건너니 곧장 광안대교였다. 벡스코 인근에서 내려 동백섬 산책길을 걷다 쉼터에서 삶은 옥수수와 계란을 먹고 누리마루에 들렀다. 최치원이 새겼다는 설이 전하는 ‘해운대’ 각석을 지나 갈맷길을 따라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갔다. 모래사장엔 알록달록한 파라솔이 펼쳐졌으나 피서 인파는 적었다.
셋째 형님이 답사가 된 맛집에서 감자탕으로 형제들은 마주 앉아 오붓한 점심자리를 가졌다. 이후 형제들에 남은 여정이 한 곳 더 있었다. 셋째 형님은 해운대와 인접한 송정으로 나가보자고 했다. 신도시를 벗어나니 금방 송정이었다. 활처럼 원호를 그린 백사장엔 해운대보다 피서 인파가 많았다. 모래밭을 산책하고 죽도공원에 올라 정자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었다. 19.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