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 조선 사람 김경선(金景善)이 중국에 다녀와 《연원직지(燕轅直指)》라는 여행기를 남겼습니다. 여기서 그는 중국에 갔다가 인상깊게 본 것 중에 하나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침 장날이라 길 양쪽에 가게가 늘어서서 여러 가지 물건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물건을 사고파는 데 정해진 가격이 있어서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이 많아 복잡했지만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신기하게 여겼던 것 중에 하나는 이렇게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건에 모두 정가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 중에도 정가제를 신기하다는 투로 기록한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조선의 시장에서는 정가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업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정가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정가에 대한 신뢰가 없으니 구매자는 무조건 물건값을 깎으려 하고, 판매자는 이를 예상하고 처음에는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가 조금씩 깎아줍니다. 똑같은 물건이라도 파는 사람마다 부르는 값이 다르고 사는 사람마다 구입하는 가격이 다르니 시장이 혼탁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단통법의 시행으로 누구나 똑같은 가격으로 휴대전화를 구입하게 되었지만, 소비자들의 불만은 여전합니다. 휴대전화와 통신요금의 정가가 터무니없이 높이 책정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정가에 대한 신뢰가 없으니 정가대로 거래하게 만든 법이 반가울 리 없습니다.
단통법에 이어 오늘부터 도서정가제가 시행됩니다. 도서정가제의 시행으로 책값의 거품이 빠지고 동네 서점이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도 크지만, 가뜩이나 어려운 출판시장이 더욱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큽니다. 도서정가제의 성패는 책의 정가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