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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든 삶,정든 세월 원문보기 글쓴이: 地坪
◆이스라엘 모델.
1953년 7월 27일의 판문점, 그때 그곳에서는 UN군 총사령관, 북한군 최고사령관,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등이 모여 3년을 끌어온 6.25전쟁에 대해 정전(휴전) 할것에 합의,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그래서 생긴것이 156마일의 휴전선과 DMZ-비무장지대다. 휴전선을 기준으로 쌍방 2Km씩 물러나 완충지대를 설정함으로서 직접적인 군사충돌을 피하기로 했다.
그후 60여년이 지나는 동안, 북한은 큰 규모로만 200여 차례 정전협정을 위반했으며 무력도발을 자행했다.
대표적인 것이 아웅산테러, KAL기 납치및 폭파, 천안함폭침, 연평도포격등이다.
그러나 한국은 단 한번도 보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얕보인게 사실이다.
김관진이 국방부장관이 된 후, 북의 도발에는 즉각 같은수준이상의 군사력으로 대응, 보고는 나중에 하라는 지침이 시달됐고,
이후 북한은 입으로는 ‘서울불바다’ 를 공갈 하지만 군사적 도발은 자제하고 있다.
우리정부가 중국을 통해 무력도발시에는 반드시 군사적 보복을 하겠다고 북한에 알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게 억지력 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존재하는한, 우리와 북한의 숙명적인 대결, 대치는 계속될 것이다.
서방이 어떤 태도와 수단을 가지든 북한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는 포기하지 못한다.
그게 마지막 남은 카드이며 생명선이기 때문이다.
북이 핵을 가지고 있는한, 한반도 에서의 핵전쟁가능성은 상존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북은 더 핍절할 것이며 그들자신이 그 한계상황을 잘 알고있다.
때문에 ‘물귀신작전’ 에 돌입할 가능성도 여전하다고 판단하는게 옳다.
그들은 사악하고, 비열하며 비겁하고 천박하다.
그들은 인간이 생각해 낼수있는 온갖 악날함으로 뭉쳐있으며 악독하고 잔인하다. 세계최악의 정치범수용소가 있는곳이 북한이다.
따라서 종북세력은 일종의 정신질환현상 이라고 할수있다.
우리는 우리의 안보와 생존을 위해 그들과 상대해야 하는 구체적이고 절대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델’ 이 필요하다.
모델은 시간과 공간, 물리적 준비와효율에서 대단히 경제적인 존재다.
그들을 연구하고 배우기만 하면 우리의 가장 효율적인 대처방법이 도출될수 있다. 그 모델중 하나가 ‘이스라엘’ 이다.
1억 아랍에 둘러싸인채 생존하는 자체가 기적같은 사실이다. 우리가 그들의 축적된 안보 노하우를 배워야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스라엘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간략하게 라도 그들에 대해 알아야된다.
그들의 생존법칙이 역사적 배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땅에 경상북도 정도의 크기를 가진 의회민주주의 국가다.
1948년 5월 14일에, 실로 나라가 깨진지 2000여년만에 독립했다.
700만 인구중 유대인은 80%이며 비유대인이 20%정도다. 유대교인이 76.5%, 이슬람이 15.9%다. 공용어는 히브리어와 아랍어,
금지된 언어는 독일어이며, 독일어로 된 책까지 배척된다.
BC597년 유대인들은 전쟁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잡혀갔으며 이후 계속적으로 강제 이주 되어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의 각제국 전역에 퍼져살았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밖에 살면서 유대교적 종교규범과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유대인,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디아스포라(diaspora) 라고 부른다.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란 그리스어>
서기 70년, 디도장군 휘하의 로마10군단에 의해 예루살렘이 초토화 되었으며 이후 지금까지 재건되지 못한채 성전도 없어졌다.
서기 135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계속된다.
때문에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은 모든 유대인들 에게는 더 없이 큰 의미를 가지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것이다.
이스라엘의 디아스포라가 정점을 찍은게 홀로코스트(holocoust) 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동물이나 인간을 태워죽이거나 대량학살하는 행위의 총칭이지만
지금은 2차대전중 나치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집단학살을 지칭한다.
특히 1945년 1월 27일, 폴란드소재 아우슈비츠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해방될때까지 600만명에 이르는, 20세기의 치욕이라 불리는 유대인학살을 지칭하고 있다.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16년의 정말하고 끈질긴 추적 끝에 아르헨티나에서 체포, 유대법정에서 재판을 통해 사형에 처했으며 그 뼈가루는 지중해에 뿌려졌다.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야드 바셈(yad vashem)은, 홀로코스트 역사박물관이 그 정식 명칭이다.
1953년에 건립되었으나 근자 10여년간의 확장공사 끝에 2005년 3월에 재개관했다.
600만명을 위한 위령탑과 꺼지지 않는 불꽃, 희생자들의 유물 및 사진, 생존자들의 증언자료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Hall of Names 의 내부벽은 무수한 희생자들의 사진으로 채워져 있다.
야드바셈 입구에는 검은색 사각형의 기둥위 눈높이에 작은 유리상자가 놓여있으며 그 안에는 어린아이의 낡은 구두한짝이 진열돼 있다.
그 충격적인 상징성은 긴 설명이 필요없다. 나치에 대한 고발은 영원히 계속되고 있는것이다.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믿는사람이라면 꼭 한번 가봐야 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스라엘의 독립자체도 험난한 것이었지만, 건국은 더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오늘의 민주국가 이스라엘은 키브츠와 모샤브의 터 위에 세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까지도 수많은 키브츠와 모샤브가 건재하고 있다.
키브츠(kibbutz)는, 이스라엘의 집단공동체로서 노동시오니즘의 형태로 1921년에 출현했다.
팔레스타인의 척박하고 메마른땅은 개인의 독립적인 농업이 불가능했다. 오직 집단농장형태의 협업만이 농사를 가능하게 했다.
그들은 척박한땅을 개간하고 사막에서 농사를 지을수 있는 과학영농법을 개발, 이스라엘을 농업국으로 만들었다.
수출된 이스라엘 오랜지는 다른 오랜지에 비해 10배의 값을 받는다.
여리고에서 제철 오랜지를 맛본 사람은 이 값의 의미를 알 것이다.
초대 벤 구리온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지도자 대부분은 키브츠 출신들이다.
한편 키브츠운동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농업의 초기정착에 실패한 정착민들에 의해 이스라엘 계곡에 60가정이 한 단위가 되는 농촌마을이 생겼는데 그것이 모샤브(moshave)의 시작이다.
키브츠와 모샤브의 차이는 키브츠가 공동재산인데 반해 모샤브는 사유재산이며 공동출자다.
나는 이스라엘을 10여차례 여행했지만 언제나 키브츠나 모샤브에 묵었다.
현대식 호텔은 모두가 같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접할수 없지만 키브츠나 모샤브는 이스라엘의 속내를 체험할수 있다.
예루살렘 근교의 모샤브 ‘네베일란’ 은 언제나 내가 묵었던 곳이다. 나중에 그들은 나를 ‘가족’ 이라고 불렀다.
오늘의 강소국 이스라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새서는 4번의 중동전쟁을 알아야 된다.
1948년 독립이후 1973년까지의 아랍국가들과의 전쟁이 그것이다.
제1차 중동전쟁, 1948년.
팔레스타인땅에 유대인국가가 건설되는것을 수용할수 없었던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레바논, 시리아의 연합군이 이스라엘에 선전포고한 전쟁.
11월 6일 UN결의로 휴전, 49년 1월 양측의 합의로 휴전협정체결,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당초 팔레스타인 지역의 56%에서 80%로확대됐으며 이때 80만명의 팔레스타인난민이 발생,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2차 중동전쟁, 1956년.
이집트의 나세르가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결정, 선포하자 운하경영권을 소유한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대한 공격을 감행, 전쟁이 시작됐다.
전쟁에서는 크게 승리했지만,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11월에 정전했으며 점령지에서 철수했다. 이후 수에즈는 이집트에 국유화됐다.
카이로근교에 있는 나세르의 거대한 묘소는 성역이 되어있다.
제3차 중동전, 1967년.
골란고원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경작이 문제가 되어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충돌이 빈번해지자 이집트가 아카바만을 봉쇄하고, 시리아, 요르단이 가담한 전쟁,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으로 일방적으로 승리, 가자지역, 구 예루살렘지역(이때 통곡의벽이 탈환됐다), 골란고원, 시나이반도 일부를 이때 점령했다.
국토는 독립때 면적의 8배로 확대되었으며 이때부터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활동이 활발해 진다.
제4차 중동전쟁, 1973년.
(라마단전쟁, 욤 키푸르전쟁, 6일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전쟁은 이집트와 시리아가 3차례의 전쟁에서 상실한 자기들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10월 6일, 수에즈와 골란고원 두 전선에서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초기 막심한 피해를 입고도 6일만에 반격을 시작, 시나이반도의 주력부대를 포위했으며 UN에서의 미,소 결의로 휴전하게된다.
이때 아랍의 석유수출국기구인 OPEC가 석유무기화를 강화, 석유가가 4배나 뛰면서 고유가 시대가 시작되기도 했다.
4차례의 중동전을 압축해서 설명하는 일화가 있다.
아랍의 미그전투기 50대가 피격,추락됐으나 이스라엘은 단 한 대의 미라지를 잃었을 뿐이다.
이스라엘 군대는 세계최고의 ‘싸움꾼’ 이다.
네 번의 생존을 건 전쟁을 치르는동안 1억아랍을 이기는 전투력을 확보한 것이다.
이스라엘 국민은, 남녀모두 18세가 되면 징집되어 남자는 3년, 여자는 2년을 현역으로 복무하며, 남자는 54세까지, 미혼인 여자는 24세까지 예비군에 편입된다.
이스라엘 정규군은 20만이 채 안되지만, 비상시 48-72시간안에 44만5천명의 예비군이 동원된다.
이스라엘 에서는 모든 전선에 일차로 투입되는 병력은 예비군이다.
풍부한 전투경험과 현역때부터 같은부대에 복무한 소속감, 단결력이 전투능력을 더 강화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스라엘을 여행할때마다 예비군훈련을 지켜봤으며 그들이 얼마나 강한군대 인지를 확인할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네게브사막 깊숙한 곳엔 아랍각국의 심장부를 향한 100개 이상의 핵탄두가 있다.
아랍각국이 이스라엘을 공격할수 없는 가장 확실한 억지력인 것이다. 한편 지금의 이스라엘 군대는 최신의 미국제 장비로 무장돼있다.
IDF(이스라엘 국방군) 의 elite unit. 인터넷과 구직전단에 ‘8200부대 출신들을 원함’ 이라는 광고가 뜬다.
이스라엘 군에서 8200부대는 말하자면 엘리트 유닛의 하나다. 아주 특별한 부대중 하나인 것이다.
이스라엘 에서는 한 사람의 군대경력이 학문적 경력보다 더 중요하다.
모든 취업 인터뷰에서 지원자들에게 하는 질문이 바로 어느부대에서 복무했는가 하는것이다.
이스라엘 에서는 가장 들어가기가 어려운곳이 대학이 아니라 이스라엘 군대의 엘리트 유닛이다.
17세가 되면 신병모집센터에 나가 각종검사를 받게되며 그 결과로 등급에 따라 어느부대에 지원할수 있는지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각 유닛이 선발한 소수의 병사들은 혹독한 훈련을거쳐 그 부대에서 정규군 복무를 하게되며 예비군 생활도 한팀으로 하게된다.
그들은 서로가 제2의 가족이 되며 부대안에서 시작되는 각종창업의 멤버가 되어 제대후에도 비즈니스에서 한팀이 되는것이다.
세계를 석권하고있는 이스라엘의 거의모든 벤쳐산업은 엘리트 유닛안에서 시작된 것들이 많다.
군대가 나라만 지키는것이 아니라 첨단산업분야의 모태가 되는것도 이스라엘군의 특징이자 강점이 아닐수 없다.
특히 예비군 부대의 기여도는 가장 크다고 할수있다. 우리가 깊이 연구해야할 대상이기도 하다.
지난 5월3일과 5일, 이스라엘 전폭기들은 시리아 영토의 군사시설을 폭격했다.
그 이유는 레바논남부, 즉 이스라엘과의 국경지대에 근거를 두고있는 시아파 무장세력 헤즈볼라에게 시리아제 중거리 미사일이 건네지는것을 사전에 막기위해서 였다.
그런데도 시리아는 변변한 항의도 못한채 침묵하고 있다.
만약 북한제의 첨단무기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위해 아랍에 전달된다면 그들은 주저없이 북한을 폭격할 것이다.
이미 여러해전 이스라엘은 북한에 대해 엄중경고를 한 바 있다.
이스라엘의 전폭기들이 북한까지 오가는것은 그들의 기술, 지혜, 용기앞에서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아프리카 엔테베까지 내려가 인질들을 구해오는게 그들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에게 배워야할게 이 부분이다.
북한집단 에게는 세계평균의 논리와 규칙이 통용되지 않는다. 강도떼들 이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을 보면 쉽게 알수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1억 아랍이 이스라엘에게 손을 못대는 이유도 그것이다.
만약 북한이 우리를 향해 단 한발의 장사포를 쏜다해도 그 일대와 지원부대 까지 초토화 해야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베개를 높이베고 잘수있는 유일한 길이다.
정전협정이후 60여년이라는 긴 기간이 우리에게 알게해준 교훈도 바로 그것이다.
이스라엘과 베트남, 그리고 한국은 점령되지않는 민족이다. - 세계역사학자들-.
by/yorowon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