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나는 청주의 청고 3학년입니다.
나는 야간학교에 다니는데, 그때의 우리반 학생들은 6.25후 세대로 공부가 늦어 거의 나이들이 23,24,25세들 입니다.
나는 24살이고요.
전국 학생들이 이승만 독재정권물러나라고 데모를 하는데 우리도 하려고 하지만 야간부라서 여의치 않아 나는 우리반 아이들 몇명이 모여 작전을 짭니다.
청주경찰서 정문에는 경찰이 기관총을 장전하고 눈을 부릅뜨고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을 흘켜보는데 소름이 끼치는데 경찰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닿아 있습니다.
우리를 소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우리반 아이들이 모여
병에 휘발유를 담고 심지를 박고
결찰서를 습격하여 태워버리자고 모의 했지만 불발이 되고 만것은
바로 오늘 4.19가 일어난 것입니다.
경찰들이 데모대들에게 발포를 하자 고려대학교가 주동이 되었고 나중에는 교수님들도 다 거리에 나오자 이승만이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습네다'
라고 한 후 하와이로 도망갑니다.
나는 음대를 가려고 그동안 음악공부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음악이면 음악, 미술이면 미술, 무용 하나만 잘 해도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음악공부하느라고 다른 공부를 제쳐둔 상태이기에 졸업하고 한 해 더 공부 한 후 음대에 갈 생각입니다.
그런데 박정희대통령은 문교시책을 바꾸는 바람에 대학에 가려면 우선 국가고시에 먼저 합격을 해야만 하는데, 나는 음악 공부하고 낮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느라고 다른 공부를 하지 못하여 도무지 자신이 없어 포기하고 맙니다.
나는 피아노 공부를 하며
시간을 내어 음악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화성학을 배우고
대위법을 배우고
카운터포인트를 배우고
곡 분석법을 배우고
작곡법을 배우고
악기 편성법을 배우고
지위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때 내가 일하던 청주시 북문로 3가의 천주교회는 미국신부님들이 사목하고 있었는데 구호물자로 인하여 신자들이 급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내덕동에 성당이 생기고
수동에도 생기고
서운동에도 성당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북문로 성당은 낡은 양철집이라서 페쇠해 버리는 통에 나는 서운동 성당으로 갑니다.
(계속)
첫댓글 4.19 혁명 역사의 한 장면들이 떠오릅니다.감합니다.
나라의 위급함의 소용돌이 속에서 용케도 견뎌낸 우리세대
뒤돌아 보면 서러움도 많았고 한도 많던 우리의 삶 이제라도 맘편히 살았으면....
안녕하세요? 스잔님도 다 겪으신 일이지요?
그날을 4.19혁명의 날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쑥들어갔어요
4.19 후에 좌빨들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오히려 4.19혁명을 역이용하여 간첩들이 위장취업을 하고 선동하였지요
제가 오늘이 목요일인줄 착각하고 4.19가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4.19 지요 그때저는
부산에서
중3때였습니다.부산에서도
대단 했습니
올리신글 잘보고 갑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아 부산에 사시는 군요 마산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여죽은 소년 이주일을 아시나요?
그 아이대문에 전국이 발칵 뒤집어졌지요